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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성동 『현대사 아리랑』, 녹색평론 2010

잃어버린 아버지들을 위한 헌주가

 

  

한홍구 韓洪九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hongkoo@skhu.ac.kr

 

 

7281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신경숙보다 15~20년 연상의 작가들은 어디다 부탁할 ‘아버지’를 갖지 못했다. 아버지의 부재와 상실은 작품으로, 혹은 삶으로 이문열, 이문구, 김원일, 김성동 등 많은 작가에게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 분단과 혁명과 전쟁과 학살로 굴곡진 현대사는 수많은 ‘애비 없는 자식들’을 낳았다. 반면 어떤 자들은 아버지가 너무 많았다. 뉴라이트들은 친일파를 신문명의 아버지로,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박정희를 근대화의 아버지로 내세웠다. 민주정권하에서 과거청산작업이 본격화되자 뉴라이트들은 좌익세력이 부친살해의 패륜을 저지르고 있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동안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애비 없는 자식들’은 뉴라이트들이 덧씌운 ‘살부(殺父)’의 죄목에 대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친일파, 이승만, 박정희는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과거사의 어두운 진실을 파고 들어가는 행위는 아버지를 죽이는 행위가 아니라 친일파, 이승만, 박정희에 의해 희생당한 우리네 아버지들을 다시 불러오는 일이라고. 그것은 부친살해가 아니라 아버지들의 귀환이라고…….

작가가 된 ‘애비 없는 자식들’이 아버지를 기리는 방식은 일정하지 않았다. 월북한 거물 공산주의자 아버지는 이문열(李文烈)에게 ‘원죄와도 같은 그늘의 무게’였다. 이문열은 자신의 연보에 ‘서른살이 넘도록 부친으로 인해 인생의 많은 가치박탈을 경험’했다고 썼다. 이문열에게 아버지는 두렵고 음산한 망령이었고, 고통의 원천이었다. 그의 『영웅시대』는 나름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아버지에게 바친 한잔 술이었지만, 그 술잔은 결별의 잔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삶과 꿈을 철저하게 부정하며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김원일(金源一)에게 아버지는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점점이 한 글자씩 속으로 그리는 ‘아・버・지’, ‘한번도 불러본 적 없는/두려운 그리움’이었다. 그는 빨갱이 아버지의 삶과 행동을 평가하려 하지 않았다. 김원일은 아버지의 너른 등판에 업혔던 어린 소년의 시점을 유지함으로써 반공과 냉전의 칼바람이 몰아치던 엄혹한 시절에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노래했을 뿐이다. 그것도 그 시절에는 엄청난 일이었다. 이문구(李文求)는 열살 남짓한 나이에 아버지와 형이 산 채로 가마니에 싸여 수장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가히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어린 이문구는 ‘나만은 절대로 형무소나 유치장 출입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처절한 생존본능으로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어’를 되뇌었지만, 이문구는 아버지가 꾼 꿈을 조용히 밀고 나갔다.

글줄이나 쓰는 ‘애비 없는 자식들’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적은 사람은 김성동(金聖東)이다. 김성동은 네살이 되도록 말을 못했다고 한다. 처음 입을 떼던 날 김성동은 느닷없이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하고 세차례나 부르짖었다고 한다. 충남 대전지역의 콤그룹 성원인 아버지가 ‘조선정판사 사건’이라는 미군정의 조작사건에 휘말려 총살을 당하던 순간이었다. 김성동은 『현대사 아리랑』을 쓴 동기를 느낌표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내 삶이 요 모양 요 꼴로 떠다박질러지게 된 까닭을 줄밑걷어 가보자는 것이었으니, 아버지!” 1947년생인 김성동과 그의 또래에게 빨갱이 자식이란 것은 ‘문둥이보다 더한 천형’이었다. 김성동은 소설 「엄마와 개구리」에서 이렇게 썼다. “빨갱이 새끼…… 그렇다. 나는 사람들이 침뱉고 발길질하고 그리고 아무나 찢어죽여도 좋은 빨갱이 새끼였던 것이다. 나는 왜 빨갱이 새끼로 태어났을까. 그때처럼 아버지가 미웠던 적도 없다. 아버지는 어쩌자고 사람들이 침뱉는 빨갱이가 되어가지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풀기 빠진 헛바지처럼 주눅들게 만드는 것일까……”

