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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제11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
이지호 李智鎬
1970년생. 충남대 식품영양학과 졸업.(본명 이종분) bunsmile@naver.com
돼지들
어느날 돼지들이 사라졌다.
노란 우의를 입은 사나이가 피리를 불었다고 했다. 꽥꽥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돼지들이 따라나섰다 했다. 돼지를 몰고 가는 바람의 목관에 몇개의 구멍이 있었다고 했다. 그 구멍 속으로 돼지들이 산 채로 묻혔다고 했다.
마을에 낯선 투명한 음계들이 떠다닌다.
마을의 지하 군데군데가 팽창하고
증오는 모두 네개의 발자국을 가졌다는 소문이 돌고
막걸리잔에 붉은 핏발들이 가라앉았다.
골목엔 안개가 돌아다니곤 했다고 했다. 그 위로 은화 같은 봄꽃이 떨어지고 몇몇은 돼지발굽 모양이라고 우기기도 했다. 돼지들이 사라진 마을에 꽥꽥대는 고요가 돌아다닌다고 했다. 텅 빈 돈사마다 기르던 예의를 가두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고 했다.
병든 발굽을 하고 봄이 지나가고 음계의 어느 쉼표에도 돼지들이 살지 않는다.
포클레인 몇대가 지방도를 따라 꽥꽥거리며 지나갈 뿐
사라진 돼지들이
우적우적 마을을 먹어치우고 있다.
그리고 어제
최씨 성을 가진 한 사내가 빈 돈사에 목장을 맸고 오늘 마을 입구로 포클레인 한대가 천천히 들어오고 있다.
부유하는 평수
풀숲을 다녀오지도 않았는데
바짓단에 새까맣게 붙어 있는 도깨비바늘을 본다
이 부유하는 씨앗들의 안착지는 어느 곳일까
어쩌다 아파트 17층까지 따라왔을까
걸음이 없는 씨앗
그야말로 공중에 붕 떠 있는 이 고층은 담보의 평수인걸
이곳엔 더 이상 지반이 없단다
풀숲을 나가고 싶었니. 사람을 좋아해 이빨 모양의 악착을 배웠니.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날려주면 좋겠니.
색종이를 다섯번 접고
마지막 입구는 잠그지 않고 보관해둔다
발 없는 흡착.
아이는 도화지에 우리집을 못 그리고
이 거대한 공중에 우리집은 도대체 어디지?
같은 창문과 같은 평수와 같은 담보대출
문득, 풀숲을 갔다 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인데
너무 많은 것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다
빚도 시절도 도깨비바늘 같은 나이도 뿌리와 줄기를 가진 꽃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은퇴가 있는 수입, 은퇴가 없는 지출
이 적자(赤字) 종자 평수에 달라붙어 있는 도깨비바늘들
하루를 떼어내듯 저녁이 오고 아파트 불빛에 제곱의 공간으로 도깨비바늘들이 달라붙는다.
악착스럽게.
별의 거울
하물며 어느 작은 웅덩이에도
하늘이 담기지 않은 것 못 봤다
비는 먼저 떨어지고 뒤이어 빗방울이 보인다
작은 파문 모양의 꽃들이 빽빽이 피어 있는 저수지
어느때에는 바람의 일가가
주변 버드나무로 살다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별들의 거울에 오늘은 비가 내린다. 은하에 모여드는 별자리들이 수면에 둥둥 떠 있다. 오래전 청룡이 날아간 뒤로 곡식의 마디나 키우고 있는 저수(氐宿).* 가끔 작은 파문들이 모여 큰 파문이 되기도 했다.
지상의 물 고인 곳마다 은하계다
그곳에 사람 하나 없겠는가
아침부터 저수(貯水)를 빼고 있는 양수기 몇대
마을의 어린 행방들이 궁금할 때면 두꺼운 물의 뚜껑을 열곤 했다. 낚시꾼이 앉았던 의자며 온갖 기물들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 많던 별과 하늘과 빗방울과 바람은 다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하늘이 통째로 사라진 물속
사람 하나 같이 사라지는 건 일도 아니다
물을 먹은 것들은 모두 별자리 모양이다
어제와는 다른 각도로 물푸레나무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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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별자리인 28수(宿)의 하나. 동방청룡 7수 가운데 세번째에 해당된다. 하늘나라 임금이 지방(28수)을 순시할 때 머무르는 궁전이자 휴게실에 해당하는 곳.
견인차 기다리는 동안
산길은 이미 오래전에 시동이 꺼져 있다
갑자기 차는 산언덕 하나 넘지 못하고
쉬어가려는 듯
제일 잘생긴 그늘 하나를 차지했다
어떤 고통을 안고도 편안한 차
비포장의 떨림이 끊어놓은
저 먼 곳의 부위처럼
길 한쪽에 나뭇잎처럼 붙어서
어떤 고통은 지금 편안하다
바람이 점점 어두워져가고 있다
어스름이 데려가는 나무와 새집은
어디까지 흘러갔다 오는지
그저 어둑한 허공이 지붕이라는 듯
검은 물소리만 둥지를 품고 있다
그사이 오후가 밤으로 견인되고
손바닥에 휴대전화 액정만 밝다
캄캄한 어둠의 이불을 덮고 조용한 시간
부스럭거리는 불안마저도 점점 방전되어간다
끊어진 길
끊어진 시간들이란 이렇듯 깊은 저녁에 들어서야
어둠이라는 동색(同色)에 치유되는 것일까
나도 저 차도 모두 한 어둠에 잠시 끊어진 인연이겠다
멀리 견인차 오는 소리가 구불구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