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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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 사회인문학 연속기획 ②

 

과학기술과 인문: 분리와 연결

 

 

김영식 金永植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저서로 『주희의 자연철학』 『정약용 사상 속의 과학기술』 『과학, 인문학 그리고 대학』 『과학, 역사, 그리고 과학사』 등이 있음. kysik6637@yahoo.co.kr

 

 

1

 

오늘날 과학기술과 인문학은 흔히 서로 상반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같은 인식은 ‘문과’와 ‘이과’의 엄격한 구분이 존재하고 그 사이를 단단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심해서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분리, 대립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1) 그러나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본질상, 반드시 두가지가 그렇게 상반되거나 대립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 역사상으로도 두가지가 그같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과학기술과 인문학 사이의 이러한 엄격한 구분과 분리 상태는 16, 17세기 서양의 과학혁명 이후 근대과학의 전문화 및 실용화 과정에서 생겨나고 그후 점차 심화되어 굳어진 것이다. 그 이전에는 서양이나 동양 양쪽 모두에서 그같은 분리가 없었다.

실제로 역사상 많은 위대한 학자들이 인간의 지식 모든 분야에 관심을 지녔다. 과거의 위대한 학자, 사상가들이 철학, 역사, 신학, 자연과학 등 모든 분야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깊은 조예를 지닌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예를 들어 뉴턴과 보일 등 과학자로 알려진 사람들이 신학과 철학에 깊은 관심을 지녔으며, 데까르뜨, 라이프니츠, 볼떼르 등 철학자, 문인들이 과학에 깊이 관심을 가졌다. 동양에서도 주희나 이황, 이이 같은 유학자가 천문역법과 같은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다. 사실 이는 인간과 세계의 여러 문제에 폭넓은 관심을 가진 진지한 학자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명색이 학자이자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인간의 지식 대상 중 한 부분인 자연세계를 자신의 관심에서 제외하겠다라는 것은 지극히 이상한 태도이겠기 때문이다. 다만 인문학과 과학기술이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오늘날 너무나 널리 퍼져 있어 그같은 이상한 태도가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일 따름이다.

물론 오늘날 과학기술이 고도로 전문화되고 이해하기 어렵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 어려움은 주로 과학기술의 지식—개념, 내용—의 전문성에 기인하는데, 특히 과학이 수학적으로 전문화되고 과학의 용어가 전문화된 것이 일반인들이 과학기술을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빚어냈다. 그러나 이는 과학기술 분야에만 국한된 상황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과학기술 이외의 다른 많은 학문 분야들이나 예술 분야들도 고도로 전문화되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에 어렵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철학, 경제학이나 문학비평, 시(詩), 추상미술 등이 모두 일반인들의 수준에서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과학기술이 문화의 다른 영역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편견과 선입견을 제거한다면 과학기술의 어려움은 이같은 분야들의 전문화된 어려움과 크게 차이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분야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유독 과학기술 분야들만 일반 지식인들의 관심에서 제외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 중에는 어느 한 분야에만 탐닉하고 다른 분야들에는 무관심한 사람, 또는 어느 한 분야에만 자질을 지니고 다른 분야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이한 사람의 예일 뿐, 많은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여러가지 분야에 대한 적성들이 함께 존재한다. 위에 든 여러 학자들이 여러 영역에서 높은 수준의 지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이를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되겠다.

그렇다면 오늘날처럼 인문학에 속하는 모든 사람이—나아가서는 이른바 ‘문과’에 속하는 모든 사람이—과학기술에 철저히 무지, 무관심하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지극히 이상한 상황이다. 이 글에서는 이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 배경으로 동서양의 과거 상황을 살펴본 후 이에 대처해야 할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2

 

