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논단과 현장

 

식민주의와 근대의 특권화를 넘어서

황종연의 반론에 답하며

 

 

김흥규 金興圭

고려대 국문과 교수. 저서로 『문학과 역사적 인간』 『한국 고전문학과 비평의 성찰』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 등이 있음.

gardener@korea.ac.kr

 

 

1. 머리말

 

나는 2008년 가을부터 2010년까지 세편의 논쟁적인 글을 발표했다. 한국 민족주의와 근대문학 성립에 관련하여 1990년대 후반 이래 주목받고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해온 탈민족주의적 성향의, 그리고 개인차가 있는 대로 다분히 포스트모던하기도 한 담론들 중 일부가 그 대상이었다.1)

이들을 쓰기 얼마전부터 근래의 수년간 나 자신이 반성적으로 정리한 학문적 입장은 1970, 80년대의 한국사/한국문학 연구를 주도해온 내재적 발전론과 민족 단위의 인식구도에 치우친 시각이 그 나름의 공헌과 함께 문제점 또한 산출했으며, 이를 겨냥한 90년대 후반 이래의 비판은 큰 줄거리에서 경청할 만한 재정향의 필요를 일깨웠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서도 새로운 동향에 대해 내가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그들에게서 양해할 만한 수준을 넘는 ‘과도교정(過度矯正)’이 종종 발생하고, 근년에는 그것이 관성화되는 추이마저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쪽으로 굽은 것을 펴고자 반대쪽으로 지나치게 당겨서 새로운 기형을 만드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의도한 바가 그렇기에 내 글들에 대해 반론이 나온다면 토론을 통해 우리의 시야를 좀더 풍부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또한 없지 않았다. 하지만 황종연(黃鍾淵)이 응답으로 내놓은 「문제는 역시 근대다」(『문학동네』 2011년 봄호)2)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황종연은 이 글에서 여러 개별 사항들에 대한 변명과 궤변적 수준의 반박에 골몰할 뿐, 논의의 거시적 구도에 대해서는 별로 진전된 견해를 내놓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나의 문제제기를 “70, 80년대 한국학계에 식민주의 사관과의 싸움 속에서 형성된 낡은 비판모델의 지루한 연명(延命)”으로 몰아붙이고(「문제는」 447면), ‘폐쇄적 내발론 대 트랜스내셔널한 개방적 시야’라는 90년대적 틀짓기에 의지하여 자기를 방어하고자 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하고 이미 발표된 세편의 글마다 서두에 밝혔듯이 내 입론의 출발점은 민족주의적・내발론적 사고모델의 실효(失效)를 기정사실화한 위에서 우리의 탐구가 어떻게 하면 시공간적 경계의 앞뒤와 안팎 중 일부를 특권화하지 않으면서 균형된 역사 이해에 접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나는 신기욱(申起旭), 헨리 임, 황종연, 윤선태(尹善泰), 김철(金哲) 등의 문제 저작들이 근대와 식민적 타자에 과도한 비중을 부여하는 한편 전근대로부터 이월된 기억・유산과 피식민자들의 작인(作因, agency)은 소홀히하는 ‘과도교정’의 편향을 보인다고 비판했다.

황종연은 이를 반박할 만한 배려의 균형을 입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신라론이 “식민지시대 조선어 텍스트에 표상된 신라를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접촉하는 지식의 경계 위에 놓고 보려는 시도”(「문제는」 435면)였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진술을 통해 그런 의도가 실천된 것처럼 자처한다.

 

나는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 신라라는 관념을 포함한, 현재 한국인 일반의 신라관에 영향을 미친 관념과 이미지의 중요한 일부(강조는 인용자)가 근대 일본의 식민주의 역사학과 고고학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가설 중 하나로 삼아 (…) 연구를 수행했다.(「문제는」 425면)

 

하지만 위의 인용에 보이는 “중요한 일부”라는 표현은 ‘식민주의의 특권화’라는 비판을 받고 나서 뒤늦게 착용한 수사적 안전벨트의 혐의가 짙다. ‘중요한 일부’란 ‘무시할 수 없는 여타 부분들’을 전제하는 표현인데, 그의 논문 「신라의 발견」은 이와 달리 일본 식민주의가 만들어낸 신라 표상의 압도적 작용력을 주장하는 데 몰두했다. ‘근대 한국의 민족적 상상물의 식민지적 기원’이라는 부제가 말하듯이 그가 조명한 ‘경계’에서 한국의 지식인들은 그 나름의 지적 자원과 담론 기동력이 희박한 2차적 주체처럼 간주된다. 그런 가운데서 거론된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그 영향력이 불확실한 “한 망명지식인”으로 주변화되고, 문일평(文一平, 1888~1936)은 식민사학의 담론을 재가공해서 유통시킨 부가사업자처럼 예시되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경계 위에 놓고’ 어느 한쪽을 특권화하지 않으면서 입체적으로 보아야 할 당위성이 원론적으로나마 시인된 것은 의미있는 진전일 듯하다. 본고는 이 진전을 실질화하는 데 긴요한 논점들의 시비를 좀더 가려보고자 한다. 다만 황종연의 반론에서 언급된 사항들은 일일이 재론하기란 불필요하게 번거로운 일이므로, 이하의 본론에서는 ‘신라통일론’ ‘민족주의 생성의 조건’ ‘민족주의 대두와 전근대의 유산’ 문제를 상호연관된 소주제로 삼아 주요 쟁점을 살피고 좀더 확장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4)

