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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 작품론

 

실종

편혜영 소설집 『저녁의 구애』

 

 

허윤진 許允溍

문학평론가. 평론집 『5시 57분』이 있음. hdthoreau@hanmail.net

 

 

3810꽤 오래전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편혜영의 첫번째 창작집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에 수록되지 않았던 그녀의 등단작 「이슬털기」(2000)로. 그녀가 처음 온 곳에서 그녀가 지금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므로.

중심인물인 지은은 선을 본 지 한달 만에 결혼한 ‘낯선’ 남편을 뒤로 하고, 만삭이 다 된 몸으로 진도에 가서 씻김굿을 본다. 그 씻김굿은 자신의 첫사랑이자 자신이 처음 임신했던 아이의 아버지인 선배의 혼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슬털기는 씻김굿의 한 절차로, 망자의 혼이 마르고 깨끗해야 환생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해 있다. 한때 목숨보다 사랑했던 존재들(연인과 그의 아기)을 현실의 세계로부터 떠나보내기 위해, 그리하여 ‘새로운’ 남편과 그의 아이와 ‘새로운’ 공간인 아파트에 적응하기 위해, 지은은 제의를 치른다.

「이슬털기」에서 회사원인 지은의 남편은 쥐와 고양이가 들끓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 집착하고 있었고, 지은은 인물(남편)과 공간(아파트 단지) 모두에서 거리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역설적이게도 첫 소설에서 배경막에 머물렀던 이런 착실한 회사원과 그가 사는 아파트, 그리고 그 세계를 엄습하는 재앙의 분위기는 이후의 소설에서 편혜영적인 세계를 이루는 기본 골격이 되었다.

죽음이라는 절체절명의 사건 앞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모두 위로하는 씻김의 제의는 성공적이었는가? 안타깝게도 언어적 씻김굿은 처음부터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죽은 연인의 물건을 모두 태울 때, 자신과의 추억이 얽힌 인형을 태우지 말라고 여자가 중얼거리던 그 불길한 순간부터 말이다. 그녀의 첫 소설은 어떤 면에서 수장(水葬)되어버렸지만,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한 그 언어적 시체는 계속해서 수면 근처를 떠돌며 그녀의 이후 소설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실종된 첫 소설을 지배하던 상실감과 파토스는 『아오이가든』에서는 어느정도 유지되었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류학적 사건은 인간에게 그 자체로 극복할 수 없는 트라우마로 다가온다. 특히 아이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탄생의 기억은 나로 인해 엄마가 죽을 수도 있었다는 급박한 위기감을 준다. 「아오이가든」에서 아이는 누이-엄마의 가랑이 사이에서 번들번들하게 피가 범벅이 된 상태로 나오는 자신을 본다. 삶의 에너지가 극대화되어 죽음의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양가적인 상황이다.

여기에서 아이는 자신이 엄마를 죽였다는 자책감과 엄마가 죽음으로써 자신을 버렸다는 원한을 동시에 느낀다. 「저수지」에서 도시로 돈을 벌러 간 엄마, 「마술 피리」에서 자신만 호의호식하고 있는 엄마에 대한 아이들의 감정도 복합적이다. 아이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대상조차 자신을 영원히 책임져줄 수는 없다는 현실 앞에서 타인과 세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은 「마술 피리」의 아이-인물처럼 “미아”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편혜영은 한 사람의 소설가로서, 언어적 제의로 해결되지 않는 삶과 죽음의 문제 앞에 선 채 동요했다. 비록 현실은 추악한 냄새로 뒤덮인 곳이지만, 그녀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관계의 친밀성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아오이가든』에는 일인칭 인물-서술자를 내세우는 작품들이 수록되었다. 물론 일인칭의 인물-서술자 시점이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관계성을 지닌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일인칭 화법이 필연적으로 드러내보일 수밖에 없는 사적인 내밀함과 자신에 대한 성실성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서술자의 감정적 개입이 배제된 3인칭 서술은 『사육장 쪽으로』(문학동네 2007)를 거쳐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저녁의 구애』(문학과지성사 2011)에서 형식적 완성을 보여준다. 서술자들은 인물의 내면에 개입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의 감정에 관한 어휘는 소설집 전체를 통틀어 헤아려보아도 얼마 되지 않는다.

