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김종광 金鍾光
1971년 충남 보령 출생. 1998년 『문학동네』로 등단.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 『모내기 블루스』 『낙서문학사』 『처음의 아해들』과 장편소설 『71년생 다인이』 『율려 낙원국』 『첫경험』 『군대 이야기』 등이 있음. kckp444@hanmail.net
불효의 시간은 더디더디
혼인에 칠순 팔순 잔치에 초상에, 왜 이리 그냥 오라는 데도 많고 가야 할 데도 많은지 정신이 없다야. 부조봉투 들고 다니다 겨울 다 갔다. 이번주에도 초상집이 둘이나 있었다야. 신기하지, 둘 다 목숨을 매달았어야. 요새 세상에 누가 자살한다고 뉴스거리나 되겠냐. 제일 높은 사람 제일 유명한 사람도 막 자살해버리는데, 션찮게 늙은 촌목숨 세상 등졌다고 무슨 말거리나 되겠냐. 근디 시골 아니냐. 죽을 나이가 돼서 죽은 것도 아녀, 무슨 사고나 병으로 죽은 것도 아녀, 자살로 죽었다면, 동네 사람들 뒤숭숭하지.
어머니는 심란한 낯꼴로 자분자분 주워섬겼다. 나는 한해에 여남은차례 얼굴을 비추는 것으로 자식의 도리를 다했다. 큰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편찮을 때나 자주 뵙지, 건강하고 안녕할 때는 도통 뵙지를 못하는 게 어버이였다. 무뚝뚝한 아버지는 저녁식사를 마치자 안채로 건너갔다. 아내가 요란한 설거지를 마치고 과일상을 보았다. 나 역시 붙임성이 없고 덤덤한 편이다. 간만에 뵌 어머니에게 살가운 말 한자락을 붙이지 못했다. 어버이를 뵈면 항상 궁금한 게 샘솟는 척해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아내마저 ‘침묵은 현금이다’라는 자태로 일관했다면 얼치기 효도방문은 얼마나 갑갑했을까. 시골물정 모르는 아내의 질문은 어머니의 수다를 이끌어냈다. 어머니는 삼동네에서 가장 말수가 적은 여인으로 유명했다. 말을 못하는 편도 아닌 듯한데, 어머니는 평소 말을 어떻게 참고 사는 걸까.
여든살도 훨씬 넘은 할아버지가 넥타이로 목을 매달았어. 건강이야 했지만 언제 워칙히 쓰러져 죽을지 모르는 나이 아니냐. 스스로 생목숨 끊어가면서 서둘러 갈 까닭이 대관절 뭐였을까나. 할머니 살아 있을 적에 죽을라고 그랬을겨. 그렇지 않겄냐? 할머니는 혼자 살 수 있지만 할아버지는 혼자 못 산다. 너도 알지? 그 냄새쟁이 노인네. 그 노인네가 냄새쟁이 된 게 언제부터냐? 할망구 먼저 보낸 다음부터지. 빨래를 못해 입으니께. 남자들이 다른 건 몰라도 세탁기 돌리는 법은 꼭 배워놔야 한다. 혼자 사는 노인네는 밥 먹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옷이 문제여. 다른 건 몰라도 느이 아버지 세탁기 돌리는 건 꼭 가르쳐놔야 되는디.
어머니도 참 별말씀을 다하셔요.
그래도 그 할아버지는 자기 집에서 돌아가셨기나 하지, 느이 아버지 동창분은 인제 나이도 일흔하나밖에 안됐는데, 참 말하기도 겁난다만, 연고도 없는 산에 올라가서 소나무인가 참나무인가에 혁대로 목을 맸지 뭐냐. 그분이 노가다꾼이여. 나는 여직도 느이 아버지한테 용돈을 타 쓴다만, 그분은 돈을 버는 족족 마누라한테 바치고 지우 차비나 타 썼다더라. 니들도 그러지이?