애비를 원망하던 주눅든 어린아이가 자라 제사상을 떡 벌어지게 차렸다. 아버지 한분의 제사상이 아니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이 중음신(中陰身) 되어 이 조선반도 건공중을 떠돌고 계신 어르신들’ 51분을 모신 자리다. 어디 51분뿐이랴. 이 책은 ‘아버지와 같은 꿈을 꾸었던 그 시절 헌걸찬 어르신들’ 모두에게 바치는 뒤늦은, 정말 너무 뒤늦은 한점 향불이리라.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단순히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사라진 불쌍한 희생자가 아니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 밑에서 민족의 해방과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거나, 분단이라는 뜻밖의 사건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온몸으로 거부했던 사람들이다.

이 제사상에 모셔진 분들은 몇개의 그룹으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이재유, 김재봉, 강달영, 권오설, 이준태처럼 일제 시절 조선공산당과 당 재건운동에서 맹활약한 인물들이다. 다음으로는 김태준, 김삼룡, 이주하, 정태식, 이관술, 유진오 등 한국전쟁 발발 전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처형된 사람들과 이현상, 박영발, 하준수처럼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희생된 사람들이다. 김단야나 조명희는 해방 전 소련당국에 의해 일제의 스파이로 처형되는 비운의 주인공이었고, 박헌영, 이승엽, 임화, 이강국 등은 이북정권에 의해 미제의 스파이로 몰려 처형되었다. 김두봉, 무정, 최창익 등 연안파는 이북정권에서 요직에 등용되었다가 숙청되었고, 최승희, 한설야 등 예술인도 이북정권 하에서 숙청되거나 고초를 겪었다. 반면 홍명희, 백남운, 박문규, 이기영 등은 세상을 뜰 때까지 이북정권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한편 여운형은 우익의 테러로 희생되었고,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했다. 자료 부족과 역사적 금기에 굴하지 않고 감히 부르기 힘들었던 이름들을 한명 한명 역사의 전면으로 불러내 술 한잔 따라드리는 저자의 극진한 정성은 참으로 눈물겹다.

나 역시 경건한 마음으로 술 한병 들고 저자가 차려놓은 제사의 말석에 참례하고자 하지만, 제사를 지내는 동안 다소 불편한 마음도 없지 않다. 신채호가 쓴 「낭객의 신년만필」의 필자를 홍명희로 착각하거나, 이광수를 홍명희보다 두살 위라고 쓴 것 같은 사소한 사실의 착오가 종종 눈에 띄지만(319~20면), 이런 결함이 이 책의 본질적인 가치를 훼손하진 않을 것이다. 불편함의 근원은 다른 데 있다.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 지도부는 이북정권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받아도 좋은 것일까? 과연 이승엽 같은 인물이 역사 속에서 ‘외로운 남자’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일제 밑에서 식량영단(食糧營團) 이사라는 막강한 요직을 지낸 그의 전향을 위장전향이라고 보는 것은 근거 없는 아량이다. 이현상의 죽음에 대해서도 ‘조선로동당의 특명’ ‘북에서 직접 내려보낸 특수공작대’(80~81면) 운운하면서 저자는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한발 빼긴 하지만, 이 또한 과도한 추측이다. 이 어려운 제사를 지내는 행위 자체가 감개무량하고, 제사상을 차린 저자의 정성이 감동적이고, 하나하나 자료를 모은 어려움에 최고의 경의를 표하며 같이 절을 올리지만, 그 제문(祭文) 모두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렇게 하기엔 우리 현대사가 너무 복잡했고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이 제사상에 오른 분들 중 몇몇은 그 많은 죽음에 상당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