 

 

2. 신라통일과 민족주의 담론

 

황종연은 그의 동료 윤선태와 생각을 같이하면서 “신라가 조선반도의 영토 지배라는 점에서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위상을 보유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일본인 동양사가들의 연구에서였다”고 주장하고, 그 선구자로 하야시 타이스께(林泰輔, 1854~1922)를 들었다.5) 이에 대한 나의 반론이 7세기말 이래의 금석문에서부터 18세기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신라통일도(新羅統一圖)」까지 다수의 증거를 제시하며 신라의 삼국(삼한)통일이라는 관념이 이미 오랜 내력을 가진 것임을 밝히자, 윤선태는 자신의 주장을 축소 조정했다. 그 요지는 ‘당(唐)이 요동으로 퇴각한 시점(676)에 신라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하야시에게서 처음 나왔으며, 신라통일 시점에 관한 한국 민족주의 사학의 통설은 바로 이것을 수용한 결과’라는 것이다.6) 황종연은 문일평이 신라통일의 요인으로 인화(人和)를 강조한 것이 하야시의 『초오센시』(朝鮮史, 1892)를 참조한 것처럼 보이게 썼다가 하야시가 『동국통감(東國通鑑)(1484) 등의 사론(史論)을 짜깁기했을 뿐이라는 점이 지적되자(「신라통일」 390~92면), 이들의 연결고리로 자신이 주목한 바는 통일 시점 문제였다고 했다. 즉 문일평이 “하야시 타이스께와 같은 방식으로 신라의 통일을 설명”했다는 것은 하야시가 1912년에 낸 『초오센쭈우시』(朝鮮通史)에서 당 세력의 철수를 통일 시점으로 본 것과 문일평의 견해가 상통함을 지칭한다는 것이다.7)

그러면 신라가 당의 군대를 한반도에서 축출함으로써 통일을 이루었다는 견해가 하야시에게서 처음 나온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보다 4년 앞선 1908년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 논설에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라. 고로 사필(史筆)이 강하여야 민족이 강하며 사필이 무(武)하여야 민족이 무하는 바이어늘, 피(彼) 김씨 제인(諸人)이 삼국 사적(事蹟)을 찬출(撰出)하매, 비열한 정책을 찬미하며 강경한 무기(武氣)를 최절(折)할새, 신라 문무왕이 당병(唐兵)을 격파하고 본국 통일한 공을 이소적대(以小敵大)로 폄(貶)하며 (…)8)

 

김부식의 사론을 비판한 이 글에서 주목할 것은 “신라 문무왕이 당병(唐兵)을 격파하고 본국 통일한 공”이라는 대목이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백제, 고구려 멸망 이후 8년간 당과 싸우고 마침내 676(문무왕 16년) 그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함으로써 문무왕이 통일의 공을 성취했다는 시대 구획을 확증한다. 신채호는 같은해 8월부터 12월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김춘추(무열왕)에 대해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공격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으나,9) 그 아들인 문무왕이 당의 직할주로 전락할 뻔한 영토를 결연히 수호한 점은 높이 평가했다. 『대동제국사 서언(大東帝國史 敍言)』에도 “문무대왕의 복지(復地)” 즉 영토 회복을 칭송하는 대목이 있으니,10) 이것은 어쩌다 나온 일회적 발언이 아니다. 신채호는 왕조의 정통성 문제보다 민족사 영토의 통합과 주권적 보위를 중시하는 ‘근대적’ 관점에서 676년을 불충분하나마 삼국통일의 완성 시기로 본 것이다.

이런 자료들을 버려둔 채 1912년에 나온 『초오센쭈우시』의 한줄에 기대서 “신라가 조선반도의 영토 지배라는 점에서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위상을 보유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일본인 동양사가들의 연구에서였다”고 단언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황종연은 이마니시 류우(今西龍)1919년 강연록도 보충적 논거로 제시한 바 있는데,11)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같은 1910년 이전 자료와 신채호의 저작 등에 그만큼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가 발디딘 “지식의 경계”란 어디에 위치하며 무엇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일까.

위에서 확인한 사항은 문일평이 ‘하야시 타이스께와 같은 방식으로 신라통일의 시기를 설명’했다는 황종연의 해명성 주장과, 그러니 식민사학의 파생담론을 면치 못한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반성을 요구한다. 당 세력의 축출을 통일 시점으로 본 신채호의 사론은 출현 시기가 가장 앞설 뿐 아니라 ‘통일’이라는 표현과 시대 구획 및 의미 근거가 하야시, 이마니시보다 뚜렷하다. 아울러, 문일평은 신라통일이 영토적으로 불완전한 ‘반벽(半壁) 통일’이었다고12) 하는 점에서 신채호와 일치한다. 신채호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지만 고구려 땅의 대부분을 일실했고,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북방 영토가 한국사로부터 사라졌으니, 신라・고려・조선왕조의 통일이란 “반변적(半邊的) 통일”에 불과하다고 했다.13) 신채호가 끼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강경한 통일한계론을 적극 주창하는 학자들은 당시에 많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 문일평은 용어조차 비슷하게 신라의 ‘반벽 통일’을 강조했다. 그는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를 서평하면서 ‘단재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사학계의 선배로서 광무・융희(光武隆熙)년간에 서까래처럼 큰 붓으로 (…) 일세를 놀라게 한’ 거인이라 하고, 그 저술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14) 이 여러 증거로 볼 때 신라통일의 시점에 대한 문일평의 견해를 계보적으로 소급한다면 그 원천은 신채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15)

황종연은 이런 개연성을 의심해보지도 않은 채 신라가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담론적 위상을 지니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일본인 동양사가들의 연구에서였다”고 단언하며, 식민담론으로부터의 파생이라는 액자 속에 한국 근대사학을 욱여넣었다. 그러면서 학문적 신중함과 ‘경계’ 위의 균형을 자부할 수 있을까.