그럼요, 저는 돈을 관리할 줄 모르잖아요.
당연히 그래야지. 에미가 착실히 관리했으니께 그나마 네가 아파트 전세라도 사는겨. 에미야, 장하다……그분이 요번에도 겨우내 골프장인가 짓는 데서 몇백만원인가를 벌어갖고 왔단 말여. 그런디 그분이 생전 안하던 짓을 왜 했을까나. 백만원도 아니고 딱 팔십만원만 달랬다더라. 아줌마가 물었을 거 아니냐? 뭐에 쓰려는 거냐고. 아저씨가 그랬디야. 이날 이때까지 내가 번 돈 내 마음대로 써본 적이 없다. 한번만이라도 내 요량껏 써보고 싶다. 당신 속상하게 하는 데 쓸 일은 없으니 걱정 붙들어매도 된다. 계집이라도 생겼냐고? 같잖은 말 좀 하지 마라. 이 나이에 계집질이 가당키나 하냐. 그냥 내 마음대로 써보고 싶다는 거 말고 다른 거 없다. 나 같으면 팔십만원이 아니라 다 주었을 겨. 칠순 노인네가 그런 말 하는디 짠해서라도 그냥 다 줬을겨. 그런디 그 아줌마는 지금 돈 들어갈 데가 한두군데냐. 벌어도 벌어도 끝이 없는데 워칙히 된 양반이 쓸 생각만 하느냐. 밥 잘 먹고 테레비도 위성방송인가 달아서 화면 백개짜리 나오니 볼 것도 쌨다. 술? 내가 언제 술 안 사다준 적이 있냐. 당신이 소주 생각난다고 하면 슈퍼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왔다. 도대체 어디에 따로 쓸 돈이 필요하다는 건지 참말로 모르겠다. 이렇게 겁나게 잔소리를 했다더라.
차소리가 나고, 곧 큰 목소리가 들이닥쳤다. 저유. 저 왔슈.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맞으러 나갔다. 어이구, 진짜로 왔네. 올 필요 없다는디 왜 왔어. 어이구, 왔으니께 어서 들어와. 애들한테 아무 말도 안해놨는디, 참 당황스럽구만.
두 여자가 부산스럽게 들어왔다. 한분은 집안행사 때마다 늘 뵙는 먼 친척 아주머니였다.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찍 늙은 얼굴에 어머니처럼 호졸근한 입성이었다. 동반한 여자는 사십대 중후반으로 뵈는데 희디흰 셔츠에 검은색 투피스 정장차림이었다. 농촌에서 보기 힘든 인상적인 미모와 세련되고 날렵한 입성이었다. 두 여자는 시골 고양이와 도시 고양이처럼 안 어울려 보였다.
아내와 나는 엉거주춤 인사를 드렸다.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 ‘런닝맨’에 푹 빠져 있던 아들녀석은 손님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녀석의 머리통을 툭 건드리며, 인사드려야지, 했다. 녀석은 아이씨, 할 뿐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좋게 말하자면 숫기가 없고 나쁘게 말하자면 버르장머리가 없다.
판돈아, 밖에 있는 게 네 차지? 차 좋더라야. 저게 준중형이란 거냐? 자못 비싼 차지? 하는 일도 다 잘되고 돈도 많이 벌고 완전 승승장구라면서. 축하헌다, 축하해. 너는 소문난 효자니께 계속 잘나갈겨.
아주머니의 난데없는 축하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비싸지요, 36개월 할부예요.
어머니, 며느리 참 잘 얻었어유. 인물 참하지 키 크지 내조 잘하지 시부모님 잘 챙기지 어디서 이런 우렁각시가 굴러들어왔어. 진짜로 다른 거 없어유. 그저 며느리를 잘 얻어야 돼. 내가 다 고맙네. 우리 판돈이랑 잘 살아줘서. 아주머니는 아내의 손을 덥석 잡아쥐고 흔들며 덕담을 퍼부었다.
