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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베네딕뜨 예로페예프 장편소설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 을유문화사 2010
취한 말〔言〕들을 위한 시간
이장욱 李章旭
시인・소설가 wook6297@hanmail.net
19세기의 많은 소설들은 야망을 가진 청년의 실패담이거나 자의식 강한 유한부인의 자살담이었다. 빌헬름 마이스터, 쥘리앙 쏘렐, 라스꼴리니꼬프 등은 예민하고 열정적인 청년이었다. 그들은 거듭되는 실패를 통해 세계를 배운다. 보바리 부인, 안나 까레니나, 떼레즈 라깽은 유럽문화의 질식할 듯한 공기 속에서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좇다가 공히 비극적인 죽음으로 생을 마친다.
이 캐릭터들이 19세기 리얼리즘의 빛나는 성취 중 일부임은 물론이다. 작가들은 이 ‘문제적 주인공’의 실패와 자살을 통해 당대적 삶을 인화(印畵)하고자 했으며, 그들의 운명이 소위 ‘근대소설’의 한 절정을 이루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20세기는 어떤가? 많은 소설이 신경증적이거나 분열증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카프카, 까뮈, 버지니아 울프의 주인공들은 많건 적건 정신적 증환 속에서 세계를 앓는다. 그 앓음을 통해 그들은 20세기적이라 할 만한 영혼의 상흔을 기록한다.
그렇다면 쏘비에뜨 관료주의의 증상을 드러내는 데는 어떤 캐릭터가 어울릴까? 알코올중독자만큼 적합한 인물이 있을까? 북구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연신 보드까를 마셔대는 노동자-지식인 유형의 주인공. 취한 자의 끊임없는 중얼거림. ‘잉여인간’의 입에서 쏟아지는 ‘잉여’로서의 말들. 그 ‘쓸모없는’ 말들은 유용성과 공안질서, 미래지향적 슬로건에 고착된 사회의 언어를 추문으로 만들기도 한다. 베네딕뜨 예로페예프(Venedikt Erofeev)의 소설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Moskva-Petushki, 박종소 옮김)가 그런 예다.
주인공 베냐는 전화 케이블공으로, 개인별 알코올 소비량을 집계한 그래프가 상부에 전해진 탓에 직장에서 쫓겨난 알코올중독자다. 그가 가려는 곳이 뻬뚜슈끼다. 실제 지명인 뻬뚜슈끼는 모스끄바에서 전차로 두시간가량 걸리는 곳으로, 갈 곳이 없어진 주인공의 목적지이기도 하다. 소설은 모스끄바에서 뻬뚜슈끼행 열차를 탄 주인공의 혼란스럽고 몽상적인 다변(多辯)과, 그가 열차에서 만난 장삼이사(張三李四)와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들 취한 상태인 것은 물론이다. 모스끄바에서 뻬뚜슈끼에 이르는 30여개의 정차역은 주인공의 여로이자 각 장의 소제목이며, 독자들이 주인공의 취기에 전염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앉은 자리에서 보드까를 한잔씩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주인공과 더불어 잔을 기울이는 듯한 기분이랄까. 조금씩 어지러워지고, 주위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대화는 단절적이고 시적이며, 환상적 이미지들이 불연속적으로 소설 속의 현실에 출몰한다. 가령 소설 말미에는 갑자기 스핑크스가 열차에 나타난다. 스핑크스는 주인공에게 원래의 신화와는 다른 어이없는 수수께끼들을 내고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페투슈키엔 아무도 갈 수 없어, 하—하! 페투슈키에는, 하—하, 아무도 갈 수가 없다니깐!”(201면)
소설 속에서 뻬뚜슈끼는 주인공의 정신적 고향이자 이상향으로 그려진다. 그곳에는 “구원과 기쁨”이 있고 “겨울에도 여름에도 재스민이 꽃피어 시들지 않는”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곳이 뻬뚜슈끼다. 안타깝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뻬뚜슈끼에 닿을 수 없다는 스핑크스의 예언은 실현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주인공이 내린 곳은 그가 출발했던 바로 그곳, 모스끄바였다. 그것도 쏘비에뜨의 심장부인 크렘린 광장. 주인공은 그 광장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쏘비에뜨 문학은 흔히 세 유형으로 구분된다. 고씨즈다뜨(국영출판사에서 출간되는 공식문학), 싸미즈다뜨(자가출판 또는 지하문학), 따미즈다뜨(망명문학)가 그것이다. 당시 사회주의 리얼리즘 코드가 적용된 공식문학에는 소위 ‘긍정적 주인공’의 낙관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었다. 1950, 60년대의 ‘해빙기 문학’은 그런 코드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그들 역시 공식문학의 틀 안에서 공식문학의 문법으로 말했다. 틀 밖의 문학, 코드 밖의 문학은 싸미즈다뜨의 몫이었다. 취한 자의 중얼거림, 성스러움과 비천함의 카니발적 혼재, 정상과 비정상의 무분별한 뒤섞임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이 ‘싸미즈다뜨의 고전’이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1970년에 쓰인 이 작품은 쏘비에뜨의 몰락 이후, ‘자생적인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작으로 추인되기에 이른다.