 

 

3. 식민화, 민족주의 생성의 조건?

 

황종연은 「민족을 상상하는 문학: 한국소설의 민족주의 비판」이라는 평론에서 한 장편소설의 31운동 시위 대목을 거론하며, ‘조선독립’의 열망을 외친 ‘만세’가 “근대의 정치적 신화를 둘러싸고 만들어진 신종의식의 일종일 것”이라 추측하고, 더 나아가 그것은 1889년 일본제국 헌법이 공표될 때 메이지 텐노오(明治天皇)를 송축한 ‘반자이’(萬歲)에서 왔을 공산이 크고, ‘반자이’는 또 유럽인들의 ‘후레이’에서 왔다는 근대적 모방의 계보를 작성했다.16) 나는 『조선왕조실록』에만도 숱하게 출현하는 ‘만세’의 용례를 제시하여, 그것이 황당한 억측임을 입증했다. 아울러 “31운동은 식민지지배에 대한 저항일 뿐 아니라, 군주에 대한 충성의 어휘 ‘만세’를 ‘조선독립’이라는 공동체 주권의 열망에 귀속시킨 결정적 사건이기도 했다”고 지적하여, ‘만세’라는 어휘가 31운동에서 새로운 의미역을 획득하고 정치적 열망의 중심으로 전화(轉化)한 사실에 주목했다(「한국 근대문학」 307~308면).

그럼에도 황종연은 반론문에서 자신의 경솔함을 부끄러워하기보다 “전근대 군왕을 송축하는 행위 중의 만세 연창(連唱)과 근대 국민의례 중의 만세 연창은 의미상 서로 다르다”면서, 내가 조선시대의 ‘만세’와 31운동의 그것을 같은 의미로 간주한 듯이 뒤집어씌웠다(「문제는」 433면). 31운동의 수백만 시위자들이 목숨 걸고 외쳤던 ‘만세’를 ‘반자이, 후레이’의 모방으로 몰아붙인 터이니, 한 사람의 비판자가 쓴 글을 뒤집어서 자기변명의 재료로 쓰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인가.

잠시 부연하자면, ‘만세’는 전근대에서부터 적잖이 정치적인 어휘였다.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명분론에서 ‘만세’는 황제를 위해서만 허용되었고, 제후 자격의 주변국 왕을 송축하는 데는 ‘천세(千歲)’를 써야 했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조의 각종 문헌에는 ‘만세’와 ‘천세’가 혼재하며,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경쟁했다. 189710월에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을 칭함으로써 이 긴장은 ‘만세’로 일원화되었다. 191931일 고종(高宗)의 장례를 계기로 모인 군중이 만세를 부른다면 ‘선황제 폐하 만세’ 같은 표현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그 대신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왕조의 통치자를 위한 송축의 어휘는 이 대사건 속에서 민족이라는 공동체의 주권을 요구하고 그 영속을 갈망하는 기표로 재정의되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당시의 시위자들은 고종과 함께 왕조적 질서에 대한 역사의 장례를 치렀던 셈이다”(「한국 근대문학」 308면).

이제까지 지적해온 종류의 무리를 황종연이 자주 범하도록 하는 요인은 민족주의의 발생 및 민족(국가) 형성을 식민주의의 효과로만 보려는 고정관념에 있는 듯하다. 발리바르의 저작 중 일부에 대한 이해의 어긋남에서 이 점을 다시금 살펴보자.

발리바르는 민족국가라는 정치적 형태의 등장 요인을 두가지로 집약했다. 하나는, 브로델과 월러스틴의 견해처럼, 그것이 세계체제의 불균형한 역학 속에 상호간의 경쟁적 도구로서 요구된 점이며,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의 이익을 위한 무력의 국내외적 동원과 노동력 공급원 및 시장의 전국화라는 필요성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소결을 맺었다. “궁극적으로 분석하건대, 저마다 다른 역사와 사회체제의 변형을 통해 민족적 형태들을 취하게 된 민족국가의 형성을 해명하는 요인은 계급투쟁의 구체적 양태들이지, 순수한 경제논리가 아니다.”17)

황종연은 이 논리과정의 전반부에만 주목하고, 그중 한 문장(“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근대적 민족(국가)은 식민지화의 산물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느정도는 식민지화되었거나 식민지를 가졌으며, 때로는 동시에 양쪽 모두이기도 했다”)을 발췌해 민족주의의 식민지적 기원이 필연적이고도 유일한 경로라는 주장의 원군으로 삼았다.18) 이에 대해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in a sense)이 명시하듯 그 문장은 세계체제의 불평등성이 전지구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보충이지 액면대로의 사실명제일 수 없다고 지적했다(「한국 근대문학」 304~305면).