아내는 태어나서 칭찬을 처음 듣는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했다.
아주머니는 아이에게도 덕담을 베풀었다. 어이구, 참 예쁘게도 생겼다, 하며 쓰다듬는 손길을 녀석이 싸가지없이 탁 쳐냈는데도, 하하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뭐 보냐? 니이, 유재석이 나오는 거구나. 나도 저 프로 되게 재미나게 본다. 재미있냐? 대단허네. 몇살인디 저런 걸 다 즐기냐. 이게 네 공부하는 책이냐. 우와, 영어네. 벌써 영어를 좔좔 하는겨. 장기판이네. 너 장기 둘 줄 아는갑다. 판돈이 닮아서 머리가 겁나게 좋은 모양이네. 커서 판검사가 될라나 교수가 될라나. 뭐가 되도 훌륭히 되겄다.
녀석은 자기를 추어주는 말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런닝맨’ 볼 때는 텔레비전에서 나는 소리 외에는 세탁기 돌아가는 거로 여기는 놈이다.
이젠 어머니를 추켜세울 차례인가? 아니었다. 아주머니가 내게 불쑥 물었다. 판돈아, 어머니가 어떤 분이신 줄 아냐?
멍청해졌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아들도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정말로 어머니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머니의 유서와도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군복무시절 휴가 나왔을 때, 우연히 어머니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이주일에 네댓번꼴로, 장갑공장에서 겪은 얘기, 아버지 때문에 속상한 얘기, 자식들 때문에 속 터지는 얘기, 농사일과 가축에 관한 얘기, 그런 자잘한 사연이 간결하게 대여섯줄씩 적혀 있었다. 일기라기보다는 가계부에 가까웠다. 그리고 갑자기 그 글이 나왔다. 왜 죽어버리기로 결심했는지를 줄줄이 써놓은. 자주 아프기 때문에, 남편과 자식들에게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인생이 덧없어서, 살 이유가 하나도 없어서, 모든 고통과 번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사람 취급을 못 받고 사는 게 억울하고 분해서……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어머니에게는 죽어버려야 할 만한 이유가 숱했다. 어머니가 야속했다. 군대 간 아들은 개처럼 터지고 모욕받으면서도 죽을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는데, 왜 엄마가! 하지만 어머니의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충분히 알 것도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어머니가 그 유서 같은 일기를 쓴 지 다섯달이나 지나 있었다. 이제 자살충동을 극복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도 군대생활 하는 동안 문득문득 떨곤 했다. 어머니가 죽는 꿈을 꾸기도 했다. 현실에서는 어머니를 위해 단 한번도 울어본 적 없는 내가 꿈속에서는 참 서럽게도 울었다. 그런 불경한 꿈을 꾼 나를 죽이고 싶었다. 환갑 넘어 일주일에 한번씩 쓰는 요즘 일기에도 어머니는 곧잘 ‘죽고 싶다’고 적어놓았다. 일기에다 ‘죽고 싶다’고 쓰는 사람은 저 하늘의 별처럼 허다하다. 그렇지만 ‘죽고 싶다’는 일기는 자식에게만은, 부모에게만은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어머니가 일기장을 자식들이 머물다 가는 바깥채 텔레비전 밑의 서랍, 눈에 아주 잘 띄는 곳에 놓아두는 것이 싫었다. 아니다, 어머니 일기장을 보면 안심이 된다. 어머니가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그 마음을 누구에게 혹은 어디에다 풀었을 것인가. 어머니는 죽고 싶을 정도로 거시기한 마음을 종이에 풀었을 뿐이다. 요즘 일기에 쓰는 어머니의 ‘죽고 싶다’는 그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보통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별생각 없이 그냥 쓴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도시의 자식은 섬쩍지근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허나 어머니가 마흔일곱살에 쓴 일기는 지금 생각해봐도 자지리 섬뜩했다. 나는 어머니를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밤에도 어머니의 일기를 훔쳐볼 작정이다. 보란 듯이 가까운 곳에 숨겨진 어머니의 신변잡기를 읽어볼 테다.
