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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도연 金度延
1966년 강원 평창 출생. 강원일보와 경인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십오야월』 『이별전후사의 재인식』, 장편소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등이 있음. cucurucu666@naver.com
왜 옆집 부부는 늘 건강하고 행복할까요
옆집 아이가 아기공룡처럼 달리고 있다. 조금도 쉬지 않고. 현관문 쪽에서부터 베란다를 향해 달려갔다가 다시 쿵, 쿵, 쿵…… 되돌아온다. 벌써 사흘째 계속되고 있다. 거실에 누워 있으면 지진이 온 것처럼 온몸이 미세하게 떨린다.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까지 부르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오직 달리기만 한다. 벙어리 아기공룡처럼. 대체 그동안 아내와 딸아이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녀들도 말없이 달리기만 했을까. 그는 화장대에 기대어놓은 아내의 영정 사진에서 눈을 돌린다. 엎드린 채로 팔을 뻗어 토끼를 끌어온다. 쓰러져 있던 토끼를 일으켜세우고 악수를 한다. 토끼는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시끄럽고 정신없는 힙합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바닥의 진동은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은데 대신 귓속이 아우성이다.
나무 어르신 뵈러 가는 날입니다 날씨가 차니 따스하게 입고 오세요
그는 누워서 휴대폰의 문자를 들여다보다가 춤추는 토끼의 손을 잡는다. 음악과 춤이 동시에 멈췄지만 아기공룡의 발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찾아가 악수를 해야 비로소 멈출 것 같다. 그는 동그랗게 눈을 뜬 토끼를 가만히 바라본다.
“……엄마는 어디 가셨니?”
“식당에 일하러 갔어요.”
“……아빠는?”
“아빠는 하우스에 갔어요!”
“농사일?”
“아뇨. 훌라 치는 하우스 지키러요.”
“……그렇구나.”
여섯살쯤 된, 세수를 해본 지 오래된 듯한 여자아이의 눈은 토끼를 닮았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잠을 잘 수 없구나.”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열두서넛의 조금 낯익거나 낯선 사람들이 수령(樹齡)이 오래된 은행나무 아래에 모였다. 나무 옆에는 낡았지만 정갈한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그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서너걸음 뒤에서 나무 해설가의 설명을 대충 듣는다. 해설가는 늘 나무를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그는 탑돌이를 하듯 나무와 나무를 둘러싼 순례자들을 안에 두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천천히 걷는다. 마치 실패에 실을 촘촘하게 감는 것 같다. 아니면 스스로를 가둘 고치를 만들고 있거나. 아빠, 엄마가 이상해요! 지난여름 다급한 딸아이의 목소리가 한겨울에 얼어버린 채로 떨어지는 은행처럼 서늘하게 되살아난다. 슈퍼 하는 엄마 친구에게 전화해서 빨리 와달라고 그래. 아빤 일 끝내고 저녁에 내려갈 테니. 그러나 그는 그날 저녁이 되어도 대관령에서 이십여분 거리인 강릉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괜찮아졌다는 소식을 듣자 다음날 일찍 해야 되는 몇가지 밭일 핑계를 대고. 은행나무는 한겨울임에도 눈과 바람, 그리고 추위에 쪼그라든 꽤 많은 은행을 매달고 있다. 그 까닭이 궁금하지만 그저 해설가의 눈을 한번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밑동의 삼분의 일가량, 거인이 들어가고도 남을 구멍을 진흙으로 채운 채 버티고 있는 은행나무. 세월이 흐르면 나무는 거대한 진흙나무로 변해버릴지도 모른다. 아빠, 엄마가 또 이상해! 무서워. 빨리 와. 슈퍼 아줌마한테 전화해. 아빤 내일 아침 일찍 내려갈게. 아빠, 엄마 남편 맞아? 그는 나무와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에 넋을 놓고 있다가 그만 단단하게 얼어붙은 은행에 정수리를 정통으로 맞은 듯 무릎을 꺾고 주저앉는다. 나무 뒤편 성당의 십자가마저 휘청 흔들렸던 것 같다. 그는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검은 구두를 신은 토끼가 춤추고 있다. 사람처럼 두 다리로 서서 요란한 음악에 맞춰 머리를 흔들고 두 팔을 휘젓고 쫑긋 치켜세운 두 귀를 까딱거린다. 목도리까지 하고. 배에는 먹음직스러운 당근 하나가 그려져 있다. 옆집 아기공룡은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쿵쿵쿵…… 모두 열네번 쿵쿵거리며 달려갔다가 한번 쉬고 다시 반대편으로 달려온다. 아내와 딸아이가 살던 허름한 아파트의 거실은 동굴처럼 어두워져간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돌아눕는다.
