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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우울의 감각과 비평의 표정
김영찬 평론집 『비평의 우울』
정영훈 鄭英勳
문학평론가, 경상대 국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윤리의 표정」 「윤리적 주체의 자리」 「부재의 흔적들」 등이 있음. yhoon2@dreamwiz.com
‘비평의 우울’이라고 했다. 2000년대 소설에 누구보다 깊은 신뢰를 보내며 그 속에서 풍성한 의미들을 발견했던 김영찬(金永贊)이 돌연 우울이라니. 여기에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일까. 장편소설의 양적 증가가 한가지 이유일 수 있겠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소설의 무게중심이 단편에서 장편으로 옮아가고”(34~35면)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이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불편하다. 장편의 증가가 작가들의 내적인 요구보다 시장의 요청에 따른 결과라는 점도 문제지만, 그게 핵심은 아니다. 그가 보기에 2000년대 소설이 활기를 띨 수 있었던 것은 ‘근대 이후’로 접어든 우리 현실을 ‘근대문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를테면 ‘탈내면의 상상력’으로 돌파해보려 했던 시도들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근대문학의 적자라 할 수 있는 장편을 지금 이곳으로 불러낸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일뿐더러 2000년대 소설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힘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최근에 나온 장편들 가운데 두드러진 성과가 없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니 이를 바라보는 그의 심사가 우울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니다. 그가 우울을 이야기하는 보다 속깊은 이유가 있다. 소설은 본래부터 “잃어버린 의미를 찾아헤매는, 하나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의식의 모험”(6면)이다. 요컨대 우울은 소설에 본질적으로 내재해 있는 자질이다. 그는 소설의 우울을 그들과 더불어, 혹은 그들을 대신하여 앓는다. 물론 비평이 소설과 더불어 앓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다. 가령 ‘문학의 죽음’이니 ‘근대문학의 종언’이니 하는 주장들이 혹 사실이라 하더라도 비평은 장례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저 혼자 넋놓고 아파하거나 슬퍼해서는 안된다. 개중에는 “대상의 죽음을 부인하고 그 살아 있음의 증거를 끊임없이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는 이들도 있거니와, 김영찬은 “죽음을 애도하고 죽음 이후 계속되어야 할 새로운 삶의 모습을 모색”(33면)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를 현실주의자라 부를 수 있는 까닭이다.
그의 독특한 글쓰기 버릇도 현실주의자로서의 이런 면모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이번 비평집을 읽으면서 새삼 확인하게 되는 바이지만, 김영찬은 늘 손쉬운 독법을 피하고 둘러가는 길을 택한다. 이를테면 그는 2000년대 한국소설의 특이점을 드러내기 위해 “‘내면성’의 종언”(20면)이라는 특징을 들고 내면성이 무엇인가 물은 다음, 길을 우회하여 한국문학의 정신적 동력이었던 ‘가능성’이라는 범주에 대해 살피고, “또다시 문제를 에둘러”(23면) “한국근대문학의 주체성의 심층에 자리를 틀고 있는 규제적 정념”인 “원한”(25면)에 대해 내쳐 살핀 다음 애초의 물음으로 돌아온다. 2000년대 한국사회가 처한 현실의 유례없음과 2000년대 한국소설이 안겨주는 난데없음을 동시에 해명하려 하는 한 이런 우회는 처음부터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단순한 독법을 자기식 독법과 나란히 놓는 것도 김영찬의 비평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수사적 특징이다. 예컨대 김영찬에 따르면 비애와 우울로 감싸인 정지아와 윤대녕의 소설을 “수동적 정념의 세계”(76면)로 비판하거나, 자해를 일삼고 타인에 대한 공격성을 표출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강영숙의 소설을 두고 “실연의 고통을 앓는 우울의 보고서”(225면)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기는 하지만 충분한 독법은 아니다. 김영찬은 늘 이렇게 묻는다. “그렇게 지적하고 마는 건 너무 쉽지 않은가?”(99면) 그러고는 “더 중요한 진실”(225면), “오히려 주목해야 하는 것”(76면)을 덧대어 붙인다. 이를테면 정지아와 윤대녕의 소설은 상실의 시대라 할 만한 이 시대의 “비루한 인간사와 인간의 실존에 대한 한층 속깊은 탐구”(76면)이고 강영숙 소설의 인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겪는 “삭막한 불모의 우울을 저 자신의 몸으로 겹쳐 앓는”(227면) 것이라고 평가하는 식으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작가 자신의 소설쓰기의 태도와 절차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101면), “자기 자신의 문학적 언표에 대한 자의식”(193면) 같은 표현들이다. 김영찬은 우리에게 주어진 다종다기한 소설 형식들이 작가의 자의식적 산물임을 거듭 확인한다. 이런 인식은 다른 무엇보다 김영찬이 작품들을 애착을 갖고 바라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어떤 새로운 문학적 시도들은 독자들이 그 의미를 발견하기도 전에 폐기되고 잊혀진다. 이들의 싸움은 다른 무엇보다 시간과의 싸움이 되기가 쉽다. 작품에 대한 애착만이 낯선 형식들의 의미를 발견하기까지 읽게 만들 수 있다.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애정과 신뢰다. 이미 그런 마음을 품었을진대 조금쯤 길을 둘러가는 것이 그에게는 전혀 귀찮은 일이 아닐 것이다.
체력이 약해지면 질러가려는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된다. 그의 몸이 내내 튼튼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