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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류기성 柳氣成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3학년. 1988년생.
shesword@naver.com
개가 떠나는 시간
살아오면서 무수히 많은 오후를 보냈지만 내가 처음 술 마시는 오후를 보내게 된 것은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로, 그때 내 주변은 온통 술 권하는 사회였다. 그 시절 술이란 낯선 사이를 어색하지 않게 이어주는 다리와도 같아서 자정을 건너고 새벽을 건너 하루를 돌고 돌 수 있도록 술은 길이 되어주었다. 술을 권하는 사람 중에는 대학생의 무분별한 음주습관 탓에 복부와 둔부에 쌓여가는 지방을 염려하여 지속적인 운동을 권하는, 이른바 ‘운동 권하는’ 자들도 있었고 사회의 밑바닥에 쌓여가는 부조리를 염려해 열렬한 운동을 권하는, 이른바 ‘운동권 하는’ 자들도 있었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복부와 둔부에 쌓인 지방덩어리도, 무엇인지 또 있기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의 밑바닥에 있다고 누군가 주장하던 그 부조리도 치우지 못했다. 어쨌든 사전이란 것은 우리에게 〔다리(명사) 1. 다른 편의 높은 곳으로 건너다닐 수 있게 만든 시설물〕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시절 우리는 다리 위를 걸었을 뿐 아니라 술에 취해 개처럼 기어가기도 했고 공처럼 굴러가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젊은 시절의 멋이었고 낭만이었고 즐거움이었다. 그 시절 술이 만들어준 다리란 그랬다. 어떤 다리를 걷다가 발을 헛디딘 바람에 다리 아래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곤 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다.
나는 그 시절 누군가의 방 벽에 붙어 있던 한 문장을 기억한다.
인간은 책을 고달프게 하는 유일한 창조물이다.*
그 문장이 붙어 있는 허름한 방을 본 것 역시 그해의 일이었다. 오후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밤새도록 계속됐지만, 어느샌가 돈이 용납하지 않았다. 아무리 팔팔한 청춘이라 해도 돈 걱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냥 무전유흥 한번 하고 튀면 되지 않을까. 그런 객기를 부리기엔 그 시절 우리는 어딘가 어설펐다. 술집에 갈 돈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산하기도 아쉬워 결국 편의점에서 소주 몇병을 사 들고 한 선배의 방에 가기로 했다. 대학생이라는 게 그렇다. 주변에선 하고 싶은 대로 하라지만 그따위 일에는 항상 음식비, 교통비, 생활비 같은 ‘—비(費)’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담배 한갑 주세요. 이 말을 처음으로 했던 때가 언제더라. 고등학생 때인 것 같다. 다섯번을 시도하면 네번 정도는 편의점 직원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없는데요? 그럼 담배도 없습니다. 나이를 꽉꽉 채우고 신분증을 발급받아 다시 갔을 때 편의점 직원은 말했다. 2500원입니다. 어, 그래요? 돈…… 없는데. 그럼 돈이 있으면 됩니다. 그랬다. 돈이 없으면 까짓것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은 다음, 편의점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을 준비해 편의점 직원에게 말했다. 한갑에 2500원입니까? 이건 제 인생의 30분입니다. 그러니까 담배 한대는 제 인생의 1.5분 정도인 셈이군요. 담배 한대를 피우면 수명이 5분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대를 피우는 데 3분 정도가 걸리죠. 결국 저는 담배 한대에 거의 10분을 쓰는 거네요. 옆에서는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담배를 보루째 사더니 말했다. 25000원입니까? 이건 제 인생의 30분입니다. 어,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말이다. 그러니까, 잠깐만……
돈을 벌고 나이를 먹고 짬밥을 먹고 머리가 어느정도 돌아가게 된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하건대 아까 그 문장은 이렇게 바뀌어야 옳다.
책은 인간을 고달프게 하는 빌어먹게 많은 창조물 중 하나다.
그리고 그 창조물을 대표하는 것을 대입하자면 다음과 같다.
돈은 인간을 고달프게 하는 최고의 창조물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것을 알 리가 없는 나는 방 한구석에 방치된 듯 붙어 있는 그 문장을 별생각 없이 바라보았다. 병 든 것처럼 초췌한 형광등이 허름한 방을 밝혔고, 저 멀리 복도 끝에서는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에 들어선 선배 한명이 말했다. 야, 이 건물에 사는 사람들은 참 하나같이 부지런해. 이 꼭두새벽에 빨래를 하지 않나, 책을 읽지 않나. 거기서 나는 그 문장의 주인을 만났다. 끼니를 잘 챙기지 않는 모양인지 양 볼은 푹 패어 있었고 안경을 쓴 두 눈은 퀭했으며 장발을 상투 틀듯 고무줄로 묶어놓은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고달파 보였다. 선배들은 곧바로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말없이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 문장을 함께 바라보던 한 선배가 말했다. 고달프게 하긴 무슨, 자식아. 너 자신이나 고달프게 하지 마라. 그러자 상투 튼 그가 웃으며 말했다. 사람도 어떤 관점에서 보면 한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뭘. 오호, 그러셔? 그러고는 한 선배가 그가 읽던 책 제목을 한번 보고는 말했다. 음, 자본론이라. 그럼, 이번에 우리 자본론님은 얼마나 고달프게 하셨나? 하하, 그래. 자본론이라는…… 한 책의 처지에서 보면 말이야, 사실 오랜 시간 외로웠을 거야. 그가 말했다. 자본주의가 몇백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이를 먹으면서 괴물처럼 몸을 불려온 가운데, 그깟 자본론이라는 책 따위가 뭘 할 수 있었겠어. 그러니 많이도 외로웠을 거야. 고달프다는 말을 그저 그 뜻대로만 받아들이지 마. 얼마나 외로웠겠어. 그렇게 위세 높던 맑스주의도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더니만, 이제는 정말 혼자가 되었지. 그러니 나라도 말을 걸어줘야 하지 않겠어? 가끔 먼지 청소도 해주고, 외롭지는 않냐고 물어도 봐주고 말이야.