서술자의 무연(無緣)함은 인물을 가리키는 호칭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전반적인 경향을 보면 『아오이가든』에서 주된 호칭은 일반명사인 경우에도 관계와 관련이 있었다. ‘엄마’ ‘누이’ ‘아이’ 등 말이다. 『사육장 쪽으로』에 수록된 첫번째 작품 「소풍」에서 인물들의 호칭은 ‘남자’와 ‘여자’처럼 그보다 보편적이고 익명적인 것이 된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역시 인물들은 익명적인 인칭대명사(‘그’)나 성(‘박’)으로 불린다. 물론 인물의 이니셜을 사용하는 방식은 편혜영 소설에서 흔히 발견된다. 이니셜로서만 존재하는 인물은 국민문학의 경계와 상관없이 현대문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다만 이러한 익명화 경향은 『저녁의 구애』에 와서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 인물의 호칭은 이제 상대적으로 거리감이 있는 관계명(선배-후배, 상사-부하직원)이나 기능을 환기하는 직위명(공장장)으로까지 확대된다. 한 인간이 고유명사로서 존재할 수 없는 관료제적인 현실은 이렇게 호칭의 형식으로 명징하게 표현된다. 인간은 기능의 단위로 전락하여, 서로가 서로의 대체재가 된다. 수작 「토끼의 묘」에서 파견근무를 나온 직원들이 고유한 가치를 지니지 못한 채 회사의 체계에서 무한 유통되고 순환되는 대상들인 것처럼 말이다. ‘사무원이 일을 한다’는 것은 관료제에서 우리가 지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문제는 그 행위가 관료제를 유지하는 기능적인 의미만을 가지며, 세계에 영향을 주는 어떤 사건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저지른 실수와 결근조차 무시당하는 것이 현대소설의 소시민 전사들이 맞게 되는 최대의 비극이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실종이 그가 살아온 세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시대의 절망인 것이다.

이름으로 표상되는 개별성을 가진 인물이 실종되면 행위와 사건 역시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저녁의 구애』에서 인물들의 행위라고 부를 만한 것은 일상의 반복적 구조를 지탱하는 ‘습관’에 가까워 보인다. 인물이 실종되고 행위가 소거되었을 때 소설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소설의 시간적인 측면은 약화되면서 공간적인 측면이 부각될 것이다. 새로 이사를 가는 부부에게는 더없이 특별하고 고귀한 크림색 소파도 타인들에게는 그저 짐짝일 뿐이다. 심지어 인간은 세계의 장식을 위한 소도구로서의 가구보다도 못한 처지로 격하된다. 우리는 세계를 채우기 위한 오브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편혜영의 주인공은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평론가 이광호가 그녀의 세계를 “하드고어 원더랜드”(『아오이가든』 해설)로, 김형중이 “하드보일드 헬”(『저녁의 구애』 해설)로 부른 것은 장소에 대한 무의식을 간파한 명명법이라고 할 수 있다. 거추장스러운 관계와 의미 따위가 개입되지 않은 익명적인 장소로서의 ‘통조림 공장’은 『저녁의 구애』의 대표적인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이곳에서 인물들이 겪는 크고작은 일상사의 세부사항은 중요하지 않다. ‘박’이라는 성으로 불리던 인물이 실종된 공장장의 뒤를 이어 새로운 공장장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 장소를 지배하는 컨베이어 씨스템에 순종하기 때문이다. 불순종의 표시는 포장과 내용물이 일치하지 않는 통조림 깡통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장(자본)의 허락 없이 형식과 내용의 일대일 관계를 교란시키는 자에게는 실종의 형태로 언도되는 상징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공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세상의 중심인 공장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되는 일종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성 위주의 대량생산 양식은 『저녁의 구애』에 이르러 인물과 장소의 차원에 전사(轉寫)된다.

 

서사학자 루보미르 돌레첼의 역작 『헤테로코스미카: 허구와 소설 세계』에서 분류된 허구 서사의 모티프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바로 자연력(natural force)이다.1) 바람이 불고 배가 뒤집히는 등 자연력은 서사에서 사건을 발생시키는 동력이 되곤 한다. 그동안 편혜영의 세계에서 자연력은 상당한 영향을 발휘해왔다. 출몰하는 짐승의 떼, 창궐하는 ‘역병’ 등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하기 어려운 요인들이 소설의 사건을 밀어간다. 전염병이라는 단어뿐 아니라 ‘역병’이라는 다소 고전적인 단어가 사용됨으로써 자연력이란 유사 이래로 인간을 두렵게 한 장구한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자연력의 위세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제외하고는 『저녁의 구애』에서 퇴조한 것처럼 보인다. 대신 작가는 근대적 제도에 협력하는 인간 자신이 타인에 대한 치명적인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괴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두려운 자연 앞에서 죽음과 질병을 향해 억울함을 호소하던 시기는 마감된 것처럼 보인다.

『저녁의 구애』에서는 인간의 수동적인 죽음보다는 인간의 능동적인 살해가 중심이 되는 듯하다. 물론 평범한 소시민이 살해자가 되기까지에는 망설임의 전조가 있다. 「산책」의 사내가 가정의 고요한 평화를 침해하는 개에게 (아마도 독이 든) 먹이를 주고 개의 반응을 볼 때, 「통조림 공장」의 박씨가 전(前) 공장장의 흔적을 정리할 때, 인물들에게는 동요의 기미가 분명히 깃든다. 잔인한 세계에 몸서리쳤던 인간은 제 손에 묻은 피를 똑똑히 본다.