사실 이 소설은 (포스트모던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사소설(私小說)적이다. 주인공 베냐 예로페예프는 사실상 베네딕뜨 예로페예프 자신이다. 케이블공이라는 주인공의 직업은 작가의 직업과 일치하며 알코올중독자라는 점도 같다. 작가 예로페예프의 일기를 보면, 이 소설의 화자가 작가 자신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일기를 쓰듯 소설을 썼는지도 모른다. 17년간 신분증도 없이 갖은 직업을 전전하며 전국을 떠돌았다는 작가가 자신의 일기에 붙여놓은 제목은 ‘한 정신병자의 기록’이었다. 아이러니와 함께 묘한 슬픔이 느껴지는 제목이다.
취한 주인공의 취한 말로 이루어진 ‘알코홀릭’ 소설이 정연할 리 없다. 주인공의 주관적 진술로 일관하는 탓에 소설의 서사와 이야기는 제대로 ‘구성’되지 않는다.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은 ‘구성력’ 부재 등을 이유로 들어 사소설이 ‘탈근대적’이라고 한 바 있는데, 이 쏘비에뜨 소설의 사소설적 요소 역시 예기치 않게도 ‘포스트모던’한 결과를 초래한다. 성서와 신화, 고전소설에서 빌려온 수많은 인용들의 출몰, 정체성의 혼돈과 출발점으로의 비극적 회귀, 이성이 추방된 자리에 들어선 취기어린 장광설, 그리고 환상과 현실의 혼란스러운 경계. 과연, 브레즈네프 시대에 쓰인 이 소설은 사본 상태로 돌아다니다가 1989년 쏘비에뜨의 몰락과 함께 공식적으로 출판된 뒤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게 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소설의 초판은 ‘단 한부’였다. 지하출판의 시대, 직접 작성한 사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 소설이 판타지 등 상업문학이 압도적으로 지배하게 된 90년대 이후 ‘순문학의 주류’로 승격된다. 사실 그것은 이미 몰락한 세계의 몰락을 추인하는 상투적인 과정에 다름아니었다. 하지만 소위 ‘주류’가 되었을 때 예로페예프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소설이 공식 출판된 그해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떴다. 여기서 책과 작가의 운명은 아이러니하게 교차한다.
책을 덮을 무렵, 엉뚱한 생각이 떠오른다. 90년대 이후 예로페예프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는 술을 끊었을까? 자기파괴적 분열증은 ‘치료’되었을까? 크렘린 대신 ‘올리가르흐’(러시아의 신흥 과두재벌)가 지배하는 모스끄바를 떠나 뻬뚜슈끼에 닿을 수 있었을까? 작가 자신은 “재미로” 쓴 것이며 어떤 심오한 의미도 없다고 부연하기까지 한 소설. 하지만 취기어린 지적 카니발리즘과 은닉된 논쟁으로 가득한 소설. 관료화된 ‘정의’와 숭고한 슬로건들 앞에서 어이없게도 취한 사람의 “딸꾹질”을 “연구”하자고(92면) 주장하는 소설. 유튜브의 한 동영상에는 후두암에 걸린 뒤 목에 연결한 기계를 통해 인터뷰에 응하던 예로페예프의 침울하면서도 천진한 얼굴이 담겨 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21세기 모스끄바의 어두운 광장 한켠에서 수많은 베냐 예로페예프들과 한잔 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