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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끝별
1964년 전남 나주 출생. 1988년『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자작나무 내 인생』『흰 책』『삼천갑자 복사빛』등이 있음. postellar@hanmail.net
앗시리아 저 별
안 보이던 별이 반짝하며 별 안의 별이 터지기 시작했던 그날을 그냥 2006년 2월 18일이었다고 하자
4억 4천만광년의 기억 속에서 안 보이던 맑은 별 하나가 화살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다고 하자
빛의 속도로 꼬박 4억 4천만년을 달려서야 내게 닿은 저 별과의 거리를 사랑의 거리라 하자
2006년 2월 26일 절정의 빛을 완성하고는 4억 4천만년 전에 사라진 저 별을 당신이라 하자
그 긴 밤들을 당신의 희디흰 이빨 아홉개가 쑥쑥 뽑혔던 아흐레의 은하수였다고 하자
셈할 수 없는 거리에서 한 우주가 푸-슉 터지면서 흩어진 하고많은 별들이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니
저 캄캄한 밤하늘을 당신과 당신과 하고많은 당신의 이빨들이 묻히는 사랑의 납골당이라 하자
46억년이나 늙은 지구라는 별도 태양과 더불어 얼추 그러니까 46억년쯤 더 늙으면
4억 4천만년 전 그날의 당신처럼 하얗게 터질 것이니 그 빛을 사랑의 빛이라 해두자
그러니까 그냥, 그날의 별빛을, 그날로부터 4억 4천만년 전에 폭발해버린 당신의 검은 구멍이라 해두자
4억 4천만년이 지난 어느 아흐레 밤 내내 누군가가 열렬히 사랑했던
불고 있던 흰 풍선이 막 터진 저녁
아흔아홉개의 이빨이 신(神)의 입천장에 막 들러붙는 저녁
나와 병과 성과 악과
푸른 사과가 구멍을 대신하는 것도
푸른 사과가 구름을 대신하는 것도
잠시 나를 대신해 살았던 죽은 이모가
한시절 입다 버린 내 바바리와 잠바를 들고 왔다
헐려버린 옛집 거실에 매달린 양파자루가
사르륵 사르륵
양파껍질 말라가는 소리를 냈다
일요일이면 찾아오는 애인이 벌거벗은 채
거대한 콘크리트벽에 거미처럼 붙어
네 다리를 더듬거리며 벽을 벗어나고 있다
사랑해 사랑해
등껍질 말라가는 소리를 냈다
직각의 콘크리트벽에서 뚝 떨어진 애인이
총알처럼 날아 허공에서 이모와 부딪칠 때
얼굴 없는 애인이 느닷없는 두꺼비가 되기도 하고
나가떨어진 이모가 거북이 되기도 하고
벌러덩 뒤집힌 거북 등껍질에 붙어 버둥대는 게
시퍼렇게 질린 내 얼굴이기도 하고
무거운 한 남자가 허공에 정지하는 것도
습습한 한 여자가 허공에 정지하는 것도
알고 보면 나와 병(病)과 성(性)과 악(惡)과
푸른 사과에 뚫린 한 구멍과
내 잠을 방해하는 한판의 살아냄, 텅텅 빈
더욱더 나와 병과 성과 악과
구름에 매달린 저 시끄러운 풍경소리들
치유될 수 있을까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