전통시대 동양과 서양 양쪽 모두에서 자연세계와 과학적 지식에 대한 탐구가 더 넓고 깊은 인문적 추구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었다. 서양의 학문체계 속에서 과학적 지식은 빼놓을 수 없는 일부였다. 고대에서부터 르네쌍스 인문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학자들은 자연세계나 과학을 자신들의 지적 관심에서 배제하지 않았다. 동양에서도 텍스트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에서 과학기술이 제외된 적은 없었다. 동양의 유학자들은 경전이나 정사(正史)들에서 자연세계와 과학지식에 대해 다루는 구절들을 피하지 않고 자세히 공부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천리(天理)’의 추구를 통해 성인(聖人)에 이르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동양 전통에서 문과-이과 구분 같은 것이 없었다는 점은 ‘문(文)’과 ‘리(理)’라는 두 개념이 중국 전통문화에서 지녔던 의미를 통해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두 개념은 양쪽 다 오랜 역사를 통한 진화의 과정을 거쳤고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는 개념들이지만, 대체로 보아 ‘문’은 문화, 전통 같은 것들을 가리키는 데 반해 ‘리’는 근본 원리나 원칙 같은 것을 지칭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리’는 ‘문’보다는 더 분석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으로 생각되고, ‘문’이 대체로 정신, 가치, 사회, 문화 등 인간세계의 것들을 주된 대상으로 한 데 반해 ‘리’는 ‘천(天)’, ‘지(地)’, ‘만물(萬物)’을 포함한 자연세계까지도 망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개념의 차이가 오늘날의 문과-이과 구분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이 구분과 얼마간은 통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통 중국에서 ‘문’과 ‘리’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은 아니었고 근본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포함할 수 있는 개념들이었다. 물론 송대에 ‘리’라는 개념이 신유학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주희는 소식(蘇軾) 같은 사람이 ‘문’에 치중함으로써 제대로 ‘리’를 추구하지 못했다 하여 비판한 바 있다. 주희의 머릿속에는 ‘문’과 ‘리’의 대립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고, 이같은 ‘문’에 대한 비판은 주희의 영향이 매우 컸던 조선시대 성리학에서도 퍽 널리 퍼진 경향이었다. 그러나 ‘문’에 대한 주희의 비판은 전통, 멋, 아름다움 등 ‘문’의 가치에 지나치게 경도됨으로써 도덕적 삶의 궁극적 원리인 ‘리’를 게을리한 데 대한 것이었을 뿐, 인간세계와 자연세계의 구분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사실 ‘문’ ‘리’ 양쪽 모두가 인간세계와 자연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었고, 특히 ‘리’에 대한 추구는 많은 경우 자연세계보다는 주로 인간과 사회의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결국 동양의 전통에서 ‘문’과 ‘리’라는 개념들은 서로 대립되는 것도 아니었고 그것들을 굳이 구분한다고 해도 그 구분은 자연세계에 대해 다루는 분야들을 한쪽에 놓고 그 외의 모든 분야들을 다른쪽에 놓아 서로 구분하는 오늘날의 문과-이과 구분과는 전혀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

서양의 전통 속에서도 문과-이과 구분 비슷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만큼 그 정도가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서양에서 ‘문과’와 ‘이과’에 해당되는 말들이 있다면 아마도 ‘인문학’(humanities)—또는 ‘인문주의’(humanism)—과 ‘과학’(science)—또는 ‘과학기술’—일 것이다. 이같은 분리는 서양에서 과학혁명기에 시작되었고 그후 과학이 점차 전문화되면서 과학은 일반 지식인들로부터 유리되었던 것이다. 로크(J. Locke)가 호이겐스(C. Huygens)에게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뉴턴의 『프린키피아』의 수학적 내용이 제대로인지 물었던 일은 과학지식이 일반 지식인들로부터 유리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직 그같은 유리상태가 완전히 고착되지는 않았기에 로크가 그같은 관심을 보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 18세기를 통해 전문화되어가는 과학지식에 대한 일반 지식인들의 관심은 지속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서 이같은 유리상태가 심해지고 차츰 고착화되어 갔다. 그리고 그같은 유리상태의 고착과 함께 과학과 인문학 양쪽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상태 비슷한 것이 생겨났다. 당시 새로 부상하는 과학기술이 지적인 우위와 실용적 가치를 내세우는 데 반해 인문학 또는 인문주의가 고전과 교양 위주 교육의 도덕적 우위를 선언한 것은 그같은 예였다. 이는 결국 과학기술에 대한 전통적 인문학자들의 우월감과 반감이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인문학자들에게서는 이와는 상반되는 태도도 찾아볼 수 있었다. 전문 과학지식에 대한 과학자들의 전문성을 인문학자들이 존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존중은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지식인들이 전문 과학지식을 전문 과학기술자들에게만 맡기고 자신들의 관심대상으로부터 제외한 채 무시해버리는 효과도 빚어냈다.

