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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인간의 오만함

대지진과 원전사고를 겪으며

 

 

사까모또 요시까즈 坂本義和

토오꾜오대 명예교수. 세계적인 국제정치학자이자 평화이론가로, 1970년대부터 일본의 전쟁책임과 과거사 청산, 미일안보조약 개정, 대북관계 개선 등에 대해 발언과 연구를 해왔다. 저서로 『地球時代の國際政治』 『地球時代に生きる日本』 『相對化の時代』 등이 있다.

  

 

삼중의 충격

311일, 첫 흔들림이 왔을 때 나는 어쩐지 평소의 지진과는 다른 이상함을 느껴 집에서 뛰어나왔다. 땅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고, 서 있을 수 없었다. 정원으로 내려오는 계단의 철제기둥을 붙잡고 몸을 지탱하고 있자니, 뜰에 있는 나무가 잔가지 끝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여태껏 경험해본 적 없는 지진이었다. 토오꾜오에서조차 그러했다.

순간 머리를 스쳐간 것은, 성난 자연 앞에서 내가 이렇게나 작고 무력한 존재였나 하는 생각이었다. 뒤이어 ‘환경보호’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것은 얼마나 인간중심의 관념인가. 환경을 인간이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 인류의 생존을 보호해준 것이다. “지구에게 상냥히”라는 슬로건1)은 인간의 무의식적인 교만이며, 인간에 대해 생사여탈의 힘을 가진 ‘지구 상냥하게’ 대해줄 때만 인류는 살아갈 수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다행히 토오꾜오는 정전을 면했기에, 텔레비전을 보니 이내 무시무시한 높이와 기세로 몰아치는 쓰나미의 영상이 나타났다. 인간의 오만을 철저하게 때려눕히는 듯한 노도(怒濤)였다. 건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뜨리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사람의 형체를 일순 삼켜버렸다. 몇백 몇천의 목숨이 바다로 떠내려간 것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간발의 차이로 살아남았을까. 꿈틀거리며 기어오르는 거대한 뱀의 무리처럼, 검은 물결이 속속 마을을 삼켜갔다.

가진 것 없이 피난소의 추위를 견디어내는 사람들의 영상을 보니, 패전 후 겨울철 난방이 되지 않는 건물에서 내핍생활을 하며 체험한 추위가 뼛속부터 스며나왔다. 아무쪼록 지진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마음은 도저히 쉴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몸은 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와 때를 같이해 원전이 붕괴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화재, 폭발, 대량의 증기와 연기의 상승. 하나같이 체르노빌을 곧 떠올리게 하는 불길한 사태다. 가장 놀랐던 것은, 텔레비전에 속속 등장한 ‘전문가’도 토오꾜오전력(東京電力)도 “내부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다” “계기가 고장났다”라고만 말한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몇번이나 ‘사고’를 일으켰으면서도, ‘전문가’는 사고방지를 위해 무엇을 해왔던 걸까.

 

‘상정(想定)’이라는 허구

원자력발전소처럼 극도로 복잡한 위험을 안고 있는 장치의 경우, 전체적인 작동을 세부까지 장악하고 세밀한 이상을 즉시 탐지해 정상화하는 일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렇다면 모든 부품이나 구조에 대해 최대한의 안전을 추구하고, 사고방지를 위해 만반의 조치를 미리 취해두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한 안전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채 원전을 작동시킨다면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데도, ‘전문가’는 그것을 ‘상정외(想定外, 미리 가정하거나 고려하지 못한 상황이나 조건)’라고 부르고는 끝이다.

그러나 ‘상정외’ 같은 표현을 경솔하게 사용하지 않고, ‘상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전문가’라고 불리는 학자와 기업의 책임이다. 일찍이 냉전시대 초강경론자인 허먼 칸2)은 핵전쟁에 대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할’(thinking about the unthinkable) 것을 주장하고, 핵전쟁이 일어났을 때 생겨날 모든 일을 철저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물론 핵전쟁은 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이지만, 무릇 과학자로서 미래를 생각한다 함은 그러한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전개발정책 추진책임자는 후꾸시마 사고에 관해 어디까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본’ 것일까. 수많은 인명에 책임을 지고 있는 입장에서 ‘상정외’로 끝내버릴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이번 지진과 쓰나미는 그들이 ‘상정’한 것과 동질적인 천재(天災)였으며 단지 그 규모가 압도적으로 컸던 것이지 운석의 낙하나 충돌 같은 이질적인 재해는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상정’에는 스스로의 재해 예측을 과신한 오만함이 깃들어 있었던 게 아닌가. 원전뿐 아니라 설계 및 건설이 훨씬 용이한 두곳의 화력발전소까지 지진으로 무너졌으니, 지진국 일본에서 대체 어떤 ‘사고’를 ‘상정’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원전은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 등과 달리 극도로 인공적인 발전장치이며, 근본적으로 자연을 거스르는 오만한 발상의 산물이다. 자연의 보복은 모두 ‘상정내(想定內)’여야 한다. 게다가 방사성물질의 낙하가 예측 이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음식물을 오염시키는 상황은, 1954년 미국의 비키니섬 핵실험 때 예고된 위험해역 밖에 있었음에도 피폭된 어선과 그 선원의 죽음(제5후꾸류우마루福龍丸 사건)3)을 경험한 일본에서는 당연히 ‘상정내’여야 하는 것이다.

