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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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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설 金異說

1975년 충남 예산 출생.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경장편소설 『나쁜 피』,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음. im2seol@hanmail.net

 

 

 

부고

 

*

 

역한 비린내가 났다. 정액 냄새라고 생각했는데, 비 때문이었다. 창턱이 빗물로 흥건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네 엄마가 죽었다.

엄마는 담담했다. 아버지가 같이 오라신다. 나는 팬티를 입는 상준을 쳐다봤다. 와이? 상준이 소리를 내지 않고 물었다.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상준이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슨 일이니?

“엄마가 죽었대.”

상준이 나를 껴안았다. 맨살에 닿는 상준의 몸은 여전히 뜨거웠다.

“슬프겠다, 은희.”

엄마는 지난 이태 동안 식구들의 짐이었다. 당뇨 후유증으로 온몸이 썩어들어갔다. 시력을 잃고 다리를 절단하고도 생을 연명했다. 나는 슬프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엄마가 죽은 거니?”

죽은 엄마는 나의 생모였다. 부고를 알린 건 나를 키워준 엄마였다. 나는 바닥에 벗어놓은 티셔츠를 입었다.

“커피 줄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다음날까지 보내야 할 논문을 아직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이미 한번 미룬 원고였다. 한글 창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원용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엄마가 죽었다는 말을 못했다. 내게는 살아 있는 엄마도 있다. 설명하자면 길었다.

—너 아니고도 사람 많아.

—일주일만 미룰게요.

—이 바닥 좁다 너.

제 할말만 한 원용 선배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상준이 커피를 내밀었다. 어떻게든 일을 마쳐야 했다. 원용 선배의 눈 밖에 나면 안되었다. 원용 선배만큼 대필 논문을 대줄 사람이 없었다. 상준이 방문 앞에서 말했다.

“혼자 있고 싶지? 난 내 방으로 갈게.”

“아버지가 같이 오래.”

“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국 장례식은 어렵지?”

“예전에는. 지금은 병원에서 하니까 그냥 있으면 될 거야. 사실, 나도 잘 몰라.”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죽었는데 일을 하겠다고? 슬퍼서 그러는 거니?”

“원고 못 보내면 돈 못 벌어. 단순한 이치야.”

“이치?”

“단순한 원리, 단순한 상황이라는 뜻이야.”

상준은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쳐다봤다.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표정 같기도 했고, 이해하는 표정 같기도 했지만, 그건 너의 일이니 알아서 하라는 방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상준은 외국인처럼 보였다.

생모를 찾아 한국으로 온 게 십년 전이라고 했다. 삼년 뒤에 생모를 찾았지만 그쪽에서 재회를 원하지 않았다. 미혼모로 상준을 낳은 생모는 새 가정을 이뤄 잘 살고 있었다. 스물세살의 상준은 생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이별을 방치한 한국사회가 더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에 눌러앉았다. 스스로 납득할 시간을 갖고 싶었다고 했다. 상준을 만난 건 학원에서였다. 이미 외국어 강사 경력이 쌓인 상준은 한국어에 능숙했다. 나는 한번도 상준과 영어로 대화한 적이 없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상준이 자기 손에 든 커피 잔을 살짝 들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상준을 향해 깍듯하게 목례를 했다. 학원의 강사들은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나는 안내 데스크에서 수강신청을 받고 상담전화를 받았다. 상준은 유일하게 먼저 인사를 건넨 학원 사람이었다.

상준과 나의 유일한 공통점은 엄마가 둘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상준은 나를 이해한다고 했다. 엄마가 둘이라는 이유로 같이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상준은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다. 중요한 건 너와 나가 사랑한다는 사실이야. 상준은 ‘내가’라는 말 대신 ‘나가’라고 했다. 나는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한다는 말만큼은 진짜 같았다.

나는 모니터를 응시하며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매일 마시던 커피 맛이 달랐다. 엄마가 죽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엄마는 투병중이었다. 슬플 이유가 없었다. 여하튼 남편을 떠나고 어린 나와 오빠를 버린 사람이었다. 속이 메스껍고 자꾸 생목이 올라왔다. 기분이 나빴다. 나는 논문 원고를 열었다. 근대문학사에 관한 연구였다. 마지막으로 퇴고를 한번 더 봐야 할 일이었다. 어떻게든 저녁때까지 마쳐야 했다.

 

병원 입구에서 상준은 내 팔을 붙잡았다.

“이 정도면 되니?”

귀걸이를 빼고 감색 양복을 입은 상준은 말끔했다. 서른살의 상준은 이십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상준에 비하면 서른다섯의 나는 너무 늙은 여자 같았다.

