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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장뤽 낭씨 『무위의 공동체』, 인간사랑 2010

미완성을 위한 기획

 

 

김성호 金成鎬

서울여대 영문과 교수 shkim@swu.ac.kr

 

 

13198장뤽 낭씨(Jean-Luc Nancy)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아직 멀게 느껴진다. 그는 일흔을 넘긴 랑씨에르와 동갑내기로, 1986년에 초판이 나와 서구사회에 적잖은 반향을 일으킨 주저 La Communauté sœuvrée(『무위의 공동체』, 박준상 옮김)가 지난해 말에야 번역되었으니 소개 자체가 매우 늦은 셈이다. 프랑스어 초판이 출간되었을 때 서구에서는 포스트-하이데거적・해체적 사유가 정점을 찍고 있었으며, 증보판이 나온 1990년, 그리고 이어 The Inoperative Community라는 제목의 영문판과 함께 낭씨가 영어권에 소개된 1991년의 시점에는 좌우 지식인들이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세계사적 스펙터클을 바라보며 역사와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새기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블랑쇼와 바따유가 곧잘 등장하기는 하지만 사유의 더 깊은 물줄기는 하이데거, 데리다, 그리고 맑스에게서 흘러나오는—그리고 한데 섞여들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것으로 보이는 낭씨의 텍스트는 생산과 수용의 양면에서 분명 자기 시대에 속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그러한 ‘운’을 우리말 번역본이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 책이 현재 우리에게 의미가 없다거나 사유를 촉발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한국의 독자로서는 낭씨의 텍스트가 생산・수용되는 맥락들을 더 의식적으로 구성할 필요에 직면한다. 특히 우리는 그가 다루는 대상이나 주제가 속한 저 깊디깊은 층위에서 정치・윤리・미학적 판단들이 서로 갈등하는 구체적 현실의 층위로 이어지는 통로를 (만일 있다면) 찾아내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이 다루는 대상은 이런저런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 자체, 그리고 인간의 존재 일반이다. ‘무위의 공동체’란 인간의 ‘공동-내-존재’(étre-en-commun)를 지칭하는데 이는 한 인간이 타인과 어떤 본질을 공유하고 공동체는 이 본질을 실현한다는 의미를, 즉 동일성의 개념을 함축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처럼 (그러나 그보다 더욱 탈중심적으로) 그것은 존재의 자기 바깥으로의 정향(定向), 타인에게의 그리고 타인의 본원적 노출 혹은 외존(exposition), 따라서 존재의 ‘공동의 나타남’(com-parution)을 뜻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또한 사이나 한계 그 자체이며, 존재는 그 양편의 어떤 내재적 본질을 지닌 분할 불가능한 개체(개인)가 아니라 바로 그 한계 위에서 일어나는 노출과 분유(分有)의 단수적(singulier)・공동적 ‘사건’이다. 이 사건은 무한하며 따라서 공동체는 무한하다.

그렇다면 무위(sœuvrément)란 무엇인가? 블랑쇼에서 가져온 이 말로 낭씨는 인간과 공동체를 규정해온 ‘일’이나 ‘과제’(œuvre)의 관념, 또는 완성의 강박에 대한 거부를 표현한다. “생산과 완성을 위해 할 일이 더이상 없[다]. (…) 공동체는 〔단수적 존재들〕이 이루어야 할 과제가 아니고 (…) 단수적 존재들의 성과도 아니고 그들의 작용 전체도 아니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그들의 존재—공동체의 한계에 매달린 그들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통이란 사회적・경제적・기술적・제도적 과제에서 벗어나 무위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79면). 소통은, 그것이 두 ‘주체’간의 대화가 아니라 ‘공동-내-존재’의 분유인 한, 상위의 목적을 지닌 공동체의 수단이 아니라 공동체 자체의 구성성분이며, 존재의 동일성이 아니라 이행(passage)을 초래한다. (문학과 관련하여 이 점은 중요하다.)

공동체는 상실된 적이 없으며 상실된 공동체란 날조된 “환상”(41면)이라고 주장하는 한편으로 낭씨는 공동체를 말살하려는 “파시스트적 대중”과 “학살의 수용소, 몰살의 수용소”(86면)를 언급한다. 또 공동체가 “우리의 계획들・의지들・기획들 그 이하”에 주어진다면서도 “공동체의 분유를 미완성의 것으로 내버려두는 것이 관건”(86면)이라고 말한다. 공동체의 주어짐은 “과제”는 아니지만 “임무”(che)다(87면).