“정말 이렇게 해야 돼?”
간단한 이삿짐을 싣고 강릉으로 가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얘 이년만 있음 중학교 들어가야 되는 거 알잖아. 촌구석에서 뭘 배우겠어?”
“당신 욕심 때문은 아니고?”
“부정 안해. 하지만 당신도 알잖아. 좁디좁은 대관령에 지금 미용실이 몇개나 되는지. 얼마 있음 다 망한다고. 지금이 기회야!”
“나는?”
“나는,이 아니라 우리야!”
홀로 올라가는 대관령엔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짙은 안개도 꾸역꾸역 내려와 길과 나무들을 지워갔다. 모든 차량들이 비상등을 깜박이며 나 여기 있다고 스스로의 위치를 알리느라 바빴다. 그는 끊었던 담배가 피우고 싶어 바싹 말라버린 입을 침으로 적시다가 고개 중턱의 휴게소 표지판이 나타나자 지체 없이 갓길로 차를 몰았다. 계기판의 바늘이 빠르게 열두시 방향으로 치달았다. 안개도 놀랐는지 급하게 양갈래로 흩어졌지만 시계(視界)는 여전히 불투명했다. 그는 길게 무적(霧笛)을 울렸다.
토끼는 휴게소 마당에 있었다. 급하게 담뱃갑의 비닐을 뜯어내고 담배를 빨며 자동차로 가던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안개와 가랑비가 뒤섞여 내리는 휴게소 주차장에서 토끼는 춤추고 있었다. 주차장에 모여 있는 여러마리의 토끼들, 강아지들…… 다른 것들은 모두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유독 그 토끼 한마리만 가랑비 속에서 음악에 맞춰 머리를 끄떡이며 팔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그 앞으로 다가가 똑같이 비를 맞으며 담배를 피웠다. 토끼를 파는 상인은 트럭에 덧댄 천막 안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봐주는 이가 거의 없는데도 토끼는 마치 어떤 사명을 완수하듯 표정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그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목덜미로 비와 안개가 끈적끈적 달라붙는 오후였다. 왜 하필 이 토끼만 춤을 춰야 하는 걸까. 종아리가 저려올 때까지 그는 춤추는 토끼 앞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 상인을 찾았다. 지금 춤추고 있는 토끼를 줘요. 새것을 가져가라는 주인의 권유를 그는 거부했다. 상인이 토끼의 왼손을 잡자 토끼는 춤을 멈췄다. 그가 토끼의 크고 동그란 눈을 보며 돌아설 때 상인은 다른 토끼의 손을 잡았고 곧 음악과 함께 토끼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개의치 않고 차를 향해 걸어가며 품안의 토끼에게 말했다.
“힘들었지?”
그는 운전석 옆자리의 문에 토끼를 기대어놓고 안개 자욱한 대관령으로 차를 진입시켰다. 토끼는 그의 옆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관령과 강릉은 고작해야 이십여분 거리다. 아내와 딸이 보고 싶으면 농사일을 하다가도 언제든지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다. 어쩌면 아내의 선택이 현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토끼를 향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문에 등을 기댄 토끼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주말의 영향으로 늘어난 차량들은 십여 미터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안개 때문에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운전석 창문을 일 쎈티쯤 열었다.
“그래도…… 대관령 넘어가서 술 한잔은 해야겠다.”
옆집 아기공룡은 여전히 쿵쿵거리며 달리기를 한다.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는 손을 뻗어 토끼와 악수를 한다. 춤을 멈춘 토끼도 땀 한방울 흘리지 않는다. 그 혼자만 지친 모양이다. 아내와 딸이 살던 아파트의 물건들을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이년 가까이 살았기에 자잘한 짐들이 꽤 많다. 이삿짐쎈터를 부르기는 애매하고 혼자 나르기엔 벅찬, 꼭 그만큼의 짐이다. 방학 동안 부모님께 보낸 딸아이의 짐은 대충 쌌지만 아내의 물건들은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손이 가지 않는다.
“아빤 왜 요즘 여기서 잠을 안 자?”
그는 일년여 전부터 아파트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잠을 잘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자려고 누웠다가도 한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일어나 옷을 찾아 입고 대관령을 넘어갔다. 간혹 아이가 학교에 가고 없는 낮에 아내와 짧게 관계를 가졌을 뿐이다. 땀조차 흐르지 않는, 스치면 마른 모래만 주르르 흘러내리는 관계를. 그것마저 중단된 지 오래였다.
