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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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임 河貞任

1977년 경남 하동 출생. 2004년 『시인세계』로 등단. rhymist18@daum.net

 

 

 

엉덩이의 추락사

 

 

밤이면 별에 매달린 내 엉덩이에서 코끼리 아저씨 길고도 아름다운 거미줄을 뽑아낸다, 하늘에 걸어둔 길고도 아름다운 거미줄, 랩소디를 흥얼거리며 거미줄을 타는 코끼리 아저씨는 서커스의 스타, 비극을 만들 듯 웃음을 만들 듯 우리들의 기묘한 서커스1, 나는 엉덩이를 벌리고 별의 가장 깊은 호흡에 매달려 있는데

 

유성이 떨어지고 코끼리 아저씨는 모자를 씌워서 서커스단과 함께 보낸다 열정이 식어가듯 밤새 빨아도 내 엉덩이에선 거미줄이 나오지 않는데, 떠나는 코끼리 엉덩이에서 나팔 소리가 울린다 이별은 늘 시끄러운 법이지 서커스단의 볼이 빨간 소녀, 코끼리 엉덩이를 찰싹 때리자 아아, 거침없이 떠나간다, 아니 떠나가는 코끼리 엉덩이에서 여자들이 슝슝슝 터져나오면서 웃는데, 즐겁다는 건지 비참하다는 건지 그 웃음소리, 나는 귀를 막고 코끼리 아저씨에게 윙크를 날리고 과거를 후회하기 위하여 묵념

 

얘야, 그동안 얼마나 뜨거웠니, 화상을 입어 입술이 그렇게 붉어졌구나, 아니요 나는 항문도 빨간걸요, 얘야, 그건 이제 너희가 항문을 핥아주는 사이가 아니라서 그렇단다, 아니요 난 이제 지겨운 항문 따윈 막아버리겠어요

 

비극의 계절, 엉덩이의 여자들 밤에는 모여서 울고 낮에는 거미줄을 치고 더 높이 더 가볍게 아슬, 아슬 걸어간다, 거미줄이나 뽑아가던 코끼리 따윈 떠나보내길 잘했지 오늘밤엔 울지 말고 거미줄 위에서 아슬, 아슬, 제발 좀 내려와요, 이제 여자들 줄 위에서 좌우의 엉덩이에 균형을 맞추고 기쁨인지 고통인지 터져나오는 웃음으로 음악을 만들어낼 지경인데, 그러다 한순간 엉덩이의 추락사

 

나는 그대로 누워 꼬박 삼백일을 앓고 거미줄을 빙글빙글 돌려 먹고 일어났다2 침대가 불쑥 날아올라 플라타너스 가지 위에 내 팬티가 걸렸다 지나가는 새들이 입술을 한번씩 문지르고 붉은 입술로 씨익 웃으며 날아가고, 지나가는 구름이 오줌을 한번씩 누고 더 검어진 지퍼를 올리며 흘러간다

 

 

 

 

불의 원리

 

 

성난 불을 발견했을 뿐이죠 아래층 위층 거지 같은 녀석들 발바닥 두 개로 밀고 들어올 때,

 

불이 번쩍번쩍 이빨을 드러내고, 아니에요, 아닐 거예요 발랄하기 위해서 태어난 소녀가 울지도 못하고 못 박히다가 원시의 불을 발견했어요 갈 수 없는 발바닥 두 개를 못질하고 있을 뿐인데 성난 불의 나라가 아래와 위로 번져가고 있어요 못 박힌 뒤쪽에서 늙은 소녀 아래와 위의 발바닥 향해 송곳니 드러내고 달려가는데, 도망갈 발바닥이 없는 아래와 위의 새빨간 신음, 가다가 뚝, 자다가 뚝, 소녀가 울지도 못하고 못 박힌 채, 아니겠죠, 아닐 거예요

 

발랄하기 위해서 태어난 늙은 여주인공, 결벽증의 흰 벽지 위 못 박혔을 때, 쿵쿵 한밤중에도 쉬지 않고 못 박힐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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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 제목.
  2. 영화 「거미숲」에서 차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