이렇게 보면 양쪽으로의 구분과 대립, 그리고 한쪽이 상대쪽에 대해 느끼는 우월감, 반감, 때로는 열등감 같은 것들은 이때쯤부터는 서양의 전통에도 있었고 이것이 어떤 면에서 문과-이과 구분과 비슷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구분 역시 문과-이과 구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과학기술과 대비된 것이 우리의 ‘문과’가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좁은 범주의 ‘인문학’이었다는 것이다. 인문학이 대항했던 것은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실용성・전문성을 중요시하는 당시 문화와 교육의 새로운 조류 전체였고, 굳이 양쪽으로 나누자고 들면 우리가 문과에 소속시키는 대부분의 사회과학 분야들이나 직업학문 분야들도 당시로서는 인문학의 반대쪽에 속했을 것이다. 실제로 고전언어 위주의 인문학 교양교육에 대항해서 이 시기에 주창된 새로운 교육은 실용적 과학기술과 아울러 현대언어들의 교육을 강조하기도 했다.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차이 및 대립 역시 교육의 목적과 그 강조점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었을 뿐 학문 전체를 양쪽으로 나누는 문과-이과의 구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이었던 것이다. 또한 실제 일반 지식인들에게서 과학기술의 유리상태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처럼 심하게 나타났던 것도 아니었다. 과학기술의 유리상태가 심했던 영국의 경우에도 케임브리지대학의 교과과정에서는 수학이 큰 중요성을 점하고 있었으며, 대 정치가나 문인들이 과학실험과 연구에 종사한 사례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결국 동서양 양쪽의 전통 모두에서 문과-이과 구분과 비슷해 보이는 구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쪽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보는 것 같은 경직된 성격의 구분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3

 

동서양 전통사회에서 과학적 지식이 처했던 이같은 상황, 즉 과학적 주제들이 비록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지만 학문체계의 당연한 일부로서 포함되어 있었던 상황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와 문화를 지배하는 과학기술이 야기한 문제들에 직면한 오늘날 인문학의 과제는 과학기술을 반대하고 극복하고 회피하고 격리하거나 과학기술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포용하고 이해하고 사용하고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이 인문적 주제들로부터 격리된 이같은 상황이 자연과학이 본질적으로 그래야만 할 상황이 아니라 서양 근대과학의 발전과정에서 빚어진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었다는 것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역사상 대부분을 통해 그러한 분리상태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렇다면 그렇게 분리되지 않고 함께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당연한 상황인 것이다.

게다가 현대의 사회, 문화에서 과학이 엄청난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오늘날 과학은 모든 영역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고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학은 특히 기술을 통해서 그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당초 자연세계에 대한 지적 추구의 중요성 때문에 지식인의 관심대상에 포함되어 있던 과학이, 이제는 기술을 통해 현대 지식인의 생활의 필수적 부분, 관심의 필수적 부분이 되었다. 그런데도, 자신들을 둘러싼 세상은 온통 과학기술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데도, 오늘날 많은 인문학자들이 현대사회, 현대문화의 가장 특징적인 과학기술은 제외시키고 무시하고 있음은 지극히 안타까운 일이다.

한편 인문학 분야들 자체도 과학분야들처럼 전문화되어가고 있고 이미 전문화되어 있다. 처음 자연과학 분야들이, 그리고 이어서 사회과학 분야들이 그랬듯이 이제 인문학 분야들도 전문지식의 분야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인문학 연구자들이 분야별 전문가집단을 형성하면서 그 속에서 전문적인 연구, 토론, 경쟁에 몰두하고 있다. 흔히 군자불기(君子不器)라고 하여 인문학은 ‘기(器)’를 다루는 과학기술 분야들과는 달리 ‘도(道)’를 다룬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면에서는 인문학 분야들도 과학기술 분야들과 같이 ‘기’가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문학이 이런 형편에 있는데도 과학기술이 인간을 황폐화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인문학자들이 많다. 오히려 이같은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을 황폐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학기술과의 연결을 통해, 그렇게 황폐화되어 가고 있는 인문학을 구제해서 다시 ‘도’의 수준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과학기술과 관련해서 인문학이 수행해온 기능 한가지는 과학기술이 가져온 폐해를 지적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그동안 인문학자들이 과학기술과 관련해서 해온 일은 주로 여기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과학기술의 발전이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에너지 고갈을 야기했고 생명의 존엄성에 도전했으며 국가간・계층간 불평 등과 인간의 기술에의 종속 등을 빚은 점에 대해 많은 인문학자들이 지적하고 비판하고 분석, 해석해왔다.