세면도구가 든 가방을 들고 나온 그는 옆집 문에 귀를 댄다. 아기공룡은 여전히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다. 엄마는 저녁 늦게까지 식당에서 일하고 아빠는 노름꾼들이 모여 있는 하우스를 지키며 밤을 새운다. 아마 아빠의 등이나 팔에는 무시무시한 문신이 새겨져 있겠지. 그런데 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지 않는 걸까. 엄마 아빠가 없는 시간이면 아이가 아기공룡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까. 그는 쿵쿵거리는 소리가 멀어지는 순간 초인종을 세번 누르고 발걸음을 빨리해 승강기가 있는 곳으로 몸을 숨긴다. 복도를 울리는 슬리퍼 소리가 게으르게 따라온다.
잠시라도 쉬렴.
다음주 나무 순례에서는 층층절벽 위 벼락 맞은 소나무 어르신의 침묵을 들어볼까 합니다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아파트 상가의 공용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는데 문자가 도착했다. 우연히 그들의 나무 순례에 참가한 뒤부터 매주 도착하는 문자가 슬슬 지겨워진다. 칫솔을 입에 문 채 그는 문자를 삭제한다. 물로 입을 헹구고 이번에는 면도할 준비를 한다. 질척거리는 화장실 바닥, 널린 담배꽁초와 휴지 뭉치…… 그나마 따스한 물이라도 나오는 게 다행이다. 머리까지 감고 싶지만 언제 들어올지 모를 사람들 때문에 포기해버렸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머문 화장실은 도저히 사용할 수 없고 씽크대는 설거지를 하지 않은 온갖 그릇들로 가득하다. 잠시 화장실 밖의 동향에 귀를 기울인 뒤 그는 재빨리 오른쪽 발을 세면대 위로 올려놓는다. 비누칠을 하고 물을 튼다. 오른발을 내리고 이번엔 왼쪽 발을 올리려고 하지만 자세는 묘하게 뒤틀린다. 왼쪽 다리의 근육과 힘줄이 바람 드센 날의 연줄처럼 팽팽해져 나머지 신체를 끌어당긴다. 그는 서둘러 비누를 씻어내고 발을 끌어내리려하지만 몸은 그사이에 마비된 듯 꼼짝하지 않는다. 그래…… 벼락 맞은 나무처럼.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각본이라도 짠 듯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아파트 경비원이다.
“당신 바람피웠지?”
“바람?”
“그렇지 않음 왜 나랑 자는 거 자꾸만 피해?”
“그만해.”
그는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아내 앞에 내려놓았다. 아내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다고 마지막이야.”
“고마워! 다른 미용실 쫓아가려면 어쩔 수 없어. 이제 제대로 한번 겨뤄볼 거야. 나, 자신 있어!”
“올라가봐야 돼.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걱정이야. 이러다 다 쓸려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걱정하지 마. 그냥 매년 오는 장마일 뿐이야. 저녁 먹고 가. 금방 차릴게.”
아내의 위안에도 불구하고 비는 그치지 않았다. 거의 한달을 내리던 비는 그날 아예 모든 기록을 넘어버렸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자라던 산비탈은 아예 통째로 떠내려왔고 지진이 난 듯 밭과 둑이 뚝뚝 갈라졌다. 다리는 무너졌고 도로는 끊어지거나 산사태에 뒤덮였다. 그는 빗속에 서서 흙탕물에 휩쓸려 모조리 사라지는 농작물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추위에 벌벌 떨며. 마치 세상의 종말을 보는 것 같았다. 비에 젖은 휴대폰을 꺼내들었지만 캄캄했다. 천지사방에 캄캄한 빗소리만 가득했다.
벼락을 맞아 우듬지가 잘려나간 소나무가 절벽 끝에 서 있다. 죽었지만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채 그대로 버티고 있다. 그는 죽어서도 눕지 못하는 나무에 가까이 다가간다. 저 아래, 절벽의 바닥이 보인다. 사타구니 근처로 전기가 흐르듯 찌르르하다. 한 세월 위용을 자랑했던 나무 옆에서 그는 바람을 등에 지고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저기…… 벼락 맞을 때 기분이 어떨까?”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신호는 가는데. 나무 순례단보다 먼저 오면 아내와 통화할 수 있을 줄 믿었는데…… 그는 바람이 더 많이 피우는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인다. 눈발이 몰려온다.