다른 선배는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 모양인지 태평하게 그의 말을 듣거나 혹은 무시했지만 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정처럼 들리는 그 말을 들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그가 말했다. 내 말에 동의하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동의하지 않나 보군. 그것도 아니어서 고개를 또 저었다. 아아, 이도 저도 아니라는 거군. 그렇지. 세상엔 참 이도 저도 아닌 게 많아. 그 말에는 왠지 수긍이 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입생인가 보네? 이름은? 이런저런 통성명을 하고 우리는 다시 술을 마셨고,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책을 읽었다. 술자리가 무르익고 내가 편의점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우스개 삼아 꺼냈을 때, 책을 읽던 그가 대뜸 말했다. 흠. 그런 일이 있었군. 2500원과 25000원이라. 안타깝네. 하지만 말이야. 이 세상에 숫자만큼 공평한 건 없어. 다른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숫자가 아닌 다른 언어는 너무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래서 난 그런 것들은 이제 믿지 않아. 숫자는 깔끔하고 또 그래서 군말도 없고, 평등하지. 사실 생각해보면 살아간다는 것은 숫자가 되는 일이 아닐까? 몇월 몇날 몇시에 어디에서 몇시간 동안 일하고, 거기에서 일한 보수는 통장에 찍힌 액수로 다시 환산되지. 삶은 어쩌면 사칙연산의 연속일지도 몰라. 어쨌든 그런 황당한 일이 있을 때는 말이야. 음, 진정하고 일단은 소수(素數)를 세는 거야. 소수, 알지? 나중에 한번 세봐. 이, 삼, 오, 칠, 이렇게. 거기에 집중하느라 다른 생각은 들지 않게 될 거야. 그의 뜬금없는 말에 다른 누군가가 너스레를 떨었다. 무슨 헛소리야. 뭐, 그러면 숫자 세느라 정신이 팔리기는 하겠네. 어쨌든, 하고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소수는 참 외로운 존재야. 소수가 왜? 왜 그렇냐니, 생각해봐. 일과 자기 자신을 빼면 아무것도 자기를 나누어주지 못하는 그런 게 소수인데, 한 소수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야. 오랜 시간 동안 외롭지 않았을까? 아직도 이 세상엔 발견되지 못한 채 외롭게 지내고 있을 소수가 수없이 있을지도 몰라. 물론 누군가에겐 외로운 게 좋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사실 혼자 있다는 건 꽤 괜찮은 일이야. 나부터가 혼자 있는 것을 즐기니까. 하지만 내가 혼자 있다는 걸 즐긴다는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면 난 더 좋아. 내가 외롭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털어놔야, 그제야 비로소 외로움이 완성되었다는 기분이 들거든. 외롭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지도 못한다면, 그건 정말 슬픈 일일 거야. 그 말에 나는 깊이 동감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 거라면 비록 사람이 아닌 개라지만, 그저 그런 개라고 하더라도, 썩 괜찮은 일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육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난 후였다. 대학에 입학해 이년이라는 시간을 술로 빚은 다리에서 헤맸고 군에 입대해 또 이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 뒤 학교로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더이상 술로 빚은 다리에서 헤맬 수 없었다. 더구나 헤맬 수 있는 자리조차 없었다. 제대하고 이년이라는 시간이 또 흐르는 동안, 나는 더 늙어 있었고 더 많은 짐을 지고 있었다. 언제고 창창한 청춘의 안식처이리라 생각했던 캠퍼스는 돌아온 내게 지독히도 무심했다. 거듭되는 무료한 일상은 여지없이 오늘을 밀어내며 내 청춘을 안은 채, 무수한 어제 위로 쉼 없이 쌓여갔던 것이다. 그리고 점점 다리는 협소해져 갔다. 나이를 먹을수록 좁아져 가는 그 길로 아주 많은 사람이 아등바등하며 지나가려고 애썼고, 나 역시 그래야만 했다. 다리를 건너는 게 싫다면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고 운이 없으면 다리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그 불운은 고작 다리 하나가 부러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그해 한강에 세워진 대교에서 투신한 사람의 수는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하루 평균 1.3명의 사람이 한강으로 투신하고 그중 절반 이상이 이십대라는 신문기사를 본 순간, 나는 외롭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말대로 세상엔 외로운 것들이 많았다. 여기저기 사방팔방에 외로운 것들이 들끓기도 했고 숨죽여 살기도 했고 외롭지 않은 척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내가 개를 키우게 된 계기는 외로움이 아니었다. 혼자 지내는 것이 심심해서도 아니었고, 밤에 혼자 술 마실 때 뭐라도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서도 아니었다. 어느 한적한 오후에 길을 걷다가 그 개와 마주친 순간, 그냥 뭔가, 저 녀석을 내가 데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연민이었다. 주인도 없이 처량하게 돌아다니는 녀석에 대한 동정이었다.