물론 과학기술의 발전이 야기한 그같은 폐해와 인간의 종속상태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며 그같은 이해가 그 폐해와 종속을 해소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날 수는 없다. 위에서도 보았듯이 과학기술의 순기능과 과학기술이 가져다준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한 분야의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에 다른 분야의 과학기술이 가져온 폐해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오존층의 존재와 오존층에 생긴 구멍의 폐해를 알게 해준 것은 바로 과학기술 연구였다. 또한 과학이 자연세계와 인간에 대해,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제공해줌으로써 환경・생태계・자원 등의 문제에 관해 균형잡힌 시각을 지니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사실 근래에 와서는 기술의 상황도 변화하고 그에 따라 기술에 대해 사람들이 지니는 관념도 변화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기술과 인간의 관계도 복잡해져서 인간이 기술을 ‘통제’하거나 ‘이용’하는 관계만으로 환원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이 과학기술에 저항하거나 이를 외면할 수는 없다. 현대 사회와 문화의 가장 중요한, 가장 특징적인 요소인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연결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인문학을 과학기술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이는 ‘과학기술시대’인 오늘날 인문학에 주어진 과제이자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우리나라만 접한 도전, 문제는 아니며, 우리만 해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현대의 인문학, 전세계의 인문학의 문제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방식들을 제시할 것이고 결국은 누군가가 해결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해서 주어진 해결방식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 인문학은 그냥 그렇게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우리도 이 도전에 접해서 우리의 방식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요즘 우리나라 인문학계에서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많은 것들이 제기되고 시도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인문학자들이 새로운 대상에 대해 새로운 방법론을 사용하는 시도들을 많이 행하고 있다.2) 인문학이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새로운 주제, 새로운 방법론만으로 치닫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특히 최근 들어 두드러져 보이는, 화려하고 색다르고 흥미있는 것만을 향하고 기본적이고 전통적인 것을 제외하는 경향은 우려스럽다. 또한 외국학계의 새로운 경향들, 특히 사회과학의 새로운 개념틀이나 방법론들을 무작정 추종하는 일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기본은 지키고 그같은 기본을 포함시키면서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기존의 전통적 틀, 방법, 대상에만 안주하는 것 또한 큰 문제임이 사실이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4

 

우선, 인문학과 과학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과거의 상황으로 되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그같은 분리의 과정을 겪은 인문학과 과학기술이 그 과정을 통해 일어난 변화, 그리고 그 결과로 자리잡은 주위의 상황은 그대로 둔 채 그냥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같은 변화를 겪고 그같은 성격을 지니게 된 인문학과 과학기술이 이제는 그렇듯 변화된 상황에서 변화된 성격을 지닌 채 다시 만나고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 설사 그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돌아간다면 그 상황에서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연결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져버릴 수도 있고 굳이 그같은 연결을 시도할 이유가 없어질 수도 있다.