여기가 대체 어디란 말인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에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렇지만 머리까지 덮은 묵직한 솜이불 속에서 계속 뭉그적거린다. 간밤에 마신 술이 머리를 무지근히 누르고 있다. 어렴풋하게 정신이 들긴 했지만 여전히 비몽사몽이다. 눈을 떠보려고 하지만 접착제로 붙여버리기라도 한 듯 눈꺼풀은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사방에서, 아주 가까이에서 자동차 달리는 소리와 요란한 경적이 들리는 걸까. 손등으로 두 눈을 억지로 문지르고 나자 그제야 조금씩 눈꺼풀이 올라간다. 자동차 소리도 점점 커진다. 그는 얼굴을 덮었던 이불을 천천히 끌어내린다.
맙소사!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그는 넋을 잃은 듯 바라보기만 한다. 내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지난밤 만취해서 분명 여관으로 들어가지 않았던가. 층수도 기억한다. 삼층 마지막 방이었다. 주인 노인과 요금을 놓고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 끝에 만원을 깎지 않았던가. 옆방엔 연인이 들었는지 줄곧 침대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런데 그 방은 어디로 가고 왜 지금 네거리 한가운데 작은 화단에 누워 있단 말인가. 요를 깔고 이불을 덮은 채. 그는 다시 눈을 비비고 주변을 둘러보지만 풍경은 여관방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돌아가기는커녕 자동차에 깔려 납작해진 토끼가 화단 아래에 널브러져 있는 게 새로이 보인다. 그 뒤로 검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고라니까지. 여관방에서 혼자 자는 게 싫어 차에 있던 토끼를 안고 간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긁고 주먹으로 두드려도 보지만 풍경은, 기억은 변하지 않는다. 밝아오는 아침 네거리에서,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피하라고 빵빵거리는 자동차 경적만 시끄럽게 울릴 뿐이다. 그는 벗어두었던 옷가지와 만신창이가 된 토끼를 들고 비틀비틀 네거리를 벗어난다. 이것이 꿈이길 간절히 바라며.
너덜거리는 토끼를 들고 그는 간밤의 그 여관을 찾고 있다. 다시 생각하니 투숙했던 방의 창으로 분명 네거리를 내려다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네거리를 다섯바퀴나 돌았지만 어디에도 여관은 없다. 모두 다른 업종들뿐이다. 헝클어진 머릿속을 수습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룻밤 취객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감쪽같이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정말 만취해 여관방인 줄 알고 네거리 한가운데로 직접 걸어갔단 말인가? 그러면 요와 이불은?
차들이 분주히 교차하는 네거리에서 그는 산을 떠나 도시까지 내려와 죽은 고라니를 침울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등을 돌린다. 자동차로 돌아가려고…… 젠장! 차를 어디에 세워놓았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만취해 잠든 다음날이면 꼭 이런 일이 벌어진다. 버스정류장의 더러운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기억을 헤집고 있는데 꽝! 하는 소리가 네거리를 뒤흔든다. 그가 잠을 잤던 바로 그 옆에서 덤프트럭과 관광버스가 소싸움을 벌이듯 뒤엉켜 있다. 그는 벌떡 일어난다.
니가 인간이야!
이런 쌍년이!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머리맡에 서 있는 토끼에게서 시선이 멈춘다. 다행히 토끼는 무사하다. 두르고 있는 목도리도 깨끗하고 배에 그려놓은 당근도 손상이 가지 않았다. 바나나보트 같은 쿠션에 기댄 채 그는 옆집과 경계를 가르는 벽에서 불규칙적으로 튀어나오는 소리를 듣는다. 상이 부딪치는 소리. 술병이 깨지는 소리. 철썩, 철썩, 퍽, 퍽, 사람의 몸이 무너져내리는 소리. 그러나 아기공룡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바늘이 새벽 2시 10분을 막 넘어서자 들려오는 유리 깨지는 소리…… 토끼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고라니가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혹 그 고라니 덕분에 살아난 것은 아닐까. 그는 조심조심 손을 뻗어 토끼와 악수한다.
집구석에서 애를 도대체 어떻게 키운 거야?
내가 노는 줄 알아! 하루종일 식당에서 허리 한번 못 펴고 일한단 말이야!
앞으론 집구석에서 한발도 나가지 마!
돈만 많이 벌어와봐! 그러지 말라고 애원해도 그럴 테니!
악, 악, 악. 토끼가 즐겁게 춤을 춘다. 그의 기분도 조금 가라앉는다. 하지만 그 여관 주인은 정말 괘씸하다. 술 취한 사람을 어떻게 네거리로 내몬단 말인가. 그는 옹관묘 같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 여관 주인을 꼭 찾아내겠다는 듯이. 옆집 부부는 진정국면으로 들어선 모양이다. 토끼의 춤을 도와주는 음악만이 가득하다.