개를 키우겠다는 말에 친구는 비웃으며 말했다. 새끼, 자기 방 전기요금도 제때 못 내는 놈이 잘도 개를 키우겠다. 그야, 그렇긴 하지……만, 뭘 해도 밥은 빌어먹는다는데, 저런 개새끼 하나 먹여 살릴 능력마저 없겠냐. 친구는 알았다는 듯, 사실 그보다는 자신과 무슨 상관이겠느냐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병원은 갔냐? 병원이라니, 무슨 병원? 동물병원 말이야. 주워온 거라며? 그 녀석 몸에 기생충이 득실득실할 건 굳이 따질 것도 없고, 무슨 병에 걸렸을지 봐야지. 어쩌면 예방접종도 해줘야 하고. 아무리 길가에서 주운 개새끼라지만 돈 들어가는 게 장난 아니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아니야, 내가 볼 땐 적당히 건강해. 나도 죽을 만큼 아프지 않으면 병원 안 가고 버티는데. 그런데 의외다. 난 네가 개 같은 건 싫어할 줄 알았는데, 네놈이 이렇게 개를 끌어안은 걸 보니 이거 좀 비현실적인데. 그냥. 날씨가 좋아서 그랬어. 날씨가? 응, 날씨가.
술 마시는 오후를 보낸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긴가민가했던 내 삶에도 점점 윤곽이 잡혀갔다. 내 주변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복부와 둔부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지방을 염려하는 ‘운동 권하는’ 선배는 어딜 가나 있었던 반면 집회에 끌고 가 촛불을 쥐여주던 ‘운동권 하는’ 선배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학교에서 그들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뿐 아니라 내 위로 선배라는 작자들이 거의 다 사라졌을 무렵, 나는 어떤 이들처럼 누군가를 검열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담배 한갑 주세요. 그렇게 누군가 말을 건네면 그를 한번 쳐다보고는 그토록 듣기 싫어했던 그 말을 바야흐로 내가 꺼내야 하는 그런 때가 되었다는 게다. 신분증 좀 주세요. 그렇게 내가 말을 건네면 어떤 이는 자신의 나이를 아주 어리게 봐준다며 자랑스럽다는 듯 신분증을 내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신분증이 없다며 당혹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이런 일을 자주 겪었는지 아무 말 없이 나가버리곤 했다. 학교 근처 편의점이어서 안면있는 사람을 종종 만났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평소에 만날 기회가 없거나,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쳐도 모른 척하고 지나가버리기 일쑤인 그런 사람이었다. 편의점에서 나를 알아본 그들은 마음에 없는 안부를 묻기도 했고, 졸업해서 보기 어려운 동문의 근황을 전해주기도 했다. 그 선배, 거기 취직했대요. 야,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될 줄 알았다니까. 나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와 대면하는 게 불편해, 열심히 바코드만 찍었다. 손님 중에는 얼핏 본 후배가 끼어 있기도 했다. 편의점에 들어와서 나를 본 후배들은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기도 했고 힘내라고 격려를 하기도 하며 갖가지 물건을 사갔다. 그중에는 내 인생의 한시간보다 비싼 것도 있었고 내 인생의 두시간보다 비싼 것도 있었으며 내 인생의 하루보다 비싼 것도 있었다.
