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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영 鄭瑛
1975년 서울 출생. 2000년『문학동네』로 등단. 시집『평일의 고해』가 있음. jeffbeck0@hanmail.net
21세기 평온경(平穩經)
무주(無住)1의 밤 기차는 달린다
눈발들이 뜨거운 술잔에 떨어져
거룩하게 절망하기엔 갓 태어난 짐승들의 심장에
멍으로 스며든다
기차는 달린다
지구 반대편에 도착해, 건배를 하기 위해
바람이 검은 눈발이 허공에 지은 집의 뼈대만을 남기고
사바세계를 가만가만 어루만질 때
기차는 물컹한 나를 허공에 담가 뼈만 건져내려 하고
그 뼈로 사원을 지으려 하는데
묻는다, 무엇이 부처인가?
입을 쩍 벌리고 우는, 평온의 거리에서
불안에 떠는 심장에서 새로 막 뿜어진 피가
술잔에서 소용돌이치며 또 하나의 피멍이 된다
기차는 달린다
가면을 쓰고 나돌아다니는 욕망의 욱하는 힘으로
이 우주, 거짓으로 우는 먼지들 틈에서
거짓으로 절망하는 인간들을 싣고
심장을 꽉 쥐었다 놓는 녹슨 기적소리가
단 한순간, 살맛나게 한다지만
바람에게 가만가만 말해주었다
더이상 부서질 것은 없어-
그 순간, 그런 것들이 마구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달의 그림자
바람의 허무맹랑한 농담
먼지의 상념
장님의 전력질주 같은 것
드디어, 저기, 어둠의 궤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까운 이야기
새들이 스스로 죽기엔 아까운 새벽
사냥개들이 야생의 습성으로 잘살아보겠다고 새들을 물어뜯기엔
아까운 오후
구름들이 몰려와 나를 물어뜯을 때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내가 먹은 동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었다
소, 돼지, 말, 양, 염소, 닭, 오리, 토끼…… 당신, 당신, 당신들……
엉킨 구름들이 내 몸속에서 요동치니
이름 모르는 무덤 앞에서 울 뿐
할 일이 없고
살기에도 죽기에도 아까운 시간들이 뭉게뭉게
생겨나고 밀려오고 또 생겨나고 밀려오고
뭉게뭉게 시간들 아래
사냥개들이 물어뜯은 새들만큼이나
내가 물어뜯은 당신, 당신, 당신들……
그리고 당신들의
나는 태어난 이래로 많이 비참해졌다
__
- 무주(無住): 인연에 따라 생기고 바뀔 뿐 잠시도 머물지 않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