그는 사거리 주변의 골목길을 뒤지고 있다. 골목들은 대부분 비슷비슷해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고 내리기를 여러번 반복했지만 여관은 없다. 분명 그곳 같은 건물의 좁은 계단을 확신하며 올라갔는데 룸이 있는 술집이다. 건물에 입주해 있는 다른 상가의 주인들이 모두 한통속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다리가 아파 더이상 걷기도 힘들다. 결국 포기하고 어디에 주차해놓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차를 찾아나선다. 토끼의 춤과 함께 흐르는 음악이 저 뒤편에서 따라온다. 사랑을 나누는 듯한 옆집 부부의 가쁜 숨소리와 교성이 그 뒤를 따라오다가 사라진다. 주변 주차장을 모두 뒤졌지만 그의 차는 없다. 아직 할부금도 다 갚지 못했는데. 비슷해 보이는 차의 손잡이를 괜히 만지다가 경고음 소리에 깜짝 놀라 물러난다.
초인종 소리는 집요하다. 문을 여니 운동복 바지에 반소매셔츠를 입은 덩치 좋은 사내가 서 있다. 빛이 바랜 용의 꼬리가 사내의 팔뚝을 감고 있다.
“옆집입니다. 슬프신 건 알겠는데, 음악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대단히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마치 아이처럼 온순해 보인다. 그는 거실에서 춤추고 있는 토끼를 돌아본다.
이삿짐쎈터 사람들이 짐을 모두 싣고 떠난 휑한 아파트의 거실에 그는 앉아 있다. 남은 것은 그가 깔고 자는 요와 이불, 땀에 전 베개뿐이다. 그리고 토끼 한마리. 그리고……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닫혀 있는 화장실 문을 줄곧 노려보고 있다. 꽉 움켜쥔 그의 오른손에는 화장실 열쇠가 화석처럼 박혀 있다. 옆집 아이는 전과 달리 콩콩콩, 콩콩, 콩콩콩, 콩…… 일정한 박자에 맞춰서 달린다.
“이 기회에 당신도 다 정리하고 내려오는 게 어때?”
“강릉 내려가서 내가 뭘 해! 미용실 셔터나 내리고 올릴까?”
“찾아보면 다 일거리야!”
“이젠 밭마저 팔아버리란 얘기야!”
화장실 문에 귀를 붙인 채 그는 안의 동정을 엿들으려 한다. 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가끔 가느다란 한숨소리도 새어나오는 것 같다. 그는 움켜쥐었던 주먹을 편다. 손바닥에 열쇠자국이 선명하다. 왜 하필 좁고 습한 화장실로 숨어버렸단 말인가. 손잡이로 다가가는 열쇠가 수전증인 듯 떨린다. 콩콩콩, 콩콩, 콩……
“아빠, 엄마가 화장실에 들어가 나오지 않아요!”
깊은 밤 딸아이가 전화기 속에서 울고 있다.
“거실 서랍에 열쇠가 있을 거야. 그래도 안되면 엄마 친구한테 전화해.”
“아빠가 좀 내려와! 무서워!”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그는 알고 있었다. 아내가 딸을 중개인 삼아 대관령 너머의 그를 향해 시위하고 있다는 것을. 미용실 확장을 위해서라면 딸과 남편을 팔아서라도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더이상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아내는 마지막으로 지난여름 수마가 휩쓸고 간 밭을, 고개 너머에서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실의 이불 옆에서, 춤추지 않고 서 있는 토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보고 있다. 화장실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열쇠를 든 채 엉거주춤 서 있는 그를. 토끼는 그런 그에게 꼭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결국 문 앞에 주저앉는다. 어두워지는 토끼의 등 뒤 유리창 너머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마지막 남은 밭까진 팔 수 없었어.”
토끼의 뒤편, 허공의 눈발이 짙어진다.
“난…… 거기쯤에서 아내가 멈추길 바랐어.”
“………”
“뭐, 그 다음은 정해진 코스였어. 사채가 들어온 거지.”
“………”
“뭐? 진심이야?”
그는 거실로 달려가 아무것도 없는 방구석으로 토끼를 내동댕이쳤다. 토끼는 방구석에서 엎어진 채로 춤을 춘다. 인상 하나 찡그리지 않고. 춤추는 토끼를 내버려둔 채 화장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선 그는 열쇠구멍에 열쇠를 거칠게 밀어넣고 손잡이를 돌린다. 화장실에 고여 있던 어둠과 비린내가 스멀스멀 밖으로 흘러나온다.
“미안해.”