감사하게도 아주머니는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던가보다. 아주머니 스스로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읊었다. 부잣집 딸로 태어나서 곱게 자란 분이셔. 외할아버지가 방앗간을 하셨어. 옛날에 방앗간을 했다면 큰 부자여. 그 옛날에 어릴 때 밭 한번 안 매고 밥 한번 안 굶고 자란 사람은 네 어머니밖에 없을 거다. 그런디 농사짓는 집으로 시집와가지구 사십년을 흙짐승처럼 사셨어. 몸이나 튼튼하게 태어난 분인가. 그 힘든 농사일에 축산에 이르케 못쓰게 되신겨……
아무리 불효자라지만 설마 죄책감도 없이 도시에서 나만 편안히 잘살까봐 친히 가르쳐주러 오신 건가?
어머니,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하며 어머니의 손을 담빡 잡은 것은 정장녀였다. 어머니, 어디어디가 아프세요? 저한테 아프신 데 다 말씀해주세요. 제가 다 들어드릴게요.
나는 저 여인만큼 살갑게 내 어머니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다. 나는 저 여인만큼 애틋한 눈으로 내 어머니를 바라본 적이 없다.
안 아픈 데가 없지유. 신경통하고 관절염은 기본으로 깔구 살아유. 쇠꼬챙이 같은 게 머리 안 쑤시는 날이 없다니께유. 팔 허리 다리 어디 하나 곧 부러질 것처럼 안 뻑뻑한 데가 없어유. 손가락도 굽고 발가락도 다 굽어서 서 있기 힘들 때가 많지유. 속은 또 어떻구유. 물만 마셔도 체하는 날이 거지반이라니께유. 얼굴 두 볼따구니도 사시사철 빨갛게 부어올라서는 보는 사람마다 왜 그러냐고 물어봐대니 귀찮아서 살 수가 없슈……
어머니가 말하는 동안 나와 아내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장남인 나는 죄인일 수밖에 없지만, 아내는 나랑 결혼한 잘못밖에 없다.
한데 정장녀는 착 달라붙어 어머니가 아프다고 말하는 곳을 족족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아이구 어머니! 어머나 어머니! 저런저런 어머니! 불쌍한 어머니! 안타까운 어머니!…… 연방 절규하며, 선거철에 양로원 찾은 정치인처럼 곰살궂게 구는 것이었다. 우리만 보기 아까운 참으로 감동적인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다.
정장녀는 더는 가슴이 아파서 못 듣겠다는 듯이 어머니를 와락 껴안았다. 그러고는 다따가 선언했다. 어머니, 이제 걱정 마세요! 제가 왔잖아요! 제가 다 고쳐드릴게요!
저분은 누구시기에 이토록 호언장담하시는가. 하늘에서 내 어머니를 위해 내려보내준 선녀님이신가?
……만병을 고쳐주는 욕조기가 있어요. 이 사진 좀 보세요. 이게 ‘스파크 반신욕조기’라는 건데, 온천의 나라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물건이에요. 욕조라기보다는 의료기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삼성 이건희 회장도 이 제품을 쓴다니까요. 대기업 회장이 쓸 정도면 얼마나 좋은 제품인지 말씀을 따로 안 드려도 아실 거예요.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정장녀의 정체 혹은 저의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적을 이길 수 있고 없고는 나중 문제다. 적을 모른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갑갑하고 무섭다. 적을 얼추 아는 것만으로도 구속에서 해방된다.
정장녀가 침묵하자 아주머니가 바로 뒤를 이었다. 나도 써봤는디 죽여야. 하루에 겨우 한시간씩 몸을 담가줬는디 허리통이 싹 나아버렸다야. 온몸의 나쁜 기운을 싹 뽑아내준겨. 야, 놀래지 마라. 휘어진 다리도 싹 펴주더라니께.