이로부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황종연은 ‘in a sense’라는 관용구의 의미에 대해 기발한 주장을 내세운다. 아울러, 내가 제시한 두 계열의 반증사례 가운데 스페인・멕시코는 제외한 채 인도・베트남・한국・중국 중에서 한국과 중국은 민족주의 대두 당시 적어도 반식민지였으니 발리바르의 해당 문장도 사실명제로서 옳고, 자신의 전제도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중의 첫째 사항은 거론하기조차 자괴스럽지만 부득이하니 먼저 언급하고, 후자의 문제를 좀더 따져보기로 한다.

황종연은 문제 구절의 ‘in a sense’가 “대개 그 앞의 진술을 통해 확인하거나 논증한 바를 근거로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주장을 하는 경우에 문두에 사용”하는 어구라고 주장했다(「문제는」 450면). 하지만 영어사전들의 풀이와 용례는 크게 다르다.19) 이 관용구는 전면적 타당성을 단언하는 ‘in all senses’(어떤 의미로 보든)와 대조되는 것으로, ‘일면적이거나 특수하게 제한된 타당성’을 주장할 뿐 액면대로의 전면적 진실성은 유보하며, ‘다른 각도에서는 참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는 의미’임을 스스로 밝히는 표현이다.20) 같은 책의 불어판에서21) 이에 해당하는 구절은 “En un sens”인데, 그 의미와 용법도 영어에서와 같다. 더 결정적인 것으로, 발리바르는 후일의 저작에서 바로 문제의 대목을 각주로 명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민국가들의 법적・정치적 뼈대(삽입절 생인용자)는 세계의 분점 또는 칼 슈미트 자신이 “지구 전체의 분배법”이라고 부른 것의 맞짝을 이룬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근대 국민의 궤적은, 극한적으로 말한다면, 식민화와 탈식민화의 역사(우리는 여기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에 따라 전체적으로 그려진다고 주장하게 되었다.22)

 

인용된 둘째 문장의 “극한적으로 말한다면”은 그가 앞서 쓴 “어떤 의미에서는”(En un sens)과 수사적으로 등가관계를 이룬다. 발리바르는 이 구절을 통해 자신의 주장이 액면대로의 사실명제가 아니라 세계체제의 불평등 속에 상호간의 경쟁적 도구로서 국민국가들이 등장했음을 주목하는 차원에서 ‘양해될 만한 강조 내지 과장’임을 밝힌 것이다. 작게는 이런 화법을 분별하지 않고, 크게는 발리바르의 국민국가론이 다루는 정치사상적 논점들을 외면한 채 그를 보증인으로 붙들어두려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무리다.

이보다 중요한 실질 문제는 황종연이 주장하는 것처럼 ‘식민지를 보유하거나 식민지인 지역에서 반드시, 그리고 그런 곳에서만 민족주의가 발생하는가’, 다시 말해서 ‘식민화는 민족주의 발생의 필요충분조건인가’에 있다.

이를 부인하는 사례로서 내가 우선 주목했던 스페인, 멕시코에 대해 그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했다. 스페인은 16세기 이래의 근대식민사에서 가장 앞섰고 한때는 아메리카대륙에 최대의 식민지를 보유했다. 그러나 1820년대에 아메리카대륙의 식민지 대부분을 상실하고 나서 19세기 중엽에야 민족주의가 태동했다. 1821년에 스페인 식민체제로부터 분리된 멕시코는 험난한 내전과 외부의 침략을 겪은 뒤 멕시코혁명(1910~17) 시기에 와서야 본격적 의미의 민족주의가 대두했다(「한국 근대문학」 305~306면). 식민지를 가졌거나 식민지였던 그 장기간에 민족주의가 출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두 나라의 경우 식민지(화)는 민족주의 발생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었다.

인도, 베트남, 한국, 중국이라는 비교군의 경우는 내 글이 간결해서 그가 논점을 착각한 것일까. ‘민족주의를 식민주의의 필연적 부산물로만 볼 경우, 이들 지역에서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민족주의운동이 대두했다는 시기적 근접성이 설명되기 어렵다’는 지적에 대해 황종연은 초점이 어긋난 대답으로 논점을 비켜갔다. 당시에 네 지역은 적어도 반식민지였으니 자신의 가설이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식민주의 아래서의 모방학습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이라면 위의 네 지역처럼 ‘학습’기간과 식민체제의 유무, 밀도가 판이함에도 비슷한 시기에 민족주의라는 싹이 돋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인도 민족주의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설립으로부터 기산할 경우 3세기 정도가 지나서 형성되었다. 식민체제의 통치성을 감안하여 그 시발점을 내려잡더라도 민족주의 생성기까지의 역사는 매우 길다. 반면에 베트남은 응우옌왕조가 프랑스에 완전히 복속되고(1885) 근왕(勤王)운동이 실패한 뒤 1903년경부터 민족주의 국면이 열렸다.23) 한국 민족주의는 1890년대 중엽부터 형성되어 반식민지 상태인 1900년대 후반까지 급속하게 성장했다. 중국 역시 제국주의 열강에게 수많은 이권을 빼앗기고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특정 세력의 식민지가 아닌 상태에서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민국혁명(1911), 54운동(1919)으로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 형성의 외인을 발리바르가 말하듯이 ‘세계체제의 비평형적 역학이 요구한, 상호간의 경쟁적 도구’로 설명하는 것은 그럴 법해도, ‘식민주의 아래서의 모방학습’ 내지 ‘식민지배의 효과’로 좁혀서 규정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명백하게 무리다.