또한 새로운 ‘틀’ ‘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원론적 주장은 구체적 연결의 방법이 되지 않는다. 사실 그간의 연결의 시도들은 구체적 방법보다는 좀더 근본적 차원에서의 일반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데 치중했다. 특히 근래에 기술이 인간사회에 미친 영향의 부정적 측면이 주목되면서부터는 기술(또는 과학기술)과 인간(인문학)의 공존과 화해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제시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인문학과 과학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여러 종류의 만남, 연결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선 과학의 해설이나 모형, 그리고 과학기술과 관련된 퀴즈, 게임, 만화 등을 통해 과학기술을 쉽게, 흥미있게 해주는 작업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찾는 진정한 연결이라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이런 식으로 과학기술을 쉽게, 재미있게 해주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미 전문화되어버린 과학기술이 지니는 본질적인 어려움 때문이다. 결국 정공법을 택해서 아무리 어렵고 이해가 힘들더라도 과학기술과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한다. 과학기술이 현대사회, 현대문화에서 지닌 역할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쉬운 방법을 찾아 그것을 회피하거나 제쳐두거나 무시하고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학기술이—그 내용과 활동이—그렇게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같은 인식에 바탕해서 과학기술을 맞닥뜨려 이해하려고 노력함에 있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다행히도 일반 지식인들이, 또는 인문학자가 그 어려운 내용의 전문가가 되어 첨단의 수준에서 활동하고 경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한편, 흔히 보게 되는 ‘인문학과 과학의 만남’ ‘과학과 예술의 만남’ 같은 모임에서 과학자와 인문학자들의, 과학자와 예술가들의 글자 그대로의 ‘만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연결을 이루어줄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물론 인문학과 과학기술이 일단 장벽을 걷어내고 소통, 교류를 갖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움직임임이 분명하지만, 이같은 ‘만남’을 통해 이루어내는 ‘연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같은 만남을 추진하는 배경에는 여전히 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이 자신의 영역을 지키면서 각각 별개로 활동하다가 그런 장(場)에서 만나 상대방과 무엇인가 필요한 것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손쉬운 생각이 보인다. 더구나 거기에는 과학자들이 과학적 대상을 인문학적으로 소화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을 맡고 인문학자들은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겠다는 생각 같은 것까지 보이기도 한다. 마치 인문학자들이 과학적 대상을 제외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런 ‘만남’을 통해서 그것에 접하는 것만이라도 대단한 일인 듯한 느낌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표방하고 진행되는 이런 만남의 시도들이 오히려 둘 사이의 구분을 기정사실화하고 강화하는 측면도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연히 이런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될 수 없다. 개인 인문학자, 개인 과학자의 지식과 학문은 그대로 격리되어 있는 채로 이들이 만나서는 제대로 된 연결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 안에서 그같은 연결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특히 인문학자 자신들이 연결의 전체 작업을 실제로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같은 작업에는 과학의, 과학지식의 얼마만큼을 받아들이고 얼마만큼을 이해할 것인가, 과학의 어떤 측면을 중요시할 것인가 같은 문제들에 대한 검토와 선택들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면, 아마 굳이 그같은 ‘만남’의 장을 만들 필요 없이, 개인 학자들의 작업에서, 개별 주제나 분야들의 토론이나 발표장에서 연결이 이루어질 것이다.