일을 끝내고 방으로 가려면 삼십분 넘게 걸어야 했다. 학교에서 멀어질수록 방값은 저렴했고, 그만큼 추레하고 낡았다. 일정하지 않은 높이로 줄지어 선 건물을 따라, 잿빛 시멘트 길을 묵묵히 걷다 보면 어느덧 집에 도착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생각 없이 걷다가 내 뒤로 졸졸 따라오는 개를 보게 되었다. 정말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인지, 아니면 서로 가는 방향이 비슷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신경 쓰지 않고 나는 계속 걸었다. 아마도 누군가 키우다가 애정이 식어서 버린 개겠지, 싶었다. 그런 개라면 어디든 흔히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 방이 있는 건물까지 다 왔을 무렵에도 녀석은 나를 졸졸 쫓아오고 있었다. 녀석을 무시하고 열쇠를 찾으려 속주머니를 뒤지는데 뭉툭한 무언가가 잡혔다. 편의점 점장이 준, 유통기한이 하루 지나 팔지 못하는 삼각김밥이었다. 이유도 없이 나를 올려다보는 개와 눈이 마주친 나는 녀석이 왠지 안쓰러워져 김밥을 잘게 부숴 바닥에 뿌렸고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먹었다. 나도 먹을 게 빠듯한데 길 가다가 마주친 개한테 음식을 주는 꼴이라니, 나 자신이 너무도 우습게 느껴졌다. 그러다 나는 기억 속의 또다른 개를 떠올렸다. 어렸을 때 혼자 사시던 할아버지 집에 부모님과 함께 찾아갔을 때였다. 할아버지는 유독 개를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는 어린 나를 ‘우리 강아지’라고 불렀다. 저기 마당에 누워 멍청하게 헐떡거리는 동물이랑 내가 뭐가 비슷하다는 것인지, 나는 늘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 불만은 할아버지가 맛있는 거 먹으라며 건네주던 초록색 종이 몇장으로 해결되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심심하게 왜 혼자 사느냐고 물었다. 난 괜찮여. 우리 강아지가 있응께, 안 심심혀. 물론 이때의 강아지는 내가 아니라 정말 그 개였다. 나는 열심히 밥을 먹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날씨가 좋고 평화롭게 느껴지는 토요일 오후였기 때문일까? 나는 왠지 모르게, 정말로 왠지 모르게 할아버지가 그토록 강아지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유기견이라고요? 개를 키운 지 두달 정도가 지나 한번쯤 가야겠다는 생각에 동물병원에 들렀을 때 수의사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유기견이라. 주택이신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어, 학생은 아니시죠? 편의점 일이나 하면서 끼니나 때우는 그저그런 학생입니다, 그렇게 말해야 했겠지만 그냥 학생입니다, 하고 말았다. 그러자 수의사는 뭔가 곤란하다는 듯, 그러면서도 뭐 자기는 상관없다는 듯, 매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유기견이라는 게, 사실 이것저것 따져보면 새로 분양받는 것보다 돈이 많이 들 때가 있어요. 온갖 더러운 데 다 굴러다녔을 게 뻔해서, 접종도 받아야 하고 무슨 병이라도 있으면 고쳐야 하고, 아무튼 잡다한 걸로 돈이 꽤 들거든요. 뭐, 물론 깨끗하게 다녀서 그런 일이 없을 수도 있는데, 그렇잖아요? 개라는 게 원래 좀 그렇지.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멍하니 들었다. 개라는 게 그렇고 그런 거라면, 왜 개 하나 키우는 데 이런저런 자격이 필요하며, 개를 키울 만한 그런저런 자격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인가.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면 개를 키울 자격도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검사를 모두 마친 후 수의사가 말했다. 일단, 그래도 유기견 키우신다고 하니까, 좋은 일 하시는 거거든. 기본적인 목욕이라든가, 털 정리 같은 건 저희가 그냥 해드렸어요. 그런데 얘 상태를 보니까, 눈자위 색깔도 그렇고 눈곱이 끼는 것도 그렇고 분명히 건강한 상태는 아니에요. 자세히 더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그리고 당연히 이런저런 예방접종도 받아야겠죠? 그럼 아마, 견적이 어림잡아 이십만원? 그 정도 나올 것 같은데.
이십만원이라니. 인생의 오십시간만큼의 돈이 오고 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어찌해야 할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런 내 심정을 알았는지 수의사가 말했다. 좀 부담되죠? 그래서 유기견을 많이 안 키워요. 유기견 쎈터 같은 데에서 깨끗하게 해놓은 거면 몰라도. 개를 키우고 싶으면 그냥 여기서 한마리 분양해가세요. 그게 더 저렴하거든. 더 적은 돈이 들면서도 더 깨끗한 개가 과연 이 녀석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일까 싶어 밑도끝도없이 서글퍼졌다. 그냥, 키우면 안되나요? 수의사는 나를 측은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글쎄요. 본인 건강에 해가 될 수 있는데, 얘가 알고 보면 세균이랑 기생충 덩어리라서. 잘 모르겠네. 청소 잘하고 잘 씻기고 그러면 괜찮을지도. 키운 지 두달이라고? 그럼, 뭐. 허허, 모르겠네. 아무튼 지금 잘 키우고 계시니까 계속 길러보세요. 그러다 정 키우기 뭐하면 유기견 쎈터에 가져다주고, 개 키우고 싶으면 새 걸 분양받으세요. 그게 훨씬 나아요. 유기견 쎈터에 가져다주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뭐, 개 키울 여유 되는 사람보고 가져가서 키우라고 있는 곳이긴 하지만 보통 안락사시키죠. 안락사라는 말을 들으니 개에게 묻고 싶어졌다. 이것저것 비롯해 많은 말들을, 그리고 우리 같은 인간이 아니라 너 같은 개들이 생각하는 너 자신의 안락에 대해서. 그렇게 하염없이 녀석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졌다. 네 삶과 내 삶을 생각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렇다 할 차이도 없는 너와 내 삶 사이에 내 멋대로 경계를 만들어놓고, 반성도 없이 무작정 쓸모없는 연민과 동정을 밀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두달을 함께 지낸 녀석이었지만 버려야겠다는 결정을 하게 될 때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끝없이 밀려오는 부끄러움이 도리어 그 결정을 내게 강요했으며, 억센 그 강요에 떠밀리며 나는 애써 자위했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개를 버리겠다는 데 그것만큼 아무것도 아닌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내 방이 있는 건물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녀석을 풀어주기로 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골목 구석에 있는 편의점을 바라보았다. 지갑에는 구겨진 천원짜리 두장이 있었다. 마지막이니 이 돈이라도 입에 물려줘야겠다는 생각에 편의점으로 들어가 녀석의 먹을 것을 골랐다. 평소에 먹인 것은 내가 남긴 음식이나, 큰마음 먹고 산 싸구려 사료가 다였다. 사료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라고는 그게 전부인 나는 편의점 한곳에 깔끔하게 진열된 애견 사료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마침내 하나를 집었다. 사각형 통조림의 포장지에 모델로 있는 강아지가 녀석을 꼭 빼닮아 있었다.