장례식장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귀퉁이에 앉아 있던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 영정 사진이 보였다. 젊은 여자였다. 저렇게 생긴 여자였구나. 예순이 다된 사람의 영정으로 쓰기에 마땅한 사진은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요절했다고 여길 만한 사진이었다. 어디서 저런 사진을 구했는지, 끔찍했다. 엄마셔. 상준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이런 자리에서 만나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상심이 크다니.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인터넷에서 알아온 말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지 앞에서도 상준은 똑같은 인사를 건넸다.

“절해라.”

아버지는 상준을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절을 했다. 자네도 하게. 상준이 어색하게 몸을 숙였다.

엄마가 밥과 국, 술을 갖다주었다.

“불쌍한 사람이라고, 아버지가 장례를 치러주자 했다.”

엄마는 상준 앞으로 수저를 놓아주며 말을 이었다.

“죽은 사람이 알던 사람들까지 찾아서 부르고 싶진 않더라.”

“잘하셨어요.”

“네가 서운할지 모르겠다만, 나는 할 만큼 했다, 은희야.”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를 때는 진심을 담은 말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의 눈가가 기미로 거뭇했다. 수저를 들었다. 국은 짜고 매웠다. 메스꺼웠던 속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

 

죽은 엄마가 집을 나간 건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예닐곱살 즈음이니 기억이 있을 법한데도, 떠난 엄마의 기억은 전무했다. 대신 어둑한 방 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있던 아버지만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자다 깨 보면, 어김없이 아버지가 엄마의 빈 베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본 것만으로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아버지의 검은 실루엣을 목도할 때마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숨이 턱 막히곤 했다.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아버지 혼자 남매를 건사했다. 아침은 아버지가, 저녁은 오빠가 차렸다. 세살 위인 오빠가 중학생이 된 이후에는 내가 상을 차렸다. 곧 쌀을 씻어 밥을 안치는 일도 할 수 있었다. 식용유에 쏘시지나 감자를 볶고, 단무지에 고춧가루와 참기름을 부어 무쳤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도 끓였다. 상차림뿐 아니라 청소와 빨래도 내 몫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고무줄을 뛰어넘고, 친구 집으로 몰려가 숙제를 하는 것처럼 집안일은 나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오빠 대신 언니가 있었으면 했다. 그러면 언니가 나 대신 일했을 테고, 언니가 나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럼 나는 지금과 다르게 살고 있을 것이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제일 먼저 숙제검사부터 했다. 오빠와 나는 공책을 들고 아버지 앞에 섰다. 아버지 마음에 들 때까지 공책을 채우고 글씨를 바로 써야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자기 전, 아버지는 다시 남매를 앉혔다. 그러고는 자신이 꺼내온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나에게는 세계명작이나 전래동화를, 오빠에게는 한국 단편들을 읽어주었다. 오빠는 벽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거나, 노트를 꺼내 그림을 그리면서 아버지의 낭독을 들었다. 혼자 있는 게 싫었던 나는 베개를 들고 와 오빠 옆에 누워 잠이 들곤 했다. 김동인, 이효석, 염상섭의 단편들을 소리 내서 읽는 아버지는 무척 외로운 인간처럼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낭독은 다분히 위악적이었다. 내가 골라온 책은 뒷전에 두고, 꼭 자기가 읽고 싶은 걸 읽었다. 가끔 주인공 대신 내 이름을 넣어달라고 조르기도 했지만 한번도 응해준 적이 없었다. 그 입 좀 다물어. 지금 내가 읽고 있잖니. 책을 읽는 중에는 어떤 질문도 할 수 없었다. 더 읽어달라고 졸라도 언제나 한권으로 끝이었다.

책을 다 읽은 아버지는 꼭 한마디 덧붙였다. 세상에 책 읽어주는 아버지는 흔치 않다. 넌 행복한 아인 줄 알아라. 하지만 아버지는 나의 외로움에 대해 어떤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 엄마가 없다는 걸 표내면 따돌림받는다. 함부로 가족 이야기를 하지 마라. 말수가 적어야 귀여움을 받는 여자애가 된다. 어디서든 나서지 마라. 평범하게 자라라. 나는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자라야 했다. 조용하고, 집안일에 성실했으며,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엄마가 그립다는 내색도 차마 하지 못했다. 그것이 열댓살도 되지 않은 내가 아버지에게 배운 삶의 자세였다. 엄마 없이 자라는 여자아이의 마음 따위는 아버지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낭독을 그만둔 건 내가 초경을 시작한 열다섯살 여름부터였다. 문과였던 오빠가 아버지와 오랜 갈등 끝에 뒤늦게 예체능계열로 바꾼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미술학원에 가겠다고 나서는 오빠를 불러 앉혔다.