맥이 풀린 탓인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묻고 말았다. 진짜로요?
진짜지 그럼, 내가 왜 거짓말을 하냐. 내 다리가 쪼끔 삐뚤어졌었는디 스파크 욕조기 한달 사용하고 나서 쫙 펴졌다. 볼래? 자, 봐라.
아주머니가 치마를 걷고 내복 안 입은 다리를 쭉 뻗어보였다. 지천명 나이의 아주머니 다리는 희고 똑바랐다. 팬티 색깔까지 뵈는 바람에 민망했다.
그런디 네 어머니 다리 좀 봐라. 아주머니가 기습적으로 어머니의 치마를 걷어올렸다.
예순네살 어머니의 깡마른 안짱다리는 대나무로 만든 어섯활처럼 휘어져 있었다. 내복을 입었기에 망정이지 여름이었다면 맨다리에 가득 핀 검버섯도 봐야 했을 테다.
안짱다리는 어머니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아니, 요새 세상에 그걸 왜 안 고치고 살아요? 수술 한번이면 그만인데. 자식놈들이 수술비를 안 대주나? 몸에 절대로 칼 대지 마셔. 긁어 부스럼 되는 수가 있어유. 내 몸이 바로 그 증거여. 한번 수술하면 계속 수리, 보충수술을 해주야 된다 말이죠. 아예 시작을 않는 게 좋아유. 수술 지지론과 반대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어머니는 그냥 이냥저냥 살다 가야겠다, 다 늙어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생돈을 들이냐며 초탈해졌다. 수술을 한다면 최소 여섯달은 재활치료를 해야 한단다. 소 키우고 농사짓는 집구석에서 도무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고칠 수만 있다면 해야지, 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다지만, 어머니는 칠순 노인네가 홀로 동분서주하는 것을 초연히 감내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빨래를 걱정했다. 내일 당장 수술시켜달라고 니들한테 전화해야겠다 싶다가도, 빨래 생각하면 수술 생각이 싹 사라져야. 네 아버지가 나름 시골 멋쟁이다. 빨래 못해 입어서 느이 아버지도 냄새쟁이 노인네 되면 워칙하냐.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것이었다.
이 스파크 반신욕조기가 왜 이리 좋으냐? 욕조기 자체도 최고급 재료로 만든 최고급 제품이지만 비밀은 스파크 장치에 있어야. 니들은 배운 사람이니께 스파크가 뭔지 알겄지?
불꽃! 하고 크게 대답한 것은 우리 부부가 아니라 아들녀석이었다.
그려, 똑똑도 허네. 불꽃이여, 전기불꽃. 보통 장치가 아녀. 욕조기에 물을 받으면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노인네들 편하라고 참 간편하게도 만들었지, 스파크가 튀겨서 온천수를 만드는겨. 보통 온천물보다 훨씬 좋아야. 평범한 물이 금세 특급 온천수로 바뀌는겨. 집에서 날마다 간편하게 온천욕을 할 수 있다는겨. 온천물이 얼마나 좋으냐. 돈 많은 사람들은 한국 온천 놔두고 일본 온천 가서 담그고 오기도 하잖냐. 어머니도 온천장 다녀봤으니 아실 거 아녀유. 온천이 참 좋잖아유?
온천이 좋기는 좋지. 몇시간 담근 것뿐인디도 몸이 가뿐해지는 기분이 들기는 혀.
동네 아주머니들은 단체여행 갈 때 온천을 필수코스에 넣었다. 온천욕을 하고 와야 여행을 다녀온 걸로 쳤다. 온천장이라면 어머니도 제법 경험해본 것이다.