나는 민족주의가 모두 선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이 제국주의시대의 조류와 무관하게 순결한 욕망과 언어로만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동시에, 그 이름으로 호칭되는 여러 집단들의 행위・사유를 한데 묶어 식민체제의 사생아라는 식으로 총체화하는 논법은 또다른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여기서 상론할 여유는 없으니, 내가 최근에 그 이론적 행보에 주목하는 아프리카사 학자 쿠퍼의 말을 충고로써 환기해두고 싶다.

 

우리는 승리하던 국면의 반식민운동을 낭만화할 필요도 없고, 식민체제의 궁극적 위기가 닥치기까지의 행로에 피식민자의 행위들이 결코 아무런 변인(變因)이 되지 못했던 것처럼 취급할 필요도 없다. 식민주의는, ‘꼴찌가 첫째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위협받았듯이, 그 체제가 작동하고 표상하는 양식들에 내재한 균열들로부터도 많은 위협을 받았다. 우리는 식민지시대의 역사가 하나의 식민적 효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그 역사의 자취들을 정밀하게 탐구할 수 있다.24)

 

4. 원초주의와 근대주의의 사이

 

황종연은 내가 쓴 두편의 비판적 논설에 답하면서 선행논문인 「정치적 공동체의 상상과 기억」도 거론했다. 이 글은 ‘민족의 근대적 발명’이라는 논법이 유행하는 가운데 역사 이해가 부적절하게 단순화되고 있다는 경고로서 제출한 것이기에, 그의 반응은 긍부를 막론하고 우선 반가운 일이다. 다만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90년대 후반 이래의 ‘과도교정’을 우려하는 내 입장을 변별하지 않고, 민족이라는 ‘유구한 실체’를 고집하는 구시대적 담론과 새로운 근대적 구성론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으로 논의구도를 후퇴시켰다. 이것은 민족주의와 내발론을 비판하면서 얻은 입지를 더 진전시키지 못한 채 정당성의 단순 재생산에 탐닉하면서 그 외부를 보지 않으려는 지적 자폐증과 무엇이 다른가. 10년쯤 전의 대립구도에 안주하고, 담론 생산성 면에서 이미 불능화된 ‘민족주의적 구태(舊態)’를 매질하며 정당성을 향유하는 데 익숙해진 나머지 오히려 그 ‘구태’에 적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닐까.

위의 글에서 나는 민족형성론의 원초주의 대 근대주의라는25) 대립에서 후자가 ‘단절적 근대주의’로 경직화된 데 따른 문제를 비판하고, 두아라(P. Duara)와 던컨(J. Duncan) 등이 제시한 입장을 제3의 접근으로 제안한 바 있다. 민족형성론에서 근대주의는 흔히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동의어로 간주된다. 하지만 나는 구성주의가 민족관념 구성의 근대적 한정성을 반드시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포괄적인 개념이라 보고, 이 둘을 구별했다(「정치적 공동체」 47~49, 55~61면). 개념상의 변별을 명확히하자면 내 관점을 수정적 구성주의라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상상의 공동체라는 책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인도네시아사 전문가였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환기할 만하다.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도서(島嶼)지역 동남아는 해양과 종족적・문화적 요인들로 다양하게 분절되어 있다가 식민세력에 의해 대단위로 통합되거나 자의적으로 재구획되었고, 이것이 훗날 민족주의운동의 지리적 윤곽을 결정했다. 반면에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베트남 등 대륙지역 동남아는 크리스티(C. J. Christie)가 지적하듯이 식민지배의 경계선이 그 이전 국가들의 경계와 대체로 일치했으며, 식민화 이전의 국가가 강했을수록 민족주의의 기동력이 컸다.26) 일본, 한국, 중국의 경우는 대륙부 동남아보다 지리적・문화적 경계의 안정성과 정치적 통합의 내력이 길어서 민족주의 생성을 위한 유산이 더 풍부했다. 그런 점에 주목하여 퇴니슨과 안틀뢰브는 앤더슨의 민족주의 발생모델에 의문을 제기하고, ‘중국과 여타 유교사회에 대한 연구의 배경이 있다면 그런 저술은 불가능했으리라’고까지 비판했던 것이다.27) 내가 말하는 수정적 구성주의란 민족을 담론적 구성물이라고 보되 이런 역사적 차이들을 주요 변인으로 포함하는 접근방식을 가리킨다. 요컨대 나는 민족의식 형성에 관한 구성주의의 입장을 취하지만 그것을 ‘앞시대와 무관한, 근대의 발명’으로 단순화하는 근대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기는 해도 한국인들이 개항기 이전에 “민족형식의 결속을 이루고 있었다”고 내가 말한 듯이 황종연이 본 것은 자신의 이분법에 이끌려 만들어낸 가상이다. 민족을 ‘수평적 유대를 지닌 주권적 공동체’라 정의할 경우 신분・권리의 수평성이나 정치적 집단주권이라는 관념 요소는 근대 세계체제와의 만남 이전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아직 개입하지 않은 ‘모종의 문화적・역사적 유대를 지닌 동질집단’의 의식 내지 감각은 앞선 시대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조성되고 상속・경쟁・재구성될 수 있다.