토끼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그는 문이 열린 화장실 안을 엿보려 하지만 반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다. 세면대와 좌변기, 벽에 걸린 수납장과 거울이 전부다. 문은 열었지만 아직 들어가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는 토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벽에 기댄 등의 힘을 풀고 요 위로 스르르 미끄러진다. 옆집 아이는 새 길을 발견한 모양이다. 현관문에서 출발해 작은방, 주방, 화장실, 거실, 큰방, 거실, 베란다를 차례로 돌고 있다. 콩콩거리며. 그리고 현관을 향해 한달음에 쿵쿵쿵 달려간다. 지난여름 수마가 휩쓸고 갔을 때의 그 물소리처럼.
“제발!”
딸아이처럼 아내도 전화기에 대고 울었다.
“안돼. 그건 우리 가족이 기댈 마지막 언덕이야.”
“뭐야? 날 못 믿는 거야?”
깊은 밤 아내는 전화기에 대고 바락바락 악을 썼다. 그는 수화기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그 옆에 누워 마당 옆의 돌배나무를 쓸고 가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아내의 고성은 얼마간 이어지다가 가라앉았다. 바람에 쓸리는 돌배나무의 잎이 늦가을을 알리고 있었다.
“자는 거야?”
그는 눈만 겨우 뜬 채 불빛이 흘러나오는 화장실을 바라본다. 낯선 집에 누워 있는 것만 같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몸통에 비해 턱없이 크고 무거운 구두를 신고 있는 토끼의 눈이 반짝거린다. 눈이 제법 많이 내렸는지 바깥의 소음은 모두 잠들었다. 옆집의 아기공룡도 잠든 모양이다. 그는 요의를 참으며 입을 연다.
“깨어났어.”
“눈이 꽤 많이 내리네……”
“그러게.”
“저기…… 이해해줄 수도 있지 않아?”
“………”
집 안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진 화장실은 왠지 멀리 있는 등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등대의 세면대에도, 변기에도 아내는 없다.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반신욕을 하다 잠든 것일까. 그와 토끼 사이의 지루한 침묵을 뚫고, 조금씩, 옆집 부부의 가쁜 숨소리가 피어오른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
그의 말에 토끼가 긴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숙인다. 옆집 부부의 침대가 그의 거실 벽을 탁, 탁, 탁…… 두드리는 밤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뒤꿈치를 든 채 주방으로 걸어간다. 힘들게 씽크대 위로 올라가 쪼그려앉아 오줌을 눈다. 화장실의 불빛이 그의 엉덩이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한낮인데도 전나무숲은 어두침침했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사상최대의 수마가 휩쓸고 갔음에도 살아남은 나무들은 변함없이 익어가는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전나무숲 사이사이로 얼굴을 내민 색색의 단풍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무 순례단의 꽁무니에 서서 숲길을 허청허청 걸었다. 한해 농사가 수해로 풍비박산이 났는데 ‘나무 어르신’ 구경을 오다니.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앞서가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들에게 대체 나무는 무엇이냐고. 주말마다 나무를 보러 다닌다는 사실을 아내가 알면 뭐라 말할까. 배부른 소리 하네. 나무라고? 그 사람들 무슨 사이비종교 신도들 아냐? 나 참, 나무라니.
나무 해설가는 한달 전 숲에서 가장 수령 높은 전나무가 쓰러진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 나무는 무려 600여년의 서 있음을 끝마치고 비로소 전나무숲에 길게 누웠다. 다섯 아름은 되어 보이는 나무의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속이 텅 빈 채로 여태껏 그 거대한 몸을 버티고 있었다니. 그는 사람 몇이 들어가고도 남을 나무의 어둑어둑한 공동(空洞) 속으로 머리를 디밀고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와, 눈이 내려요!
눈이 내린다는 감탄이 주변에서 피어나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허리를 구부린 채 나무 안을 들여다보았다. 눈물이 몰려오고 있다는 걸 느끼고서야 간신히 어두운 공동 속에서 빠져나왔다. 전나무 가지와 잎이 대부분의 하늘을 가렸는데도 그 틈으로 눈은 천천히, 아주 느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 그는 다행히 눈물을 감출 수 있었다.
“여보, 제발 나 좀 살려줘!”
“………”
“이대로 무너질 순 없어! 여기서 무너지면 동창년들이 뭐라 쫑알거리겠어!”
“………”
“당신, 내 남편 맞아?”
“나는…… 당신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어.”