삼각김밥 두개 가격의 통조림을 열어 바닥에 놓자마자 녀석은 허겁지겁 먹었다. 내 손에 딱 쥘 만큼 작은 통조림은 순식간에 동났다. 이것으로 작별 인사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녀석의 목줄을 풀어주면 됐다. 그러고 난 후 녀석은 녀석의 길을, 나는 내 길을 갈 것이었다. 나는 아쉬운지 빈 통조림을 핥아대는 녀석을 두고 슬금슬금 뒷걸음질했다. 한걸음, 두걸음, 세걸음을 채 떼지도 못했는데 녀석은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있었다. 녀석과 어떻게든 떨어지려고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기도 했고 따라오지 못하게 발을 구르기도 하고 발길질도 했지만, 처음 만난 날 그랬듯 녀석은 계속해서 나를 따라왔다. 중간에 건물이 나오면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놓고 숨어서 녀석이 다른 곳으로 가기를 기다리기도 했고, 나를 쫓아오지 못하게 달려보기도 했지만 녀석은 끈질기게 따라왔다. 먼발치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녀석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울컥했다. 버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야, 개 키우는 것도 돈 많이 드네요. 그 일이 있은 뒤, 오랜만에 동문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자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사실 아는 사람이라곤 몇몇뿐이고 대부분이 그날 처음 보거나 고작 한두번 본 후배들이었다. 오빠, 저는 고양이를 기르는데 요즘에는 고양이 키우는 게 유행이에요. 옆집 눈치 보이게 짖지도 않고, 털도 잘 빠지지 않고, 또 똑똑한 건지 원래 그런 건지 배변도 조금만 훈련하면 알아서 잘하니까. 고양이를 키운다는 한 후배가 말했다. 야, 애완동물 키우는 것도 트렌드를 알아야 하나 봐? 하하하. 그 말을 들은 다른 놈이 말했다. 그래도 십팔만원이면 그간 정든 것도 있을 테고, 괜찮을 것 같은데. 내게는 하등 쓸모없는 그런 말들.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형도 학생인데, 십팔만원이면 꽤 큰돈이지. 굳어진 내 표정을 본 한 후배가 나를 옹호하듯 말했다. 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듣고 싶어 꺼낸 말이었지만 한참토록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론을 내린 것은 술자리가 끝났을 때였다. 그 결론은 허무했다. 정말로 허무했다. 한 후배가 말했다. 얼마 전에 어디 대기업 취직했다는 오빠가 술 사주고 가셨는데.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후배가 말하자 다른 녀석들도 그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취직 이야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대화에 끼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내게 어떤 녀석이 물었다. 오빠도 곧 졸업 아니세요? 으, 으응. 그렇지. 곧 해. 그럼 오빠도 곧 취직하시겠네요? 그렇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답했다. 아주 많은 말을 삼키고서. 그럼 오빠, 어차피 취직하실 건데 오늘 취직하신 셈 치고 저희 술이나 사주세요. 여기 신입생들도 있는데 졸업하면 별로 못 보실 거 아니에요? 그러자 주변에 있는 녀석들도 동요하는 눈빛이었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방값도 제때 못 내 빌빌거리고, 전공 교재를 사는 것도 아까워 복사하기 일쑤고, 편의점에서 그런저런 인간이라는 취급을 받아가며 사는 나 자신이 갑자기 처량하게 느껴졌다. 다들 짜기라도 한 것처럼 한목소리로 내 이름을 외치는 걸 들으니, 문득
진정하고, 일단은 소수를 세는 거야.
라고 했던 선배의 말이 번개처럼 내 머리에 꽂혔다. 나는 가만히 앉아 소수를 생각했다. 이 삼 오 칠 십일 십삼 십칠 십구 이십삼 이십구…… 그다음은 뭐지? 생각나지 않았다. 언제까지 세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 소수가 아닌가?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무튼 이건 뭔가, 그러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주 많이 이상했다. 왜, 나는 고작 술값 몇푼에 벌벌 떠는 그런 한심하고 무능한 인간이 되어 이 자리에 앉아 있는가. 왜, 나는 그깟 소素수 따위도 소少수밖에 세지를 못하는 것인가. 왜, 나는 이토록 아등바등 살아가는데 조금도 나아지는 게 없는가. 왜, 내 키는 중학생 이후로는 크지 않는가. 왜, 내 인생의 30분은 2500원이고 다른 누구의 30분은 25000원인가. 왜…… 왜…… 왜, 나는 이렇게 되어버렸는가. 그렇게 등쌀에 떠밀려 계산한 후 다음날, 술자리에서 봤던 한 후배가 편의점에 와서는 이것저것 물건을 사갔다. 선배님, 어제는 고마웠어요. 자주 뵈어요. 녀석이 말했다. 나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녀석의 물건 하나하나의 바코드를 찍었다. 내 인생의 열시간보다 비싼 돈을 내고, 내 인생의 한시간만큼의 돈을 거슬러 받은 후 녀석은 편의점을 나갔다. 정말, 숫자는 공평한가. 그런 생각이 부질없이 밀물처럼 밀려왔고, 썰물처럼 당연하게 나는 개를 데리고 유기견 쎈터로 갔다.