온천을 날마다 집에서 헌다고 해봐유. 몸이 안 좋아지겠어유? 허리가 안 났겠어유, 다리가 안 펴지겠어유. 만병이 고쳐질 수밖에 없다구유. 판돈아, 실은 내가 한달 전부터 어머니를 틈틈이 찾아뵙고 홍보를 해드렸어. 아버님한테도 말씀드렸지. 근디 아버님은 만날 술 취해 계셔갖고 못 알아들으시더라. 어머니도 온천 좋은 거 아니께 꾀꾀로 탐이 나시는가보더라. 근디 어머니가 돈이 없잖여.
어머니가 깜짝 놀라 질렀다. 내가 언제 탐을 냈디야? 나는 그냥 돈이 없다는 얘기만 했잖어. 돈 없는 할마씨한테 백날 떠들어봐야 소용없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 눈앞에 있다 한들 돈 없으면 티브이 속의 다이아반지 아니냐.
그려유, 어머니가 무슨 돈 있슈. 하지만 판돈이 너는 있을 거 아니냐. 야, 너는 네가 잘해서 잘된 거로 생각하겠지만, 어머니 정성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거다. 어머니가 절을 두세군데씩이나 댕기시며 너 잘되라고 불공드렸다는 건 삼동네가 다 아는 일 아니냐.
저 하나도 잘 안됐다니까요. 왜 자꾸 잘됐다고 하세요. 제가 잘됐으면 어머니 허리 다리 벌써 고쳐드렸지요. 잘 안됐으니까, 만날 아프신 거 보면서도 그냥 눈 딱 감고 쪽팔리게 사는 거 아닙니까.
아이구, 좋은 얘기 하고 있는디 왜 화를 낼라고 그런디야.
정장녀가 보충 설명을 했다. 우리나라도 곧 물부족국가 대열에 들 텐데, 이 욕조가 정말 획기적인 게 뭐냐면, 아침에 받아놓은 물로 저녁까지 온가족 모두가 쓸 수 있어요. 물을 한번 받아놓으면 정화장치가 있어서 불순물을 계속 걸러주거든요. 그러니까 하루 한번 받아놓은 물을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며느리가 모두 사용할 수 있지요. 물이 식지도 않아요. 늘 우리 몸에 좋은 최적의 온도를 유지해주거든요. 참 경제적이고 효율적이지요?
안내책자 표지사진 상으로 스파크 반신욕조기는 별로 특별해 뵈지 않았다. 스파크를 발생시킨다는 전기장치 등속과 불순물을 걸러준다는 순환장치박스 같은 것을 걷어내면, 평범한 싸구려 욕조와 똑같아 보였다.
도대체 가격이 얼마나 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절대로 물어보면 안된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어떤 물건의 값을 물어보면 그 물건을 사고야 마는 버릇이 있다. 판매원이 얼마라고 하는 순간, 물건과 가격에 대한 비판적 통찰력이 마비되고, 달라는 대로 돈을 세거나 카드를 내미는 것이었다.
아주머니의 역할은 더이상 없나보다. 이후부터는 정장녀의 일방적인 요설이었다. 정장녀는 안내책자에 다 써 있으니 읽어보면 알 거라는 말을 추임새처럼 섞으면서도, 한 페이지도 읽어볼 겨를을 주지 않았다. 활짝 웃는 낯꼴로 지당한 말, 다정한 말, 좋은 말만 골라서, 만병을 치유할 ‘특급 온천수 반신욕조기’를, 평생 고생해서 키워준 어머니께 그깟것 하나 못 사주면 완전 불효자 아니겠느냐로 요약할 수 있는 말을 줄기차게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나는 새총으로 쏘아대는 뾰족한 돌로 계속 얻어맞는 듯했다. 저는 원래 불효자예요, 불효자입니다! 발악처럼 부르짖고 싶었다.
아내도 과히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정장녀의 말은 아내에게 이렇게 들릴지도 모른다. 시어머니한테 욕조기 선물하겠다고 얼른 말해!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나쁜, 못된, 야박한 며느리야! 아들이 무슨 경제권이 있어. 아들이 사드리고 싶어도 며느리가 반대하면 안되는 거잖아. 며느리, 어서 결단을 내려. 시어머니 다리가 불쌍하지도 않니?