면소재지의 장거리에서 작은 미용실을 하던 아내는 예뻤다. 이 골 저 골에서 장을 보러 나온, 등이 굽은 할머니들의 머리를 곱슬곱슬하게 지지는 아내는 행복해 보였다. 처음 미용기술을 배우던 무렵 그의 머리를 연습 삼아 자르던 아내의 가위질 소리는 봄날의 종달새 소리처럼 들렸다. 머리 모양이 엉망이 돼도 그는 운동모자를 푹 눌러쓰는 게 즐거웠다. 즐거워서 휘파람을 불며 밭으로 나갔다. 그랬던 아내가…… 너무 먼 곳까지 가버렸다.
오늘, 날과 장소 하나는 제대로 잡았네요!
전나무숲을 통과하면 절이 있다. 그 절에서 나온 단기 출가자들이 전나무숲길에서 삼보일배를 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막 내려 쌓이는 눈 위에 두 손과 두 무릎, 두 발의 자국을 고스란히 찍으며. 그는 길옆에 비켜서서 세걸음 걷고 한번 절하는 사람들의 샘물 같은 눈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걸음은 전나무숲을 빠져나와 천천히 내려오는 눈송이와 흡사해서 마치 정지된 세계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나무 순례자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전나무숲길을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마치 밀고 밀어서 스스로를 단단한 불쏘시개로 변화시키려는 듯한 출가자들 뒤를 한걸음 한걸음 좇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쓰러진 나무 안에서 내가 뭘 보았는지 알아?”
토끼는 대답 없이 귀만 쫑긋 세운다.
“모두 썩어 사라져 컴컴한 동굴이 되어버렸는데, 오래전에 아니 더 오래전에 불탄 나뭇가지들이 시커먼 옹이로 변한 채 이곳저곳에 박혀 있었어. 나무는 이미 죽었는데.”
“………”
“내 안을 들여다보는 거 같았어.”
“당신 아내는?”
“……아내?”
그는 토끼의 반문에 대답을 못하고 어둠 가득한 거실에서 불빛이 흘러나오는 화장실을 멍하니 바라본다.
“아내……”
욕조와 좌변기가 있다. 세면기 위의 유리컵에는 낡은 칫솔들과 거의 다 쓴 치약튜브가 담겨 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수납장 안도 마찬가지다. 세숫비누, 샴푸, 린스, 수건…… 다 그렇고 그런 물건들뿐이다.
“들어가봐.”
토끼가 그의 등을 떠민다.
“불을 끄고 문도 닫은 채 변기에 앉아 있어봐.”
캄캄하다. 손도 보이지 않는다. 옆에 목을 맨 아내가 있는 것 같아 손을 휘저어본다. 그럴 리 없겠지만 누군가 밖에서 문을 잠가버릴 것만 같다. 변기에 앉은 그는 휴대폰 폴더를 올린다. 그 불빛에 비로소 콩닥거리던 심장이 조금 진정된다.
“그게 당신 아내의 안이었어.”
바깥에서 들려오는 토끼의 말이다. 그는 어둠속 곳곳에 박혀 있는 듯한 시커먼 옹이가 떠올라 변기에서 벌떡 일어난다.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려고 한다. 그럴 수 없는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문은 열리지 않는다.
옆집 아이는 다이내믹하게, 마치 리듬을 타듯이 쿵쿵거린다. 머리맡에 토끼를 세워놓고 누운 그는 휴대폰이 수신한 그동안의 문자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지워나간다. 덤덤한 표정으로. 대부분 아내의 사망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어지럽혀진 마당을 싸리비로 쓸 듯 그의 손놀림이 빨라진다. 더러 고맙다는 답장도 보냈다.
이곳의 느티나무 어르신과 석탑은 보름달이 떠 있는 밤에 봐야 제격인데 아쉽네요
나무 순례 모임에서 보낸 메씨지다. 한때는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던 사찰이었으나 지금은 절터와 탑만 남은 폐사지. 그 귀퉁이에서 자라는 나무 얘기다. 그는 벽의 달력을 찾으려 하지만 어느 곳에도 달력은 없다. 벽을 넘어오는, 쿵쿵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젓는다. 토끼와 악수를 하고 동굴의 입구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이불 속으로 기어서 들어간다. 입구를 막아버린다.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한다.
“아빠…… 엄마가……”
당신, 나쁜 사람이다. 아무리 내가 미워도 어떻게 아이에게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준단 말인가.
“아빠, 나빠! 엄마도!”
폐사지로 가는 길의 풍경은 전과는 딴판이다. 눈이 내렸기 때문이다. 모든 게 흰 눈 위에서 시작된다. 나무들이 그렇고 집들과 사람들이 그렇다. 줄지어 날아가는 새들도 눈 위에 선명한 발자국을 찍어놓고 떠났다. 검은 아스팔트길도 그늘이 깊은 산골짜기로 접어들면 흰 눈길로 모습을 바꾼다. 그때마다 차의 뒷바퀴가 좌우로 미끄러진다. 그는 옆자리의 토끼에게 걱정 말라는 눈빛을 보낸다. 숨막히는 도시에서 사는 건 힘들어도 산골마을의 이런 눈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왜 나무를 찾아다니는 거냐고?”