결국 낭씨는 공동체와 관련한 어떤 기획, 어떤 의지를 전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공동체는 어떤 의미에서는 저항 자체, 즉 내재성에 대한 저항이다”(86면). “내재성” 혹은 “내재주의”(immanentisme, 25)로 지칭되는 공동체의 적(敵)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띠는가? 개인이란 공동체의 붕괴가 낳은 추상적 결과이자 “내재성의 또다른 표현”(25면)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개인을 자기 삶과 공동체의 최고주권자로 특권화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대한 낭씨의 ‘저항’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적은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생산자로서의 인간’이라는 자본주의적이거나 국가사회주의적인 규정은 물론, ‘집단으로서의 인민’에 주권적・실체적 지위를 부여하는 공화주의와 사회주의의 유구한 전통, 연합(communion)에서 집단 형성과 존속의 원리를 찾는 공동체주의의 종교적・세속적 판본들(후자에는 평등주의적, 권위주의적, 파시즘-전체주의적, 공산주의적 판본 등이 있다), 심지어는 사회를 최소한의 규칙을 따르는 다수의 정체성들 사이의 타협 또는 헤게모니 투쟁의 공간으로 보는 다원주의적 관점까지, 역사상 출현한 대부분의 체제와 이념은 개인이나 집단의 내재적 본질에 입각한 것으로서 낭씨가 제시하는 ‘공동체’의 적이라 할 만하다.

이 무수한 적들에 대항하여 ‘무위’를 지켜내는 것, “공동체의 분유를 미완성의 것으로 내버려두는 것”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대단한 위업이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물론 할 수 있다. 단, 언제나 국부적으로, 언제나 일시적으로. 보편적 무위란 완성된 미완성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질서로서는 상상할 수 없다. 상상이 된다면 그것은 유토피아로서다. “우리는 끊임없이 태어나 공동체에 눈뜬다. 그것이 죽음이다”(150면). (한 존재로부터의) 죽음과 동시적인 (다른 존재로의, 타자로의, ‘공동-내-존재’로의) 탄생의 끊임없는 반복, 귀결점(완성)에 이르지 않는 반복적인 “개시의 몸짓,” 그리고 그런 몸짓으로서의 글쓰기—이렇게 이해되는 “문학적 공산주의”(153면)는 유토피아적 표상이다. 그 유토피아는 씨뮬라크르의 세계와 유사하다. 한 존재는 끊임없이 다른 존재를 향해 노출(외존)되고 그리로 이행하며 새롭게 탄생하지만 그 다른 존재 역시 동일한 움직임 가운데 있으며 그것 ‘자체’는 어디에도 없는 세계. 이 유토피아가 현실과 만날 때 그것은 즉각 저항으로 환원된다. “‘문학적 공산주의’는 적어도 다음 사실을 지적한다. 자신을 (…) 완성으로 이끌려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 속에서 공동체는 억누를 수 없는 어떤 정치적 요구를 의미하며, 그 정치적 요구가 이어서 ‘문학’의 어떤 것을, 우리의 무한한 저항의 기입을 요구한다는 것이다”(178~79면).

무위=저항=정치=문학의 이 등식은 근래에 국내 비평계에서 진행된, 랑씨에르를 매개로 한 ‘시와 정치’ 논의를 상기시킨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는 이것이다—보편적 무위가 현실의 질서로 상상될 수 없으며, 무위는 다만 (무엇이 됐든) 현실의 질서에 대한 “무한한 저항”으로 ‘존재’할 뿐이라면, 그것은 무위가, 그리고 무위의 문학이, 따지고 보면 (무엇이 됐든) 현실의 질서와 한패를 이루고 있음을 뜻하지 않는가? 실은 보편적 무위가 유토피아라는 사실도, 무위의 문학이 저항의 문학이라는 사실도 문제가 아니다. 유토피아에는 그 나름의 정치적 몫이 있으며 저항의 문학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차원의 혼동 속에 유토피아를 그대로 현실의 질서로 구현하려 드는 것, 그러한 시도와 저항의 차이를 보지 못하는 것, 문학의 동일성에 대한 저항과 현실에 대한 저항을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 이 모든 오류들의 결과 원대한 포부와는 정반대로 현실 안에 자그마한 ‘문학의 왕국’을 만들어 그 속에서 “무한한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낭씨의 공동체론이 반드시 이런 문학주의를 부추긴다고 속단하기에는 아직 그와의 대면이 너무 짧다. 작가와 비평가는 그의 공동체론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들, 그가 말하는 ‘저항’을 문학의 고유한 질과 진정한 정치성의 동시적 발현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식들을 고민해보아야 한다. 문학의 정치성에 실질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철학자라기보다 작가와 비평가의 몫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