“기어이 네 고집대로 하겠다니, 잘났다. 예술은 개나 소나 한다더냐? 빌어먹는 환쟁이나 되라고 내가 널 키웠구나. 어디 두고 보자.”

오빠는 대꾸하지 않았다. 말수가 적은 오빠는 좀처럼 그 속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빠가 법대에 들어가기를 바랐다. 힘을 가지려면 법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사회적 계급을 위해서라도 남자라면 마땅한 진로라고 설득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미대에 가겠다는 오빠의 선언은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과 같았다. 자기 뜻이 꺾인 아버지의 노여움은 가시지 않았다. 자식에게 졌다는 걸 참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와 대척점에 있는 오빠가 부러웠다.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자라면 되는 줄 알았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던 것이다. 차라리 못된 짓을 해서 실컷 두들겨맞기라도 했다면 아버지에게 조금 더 살가운 부정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나를 표현해야 하는지 몰랐다. 아버지가 침묵을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자식이 전부라고 생각한 내가 천치였지. 나도 이제 내 생각 하면서 살겠다. 그리 알아라.”

얼마 후 아버지가 여자를 데리고 왔다. 오빠는 여자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하지만 엄마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여자가 말릴 틈도 없이 아버지가 오빠의 머리를 후려쳤다. 오빠는 화구통을 들고 훌쩍 집을 나갔다. 엄마라는 단어는 나 역시 이물스러웠다. 나는 여자를 오래 쳐다보았다. 연분홍색 투피스를 입은 여자 옆에는 검은 가방과 커다란 이불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여자의 마주잡은 두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톱이 짧아 속살이 벌겋게 솟아 있었다.

여자는 나와 오빠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썼다. 밥 먹어요. 이제 그만 자야죠. 아버지가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나는 너희들의 엄마가 아니라는 선언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굳이 엄마라 부르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 같기도 했다. 여자는 음식 솜씨가 좋았고, 부지런해 집안은 언제나 말끔했다. 발소리를 내지 않았고, 아버지와 다툼 한번 없었다.

다만 여자는 일년에 한번, 일주일씩 집을 비웠다 돌아왔다. 마치 휴가를 얻어 떠나는 사람 같았다. 집을 비우기 전에는 일주일치 반찬과 국, 찌개를 냉장고에 재어놓았다. 아버지 말로는 여자의 부모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여자의 부모라면 오빠와 나에게는 외가가 될 터였다. 그러나 그쪽과 교류는 없었다. 아버지는 여자를 일가에 알리지 않았다. 집안의 대소사에는 언제나 아버지 혼자 다녀왔다. 새로운 관계는 여자 하나로 족했다.

오빠는 재수 끝에 미대에 진학했다. 여자는 새벽마다 도시락을 싸주었고, 저녁에는 화실 앞으로 저녁을 날랐다. 대학에 들어간 뒤, 학교 앞에서 자취를 시작한 오빠에게 종종 반찬을 갖다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여자가 들어온 이후로 입성이 좋아지고 살이 붙었다. 낭독을 하던 시간에는 여자의 무릎을 베고 텔레비전을 봤다.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웃음도 흔해졌다. 여자는 자기가 할일을 잘 찾았고, 항상 잘해냈다.

여자 때문에 힘든 건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여자가 들어온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계절마다 이불의 두께가 달라졌고, 커튼 색깔이 바뀌었다. 냉면이나 주꾸미 같은 제철에 먹을 수 있는 별미가 상에 올랐다. 겨울을 앞두고 김장을 했고, 손수 만두를 빚었다. 베란다에는 철마다 꽃을 피우는 화분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매일 삶는 수건과 속옷에서는 언제나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었다는 걸 나는 몰랐다. 그것이 여자여서 가능하다는 걸 절감할 때마다 열패감을 느끼곤 했다. 나는 여자 때문에 집안일을 하지 않았고, 갑자기 생긴 많은 시간을 어쩌지 못했다. 친구를 어떻게 사귀는지 몰라서 늘 외톨이였다. 책을 읽거나 공부만 했다.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여자는 한결같았다. 정해진 시간에 간식을 챙겨주고, 매일 깔끔하게 교복을 다려놓았다. 미처 꺼내놓지 못한 실내화도 깨끗하게 빨아 월요일 아침이면 현관 앞에 놓아두었다. 자라는 몸에 맞춰 새 속옷을 건넸고, 용돈을 늘 넉넉히 챙겨주었다. 늦은 밤에 생리대를 사다주거나, 블라우스나 한복 저고리를 만드는 가사 숙제를 대신 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여자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고맙습니다,였다. 그런데도 여자는 나에게 학교생활에 대해 먼저 묻지 않았다. 나는 가정통신문이나 성적표를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여자는 늘 멀찍이 서 있곤 했다. 내가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게 된 건 열일곱살 여름이었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오던 길이었다. 집 부근에 남자애들 네댓이 모여 있었다. 그중 하나가 내 이름을 불렀다. 또래로 보였지만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너 이 집 살아? 그런데? 나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무리가 나를 에워쌌다. 아버지 딸이라 이거지? 뭐? 생김새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비밀 하나 알려줄까? 너 누구야, 너희들 뭐야? 남자애가 담배를 피워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 중의 둘이 내 두 팔을 잡았다. 왜 이래! 무리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애가 비죽 웃더니 뺨을 올려쳤다. 소리 지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맞은 뺨을 감싼 채 뒤돌아섰다. 나를 둘러싼 남자애들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남자애가 순식간에 내 머리채를 잡아챘다. 악! 조용히 못해! 엄마! 엄마! 나도 모르게 터진 말이었다. 한번도 불러본 적 없는 ‘엄마’였다. 그러나 골목은 조용했다. 작정을 하고 덤빈 남자애들을 이겨낼 수 없었다. 엄마! 엄마! 엄마 좋아하시네! 남자애가 내 입을 막고 골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남자애들은 질질 끌려가는 나를 발로 차댔다.