토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운다.
“별 뜻 없어. 나무는 발이 없잖아.”
폐사지 옆 공터에 차를 세워놓고 달이 뜨기를 기다리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앞유리에 부옇게 서린 김을 닦아내려고 와이퍼를 작동시킨다. 동쪽 산의 능선이 희부옇게 변한 걸로 보아 조만간 달이 떠오를 것이다. 그는 뒤로 젖혀놓은 의자에 등을 묻고 다시 눈을 감는다. 아내가 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당신, 내 남편 맞아?’였다. 결혼한 지 십오년이나 지난 뒤에 들은 말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과 아내라는 말만 있었지 그 안은 텅 비어버린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수마 같은 게 휩쓸고 간 그 안을 채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데려가.”
“궁금한 게 있어. 왜 안하던 말을 하는 거야?”
“……말을 해주길 원하잖아.”
“……내가?”
거대한 절터다. 보름달이 비추고 있는 삼층석탑과 부처가 앉았던 석조좌대, 그리고 한쪽 구석의 검은 느티나무가 넓은 절터를 지키고 있다. 그는 토끼를 옆구리에 낀 채 달빛을 받아 푸르게 반짝거리는 절터의 주춧돌 위를 게으르게 걷는다. 주춧돌들은 마치 절터에 만들어놓은 미로처럼 보인다. 느티나무까지 가는 길, 삼층석탑까지 가는 길, 제일 뒤편 부도(浮屠)까지 가는 길…… 그는 그 미로의 골목골목에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을 찍는다. 마치 모든 골목을 다 돌아서 거기에 도착하겠다는 듯이. 보름달도 몇발짝 뒤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다. 그는 고개를 치켜들고 보름달 근처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지만 시퍼렇게 벗겨진 하늘만 보다 돌아온다.
“예전에는 잘 보였는데……”
“뭐가?”
“별.”
탑돌이하듯 석조좌대를 몇차례 돌고 내려와 삼층석탑을 돈다. 보름달은 탑에 가렸다가 나타나기를 거듭한다. 그는 탑 뒤에 숨을 때와 달 아래 모습을 드러낼 때의 심장박동수가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다. 그러나 탑 뒤의 공간은 너무 좁다. 조금 더 있으면 탑 꼭대기로 달이 이동할 게 틀림없다. 넓은 절터의 어디에도 숨을 곳은 없다.
“여보……미안해.”
“지금 우는 거야?”
그는 서둘러 느티나무의 검은 그늘을 향해 걸어가지만 길은 점점 늘어나는 것만 같다. 입고 있던 옷마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알몸뚱이가 된 기분이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은 달빛을 받아 시리도록 선명하다. 느티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는 걸 포기한 그는 보름달이 삼층석탑을 다 지나가도록 절터를 걸었다. 마치 백팔배를 하듯 걷고 또 걸었다. 불타지 않았더라면 결코 볼 수 없었을 중문, 강당, 금당, 승방, 회랑 들이 들어서 있던 본디 자리를. 허리가 아파오고 가쁜 숨이 차오를 때까지.
“혹시, 지금 누굴 기다리는 거야?”
“………”
“그게 말이 돼?”
그는 석탑 아래에 토끼를 내려놓고 악수를 한다. 그리고 돌아선다. 텅 빈 절터로 음악이 흐르고 토끼는 춤을 춘다. 보름달은 서산 위에 떠 있다.
옷을 모두 벗고 화장실로 들어간 그는 목욕을 한다. 옆집 아이는 쿵쿵쿵, 쿵쿵, 쿵쿵쿵…… 달리고 있다. 양치질을 끝마치고 정성스럽게 면도를 한다. 물방울 하나 남기지 않으려고 마른 수건으로 꼼꼼하게 몸을 닦는다. 변기에 걸터앉아 몇번에 걸쳐 심호흡을 한다. 아기공룡의 쿵쿵거림이 끝나자 한바탕 고성이 오간다. 그릇들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쉬었다가 남녀의 사랑 노래가 그 뒤를 잇는다. 그는 화장실 문을 닫고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긴 신호음 끝에 마침내 저쪽의 문이 열린다.
“아빠?”
그는 거울을 보며 입꼬리를 늘인다.
“……그래. 내일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