나는 견딜 수가 없어 물었다. 그게 얼만데요?
정장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을 했다. 아주아주 저렴해요. 이것저것 다 하고 설치비까지 해서 사백만원밖에 안합니다. 카드할부도 되지요. 효과를 생각해보세요. 만병을 고쳐주는 값에 비하면 얼마나 저렴합니까? 어차피 어머니한테 한달에 용돈 오십만원은 부쳐드릴 것 아니에요? 딱 여덟달치 한꺼번에 드렸다 치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정장녀는 가방에서 뭘 잽싸게 꺼냈다. 카드결제기였다. 자, 바로 결제해드릴 수 있습니다.
카드결제기를 보자 더럭 무서웠다. 오십만원이라니요. 지나친 상상력이십니다. 잘 벌 때는 삼십만원, 못 벌 때는 십오만원밖에 못 보내드려요.
애매한 십오만원은 뭐래요? 하여간 평균 이십만원 잡고 딱 스무달치네요. 스무달치 먼저 드린 셈 치면 되겠어요.
구경만 하다가는 남편이 일 저지를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없는 듯하던 아내가 칼을 빼들었다. 저희도 물건이 훌륭하다면 기꺼이 장만해드리고 싶지요. 문제는요, 스파크 욕조기라고 하셨죠? 이게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제품인지가 문제지요. 종일 물 데우고 순환장치 돌리면 전기세가 엄청 나오겠네요. 그리고 어떻게 아침에 받아서 사용한 그 물에,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며느리 성별도 없이 같은 물에 몸을 담가요. 아무리 물을 자체 정화할 수 있다 해도 그렇게 쓰게 될까요?
품질은 내 목숨을 걸고 보장할 수 있어요. 전기세도 약간 더 나오는 정도예요. 만병을 고치는데 전기세를 아끼자는 건가요?
스파크라는 것도 좀 이상하네요. 제 생각엔 그저 물을 덥히는 기능에 불과한 것 같아요. 물에다 대고 전기 좀 튀긴다고 해서 물이 갑자기 특효 온천수로 바뀐다니 판타지 같아요. 그리고요, 진짜 제대로 된 물건이라고 쳐도 이해할 수 없이 비싸네요. 욕조기 하나에 전기장치 순환장치 둘이라는 거잖아요? 이게 어떻게 사백만원이나 할 수 있죠?
따짐쟁이라는 별호가 아깝지 않은 아내였다. 오년 전, 아이가 다니던 고액 유치원에서 무슨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교육씨스템을 바꾼다며, 필수코스 특별활동 비용으로 이십만원을 더 받겠다고 했다. 중대형아파트 엄마들이 이십만원을 더 지불할 만한지 긴가민가 하는 사이에, 임대아파트 아내는 지금도 비싸 죽겠는데 더 올려받으려는 파렴치한 수작이라며 소형아파트 엄마들을 규합해서는 결사반대! 데모 수준으로 나대었다. 유치원으로 따지러 다니는 아내는 ‘철의 노동자’ 같았다. 결국 유치원은 야심차게 준비했던 특별활동 프로그램을 접고 말았다. 그 활약으로 아내는 따짐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유치원 원장은 내 아들녀석이 졸업할 때 악성 바이러스를 퇴치한 것처럼 시원했을 테다.
설치비가 들어간다고 했잖아요! 나를 다단계 같은 걸로 의심하는 것 모양인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 욕조기는 불법 물건이 아니라고요. 아니, 이렇게 안내책자가 있는데도 의심을 하나요. 이게 홈페이지 주소입니다. 혹시 컴퓨터 안 가져왔나요? 스마트폰만 터지면 회사 홈페이지 바로 보여드릴 수 있는데, 스마트폰이 안 터져서 홍보가 넘 힘드네요.