정신을 차린 건 내 방에서였다.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큰 목소리였다. 네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고 그러는 거야! 여자가 조용히 대꾸했다. 당신 자식을 내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어요.

“그런 사람이 그런 말을 해? 신고를 하자고?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어?”

“숨기는 게 은희에게 더 큰 상처가 될 거예요.”

“당신이 뭘 알아? 여자 인생이 어떤 건지 당신도 잘 알잖아!”

“은희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걸 은희 혼자 감당하게 하려는 당신이 더 이기적인 거라고요.”

“가만두면 조용해질 일이야. 그런데 신고를 하자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당신이 더 의심스러워.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제 인생을 생각해보세요. 은희가 저처럼 되지 말라는 보장을 누가 해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방문에 기대어앉았다. 교복은 흙과 피로 범벅이었다. 아랫도리는 송두리째 없어진 것처럼 어떤 감각도 없었다. 골목이 떠올랐다. 재개발 바람이 분 동네는 온통 부서진 집들이었다. 내가 끌려간 곳도 기둥만 남은 집터였다. 시궁창 냄새가 진동했다. 내 뺨을 후려친 남자애가 바닥으로 나를 밀쳤다. 교복 치마가 훌렁 뒤집어졌다. 손을 뻗기도 전에 남자애의 운동화가 가랑이 사이로 들어왔다. 검은 쥐 한마리가 내 어깨를 지나갔다. 남자애가 나를 덮쳤다. 내 입을 막고 혼자 지껄였다. 너 혼자 아버지를 갖겠다고! 넌 공주처럼 키우고 난 쓰레기처럼 내팽개치겠다 이거지? 다른 남자애들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발버둥을 쳤다. 몇이 내 팔과 다리를 잡았다. 남자애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계속 지껄이면서 내 몸을 짓이기듯 파고들었다. 온몸이 점점 굳어졌다. 어느새 남자애가 일어나 바지춤을 올리며 침을 뱉었다. 야, 너! 발을 잡고 있던 남자애가 내 위로 올라왔다. 남자애들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다음은 너! 팔을 잡고 있던 남자애가 나를 올라탔다. 야, 이제는 너! 씨발, 나부터 하자. 싸겠다, 싸! 왁자한 웃음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내 입을 막은 남자애의 손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아악! 남자애의 손가락 살점이 뜯겼다. 내 얼굴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남자애가 돌멩이로 내 머리를 쳤다. 욕지기가 일면서 오줌을 지렸다. 순간, 정신을 잃었다.

“내 새끼가 내 새끼를 해쳤다고 고발하라고? 나는 못해. 차마 그렇겐 못하겠다.”

아버지가 낮게 읊조렸다. 여자는 아버지를 이기지 못했다. 나는 집안의 비밀이 되었고, 곧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새로 이사한 집, 새로운 내 방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했다. 방문을 열어준 아버지가 내 어깨를 감쌌다.

“누구나 살면서 불운을 겪는 법이다. 그러니……”

여자가 아버지의 말을 막고 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나를 힘껏 안았다. 여자의 품에서 시큼한 땀내가 났다.

“괜찮아, 은희야.”

여자가 내 이름을 발음했다. 은희 혼자 감당하게 하려는 당신이 더 이기적인 거라고요. 제 인생을 생각해보세요. 여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자도 나와 같은 불운의 경험이 있다. 집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안도를 느꼈다.