이런 집단정체성의 여러 층위를 둘러싼 담론과 정치적 역학을 외면한 채 전근대사회는 절대왕권과 도덕의 전일적 지배 아래 촌락공동체 상태로만 머물러 있었으리라 가정하는 것은 두아라가 지적했듯이 자기인식을 근대만의 독특한 현상으로 보는 헤겔적 관념의 오류다. 두아라는 전근대의 정치적 정체성들이 반드시, 또는 목적론적으로 근대의 민족적 정체성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며 과거와의 중요한 균열이 존재하기도 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새로운 어휘와 새로운 정치체제(국민국가 단위의 세계체제)는 이들 오래된 표상들을 선택하고 변형하고 재조직하며 심지어는 재창조한다.”28)

다시 말해서 정치적 주권공동체로서의 근대 민족이라는 ‘상상’은 그 생성의 국면에서 활용 가능한 사회조건과 집단적 ‘기억’의 자원에 의존하고 또 그것에 제약받기도 한다. 물론 민족주의 내부의 다양한 분파는 그들이 호출해내는 기억의 목록과 이를 구성하는 정치적 상상력에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낸다. 근대적 민족관념의 형성에 작용하는 과거의 유산을 내가 중시하는 까닭은 민족을 ‘예로부터의 영속적 실재’로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상호작용들의 해명이 중요하다는 데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내가 비판한 것은 과거와의 그런 연관을 부정한 채 ‘기억 없는 상상’만을 강조하는 단절적 근대주의 모델이다.

황종연은 이러한 논리구도를 곡해했을 뿐 아니라, 내가 소개한 던컨의 글도 ‘한국사에서 전근대에 이루어진 원형민족적 결속이 자연적으로 근대 민족의 형성에 귀착했다’고 주장한 듯이 왜곡했다. 그는 내가 던컨을 원용한 요지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을뿐더러 던컨의 논문을 온전히 읽지도 않은 듯하다. 던컨의 주장은 근대사의 특정 국면에서 민족이 주권적 공동체로 호명되기 이전에 왕조체제의 작용과 여러 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집단적 인식(들)의 성장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어떤 조건과 만나서 근대적 민족인식의 질료 내지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번잡한 중계를 줄이고 던컨의 결론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나는 또한 엘리뜨와 평민을 막론하고 한국인들 사이에서 국가에 의해 표상된 거시적 집단성에 대한 귀속의식(sense of identification)이 20세기의 새로운 산물이 아니라 수백년을 거슬러올라가는 것임을 지적해야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 단위로 규정된 집단성이 〔전근대 한국인에게〕 유일하거나 최우선인 정체성의 근원이었다고 내가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두아라가 중국 사례에 관한 논의에서 지적하듯이, 국가라는 대단위 공동체에 대한 귀속감은 정체성의 여러 수준들 중 하나일 뿐이다. (…) 어떤 정체성이 특정한 시기에 우선권을 지니게 되는가는 역사적으로 우연한 상황들에 의존한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한국에서 그 상황들이란 제국주의적 국민국가체제와 불행하게 맞닥뜨린 것이었다.29)

 

던컨은 전근대의 원형민족적 결속이 ‘저절로 또 필연적으로’ 근대 민족주의로 진행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황종연은 던컨이 그렇게 주장한 듯이 기술하고, “원형민족적 결속은 아무리 강고하다 할지라도 일정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근대적 민족 형성으로 발전하지 못한다”며 엄숙하게 훈계한다(「문제는」 451면). 이 씁쓸한 희극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에서 식민주의를 특권화하고, 식민주의적 담론의 구성물이자 헤게모니 도구인 근대를 특권화하는 데 매몰된 사고가 그 원천인 듯하다. 이번의 반론을 보면 안타깝게도 그런 우려가 더 깊어진다.

 

 

5. 넘어서야 할 것들

 

황종연은 식민지시대 한국 역사학의 신라 인식에 관한 자신의 논의가 “피식민자가 식민자의 언어를 변형시켜 식민자의 목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동시에 피식민자의 필요에 맞게 사용하는” 전유(appropriation)에 주목한 것이며, 자신의 신라론 어디에서도 “식민주의 역사학의 해석이나 고고학의 발견을 합리화하려는 시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문제는」 436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내가 문제삼은 것은 그가 한국의 근대역사학을 식민주의가 생산한 지식의 차용이나 전용(轉用)이라는 계보적 파생성 ‘속에서만’ 보는 데 매몰되었으며, 한국 역사학자들이 자국의 전근대 역사서・자료・기억과 대화하고 해방적 이해의 창출을 위해 고투하기도 한 바를 무시하거나 왜곡했다는 것이다. 그는 식민주의를 가치론적으로 합리화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담론 생산의 원천으로서 독점적 위상을 지니는 듯이 가정함으로써 ‘발생론적으로 특권화’했다는 것이 내 비판의 핵심이다.