개는 어디로 갔냐. 이제는 나밖에 없는 방으로 들어온 친구가 말했다. 유기견 쎈터. 그래? 버리기로 했어? 그렇게 했어. 잘했네. 네 형편에 무슨 애완동물이냐, 그런 건 나중에 취직이나 하고 나서 키워. 나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개라도 있는 게 낫긴 하던? 어딘가 허전하게 느껴지는 내 방을 바라보며 친구가 물었다. 개가 떠난 방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털만 남아 있었다. 글쎄, 아직은 모르겠네. 그렇게 말은 했지만 개가 떠난 방에서 내가 곧 마주할 심정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곧 나 자신이 그 심정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로움이나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라도 언제나 외롭고 혼자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고독과 외로움이 반가울 때는 그저 순간일 뿐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가 가끔 찾아오는 고독을 즐기며 외로움을 만끽하는 순간이 좋을 뿐이며, 그러다가 가끔 자신이 외롭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토로하고 위로받으며 지난 순간들을 보듬을 뿐이다. 나는 그래왔다. 혼자인 것이 지겹고 외로운 것이 편치 않아서, 누군가가 건네주는 위로가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그 위로를 건네준 존재가 설령 사람이 아닌 개라고 하더라도. 그 개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오랫동안 품어안고 지내왔던 외로움에게, 녀석은 어떤 존재였을까.
넥타이를 풀고 소주를 마시는 친구에게 물었다. 결과는 어떻게 됐어, 잘했냐? 녀석이 웃으며 답했다. 글쎄, 모르겠네. 좋은 결과 있길 바란다고 말하더군. 면접관에게 좋은 결과란 뭘 뜻하는 걸까? 자기 회사가 잘되는 것?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나와 일하게 되는 것? 아니면 나보다 더 잘난 누군가가 나를 짓밟고 올라와 회사의 일꾼이 되는 것? 거참, 진짜 모르겠다. 됐다. 그런 이야기는 집어치우자고. 그나저나 유기견 쎈터라니, 그럼 그놈은 어떻게 되는 거냐? 내가 묻는 것에는 답하지 않고 친구는 다른 말을 했다. 아마 죽게 되겠지. 이주인가, 삼주인가. 누군가에게 분양되지 않으면 안락사를 한다더라고. 안락사라니. 안됐네. 그래도 귀여운 놈이었는데. 녀석은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죄책감이라도 느껴야 하는 걸까? 내 말에 녀석은 이상하다는 듯 반문했다. 죄책감이라니, 무슨 빌어먹을 죄책감이야. 윤리 같은 걸 말하는 거야? 아니, 뭐. 윤리든 그렇지 않든. 그냥. 손사래를 치며 친구가 말했다. 누가 그런 걸로 너를 비난할 수 있겠어. 너도 어차피 버려진 놈 주워다 키운 거 아니야. 잘했으면 잘했지. 뭐가 잘못이야. 그런가? 어차피 밖에서 죽든 거기서 안락사를 당하든, 그게 팔자겠지. 누군가에게 처음 버려진 그 순간부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개를 생각하니까 그냥 이런 생각이 드네. 녀석은 술을 털어놓고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살아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되게 중요한 거 같아. 그런 생각이 들어. 그 개 주인은 아마 애정이 식었거나 아니면 다른 개를 얻었거나, 아무튼 뭐 그런 이유로 그 개를 버린 거겠지? 아마도 그랬겠지, 내가 답했다. 그 개는 말이야. 원래, 그렇게 있었던 대로 있을 수는 없었던 걸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나는 갸우뚱하며 물었다. 무슨 말 하는 거야? 그냥, 그렇다고. 그 개나 나나, 너나 그렇잖아. 그냥 이렇게만 있어도 좋은데 말이야. 왜 우리는 누군가보다 나아져야 하고, 그 개는 왜 주인의 애정이 식지 않도록 죽기 살기로 재롱을 부려야 하는 걸까.