시간이 지난다고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기억은 언제나 생생하게 되풀이되며 재생되었다.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비밀은 더욱 견고하게 기억에 매몰되었다. 그뒤로 나는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스무살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아버지와 한집에 사는 이상 그날 밤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엄마가 상준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은희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입안에 든 밥을 상준이 마저 다 씹어삼켰다.

“국적이 한국이 아니라고요.”

네. 상준이 수저를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한국사회가 바라는 버릇을 이미 몸에 익힌 상준이었다.

“들어온 지 십년이면, 한국사람 다 됐겠어요.”

“아, 아닙니다. 아직 부족합니다.”

“계속 한국에 있을 건가요?”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은희가 한국에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나도 그렇고. 오빠가 한국에 없다 보니……”

오빠가 결혼 직후 뉴질랜드로 이민을 간 게 오년 전이었다. 빈 상가를 둘러보았다. 오빠가 한국에 있다면, 여기에 왔을까. 아버지에게 시선을 보냈던 엄마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는 엄마의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전 부인의 장례식장에 서 있는 남편을, 자기가 키운 의붓자식을, 그 자식이 데리고 온 이국의 사내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대체 어떤 것일까.

집을 나간 엄마가 다시 돌아온 건 이태 전, 근 삼십년 만이었다. 평생 혼자 살았으면서도 죽음을 앞두고는 두려웠다고 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특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납득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돌아온 사람을 내치지 않았고, 엄마 역시 아버지를 만류하지 않았다. 나는 받아들인 아버지보다 묵과한 엄마가 더 놀라웠다. 병든 전 부인을 받아들여 입원시키고 간병인을 붙이는 엄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와 살면서도 아버지는 떠난 엄마를 만나왔다. 졸업식을 앞두고 있을 때마다, 아버지는 엄마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걸 전했다. 하지만 나는 한번도 응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외도 때문에 떠난 엄마였지만, 나를 버린 사람이라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어릴 적 내가 불쌍해서라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편부에게 사랑받기 위해 엄마라는 단어조차 입 밖에 내지 못하며 자란 나였다. 엄마가 그립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다. 아버지의 방만한 양육이 엄마를 향한 그리움조차 밝힐 수 없게 했던 것이다. 떠난 엄마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키워준 엄마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키운 여자는 적어도 나에게 괜찮다는 말을 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키워준 부모님은 모두 생존, 그러니까 살아 계시나요?”

“네.”

엄마가 계속 상준에게만 물었다. 마치 사윗감을 보는 자리 같았다. 나는 점점 불편해졌다.

“그래도 키워주신 분들인데. 생모를 찾아 여기에 나와 있는 걸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으실까요?”

“그런 분들은 아닙니다. 한국인의 정서와는 많이 달라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찾는 것이라는 원칙이 강한 분들이에요.”

“훌륭한 분들이네요.”

엄마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여기까지 왔으니 알겠지만, 우리의 사정을 다른 나라에서 자란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나이도 있고, 부모 입장에서는 둘이 같이 사는 걸 알면서도 그냥 두는 게 옳은지…… 은희 아버지는 둘이 결혼하길 바라거든요.”

상준이 잘라 말했다.

“은희와 거기까지 말해본 적 없습니다.”

사생활 존중. 일할 때는 방해하지 않기. 식사준비와 청소, 빨래는 번갈아가며. 생활비는 반반씩 지출. 간략하고 단출한 규칙이었다. 다른 상가의 곡소리가 들릴 때마다 상준은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한국은 조금 다르다는 걸 알죠? 부모 입장에서는 과년한, 그러니까 나이가 많은 딸을 그저 동거하는 딸로 두고 싶지 않아요.”

엄마의 말에 상준이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 도움을 청하듯 쳐다봤다. 여기에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준도 따라 일어섰다. 앉아라. 엄마가 아버지의 밥과 국을 들고 왔다. 넷이 머리를 맞대고 소리 없이 식사를 했다. 다른 상가에서 오열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젊은 엄마의 영정 사진이 신경 쓰였다. 더이상 수저를 들 수 없었다.

“본인 스스로 고른 사진이다. 뭐라 하지 마라.”

아버지가 눈을 치켜떴다. 평생 교육자로 살았다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그건 자기 논리일 뿐이었다.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이혼과 재혼을 철저히 숨긴 걸 투철한 자기관리라고 내세웠다. 자신의 외도로 집을 나간 사람의 죽음 앞에서, 저렇게 서슬 퍼런 영정 사진 앞에서 밥술을 뜨는 사람이었다. 불운을 겪은 딸을 위해 이사하고, 국적을 바꾸겠다는 아들을 막지 못한 것도 자신이 아량을 베풀었기 때문이라고 믿는 장본인이었다.