그는 한국사의 근대를 식민주의에 포획된 시간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위의 특권화는 곧 근대의 특권화와 표리관계를 이룬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는 전근대와 근대를 단절적으로 구획하고, 그 사이의 연관이 경시될 수 없다고 보는 이들은 민족주의적 퇴물이나 내재적 발전론의 잔당쯤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한국사와 문학의 전근대가 외부와 무관하게 근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는 내발론의 가정이 그릇되었다 해서 전근대가 정체성의 늪처럼 균질화되거나 다음 시대와의 역학관계로부터 배제될 일은 아니다. 단선적 진보사관의 믿음과 달리 역사는 다중적 시간성의 얽힘으로 형성되며, 과거 시간의 가닥들은 신기루처럼 일거에 사라지지 않고 그것들이 폭력적으로 접혀들어간 시공간에서 복잡한 작용의 역사에 관여한다.

황종연은 내 글에 대한 반론 제목을 「문제는 역시 근대다」라 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다. 까닭은 ‘근대’라는 어휘의 수상함에 있다. 두쎌, 차크라바르티 등과 근간의 한국 서양사학자들도 지적하듯이 ‘근대’란 식민주의시대에 유럽이 세계사의 중심을 자처하면서 진보의 역사라는 단일축 위에 근대-전근대, 문명-야만, 진보-정체(停滯), 중심부-주변부를 위계적으로 배치하고 ‘차이의 지배’를 정당화한 담론의 중핵이다.30) 그것은 보편적 시대개념의 외관 아래서 다양한 시공간적 차이를 근대성이라는 단일 척도의 장으로 몰아넣고, 근대와 전근대를 이분법적으로 평판화(平板化)했으며, 상이한 역사들을 성찰할 만한 시야를 폐쇄해왔다. 역사와 문화에 대한 우리의 논의가 탈근대적, 해방적이고자 한다면 근대에 권위화된 담론과 개념들의 구성성을 해부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근대’는 그것을 버리고 역사를 논하기 어려울 만큼 기본적인 어휘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근대’라는 술어와 그것이 동반한 유럽중심적 서사의 해체적 재검토가 긴요하다. 근대에 만들어진 가장 문제적인 구성물은 바로 근대라는 관념 자체다.

 

 

--

1) 「정치적 공동체의 상상과 기억: 단절적 근대주의를 넘어선 한국/동아시아 민족 담론을 위하여」, 『현대비평과 이론』 30호(한신문화사 2008년 가을); 「신라통일 담론은 식민사학의 발명인가: 식민주의의 특권화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 『창작과비평』 145호(2009년 가을); 「한국 근대문학 연구와 식민주의: 김철・황종연의 담론틀에 대한 비판적 검토」, 『창작과비평』 147호(2010년 봄). 이하의 논의에서는 이들을 각각 「정치적 공동체」 「신라통일」 「한국 근대문학」으로 약칭하고 출처 면수만 밝힌다. 비판대상은 위의 순서대로 〔신기욱, 헨리 임〕, 〔황종연, 윤선태〕, 그리고 〔황종연, 김철〕이었다.

2)) 이하의 논의에서 이 글은 「문제는」으로 약칭하고 참조 면수만 밝힌다.

3) 황종연 「신라의 발견: 근대 한국의 민족적 상상물의 식민지적 기원」, 황종연 엮음 『신라의 발견』(동국대출판부 2008) 20, 29면.

4) ‘한국 근대문학 성립’ 문제는 비판적 대안의 차원에서 「문학場의 변동과 문학관념의 변화」라는 별도의 논문을 준비중이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이 논문은 늦어도 금년 말까지 발표할 예정이다.

5) 황종연, 앞의 책 21면; 윤선태 「‘통일신라’의 발명과 근대역사학의 성립」, 같은 책 53~80면.

6) 윤선태 「‘통일신라론’을 다시 말한다」(『창작과비평』 146호) 376면.

7) 하야시 타이스께의 『朝鮮通史』(富山房 1912)는 『朝鮮史』(1892)와 『近世朝鮮史』(1902)를 합치면서 수정 가필한 것이다. 『동국통감』 등에서 발췌했다고 내가 밝힌 신라통일 요인론은 여기서 사라지고, “후세에 있어 조선 남북부가 모두 합일됨은 시작을 이때로부터 하는 것이다”(황종연 옮김)라는 서술이 첨가되었다.

8) 「許多古人之罪惡審判」, 『대한매일신보』 1908.8.8; 『단재 신채호 전집 6: 논설・사론』(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280면. 원문의 옛 글자 표기는 현대식으로 바꾸고, 한자는 일부만을 괄호 속에 남겼다.

9) 『단재 신채호 전집 6』 44~52면.

10) 『단재 신채호 전집 3: 역사』 204면. 『대동제국사 서언』은 1909~10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용하 「단재 신채호 전집 3권 해제」 참조.

11) “조선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동양사가로 손꼽히는 이마니시 류는 그의 1919년 8월 쿄토제대 강연록 「朝鮮史槪說」에서 신라가 당과의 교전을 끝낸 문무왕 14년(676) 이후에 ‘삼한통일’이 완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황종연 「신라의 발견」, 앞의 책 22면. 여기서 “문무왕 14년(676)”은 두 연대가 어긋나는데, 이마니시의 책에 있던 오류를 황종연이 그대로 옮긴 것이다. 今西龍 『朝鮮史の』(近澤書店 1935) 135면 참조.

12) 문일평 「朝鮮叛亂史論: 삼국편(9)」, 『조선일보』 1930.10.8; 『호암 문일평 전집 5: 신문・보유편』(민속원 1995) 77면.