 

원전의 이익구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전 추진자가 개발을 강행한 것은, 원전에 따르는 위험성의 인식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원전을 좀더 안전하게 건설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며, 그 결과 여론의 반대가 거세져 원전의 건설이 불가능해지고 원전 개발로 이윤을 얻는 기업이 존립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위험과 비용을 견주어본 후 비용 계산을 우선시함으로써 위험의 철저한 감소를 회피한 것이다. 정부는 기업이윤의 규제에 태만했고 기업은 위험보다 이윤을 중시해, 여기서 양자의 유착이라는 구조가 생겨났다. 그리고 비용보다 위험성 쪽이 작다는 인상을 여론과 미디어에 침투시키기 위해 ‘원전 안전신화’를 꾸며내고 여론을 유도해왔다.

그 결과, ‘안전신화’가 공공연히 널리 퍼졌을 뿐 아니라 원전사고를 은폐하는 은밀한 사기행위가 누적되어왔다. 사고 발생을 숨기거나 기록을 조작한 사례는 알려진 것만 해도 놀랄 만큼 많다. 허위 기재가 원자로 13기에서 29건, 전국 원전에서의 고장 은폐 등은 97건에 달한다는 정보가 있다. 그밖에도 크고작은 사고가 있었으리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은폐행위가 미디어에 의해 묵살되거나 축소 보도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전력 관련 기업이 신문이나 텔레비전의 광고주로서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이들 기업은 일부 정치가에게 중요한 자금원이고, 관료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낙하산 자리’다. 또한 원전에 반대하거나 비판적인 학자는 연구비를 따내기 어렵고 대학 내에서의 승진도 기대할 수 없다.

이러한 정(政)・관(官)・산(産)・학(學) 복합체의 존재는, 이번 원전재해 관련 정보 축소와 공표 지체, 그리고 정보공개 문제에 대한 미디어의 애매한 ‘해설’과 미적지근한 비판을 통해 드러나 많은 시민들과 국제사회의 불신감을 키우고 있다. 예를 들어, 사고등급을 처음에는 스리마일섬 사고수준인 5등급이라고 선언했다가 한달 후에는 갑자기 체르노빌 수준인 7등급이라고 공표하면서 “그러나 방사성물질의 방출량은 체르노빌의 10분의 1이다”라고 해명하는 등 누가 보아도 정보공개가 작위적이었다. 토오꾜오전력은 417일 ‘원전 수습’ 로드맵을 발표했지만, 이는 희망적 예측에 불과하다는 시민의 불신감이 불식되진 않았다.

 

문제시되는 ‘선진국’ 문명

나는 일찍이 1980년대에 프랑스 대통령 미떼랑(F. Mitterand)이 ‘환경보호’라는 이상한 근거로 원전 추진을 주장했을 때, 그 불합리함을 지적하고 그의 정치적 책임에 대해 문제제기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 이 흉기라고까지 할 원전의 ‘안전신화’를 내세우며 계속 두둔해온 쪽이 자민당 정권 및 그와 유착한 토목 이권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참사에 대해 자민당에서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발언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일본을 정치적 책임의식이 결여된 국가로 만든 최대의 책임은, 누구보다도 반세기에 걸쳐 정권을 차지해온 자민당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자민당이나 민주당 내의 현정권 반대파는 정부 대응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불문에 붙이고 있다. 대체 그 정치가들은 이 대재해에 대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위기를 앞에 두고 존재감이 없다. 살풍경이다.

하지만 이번 원전 붕괴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린 딜’(Green Deal)을 기치로 원전 추진을 주창해온 오바마 정권이나 유럽의 많은 나라들처럼,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기존 방침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나라는 그나마 아직 나은 편이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인도나 중국 또는 중동 산유국들은 이 사건에 관계없이 원전 증설에 매진할 방침을 취하고 있다. 왜 그럴까.

