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문학초점

 

고통의 천형, 시인의 천행

김태형 시집 『코끼리 주파수』

 

 

서희원 徐熹源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역사의 폐허를 재현하는 실재의 시선」 「근대세계체제의 알레고리 혹은 가능성의 비극」 등이 있음. mazegaze@naver.com

 
 

3541김태형(金泰亨)은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해, 그 첫 문장을 적는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외로웠구나 그렇게 한마디 물어봐줬다면/물가에 앉아 있던 멧새 한 마리/나뭇가지에 어떤 떨리는 영혼을 올려놓고 갔을 것이다/첫 문장을 받았을 것이다”(「내가 살아온 것처럼 한 문장을 쓰다」). 여기에는 시작(詩作)의 과정에서 보편적이라고 인식되는 유심론적 탐구의 행위가, 가상의 세계에서 궁극적 실재를 찾아가는 사유자의 탐색이, 이질적 대상들을 관념의 평면이나 동일한 지평에 놓고 생각하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시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에는 유물론적 주고받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물들의 기원보다는 사물들의 우연성에 기인한, 알뛰쎄르가 “마주침이 있었고 서로간의 응고가 있었다”(루이 알튀세르 철학과 맑스주의, 서관백승욱 편역, 새길 1996, 40면)고 지칭한 우발적 사유의 발생이 담겨 있다.

유심론적 사유나 사물의 이질성을 무화하는 동일시에 대한 거부는 『코끼리 주파수』(창비 2011) 전체에서 개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적 발화를 가능하게 하는 김태형의 일관된 태도이다. 그는 ‘눈’으로 대표되는 로고스 중심주의를 의심하고, 그 대신 ‘귀’라는 유물론적 기관을 신뢰한다. 시인은 “귀가 밝아진다는 건 그래도 슬픈 일만은 아니었다”고 말하며, 오래전 다큐멘터리 자료에서 찾아본 소쩍새 한마리의 울음, 그 떨림의 장소를 생각한다. “그 울음이 배어나왔을 저녁 어둠은/아직 창밖의 나무옹이 속에 웅크려 있”고, “저물녘 누군가 앉아 있던 자리도 그러하였을 것”이기에 소쩍새의 울음은 존재의 시간 속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서만 들을 수 있는 우연적이며 고유한 것이다. 그렇기에 김태형은 “울창하고 맑은 밤의 창을 가진 이가 부러운 게 아니었다/아직 내 마른 묵필은 그 어둠을 가질 수 없었다”고 쓴다(「소쩍새는 어디서 우는가」).

여기에는 스핑크스를 물리친 것처럼 테베의 재앙을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며 이성의 오만함으로 자연과 사람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던 오이디푸스(오이디푸스)가 시력을 상실한 이후 자각한 육체의 울림(목소리)에 대한 사려 깊은 신뢰, ‘소리로 보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고통을 경험한 자의 윤리학(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이 담겨 있다. 이는 시인으로서는 천행(天幸)이지만, 인간으로서는 천형(天刑)과 같다. 그는 눈을 버리고 울음에 공명하는 것을 선택했기에 그 장소가 인간에게 주는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할 수 있지만, 그곳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어느 눈먼 취한 사내가 가파른 골짜기에서 힘겹게 걸어나올 때/이 메마른 모더니티로부터/영영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샘」). 김태형이 “메마른 모더니티”라고 지칭하는 이 실재의 “사막”은 사물의 이질성을 상품의 동질성으로 치환하는 자본주의이다. 여기는 “어제나 그제도 내일 모레도 언제나 한결같”은, 인간도 “얼굴만 조금씩 다를 뿐 결국 동일한 형식의 일련번호가 찍혀 있”는 상품에 불과한 “슈퍼싸이징 팩토리”이며 “컨베이어 상점”이다(「엠 팩토리」). “이 세상은 너희들을 사라지게 할”(유령들) 것이기에, 시인은 “얼굴을 지워버린 짐승”(「라 뽀데로싸 1992~ 」)을 쫓으며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 그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러진 손가락에 글러브를 끼고서라도 링 위”로 오르는 권투선수처럼 “보이지 않는 상대”의 폭력을 육체의 상처와 고통의 발화로 실재화하는 것뿐이다(「권투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를 통해 사유하자면, 김태형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일종의 공명(共鳴)이다. 이는 물리학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모든 물체에는 자기만의 고유진동수가 있다. 공명은 어떤 물체가 그것의 고유진동수와 같은 진동수(주파수)를 가진 외부적 힘을 주기적으로 받아 진폭이 뚜렷하게 증가하는 현상을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귀란 특정한 가청주파수만 감각할 수 있는 퇴화된 기관이다. 아무리 귀가 밝아져도 인간이 세계의 울음에 모두 공명할 수는 없다. 그러하기에 김태형은 “몸으로 울리는 누군가의 떨림을/내 몸으로서만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코끼리 주파수」). 시인이 단순히 듣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온 육체로 그 떨림을 받아 공명할 때 그 진동은 강해지며 진폭도 커진다. 비록 시인의 몸은 “제 몸을 사각사각 먹어치우는 눈먼 애벌레처럼/진흙 먹은 울음소리로 자기를 뚫고 가는 지렁이처럼”(「내가 살아온 것처럼 한 문장을 쓰다」) 고통에 공명하며 피투성이로 사멸하겠지만, 김태형은 이 고통의 천형을 시인의 천행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렇기에 그는 “간혹 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는 이름에 사로잡힌 이들이 있다 사라진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이었던가//나는 그런 것들에 바쳐졌다”(「늑대가 뒤를 돌아본다」)고, 자신은 “시인이 될 운명”(「바람의 작명가」)이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서희원

저자의 다른 계간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