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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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민중시』1집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만국의 노동자여』『인간의 시간』『초심』등이 있음.

 

 

 

흐르는 집

 

 

1

터신에 고하고

집터를 다진다

안산과 조산 사이 좌향을 정하니

형국은 行舟形이다

이것은 집의 뿌리내림이다

 

주추를 놓고 삼칸 열두 기둥을 세운다 이번엔 수직오름이다

장여와 보아지 처마도리를 얹고 들보를 올린다 이번엔 수평지르기다

동자주를 세우고 마룻대를 올리고 상량을 한다

서까래와 평고대를 얹고 개판을 이고 박공을 단다 이번엔 솟을각오름이다

중인방 하인방 문설주를 끼우고 창을 달고 벽을 친다 이번엔 나누어지르기다

온돌을 놓고 바닥을 고른다 이번엔 평탄다짐이다

문을 달고 솥을 걸고 조왕에게 고하고 정화수 올리고 조상에게 고한다 이번엔 모심이다

아는 단골 청하여 세존님 대접하고 이웃을 청한다 이번엔 나눔이다

 

집을 모셨다 전셋방도 살아보지 못한 이 나이에 연장 마련해서 손수 오두막 하나 지었다 집을 짓는 일이 건축이 아님을 다 짓고 나서야 안다 유목을 청산하고 나도 정착민이 되려고 하였다

 

2

유목에서 돌아오려고 했지만 나의 세간붙이는 그간 비에 젖고 바람에 해어지고 눈보라에 찢겨 집에 들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나의 집은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같은 내 손과 같고 강둑 같은 내 몸과 같아서 무엇을 들일 공간이 아니었다

 

송곳 꽂을 땅 하나 없이 사는 일이야 탓할 일 없었으나 꽂을 송곳을 내내 들고 사는 나를 내가 혐오하고 의심했다 그 의심은 깊어졌지만 나는 가난다운 가난을 얻지 못하고 자주 해체되고 방기되고 분리되었다 나의 몸도 흩어졌다 몸을 떠나 구할 언덕이 어디에도 없음을 알았을 때 나는 집을 생각했다 몸 밖에 집을 집 밖에 세상을 나는 건너뛰지 못하였다 천지간을 집으로 삼지 못하고 산수간에 터 하나 잡았다 버리다 버림에 빠진 자가 잡고 올라올 한토막 나무가 필요했다

 

3

나는 달관하지 않겠다 나는 해탈하지 않겠다 아비규환의 저잣거리에 남겠다 나는 이런 말을 모른다 집은 숨구멍 하나 없이 좁고 존재의 집은 머물 수가 없는데 어느 세간붙이는 이쪽에 놓고 어느 세간붙이는 저쪽에 놓겠는가 해탈은 내 알 바 아니나

내게는 머물 저자도 없다

 

4

나의 발길은 멀리도 흘러왔을 터인데 돌아보니 맨 그 자리였다 내가 짚고 일어설 곳도 쓰러진 그곳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내가 딛고 일어설 집을 지었지만 허공에 뜬 자리였다 그렇다 이 허공이 바로 내가 오래 흘러온 자리가 아닌가 그러므로 내 집은 안거의 자리가 아니라 뗏목이 아닌가 안거가 아니라면 집 안에 내가 없고 그 구조의 밖에 있으니 내 집은 구조물이 아니라 한척 뗏목이 아닌가

 

나의 사랑도 불빛 거리에 있고 내 그리움도 아직 저 먼지바람 이는 광야에 있으니 머물 것이 없는 집이 아닌가

 

5

낡아가는 것은 없다 다만 흘러갈 뿐이다 흘러가는 것들은 만날 수 없다 나는 나를 만날 수도 너를 만날 수도 없다 나는 언제나 나를 아슬아슬 스쳐 지나갈 뿐이다 비켜갈 뿐이다 나는 내가 낯설다 그리하여 언제나 끊임없이 그리워할 뿐이다 달의 등은 끝내 볼 수가 없고 달의 얼굴은 한번도 같은 얼굴이 아니다 그렇게 나도 나의 집도 물결에 흔들리며 파도를 다 견디며 흘러갈 것이다 건너갈 곳은 없다 흘러가는 것은 언제나 낯설고 아득해질 뿐이다 다만 언젠가는 물결 하나 다치지 않고 흘러가고 싶은 것이다

 

 

 

 

 

기특한 한 여자아이 손이 늘 얼음처럼 차다

몸 불편한 어른들 손발 대신하느라고

아직 응석도 부릴 솜털 뽀얀 나이인데

어른 몫 하느라 아이 몸짓이 아니다

커서 잘살겠다고 이웃들 덕담들 하지만

그 아이 불길한 미래를 나는 여러번 본 일 있다

아주 여러번

 

부모 동생 짐 덜자 꼭 그리 지지리도 못난 남자 만나

습관이 사람을 부르고 운명을 부르고

그 사람 뒷바라지에 딸린 시부모 시동생 치다꺼리에

자식이나 탈이 없으면 좀 좋으랴만 사고를 달고 살고

남의 집 일 공장 일 가는 곳마다 배부른 자들 봉양하느라 마흔 쉰 예순

늘그막에 자식 며느리 밥상이라도 받을라치면 덜컥 큰 병원에서 오라네

 

늘 꼼지락대던 어린 우리들에게 어른들은,

  좀 처연히 있을 버릇해라 이놈들아 복 달아난다!

  복이 왔다가 어디 앉을 곳이 있어야 앉지!

그랬다, 나비도 조용한 꽃에 앉고

새들도 바람 잔 가지에 앉는다

땀에 절어 일하는 사람들 복 앉을 처연한 어깨 없어 가난하다

지나친 노동은 죄악이다

 

착한 이웃들 아이에게 먹을 걸 가지고 갈 때

나는 화장품 가지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