인도나 중국은 ‘우리나라에는 아직 전력을 공급받을 수 없는 지역이나 계층이 많으며, 원전 증설은 당연한 권리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선진국 생활수준에 도달할 권리가 자국민에게 있다는 견해다. 그것은 일견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선진국’ 소비사회의 자만을 모델로 삼아 평등한 소비수준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선진국’으로 되돌아온다. ‘선진국’을 모델로 삼은 신흥국과 도상국이 앞다투어 원전을 만들기 전에 기선을 잡았던 쪽은 누구인가. ‘유일한 피폭국’ 일본도 다름아닌 ‘원전 선진국’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후발국이 이러한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데 편승해 원전과 그 기술의 수출에 따른 이익을 얻고자 힘을 쏟아왔다.

21세기의 인류는 지금까지의 ‘선진국 모델’을 모두가 추구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지구 전체의 소비사회화를 지향하며 원자력에너지 의존도를 높여 자멸의 위험을 키울 것인가.

이번 대재해에 즈음해 한국을 필두로 100여개국이 지원 의사를 표명했는데, 그것은 이 문제가 일본만의 사안을 넘어 지구적 차원의 의제라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곧 인류문명의 존재방식에 질문을 던진 사건인 것이다.

 

탈원전과 시민의 역할

이번 원전 재해로 인해 일본국민의 의식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력공급 격감에 대응해 자발적 절전이 확산되었고, 현란한 간판이나 네온싸인이 토오꾜오의 밤거리에서 사라졌다. 많은 지하철역에서는 고령자나 유모차용 엘리베이터를 제외하고 에스컬레이터 운행을 중지했다. 상점에서, 또 가정에서도 절전 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전력소비를 줄여도 생활의 질이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다. 아무 소용 없고 무의미한 것에 자원을 낭비하고 있었음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비사회의 공허함에 대한 반성이다.

지금까지 반(反)원전운동은 원전건설 후보지에서는 강력한 ‘주민운동’으로 힘을 발휘했지만 ‘주민운동’이라는 표현이 그렇듯 그밖의 지역에서는 크게 성장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건설 후보지가 외진 해안지역인데다 정부나 전력회사가 거액의 돈을 뿌려 ‘주민운동’을 분열시키고 가라앉힌 결과, 타 지역 주민 상당수는 오히려 그 원자력발전의 수익자가 되기 쉬웠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이번 재해에서는 전국적인 관심이 높아져 자원봉사자도 다수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지진뿐 아니라 쓰나미에 의해 가옥이 철저하게 붕괴되고 유실되어 소멸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재건은 보통사람의 능력을 뛰어넘으며, 거기에 문자 그대로 연일 강한 ‘여진(餘震)’ 때문에 위험이 계속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높은 방사능 수치 때문에 출입할 수 없는 지역도 있다. 그러한 제약 가운데서도 시민그룹은 일단 이재민의 생활의료지원이나 배상취득지원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과 병행해 토오꾜오전력이나 관료기구의 정보 은닉을 규탄하는 운동이나 원전폐지운동도 젊은층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독일의 탈원전운동은 현재 전력수요의 15퍼센트를 차지하는 대체에너지원 비중을 2050년에는 100퍼센트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듯한데, 일본에서도 탈원전이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려면 명확한 목표와 전략을 세우고 그 실현에 온힘을 쏟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인간을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삼는 소비사회의 기만 및 오만과 결별하고, 목적으로서의 인간의 주체성과 겸허함에 입각한, 시민의 연대사회를 향한 길을 착실하게 탐구하려는 움직임이다.

인간의 오만 위에 세워진 오늘날의 삶의 방식, 생활양식 자체를 변혁해 국가간 격차와 국가내 격차가 없는, 공정하고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사회란 무엇일까. 그 ‘모델’을 창출할 길을 찾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의 천재와 인재(人災)는, 그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다.

번역 | 정신연세대 사학과 석사과정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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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원제는 「人間のおごり」이며, 『世界』 2011년 5월호에 기고된 글을 본지의 요청에 따라 필자가 가필한 것이다. ⓒ 坂本義和 2011 / 한국어판 ⓒ 창비 2011.

1) 일본에서 에너지·자원 절약 및 환경친화적 생활 권장을 위해 널리 쓰이는 표어. 친환경 상품에 부착되는 ‘에코 마크’의 문구로도 쓰인다—옮긴이.

2) Herman Kahn, 1922~83. 미국의 군사이론가로, 핵전쟁시 발생 가능한 상황을 분석한 군사전략론으로 널리 알려졌다. 만년에는 미래학 연구에 주력하면서,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성장에도 주목했다—옮긴이.

3) 당시 제5후꾸류우마루는 미국이 설정한 항해통제수역 밖인 핵실험장 동쪽 170여킬로미터 해상에 있었으나, 수소폭탄의 낙진이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선원 23명 전원이 피폭됐다. 그 가운데 통신장 쿠보야마 아이끼찌(久保山愛吉)는 6개월 후 “원수폭의 희생자는 내가 마지막이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내에서 반핵운동이 크게 고양되었다—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