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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주택 朴柱澤
1959년 충남 서산 출생.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꿈의 이동건축』『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사막의 별 아래에서』『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등이 있음. sesan21@hanmail.net
수염
오늘 밤 새 잎을 지나는 청춘들을 바라보며
어리석었던 것들에 적막해 오고 더 멀리
마음을 밝히지 못한 어제의 계절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이제는 이름을 지우라고 말해야지
이 저녁이 다하여 원하지 않게 보낸 거리에서
쉽사리 거리가 꽃잎을 받아들이고
바람만이 숨 가쁜 것을 토해낼 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저 적빈은 어리석었음을
깨닫게 하는가 바람도 죽어 버리는가
저녁 비 내린 뒤 길을 고아 만든 불빛은 내리고
아득히 밤 구름을 운집시켜 타오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조차 불꽃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직도 가느다란 빛에 들지 못하고
굽이쳐 오는 것에 눈이 멀지 않는다면
비련을 받아들이고 있는 술집처럼
차라리 뼈에 새겨지는 고적을 홀로 울게 하리라
장미
아름다운 바람에 맞서 그대는 소리 지른다
그대는 뿌리 긴 비에 젖고 느린 발자국에 맞춰
입을 벌린다 곤충들이 그대의 몸속에서 나와
공허를 가로지른다 흉부 속에서 섬광이 터지듯
한 곳으로 모여 있는 말들 천천히 궁전의 처마 아래로
거미처럼 흩어지는 그대의 손가락
천둥이 침묵과 연결되어 길을 막아버릴 때
어두워지는 적막으로 모이는 빛
그대는 녹음을 퍼뜨리면서 외쳐대는 깃발 속에서
수면에 견디는 후광처럼
비의 말씀을 어스름한 저녁에 좁힌다
우거진 달처럼 굴러다니고 폐허에서
귀향하는 열쇠를 쩔렁거린다
먼 골짜기로부터 길어올린 아침의 광선에 머물러라
심장을 눕힌 물들만이 이렇듯
모든 것이 태어나는 그곳으로 돌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