주정을 부리는 것처럼 들리는 친구의 질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 역시 궁금했다. 그것은 정말로 궁금한 것이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었다.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게 분명한 그따위 것들 앞에서, 불만이 있으면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한번 호쾌하게 웃어주고 그래도 안되면 엉엉 울어주는 수밖에는. 그따위 것 말고는 나란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삼주 전이라고요? 거 좀, 애매한데. 보통 맡기고 나서 이삼주 내에 안락사 처리되거든요. 나는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하지만 유기견 쎈터 직원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음, 그럼 안에 들어가서 찾아보실래요? 직원이 한쪽 문을 가리키며 말한다. 문 안쪽에서부터 어렴풋이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안내한다. 문으로 가까이 갈수록 아스라이 들릴 듯 말 듯했던 개 짖는 소리가 점차 선명해진다. 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와 함께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밀려온다. 한번 찾아보세요. 찾으시면 다행인데, 못 찾으시면…… 그게, 이 쎈터에 맡기실 때부터 안락사에는 암묵적으로 동의한 거라 저희가 어떻게 책임질 수는 없거든요. 무심하게 말하는 직원을 보며, 응당 그래줘야겠다는 생각에, 그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준다. 혼자 서서 방안을 가득 메운 개들을 바라본다. 철창에 갇혀 있는 개들은 잠시 잠잠해지다가도 난데없이 짖고, 또 그러다가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잠잠해진다. 저렇게 무력하게 갇힌 녀석들 치고는 어딘가 표정이 밝아 보인다 싶다가, 도리어 내가 녀석들을 가둔 우리에 둘러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괜스레 서글퍼진다.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개장이 무질서하게 벽을 따라 쌓여 있고, 개장마다 빠짐없이 서너마리가 들어 있다. 개털이 여기저기 흩날린 바닥을 따라, 난삽하게 삐죽 튀어나와 있는 철장을 따라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본다. 일렬로 늘어서서 웃는 듯 우는 듯 기묘한 표정을 지은 개들을 바라보다가 이제 와 녀석을 되찾아 무엇 할까 싶어 끝없이 아득해지면서도, 쉬이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어딘가로 나아가지 못하고 버려진 채 죽음만 기다리다가 진창이 되어버린 그런 삶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겨우 그쯤에서 머문 생각으로, 그 시선으로 그 삶들을 내려다본다. 저기 삶의 진창 속에서 조용히 구석 어딘가로 침전하듯 몸을 웅크린 녀석이 보인다. 구석에 웅크린 채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이 보인다.
삼주 만에 만난 녀석은 나를 보자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철없게 꼬리를 흔든다. 녀석을 데리고 나온 후, 나는 녀석과 작별인사를 할 때 주었던 통조림 캔을 까서 녀석 앞에 놓아둔다. 이번엔 두개다. 저물어가는 삶에 작별을 고하기엔 너무도 초라한 그런 음식을 바닥에 둔 채 가만히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네가 아무리 그저그런 개고 한때는 물건처럼 어디엔가 팔렸다가 이제는 버림받은 신세라지만, 그래도 네 삶을 결정할 권리는 네게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며 묵묵히 쇠고기 통조림을 먹는 녀석을 내려다본다.
역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녀석의 목줄을 푼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목줄을 풀어주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다음 녀석이 들어오지 못하게 겁을 주기만 하면 될 것이다. 전처럼 쫓아오지 못하도록 겁을 주면서 매몰차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역으로 내려가면 끝이다. 그러면 녀석은 엘리베이터 주변에서 한동안 서성이겠지만 결국은 자신의 길을 갈 것이고, 나는 지하철을 타고 의자에 멍하니 앉아 승객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으며, 덜컹덜컹, 그런 소음같이 느껴지는 어느 풍경의 일부가 될 것이다. 따뜻한 오후의 햇살을 느끼며 잠시, 아주 잠시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녀석은 여전히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꼬리를 흔든다.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고, 이렇게 떠나보낼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나는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를 보며 안녕이라는 말을 집어 눌러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가만히 너를 안고서 앞으로는 들어주지 못할 네 기나긴 이야기를 들어본다.
* 우디 앨런, “인간은 웨이터를 고달프게 하는 유일한 창조물이다.”
소설 | 심사평
올해는 총 362편의 작품이 응모되었다. 열의로나 작품 수준으로나 대학 문사들의 축제이자 신인등용문으로 손색이 없었다. 한 심사위원은 올해 응모작들이 대체로 예년보다 수준이 고르고 높다고 평가했다. 한편 대학생들이 문학에 접근하는 자세가 의외로 보수적이라는 평가도 따랐다. 사유의 전복이나 과감한 실험을 내세우는 작품보다 안정적이고 익숙한 주제와 소재로 접근하는 작품이 많았다. 이는 문학사를 한창 수용해가는 입장에서 비롯한 경향이라 여겨졌다. 그 가운데서도 비교적 제 목소리가 또렷하고 대학생다운 패기가 돋보이는 작품 9편이 본심 테이블에 올려졌다.
