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조각난 시의 얼굴

임선기 시집 『호주머니 속의 시』, 문학과지성사 2006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netka@paran.com

 

 

임선기(林善起)의 『호주머니 속의 시』는 사물의 생리를 노래하기보다 그 사물을 대하는 시적 화자의 태도를 시화(詩化)한 시집이다. 형식이나 방법을 자기 시의 주제로 직접 운반한 작품들은 종종 있었지만 이처럼 시적 화자의 태도를 주된 관심사로 두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데 이 시집은 그 가운데서도 남다른 면이 있다. 그것은 예의 ‘태도’가 지닌 개성 때문이다. 화자는 작품 안에서 유사종교적 긴장을 팽팽히 유지하며 만상(萬象)을 우러른다. 별, 나무, 하늘 등의 상향 소재가 사색적으로 배치된 것 또한 그렇거니와 나무가 아름다운 이유를 “아무도 모르는 깊이가 있기 때문”이라거나 “그 깊이 속에 우리가 아직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나무를 우러르며」)이라고 설명하는 대목 등에서 그것은 특히 두드러진다. 물론 사물과 세계를 대하는 종교적 태도가 작품의 수준을 곧바로 끌어올리지는 못할 뿐 아니라 시사(詩史)의 전통 속에서 그런 경향은 이미 낯익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요소가 이 시집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가?

우선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이 독특한 태도를 ‘거리두기’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등단 12년 만의 첫시집이라는 사실을 무색케 할 정도로 시편 전반에 고루 나타나고 있으며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양날의 칼로 기능하고 있다. 「목화의 방」 「햇살의 마른 자국이 있는 집」 「나무를 지나서」 같은 시에서는 정지용, 윤동주, 김현승 등이 보여준 ‘견고한 고독’에 가닿기도 한다. 그런데 한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기서의 거리두기가 자연서정시에서 이따금 회자되는 관조적 태도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정지용에게는 “외로운 황홀한 심사”를 불 지피는 촉매였으며(「유리창 1」, 1930), 김수영에게는 “두려운 세상과 같이 배를 대고 있는” 정직함의 표상이었던(「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1955) ‘유리창’은 이러한 시적 관조의 매개물로 자주 동원되는 소재다. 이 유리창을 통해 임선기의 시적 화자는 어떤 영원성에 접속하고자 한다.

 

창에서

창밖은

어떤 깊이에 서 있고,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나를

창에서 만난다

-「창 1」 부분

 

“창 앞에 서 있는 것은/언제나,/영원 앞에 서 있는 것 같다”(「창 1」)라고 말하는 화자는 마치 침묵하는 신 앞에 버려진 단독자처럼 자기존재의 근원적 무의미에 감전되어 있는 듯하다. 그는 한낱 “먼지 같은 사람”(「먼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먼지에 불과한 존재인 ‘나’는 왜 창밖에 있는 또다른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하는가? ‘나’는 달관한 자의 초연함을 가장하곤 하는 통속시의 관조적 자아들에서 벗어나 있는데 그것은 화자의 거리두기가 시적 대상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관조적 자아들은 흔히 세속의 덧없음을 섣불리 누설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지나치게 변호하려 들지만 이 “멀리 떨어져 있는 나”는 시시각각으로 틈입해오는 생의 산문성 앞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노출시키는 분열의 페르쏘나(persona)다. 말하자면 그는 대속자(代贖者)에 다름 아니다. “파리의 어느 가난한 삶을/견디면서/시를 지어”낸 “에밀 시오랑”(「이곳에 살기 위하여」)이나 “비틀거리는 생을”(「12월」) 목격해버린 릴케, 첼란, 말라르메, 김종삼, 끌레, 달리, 고흐 같은 이름들의 등장은 ‘대속자로서의 시인(예술가)’이라는 인식과 깊이 결부된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 자기인식의 존재는 동시대 젊은 시단의 흐름에 비추어서도 단연 이채롭다. ‘미래파’ 선언을 둘러싼 논란이 꾸준한 데서도 알 수 있듯 대중문화산업과 하위문화의 분방한 자유를 호흡하는 오늘의 젊은 시들은 기성의 언어를 해체하는 데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시대의 시적 경향 전체가 한때의 유행에 불과할 뿐이라거나, 이 시집이 시대착오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경향은 경향대로의 의미와 가치가 있을 것이되, 이 시집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동시대와의 어떤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예컨대 자본의 일회성 욕망들이 만들어낸 갖가지 소음 사이를 누비는 오늘의 시인들 앞에는 대략 세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는 듯하다. 하나는 그 소음들 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뒹구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과 생명이라는 최후의 피안으로 잠행하는 길이다. 임선기는 아마도 제3의 길을 선택한 듯하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최고의 아름다움”(「기도」)이 되는 영성(靈性)의 장소와 “가냘픈 바람에도” “불안”(「꿈속의 나비」)한 자신의 현실 사이에서 분열을 앓는 대속의 길이다.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나아갔네” “벗을 기다렸으나/아무도 오지 않았네”(「詩」)라고 고백하는 동시에 “내 마음아/낮은 곳으로 가자//낮은 곳,/숨소리 들리는 곳”(「아침 눈을 보며」)이라고 노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삶은 단편적이다/나의 얼굴은/조각나 있다”(「꽃-말라르메」) 같은 시적 진술 또한 여기서 멀리 있지 않은데, 이 자기분열에 대한 인식의 깊이는 「공원」 같은 사생시(寫生詩)조차 이지적 균제력의 산물로 보이게 만든다.

요컨대 이 시집이 이룬 성취는 영원에 대한 구도자적 추구와 일회적인 삶 사이의 거리를 언어적으로 육화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그것은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전자가 예술가들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견자(見者)의 맥락이라면 후자는 속인의 맥락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둘 사이의 완강한 거리는 때로 “시인 비용이 찾던 그 눈”(「아침 숲」)이라든가 “엘뤼아르가 바라보던 물길”(「이곳에 살기 위하여」) 같은 예에서 보듯 작품을 설명 과잉으로 이끌 때가 있다. 그것은 시인의 언어가 아니라 교사의 언어다. 게다가 그 교사들이 서구정신의 전령사들로 편중된 것 또한 한번쯤은 고쳐 생각해볼 일인 듯하다. 그러나 십여년 시력으로 다져진 이 단단한 시집이 그만한 흠결 때문에 빛을 잃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문학은 자신의 낡은 서가를 당분간 밝혀줄 새 램프 하나를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