또다시 ‘어떻게’라는 질문이 나온다. 과연 인문학이 과학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역시 여러 종류, 여러 수준의 ‘받아들임’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인문학이 과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상궤에서 벗어난 무슨 특이한, 심지어는 비정상적이기까지 한 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님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당연히 인문학의 일부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이 배제하고 있고 배제해왔던 것을 포함시키자는 것이지 인문학의 바깥에서 이질적인 무엇을 찾아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닌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손쉬운 방법이 있을 수는 없으며, 따라서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면 이제 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인문학이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가장 초보적 수준으로 인문학자가 컴퓨터, 인터넷 같은 것을 사용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연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듯 과학기술의 결과물을 단순히 ‘사용’하는 것이 인문학과 과학의 제대로 된 연결이 아님은 분명하다. 또한 소설가, 예술가가 과학기술을 소재로 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주로 소설이나 예술작품에 과학기술자나 기계 등이 등장하고 이에 따라 과학기술 지식이 사용되는 경우들이다. 음악, 미술 등의 창작과정에서 과학기술의 기법을 사용하는 경우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성격이다. 이런 예들은 워낙 분명하고 흔한 것들이어서 어쩌면 현대사회에서의 인문학(또는 예술)과 과학기술의 연결의 가장 눈에 띄는 표현일 수 있고,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연결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연결의 추구가 이 수준에서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인문학자가 과학기술의 개념, 지식을 원용(援用) 또는 전유(專有)하는 경우는 위의 예들과는 다른 성격, 다른 수준의 연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 역시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특히 고립된 지식, 단어, 물체만을 그냥 가져다 쓰는 피상적인 수준에 그쳐서는 큰 의미를 지니기 힘들다. 사실 오늘날 인문학에서 제대로 이해 안된 과학기술 용어들을 가져다 쓰는 일이 잦다. ‘엔트로피’ ‘상대성’ ‘양자’(quantum) ‘불확정성’ 등이 그 예들이다. 그러나 이 심오하고 난해한 물리학 용어들을 고립적으로 사용—대부분 오용(誤用)—하는 것보다는 비교적 쉬운 생물학・환경학의 지식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자신의 사고 속에 용해시키는 것이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분자생물학 지식의 핵심 내용은 얼핏 위에서 말한 물리학 용어들보다 더 어렵고 생소하게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주의를 기울이고 노력만 하면 고교생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인문학이 과학기술을 대상으로 해서 학문적으로 다루는 경우, 즉 인문학자가 과학기술을 자신의 연구주제로 해서 연구하는 경우도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연결의 형태로 들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경우들보다 한단계 더 나아간 수준의 연결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는 이 분야들은 20세기를 통해 꾸준히 성장해서 이제는 확립된 전문 학문분야가 된 경우들인데, 과학기술이 사회와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사회와 문화의 요소들이 과학기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과학지식의 특성이 무엇이고 그것이 지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근거가 무엇인가 같은 질문들이 이 분야들에서 다루는 대표적 주제들에 속한다. 한편, 다루는 주제의 필요에 따라 인문학과 과학기술이 만나고 연결되는 경우들이 있고 그같은 연결을 통해 생겨난 학제적(學際的) 분야들이 있다. 인지과학 또는 뇌과학, 진화생물학 등이 대표적인 예들로, 이 분야들은 대부분 성공적으로 학문세계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것들이 자연과학에 속하는 분야들과 인문학의 만남, 연결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일정한 주제, 영역, 문제들의 필요에 의한 몇몇 개별 분야들의 만남, 연결에 그친다. 이것들이 인문학과 과학의 연결의 확실한 한가지 유형임은 사실이고 그같은 연결을 통해 그간 이루어낸 학문적 성과가 뚜렷하기에 자주 언급되고 중요시되지만 이같은 성격의 연결만으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쯤에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는 ‘통섭(統攝)’이라는 말을 생각해볼 만하다. 당초 ‘consilience’라는 영어 단어의 역어(譯語)로 제시된 이 단어는 최재천(崔在天)이라는 탁월한 해설자를 통해 널리 소개되고 받아들여져 있어서 이제는 생소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3) 그리고 ‘통섭’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분리된 학문들의 융합을 주장하는 논지는 나무랄 데 없다. 그러나 ‘통섭’을 화두로 해서 유행하고 있는 지금까지의 논의들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기에 잠깐 지적할 필요가 있다. 원저자 윌슨(E. O. Wilson) 자신은 “세계가 정말로 지식의 통섭을 장려하게끔 작동한다면 (…)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21세기 학문의 거대한 두가지가 될 것이다”라는 말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분리를 일단은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둘 사이의 통섭을 주장한다. 문제는 모든 정신과정이 궁극적으로 물리적 기초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 윌슨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섭’은 결국은 인문학을—그리고 모든 학문을—자연과학으로 환원하는 방식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모든 현상들—예컨대, 별의 탄생에서 사회조직의 작동에 이르기까지—이 비록 길게 비비 꼬인 연쇄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물리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는 물론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연결짓는 가능한 하나의 방식이다. 그리고 여러가지 이유에서 이같은 방식을 혐오하고 강력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같은 방식이 필요함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고 나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통섭’에 만족할 수 없다. 그것이 불가능하리라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령 인간의 감정, 도덕, 가치와 사회, 문화의 모든 문제를 그 물리적 기초—유전자, 진화 등—를 통해 설명해낼 수 있는 만큼 설명해냈다고 하자. 그러나 그렇더라도 과연 우리가 거기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내 자신의 분야인 역사학을 두고 윌슨은 “인간의 역사과정을 물리적 역사과정에서—그것이 별의 역사든 아니면 생물의 역사든—분리할 만한 근본적인 차이는 인간의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4) 물론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윌슨이 말하는 것처럼 완전히 물리적 역사로 환원된 역사학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황량한 역사학이 될 것이라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굳이 한쪽을 택하자면 나는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인문학이 자연과학까지를 종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이야기한 여러가지 수준과 성격의 연결들이 현재 추진되고 있고, 이같은 노력과 작업들은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만족스러운 연결이 되지는 못한다. 나 자신 구체적인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분리상태의 심각함을 생각하면, 그리고 현대 사회・문화에서의 과학기술의 위치를 생각하면 과학기술과 인문학 사이에 지금까지 살펴본 것보다 더 깊은 수준의 연결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이와 관련해서 한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그간 제시되고 있는 여러 연결방식들에 공통된 기본입장이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대립관계로 보기보다는 상호 보완관계로 보는 것이고 이는 근본적으로 옳은 입장이지만 문제점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대립관계로 보는 경우에서 그렇듯이 상호 보완관계로 보는 입장에도 과학과 인문학 두가지를 같은 층위에 두고 보는 면이 있다. 그러나 사실 과학과 인문학은 층위가 다른 것들이다. 그것은 이 두가지 중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우위라는 면에서가 아니라, 이 두가지가 서로 다른 수준, 다른 차원, 다른 성격의 것들이어서 서로 대칭적인 통합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통합’이 아니라 ‘연결’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연결을 위해서는 서로 층위가 다른 이 두가지를 대칭적인 것으로 보고 생겨난 경계, 구획,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 역사상으로도 과학과 인문학이 대등한 지위에 있으면서 서로 대립하고 영향을 미치고 관계를 맺어온 것이 아니라 당초 철학과 신학의 부차적인 일부였던 과학이 독립, 분리되고 중요해지고 큰 영향을 미치고 모델이 되고 하는 관계가 된 것이다. 이런 점을 인식하게 되면 과학기술과 인문학을 단순히 만나게 하고, 통합, 융합시키는 것이 아닌 다른 성격의 일이 필요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5