『아오이가든』에서 『사육장 쪽으로』, 『재와 빨강』(창비 2010)을 거치는 동안 작가가 보여준 ‘길들일 수 없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은 인물들이 개떼(「사육장 쪽으로」)나 쥐떼(『재와 빨강』)의 형상과 마주칠 때 극대화되었다. 자연을 길들이는 문명화과정은 마치 암의 발전단계처럼 1기・2기・3기를 거쳐 성숙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제 자연은 애완용 토끼(「토끼의 묘」)나 먹이 앞에서 명을 재촉하는 개(「산책」)처럼 온순하고 무력해 보인다. 허나 문명화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한 것은, 인간이 테크놀로지에 의거해 자연을 길들이는 만큼 역으로 인간도 테크놀로지에 의해 길들여진다는 점이다.

냄새와 혀로 육박해 들어오던 괴물은 실종되었다. 프랑꼬 모레띠는 서사양식과 사회구조의 상동성(相同性)을 탐구한 저작 『경이로 여겨진 징후들』에서, 『프랑켄슈타인』은 괴물과 우리가 같지 않다는 사실, 즉 종(種)의 차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불평등성을 환기한다고 논한 바 있다.2) 편혜영은 자본주의문명이 배제한 ‘천한 것들’의 귀환을 형상화해왔다. 온갖 괴물의 형상은 세계의 불평등성에 대한 시각적 고발이었던 셈이다. 이제 그녀는 우리가 모두 작은 괴물로서 ‘제도’라는 보이지 않는 괴물의 수하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괴물성은 타인에 대한 공감력을 상실한 상태로 나타난다. 윤리 감각을 상실할 때 우리의 존재는 강등(降等)된다. 역설적이게도 제도 안에서 살아남아 우위에 서려 할 때,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냉정한 우리는 괴물의 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중심인물인 복사실 사내가 출근길에 지하철역에서 마주친 누군가의 핏빛 죽음에 사람들은 모두 무관심하다. 개인의 개별적인 고통은 수치화되면서 인격적인 의미를 잃는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에게 유일무이한 것이며 추상화될 수 없는 것이지만, 장례식장(「저녁의 구애」)이라는 장소의 형식을 통해, 탐문과 수사(「동일한 점심」)라는 언어의 형식을 통해, ‘집계’되기에 이른다. 어쩌면 죽음이 자연력으로서의 권위를 잃는 이때야말로 서사로서의 소설이 죽음을 맞게 되는 순간이며 우리가 진심으로 애도해야 할 순간인지도 모른다.

편혜영은 「크림색 소파의 방」이나 「통조림 공장」의 결말 부분에서 인물들의 타살 가능성을 모호하게 처리한다.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는 완벽한 가해자도, 완벽한 피해자도 있을 수 없다. 그녀에게는 인간이 가하는 타살이란 자연사의 특정한 사례에 다름 아니다. 그녀가 소설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존재가 일시적으로 혹은 영원히 실종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언어로 “조등(弔燈)(62면)을 밝히는 것일 따름이다.

존재의 흔적만을 남기는 죽음. 이 거부할 수 없는 실종의 운명에, 앞으로 편혜영은 어떻게 맞설 것인가. 이력의 초기에서부터 ‘누군가가 실종되었다’는 인간 조건의 미스터리를 천착해온 그녀가 지목할 범인은 이제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그녀는 제도와, 제도에 자발적/비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개인에게 어떤 자백을 받아낼 것인가? 아니, 실종된 인물과 실종된 행위에 대해 그녀는 작가로서 어떤 수사기법을 펼쳐갈 것인가? 이 모든 난제 앞에서 추적자-작가로서의 그녀는 기존의 수사방식을 더이상 고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실종을 공표하고 실종의 배후로 자연과 제도를 동시에 지목했던 기존의 전략은 이 갑갑한 현실 속의 브리핑룸을 서성이는 공중(公衆)에게 충분히 전달되었다. 이제는 익명 속으로의 실종이 아닌 인격의 실종과 대면해야 할 순간이 온 것 같다. 자본주의 체제의 몰개성을 지적하는 그녀의 언어가 비판하는 대상의 속성을 닮아가서는 난감하니 말이다. 수사관은 어둠 속에 얼굴을 숨겨야 하는 존재이지만, 공중은 그녀의 형형한 눈빛과 인간적인 것에 치명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녀의 심장을 원한다. 현대문학과 연루된 모든 관계자들이 오래도록 해온 고민을 그녀의 몫으로 미뤄두는 것은, 어쩌면 잔인한 책임전가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냉정한 시대의 괴물들에겐, 적어도 폭발하는 자동차의 열기 같은 파토스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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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Lubomr Doležel, Heterocosmica: Fiction and Possible Worlds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8), 35면.

2)Franco Moretti, Signs Taken For Wonders: Essays in the Sociology of Literary Forms, Rev. ed. trans. Susan Fischer, David Forgacs and David Miller (London: Verso 1988), 86~8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