다른 상가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모두 젖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물기 가득한 공기가 상가에 맴돌았다. 상준이 자꾸 시계를 쳐다봤다. 더 있을 필요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입관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입관실과 참관실은 유리부스로 나뉘어 있었다. 창 너머에 엄마가 누워 있었다. 생소한 얼굴이었다. 입원했던 동안에도 나는 엄마를 보러 가지 않았다. 엄마의 기억이 없으니, 생전 처음 보는 셈이었다. 엄마라는 호칭조차 무색했다. 저기 죽은 여자가 누워 있을 뿐이었다.

입관 담당자가 수의를 다 입히자 가족들을 불렀다. 망자에게 마지막 말을 하라고 일렀다. 아버지가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두 다리에 힘을 줬다. 어미의 도리를 저버린 사람에게 자식으로서 죽음의 예의를 갖추라 종용하는 절차가 원망스러웠다. 엄마가 내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엄마의 손이 뜨거웠다. 그제야 나는 발을 뗐다. 시키는 대로 죽은 사람의 이마와 가슴에 손을 댔다. 오른손에 닿은 이마가, 소스라치게 차가웠다. 살면서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섬뜩함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이 여자가 나를 낳은 사람이라는 걸, 명확히 깨달았다.

 

*

 

월말의 학원은 수강신청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매달 벌어지는 일이었다. 레벨 테스트를 위해 상담 강사를 안내하고 수강신청을 접수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 몰랐다. 모친상이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근을 해야 했다. 탈상 때는 어쩔 수 없이 휴가를 냈다. 하필 월말에,라며 말끝을 흐린 담당자가 인상을 썼다. 마침 상준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눈이 마주쳤지만 상준은 이내 시선을 거뒀다. 자기 책상 앞에 앉자마자 옆자리의 강사와 떠들었다. 학원에서 나와 상준의 동거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상준은 학원에서 나에게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학생들과 담소를 나누고 강사들과 회식을 가면서도 내게 눈짓 한번 주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상준에게 엄마의 말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결혼 같은 걸로 우리의 관계를 규정짓지 말자고 했다.

“오케이.”

상준의 대답은 명료했다. 상준이 끔찍이 싫어하는 된장찌개만 끓이지 않으면 결혼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엄마가 둘이라는 것도 우리 사이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상준이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처럼 사랑한다면, 국적이나 과거의 일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단번에 결혼 이야기를 접은 상준이 내심 서운했다. 정말 나와의 결혼을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니? 넌 가정이라는 걸 꾸리고 싶지 않니? 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약속이 있다는 말이 없었는데 상준의 귀가가 늦었다. 나는 불을 끄고 누웠다. 시계 초침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자고 싶은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에 발인이었다. 하루종일 복잡하고 고단할 것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원용 선배였다. 보낸 원고에 대해 몇가지 피드백을 해주었다. 메일로 지적사항을 보내놓고도 꼭 이렇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통화 말미에는 다른 일을 주었다. 지난번 논문과 비슷한 주제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신경 써야 할 일이었다.

논문을 쓰다 보면 그것이 내 논문 같고, 내가 석사 박사가 된 것 같았다. 학원으로 출근하다 보면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 같았다. 상준과 누워 있으면 상준의 아내 같고, 여자를 엄마라고 부른 뒤로는 여자의 친자식 같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 같았다.

 

아버지의 차에 셋이 올랐다. 아버지와 엄마가 앞에, 내가 뒷자리에 앉았다. 유골함은 내 옆에 두었다. 보자기에 싸인 상자도 한자리를 차지하는 것 같았다. 자꾸 멀미가 났다. 뼛가루는 죽은 엄마가 살던 곳에 뿌리기로 했다. 그것도 죽은 사람의 부탁이었다. 남은 사람들에게 끝까지 자기 일생의 응어리를 짓누르고 가는 망자가 새삼 가여웠다. 나는 머리를 뒤에 붙이고 먼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고속도로로 두시간 거리였다. 휴게소에 세번이나 들른 후에야 도착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백숙집과 영양탕집이 즐비한 물가였다. 여기서 죽은 엄마가 뭘 하며 살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3월이 목전이었는데 간간이 눈발이 흩날렸다. 산간지방에는 폭설주의보가 내렸다고 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는데도 군데군데 낚시꾼들이 보였다. 아버지가 성큼 물가로 다가갔다. 내가 아버지 뒤를, 엄마가 내 뒤를 따랐다. 물 앞에 선 아버지가 뒤로 물러섰다. 네가 뿌려라. 오빠가 한국에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앞으로 아버지와 엄마에 관한 일들은 모두 내 몫이 될 것이었다.