 

지금까지 이 글에서 과학기술시대 인문학이 추구해야 할 바를 논의하면서 막상 나 자신의 구체적 연결방법이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물론 과학과 인문학의 연결을 표방하는 몇몇 시도들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주로 불만을 토로하고 비판해왔다. 위에서 말한 것들 중 어느 것도 내게는 만족할 만한 해결책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문제를 두고 나는 때로 지극히 비관적인 기분에 빠지기도 하고, 그럴 때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과학기술의 분리・장벽・소외의 상황에 출구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뚜렷한 방법, 출구가 현재 안 보인다는 측면에서는 절망적이지만, 그렇다고 나는 연결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같은 일말의 희망의 근거는 사실 가련할 정도로 미약하고 어쩌면 무책임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고 사회가, 그같은 분리상태에 안주한다는 것이 철저하게 불가능해졌고 따라서 그같은 분리상태가 결코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희망의 근거인 것이다. 그같은 불만에서 동력을 얻어 결국은 누군가, 어떻게 해서든가, 연결을 이루어낼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해결책이 되어줄 연결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어떠하리라는 것을 지금 예측할 수는 없다. 아마도 그동안 제시된 해결책들이 아닌 새로운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지만, 다른 한편 오늘날 제시되고 있는 해결책들 중 어느 것이 오랜 시간 후에 주도적인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역사상 학문・사조의 커다란 흐름이나 변화들이, 특히 몇세기 만에 나오는 큰 규모의 변화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가를 검토해봄으로써 우리가 찾고 있는 해결책이 어떤 종류의, 어떤 성격의 것이 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는데, 아마 완전히 새로운 것, 그리고 그것이 제시될 당시에는 그것이 나중에 가서 받아들여지는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미리 짐작할 수 없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위와 같은 문제들을 인식하지도 않고, 그 해결을 모색하는 일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이루어진 시도가 뜻하지 않게 위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주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같은 해결책을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해서 의도적으로 조직적인 프로젝트를 구성해서 체계적인 활동을 벌여 해결책이 얻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위에 제시한 방법들을 포함해서 여러가지들을 계속해서 시도하는 가운데 그중에서 어느 하나의 해결책이 부상할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 ‘연결’을 겨냥한 의도적인 시도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학과 인문학이 분리되어 있는 현재의 상황이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이 되겠다. 이런 면에서 근래에 들어 문제의 인식이 얼마만큼 이루어져 있음은 다행이다. 근래에 과학과 인문학, 예술, 문화 등의 ‘만남’의 시도나 ‘통합’ ‘융합’의 주장이 많아졌다는 사실 자체가 그같은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훨씬 더 철저한 인식이 필요하다. 과학과 인문학이, 과학과 문화 일반이 서로 분리된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철저한 인식, 그리고 그것을 해결한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하고 결국은 해결되고 말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한편 이같은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이 반드시 인문학일 것이라거나 인문학이 반드시 그것을 해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사회과학이 해낼 수도 있다. 사실 월러스틴(I. Wallerstein) 같은 사람은 ‘두 문화’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역사적 사회과학’(historical social science)이 그것을 해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5) 인문학과 과학이 모두 사회과학에 포괄되어 사회과학화함으로써 그같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이다. 당초 사회과학이 인문학과 과학 양쪽의 성향 사이에서 마찰을 겪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흥미로운 생각이기도 하다.6)