「상이허(傷而虛)」는 독순술(讀脣術)에 밝은 화자를 내세워 청각, 촉각, 시각을 새로이 보게 하는 설정이 매력적이고, 은유적인 글쓰기를 통해 풀어내는 관념이 눈길을 끌었다. 「인 더 박스」는 자판기에 사람이 직접 들어가서 일하고, 사람이 자판기로 변하는 환상을 통해 기능인으로 전락한 현대인을 간결하게 풍자해낸 솜씨가 인상 깊었다. 「하와이안 코코넛 브래지어」는 만난 적 없는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대학생 이야기를 제목만큼 유쾌하고 산뜻한 어법으로 그려내 이채로웠다. 복어 독으로 아버지를 잃은 화자의 성장기를 섬세하게 그린 「복어」는 상처에 반응하는 예민한 감수성이 돋보였다. 「세르비아 행 버스」는 후반부의 퇴행에도 불구하고 편견과 차별이 만연한 우리 사회를 이방인의 시선으로 직접 겨냥한 시도가 외려 신선하고 통쾌했다. ‘루저’들의 세계를 인도 여행기에 실은 「긴 것들의 푸람」 역시 안정된 문장으로 구축한 서사라든가 세계를 따뜻하게 포용하는 시선이 남달랐다.
마지막까지 선자들의 손에 남은 작품은 「세계지도를 횡단하다」 「오래된 책상은 오래된 생각을 담는다」 「개가 떠나는 시간」이었다. 이들은 앞서 논의한 작품들의 성과를 고르게 나누어 가진 가운데 각기 양보할 수 없는 개성을 지닌 작품들이었다. 또한 세대의 정체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정직하게 개진한 작품들이기도 하였다.
「세계지도를 횡단하다」는 다단계판매업에 나선 가족의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그려내고 있다. 심각한 얘기를 유쾌한 필치로 그려내는 방식이 요즘 트렌드이기도 하지만 그 태도나 자질이 생득적이라 할 때 이 작가의 장점은 더욱 돋보였다. 그러나 이런 자질이 문장에까지 올랐는가 하는 질문에 이르러서는 유보적이었다. 「오래된 책상은 오래된 생각을 담는다」는 여러 화자가 오래된 책상을 두고 담담하게 풀어내는 삶의 내력에 귀 기울이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러나 이야기가 한발 더 깊이 들어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끝까지 남았다. 「개가 떠나는 시간」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유기견을 기르며 겪는 이야기이다. 소재로서는 새롭다고 할 수 없으나 작가의 개성적인 어법에 힘입어 대학의 풍속도와 젊은 세대의 현실이 실감나게 전달된다. 다소 사변적인 대목들이 아슬아슬하면서도 작가의 언어적 감수성을 엿보는 데는 유감없다. 심사위원들은 「개가 떠나는 시간」의 작가가 제 문학을 시원하게 밀고나갈 패기 넘치는 신인이라는 데 동의하고 기꺼이 올해의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문학의 장도에 동참한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구효서 이혜경 전성태
소설 | 당선소감
2008년 6월, 이틀 동안 유치장에서 밤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촛불집회에 참석했다가 연행된 것입니다. 그 기억을 이제 와 다시 꺼낸 것은, 제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서가 아닙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사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사건은 제 이십대 시절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헌법이 걸린 재판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가는 입대를 허락하지 않았고 재판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때문에 입대하지 못한 것을 기회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의 타격으로 말미암은 유보였으며 따라서 변명할 여지는 생겼으니까요. 씨스템이 독점한 권력에 마모되지 않도록 그 시절 간직했던 감각을 단련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삶의 한 부분에선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가 제대하고 홀가분히 삶을 시작할 때마다 균열에 파문이 일었고, 저는 무력했습니다. 저는 언제부터 어떻게 균열이 시작되었는지 고민했습니다. 그 끝은 어떻게 될지도.
단편소설을 만드는 것은 선(線)에 대한 관찰력이라는 피츠제럴드와 들뢰즈의 가르침을 기억합니다. 소설은 삶을 가로지르는 선과 그 선들의 충돌을 포착하는 작가의 통찰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소설은 살아 있는 선들, 살의 선들의 견지에서 정의된다. (…) 그리고 다른 선들보다 더 중요한 선이 있다. 그 선들의 충돌은 두 종류의 붕괴를 가져온다. 외부에서 오는 거대하고 갑작스러운 것, 그리고 안에서부터 오는 내부로부터의 타격.” 후자의 붕괴는 우리를 돌이킬 수 없게 합니다. 내부로부터의 타격은 조금씩 전진하고 확장하지만 우리는 평소에 그 균열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소한 것으로 시작했더라도.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깨닫는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자리잡은 그 선을 결국엔 한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삶의 선은 지극히 윤리적이기 때문에 따라서 개인적입니다. 그 앞에서 ‘사소하다, 아니다’라는 이분법은 무의미합니다. 타인에겐 사소할지도 모르는 것에 의해 삶은 바뀔 수 있고, 소설 속 인물의 삶도 그렇습니다. 어떤 힘이 삶을 타격하면 소설 인물이든 현실의 사람이든 가장 먼저 욕망을 향해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삶이란 욕망에 대한 투쟁의 연속이고, 소설은 욕망의 표현입니다.
저는 이제야 그 사소하고 사소했던 유치장에서의 이틀 밤이 제 삶에 어떤 선으로 자리잡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의 충돌이 무엇을 욕망하게끔 만들었는지도. 그리고 이렇게, 제 삶에 새로운 선이 자리했습니다. 이 선을 선사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고맙습니다. 용기를 준 배형과 병진형, 현우형, 창록형, 선민,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선생님. 모두 고맙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외로움을 가르쳐준 소중한 벗, 영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정진하겠습니다.
류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