흰 가루가 물 위에 둥둥 떠다녔다. 두어번 손으로 꺼내 뿌리다가, 유골함을 통째로 뒤집어엎었다. 허연 가루가 제멋대로 날렸다.

아버지가 담배를 피워물었다. 이십년간 끊었던 담배였다.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물가에서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허름한 낚시가게와 백반집, 작은 점포가 띄엄띄엄 자리했다. 저만치에 엄마가 웅크려앉아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다가갔다. 엄마의 손에는 냉이가 한움큼 쥐여져 있었다.

“여기 잔뜩 있다.”

어디서 주웠는지 막대기로 땅을 파내 냉이를 캐고 있었다. 냉이의 뿌리가 길고 곧았다.

“다 뿌렸니.”

“네.”

“고생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엄마는 냉이를 찾느라 계속 앉은걸음이었다. 아버지가 불렀다.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요, 엄마.”

“은희야.”

엄마가 방금 캔 냉이뿌리의 흙을 탁, 탁 털었다.

“너는 늘 혼자 방에서 책만 읽는 애였다. 밥 먹으라고 불러도 도통 단번에 나오질 않았지. 그래서 네가 책을 만들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줄 알았어. 그런데 거짓말을 하면서 살 줄은 몰랐다. 나는 그게 속상해. 그렇게 살지 마. 비밀을 만드는 사람은 결국 외롭게 되어 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엄마가 다시 냉이를 찾아 자리를 옮겼다. 엄마의 등은 동그랗고 작았다.

“너는 강한 아이야. 속은 문드러졌겠지만, 적어도 허투루 사는 인간은 아니지. 그게 늘 고마웠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미안했고. 그걸 꼭 말하고 싶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는 연신 냉이 이야기를 했다. 차 안에는 흙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흙냄새 때문이었는지, 멀미를 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상준의 방이 깨끗했다. 책상 위에 메모가 있었다.

 

I also had hard times, but I got over it with another aspect of life. You cannot stop mourning your mother, but the emotion would be dimmed. It seems that I cannot help you to find your new life. But I never forget the moments weve shared. Thank you for all of our times. Farewell.

 

한글이 아니라 영어로 쓴 메모였다. 왜 그랬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나와 함께 지낸 이년 동안 상준은 한국사회를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을까. 내가 찾아야 할 new life가 무엇인지 알려주면 더 좋았을 텐데. 어쨌든 Farewell. 나는 배 속 아이에 대해 상준에게 말하지 않은 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상준이 출근한 걸 확인한 뒤,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리고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수술은 짧았다.

열일곱살짜리 나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들어섰던 여자는 눈물을 흘렸다. 회복실에서 눈을 떴을 때 여자는 내 손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미안하다. 다 나 때문이다. 다 내 잘못이다. 미안하다, 은희야. 여자가 울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혼잣말을 들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게 왜 여자의 잘못인지 몰랐다. 단지 나는 여자가 나를 위해 울고 있다는 사실만 중요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여자를 엄마라고 불렀다.

 

*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온 건 여름이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새로 다니기 시작한 보습학원의 상담교사로 출근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였다. 아버지를 한번 찾아가보라는 말이었다. 엄마의 부탁이어서 거절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내 앞으로 통장을 내밀었다. 죽은 엄마가 남긴 돈이라고 했다.

“병원비 쓰고 남은 돈이다. 이 돈 중에 반은 네 오빠한테 보낼 생각이다. 나머지는 네가 가져라.”

“이걸 왜 내가 가져요.”

“그 사람이 그러길 바랐다.”

통장의 잔액은 미미했다. 석달치 생활비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액수의 문제가 아니었다. 평생 남보다 못한 사람이었다. 살았을 때도 안 보고 살던 사람이었다. 죽은 마당에 어떻게든 연관되는 게 싫었다. 망자의 소원을 들어줘야 할 의무가 없었다. 나는 끝까지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대체 왜 그래요. 정말 자식들이 이 돈을 받기를 바라는 거예요? 난 싫어요.”

“액수가 적다고 그러는 거냐.”

“그럼 오빠한테 다 주든가요. 아니면 죽은 전 부인 못 잊는 아버지가 다 갖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난 받기 싫어요!”

“그래도 널 낳은 어미가 바란 거라니까.”

“어미라는 말 마세요! 그 여자가 무슨 자격으로 자식 운운해요. 그렇게 만든 아버지는 또 무슨 권리로요? 아버지는 엄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나는 부엌 쪽을 힐끔거렸다.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엄마와 나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죽은 사람과 우리의 문제다.”