그러나 만약에 인문학이 그것을 해내게 된다고 하면,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그 무엇을 ‘인문학’이라고 부른다면, 한가지 있을 법한 씨나리오, 생겨날 법한 상황은 ‘인문학’이란 하나의 분야가 존재하게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사실 현재에도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냥 여러 인문학 전문분야들의 합(合), 심지어는 인문대학에 속한 분야들의 합을 지칭하는 이름일 뿐 실체가 있는 것인가는 의문스럽다. 물론 ‘자연과학’도 여러 전문분야들의 합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실체가 없다고 하기는 힘들다. 이런 면에서 인문학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humanities’로 복수형태라는 점을 생각해볼 만하다. 자연과학도 ‘sciences’라는 복수형태도 있지만 ‘science’라는 단수형태가 있는 데 반해, ‘humanities’를 단수로 만들면 뜻이 달라져버려서 ‘humanity’는 ‘인간성’, ‘인간다움’, ‘인간애’ 등이 되고, 혹은 이런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말로 ‘인문정신’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인문학 분야들의 합이 아니라 모든 학문분야들—현대에 와서 전문화되어버린—을 아우르는 ‘인문학’, 전문지식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삶의 여러가지 문제에 의미있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이런 분야들을 포괄하는 ‘인문학’이 아닐까? 물론 어떻게 ‘아우르고’ ‘포괄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역시 계속 제기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렇듯 아우르고 포괄하면서 과학기술을 제외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찾는 인문학은 ‘학’이라기보다는 ‘방법’ ‘정신’이다. 이것이 사실은 복수인 ‘humanities’보다는 단수 ‘humanity’라는 단어의 뜻과 더 부합된다. 그리고 명사로서보다는 형용사로서 기능하는 말인 것 같다. 모든 학문 분야들—오늘날 인문학에 속하는 분야들을 포함해서—은 전문화되어갈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 분야들 모두를 아우르는 ‘인문적’(이제는 형용사로서) 정신・방법은, 그리고 그같은 정신・방법에 대한 필요와 욕구는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 추구하는 바가 될 것이고 그 추구에서 새로운 해결책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점은, 과거에는 ‘인문학’에 해당되는 윤리학이 유용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자연에 대한 탐구는 실용성이 없다고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현재는 이와 정반대의 상황이다. 자연에 대한 탐구인 과학은 유용한 것으로, 그리고 윤리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실용성이 없는 학문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인문적’ 정신과 방법의 추구가 과거 인문학이 지녔던 유용성을 회복하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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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0년 10월 1일 한국하버드옌칭학과학기술정책연구원 공동학술대회 ‘인문사회과학과 과학기술의 통섭’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많은 부분이 김영식 『인문학과 과학—과학기술시대 인문학의 반성과 과제』(돌베개 2009)의 내용에 바탕을 두었다.

1) 김영식 「한국사회에서의 문과・이과 구별의 경직성과 그 폐단」, 『과학과 철학』 제4집(과학사상연구회 1993), 20~34면; 김영식 『과학, 인문학 그리고 대학』(생각의나무 2007), 125~48면.

2)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2007년에 시작된 인문한국(HK)지원사업의 주제들이 이같은 상황을 잘 보여주며, 이 글로 두번째가 되는 창작과비평의 ‘사회인문학 연속기획’도 그같은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

3)Edward O. Wilson,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New York: Alfred A. Knopf, 1998); 국역본 최재천・장대익 옮김 『통섭: 지식의 대통합』(사이언스북스 2006).

4) 그는 이어서 “천문학, 지질학 그리고 진화생물학 역시 일차적으로 역사적인 분과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통섭을 통해 자연과학의 다른 분야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5)Immanuel Wallerstein, The Uncertainties of Knowledge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2004); 국역본 유희석 옮김 『지식의 불확실성』(창비 2007).

6) 초기에 사회과학은 과학적임을 내세우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으로부터의 독립, 분리를 추구했다. 전자의 경우에는 일반화된 법칙을 추구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개별 사회현상의 특수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김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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