13) 「독사신론」, 『단재 신채호 전집 3』 48면.

14) 문일평 「讀史閑評: 조선사연구초를 보고」, 『조선일보』 1929.10.15; 『호암 문일평 전집 5』 44면. 『조선사연구초』는 1924~25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6편의 논고로서, 1929년에 홍명희・정인보의 서발문을 붙여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여기서도 신채호는 신라통일 이래의 강역을 “구구한 소통일”로 규정했다. 『단재 신채호 전집 2: 조선사연구초』 296면.

15) 췌언이겠지만, 나는 이런 위치에 있는 신채호 역사학이 제국주의시대의 영토횡단적 지식・담론과 무관하다거나 전근대 한국지성사가 함양해온 ‘주체인식’의 자연적 결과였다고 단순화하지 않는다. 신채호는 근대의 격랑 속에서 과거를 읽었고, 지난 역사를 되물으며 당대의 문제와 맞선 점에서 그 누구보다도 ‘경계 위의 인물’로 조명될 만하다. 중요한 점은 그런 실천을 해명하기 위해 외부와 함께 내부를, 당시와 함께 앞시대로부터의 장력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16) 황종연 『비루한 것의 카니발』(문학동네 2001) 97~98면.

17) Étienne Balibar, “The Nation Form: History and Ideology,” Étienne Balibar and Immanuel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 Ambiguous Identities (London: Verso 1991) 89~90면.

18) 황종연 「문학이라는 譯語」, 『동악어문논집』 32호(동악어문학회 1997) 473면.

19)in a sense/in one sense/in some senses used to say that something is true in a particular way but there may be other ways in which it is not true or correct.”(Longman Dictionary of American English 2004); “if you say something is true in a sense, you mean that it is partly true, or true in one way.”(Collins COBUILD Advanced Learners English Dictionary 2006)

20) 다음의 예문들을 보더라도 이 점은 명료하다. “In a sense, both were right.”(Cobuild); “Were all competitors in a sense but we also want each other to succeed.”(Longman)

21) 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quës (Paris: La Découverte 1988, 1997).

22) 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후마니타스 2010) 127면. 이 자료와 발리바르의 저작에 대해 조언해준 진태원 교수께 감사한다.

23) 베트남 민족주의의 시발점으로는 보통 판 보이 쩌우(1867~1940)가 1903년에 저술한 『琉球血淚新書』를 꼽는다. 노영순 「러일전쟁과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의 維新運動」, 『역사교육』 90호(역사교육연구회 2004) 130면.

24) Frederick Cooper, Colonialism in Question: Theory, Knowledge, Histor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 32면. “꼴찌가 첫째가 될 수 있다”는 마태복음(20:16)의 구절을 빌린 파농의 말이다. 프란츠 파농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남경태 옮김(그린비 2004) 57면 참조.

25) 원초주의(primordialism)는 민족이 먼 옛날부터 이어져내려오는 자연적 실재라는 주장이며, 근대주의(modernism)는 이와 대조적으로 그것을 근대적 구성물(modern construction)이라고 본다.

26) 클라이브 크리스티 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 노영순 옮김(심산 2004) 43면.

27) Stein Tønnesson & Hans AntlÖv eds., Asian Forms of the Nation (Richmond, Norway: Curzon Press 1996) 9면.

28) 프라센지트 두아라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 근대 중국의 새로운 해석』, 문명기・손승희 옮김(삼인 2004) 93~95면.

29) John Duncan, “Proto-nationalism in Premodern Korea,” Sang-Oak Lee & Duk-soo Park eds., Perspectives on Korea (Australia: Wild Peony 1998) 220면. 던컨의 이 견해는 10년 뒤의 논문에서 두아라가 동아시아 민족주의에 대해 지적한 바와도 상통한다. “동아시아의 국가·사회들은 세계관이나 목표의식에서 〔전근대 단계부터〕 민족주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이들 각국이 저마다의 중심적 영토 내에 상당한 수준의 제도화된 동질성과 더불어 정치적 공동체의 역사적 서사를 자산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민족주의가 깊숙하게, 심지어는 농촌지역에까지도, 관철될 수 있는 중요 조건들로 작용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는 20세기에 와서 비서구세계의 여타 지역들보다 동아시아에서 훨씬 강력하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Prasenjit Duara, “The Global and Regional Constitution of Nationalism: The View from East Asia,” Nations and Nationalism 14-2(2008) 325면.

30) Enrique Dussel, “Eurocentrism and Modernity(Introduction to the Frankfurt Lectures),” boundary 2, Vol. 20, No. 3 (Autumn, 1993) 65~76면; 엔리케 두셀, 『1492년, 타자의 은폐: ‘근대성 신화’의 기원을 찾아서』, 박병규 옮김(그린비 2011); Dipesh Chakrabarty, Provincializing Europe: Postcolonial Thought and Historical Differenc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0); Frederick Cooper, 앞의 책 113~49면; 제임스 M. 블라우트 『식민주의자의 세계모델: 지리적 확산론과 유럽중심적 역사』, 김동택 옮김(성균관대출판부 2008); 이매뉴얼 월러스틴 유럽적 보편주의: 권력의 레토릭, 김재오 옮김(창비 2006); 한국서양사학회 엮음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푸른역사 200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