“왜 엄마가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원래 그러기로 하고 산 사람이니까.”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세요.”

“엄마에게도 다른 가족이 있다. 우리는 각자 자기 가족도 챙기며 살기로, 그러기로 하고 살았다. 그러니 하라는 대로 해라.”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알고 싶지 않던 사실까지 알게 되는 건 참혹한 일이었다. 이십여년 전, 우리 집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엄마는 이미 자식이 있는 여자였다. 아버지는 양육비를 대주는 조건으로 그 아이를 데리고 오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는 나와 오빠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다.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 남의 자식을 키운 셈이었다. 그래서 나와 오빠의 이름을 부르는 걸 꺼렸고, 우리에게 존대를 쓰면서, 아버지 앞에서는 더없이 활짝 웃었다. 새 가정을 꾸렸던 건, 결국 자기 자식을 위해서였다. 나를 위해 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식 때문에 흘린 눈물이었던 것이다. 이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 매순간을 거짓으로 일관했다는 뜻이었다. 부모의 본성이란 그런 것인가. 나는 치가 떨렸다.

“엄마랑 헤어지기로 했다.”

“왜요, 그 여자가 죽은 걸로 모든 게 끝이에요? 그럼 살아 있는 엄마는요? 엄마 자식은요?”

“원래는 너까지 보내고서 헤어지려고 했는데, 지난해 자기 자식 여의더니, 이제 더이상 못하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러자 했다.”

창밖에는 매미가 그치지 않고 울어댔다.

“이참에, 나도 홀가분하고 싶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평생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사람이었다. 내 인생의 복판에서 한치도 움직이지 않던 사람이었다. 나의 불운을 만든 건 바로 아버지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가, 어떻게 자기가 벗어나고 싶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럼 빌어먹을 그 새끼는요? 나한테 그짓을 한, 아버지가 싸질러놓은 그 새끼는요!”

그 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아버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작년에…… 사고로…… 죽었다.”

“하, 잘됐네요. 그럼, 이제 아무 문제 없네요!”

“평생 자식만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도 자식 셋 모두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남은 건 이제 너 하나다. 그 사람 사후처리까지 내가 다 끝냈으니, 남길 빚은 없다.”

“나는요!”

“잊어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오래전이어도 바로 오늘 같은 일이 있다. 몹쓸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는지 아버지는 죽어도 모를 것이다. 그 무엇도 내 것은 없었다. 논문도, 상준도, 의붓어미의 사랑도 내 것이 아니었다. 모두 빌어먹을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은 잊을 수 없어요.”

시끄럽던 매미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담배 연기 사이로 아버지의 반백이 보였다 사라졌다. 아버지 혼자 두고 집을 나섰다. 나는 대문을 안에서 잠그고 뒤돌아섰다.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와서 나는 여름감기를 앓았다. 혼자서 병원을 다니고, 혼자 죽을 끓이고, 혼자 처방약을 먹었다. 상준이 생각났지만 전화하지 않았다. 내가 아니어도 한국사회를 이해할 방법은 많을 것이었다. 학원생들의 기말고사가 끝나고, 피서철이 돼서야 짧은 휴가가 주어졌다.

전화가 걸려온 건 막 논문 초고를 끝냈을 때였다. 열대야로 온몸이 땀이었다. 원용 선배는 제 날짜를 좀 지키라고, 사람이 나밖에 없는 줄 아느냐고 윽박지르면서도 꼬박꼬박 일을 대줬다. 차라리 네가 대학원에 가지 그러냐는 선배의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게 된 건, 아버지에게 다녀온 이후였다. 결국 외롭게 될 거라는 엄마의 말도 자꾸 떠올랐다. 써먹을 데가 없더라도, 거짓말을 그만두는 일은 그것밖에 없을 터였다. 원용 선배인 줄 알고 무심히 받았는데 엄마였다. 새벽 4시였다. 툭, 툭, 투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네 아버지가 죽었다.

아버지가 스스로 생을 놓았다. 어쩐지 놀랄 일도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오래 준비해왔던 소식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자주 찾아간다고 했는데도…… 닷새가 지났대. 미안하다, 은희야.

이 더위에 닷새면 아버지의 몸에는 구더기가 끓고 시취가 심했을 것이다. 소나기라도 내리면 열대야가 조금이라도 수그러들까. 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젖은 흙냄새가 훅 끼쳤다. 날벌레들이 불빛을 찾아 방 안으로 들어왔다. 파닥거리는 날갯짓 소리에 울음소리가 섞였다.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유일한 사람도 여자였다.

“괜찮아요, 엄마.”

그제야 여자가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날이 새도록 여자의 울음을 오래오래 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