정장녀가 눈짓을 보내자, 아주머니는 건듯 웃었다. 좀 속상허네. 나는 어머니 아픈 거 생각해갖고, 나만 효능 보기가 아까워서 이런 좋은 물건을 소개하는 건데, 우리 본부장님을 사기꾼 대하듯 딱딱거리면 내 얼굴이 뭐가 되나. 내가 늘 웃기만 하는 년이기는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네.
나는 모처럼,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했다. 저희도 쪼들려요. 스마트폰도 없어요.
아내는 친근하게 웃으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감추지 않았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싸이버도 믿을 수가 없지요. 홈페이지 정도는 우습게 장난질 치는 사람이 수두룩해요. 뉴스에서도 자주 나오잖아요. 싸이버 사기 당한 사람들이 가슴 쥐어짜며 아파하는 거요. 싸이버범죄 수사대가 괜히 있겠어요?
정장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젊은 사람이 정말 진짜로,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못 믿어요?
저도 불혹지년이에요. 사람 말 잘 믿을 만큼 젊지는 않죠.
나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전쟁터에 아내만 남겨놓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기분이었다. 달과 별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삼월 하순의 밤바람이 사무치도록 시렸다. 화가 치민다. 사드리면 좀 안돼? 카드 할부하면 되잖아. 어머니한테 자잘한 거 말고 큰 거 사드린 적 있어? 화끈하게 한번 사드리면 안돼? 불법 다단계일 수도 있고, 욕조기가 아무 쓸모도 없는 불량품일 수도 있어. 어머니한테 욕조기에 들어가 있을 한가한 시간이 어디 있나? 며칠 쓰고는 곧 애물단지가 될걸. 하지만 까짓것 속는 셈 치고 사드리면 안되나. 사드렸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다. 어머니가 ‘내가 언제 탐을 냈디야’ 말할 때 나는 분명 보았어, 어머니의 눈빛을. 어머니는 정말 탐을 내고 있는 거야. 저 여자의 욕조기 선전은 내 귀에도 솔깃하게 들렸으니 어머니 귀에는 얼마나 달콤하게 들렸을까. 어머니는 수술만 아니라면 휘어진 다리를 고치기 위해 뭐든지 하고 싶을 거야. 몸만 담그고 있어도 된다니 얼마나 쉽나. 밑져야 본전, 욕조기를 그냥 갖고 싶을 수도 있어. 효과가 전혀 없다고 해도, 기분은 괜찮을 거야. 다리가 펴지는 기적은 언감생심이더라도, 대도시 상류층 여인네들이나 하는 걸로 알았던 반신욕을 날마다 하는 거니까 귀부인 할머니가 된 것 같은 즐거움은 맛볼 수 있지 않을까.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 욕조기에 들어앉아 있으면 어머니의 스트레스가 쫙 풀리면서 짜장 만병이 싹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잖아. 다 그만두고 어머니는 아들이 덜컥 사드리죠, 냅뜨기를 바랐을지도 몰라. 빈말이라도 어머니를 위해서 고민없이 돈을 쓰겠다고 설치기를 바랐을지도 몰라.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통 크게 사백만원을 긁을 수 있는 자식, 그게 바로 효자가 아닐까. 사백만원짜리 욕조기를 사드리면 한순간 불효자에서 효자로 변신할 수 있을 듯했다.
정장녀와 아내는 여전히 티격태격 설전중이었다. 어머니와 아주머니는 교환을 앞둔 포로들처럼 애매한 낯꼴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나는 오른손에 신용카드를 쥐고 있었다. 아내를 보면 마음이 바뀔까봐 미리 지갑에서 꺼내 손에 움켜쥐고 온 것이다. 신용카드를 정장녀 앞에 탁 내려놓으며 10개월 할부로 해주세요, 하고 싶었다. 그러나 역시, 아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 의지는 공약처럼 흔들리고 간장은 쪼그라들었다. 돈이 그렇게 무섭니? 어서 사겠다고 말해! 효자가 되어야 해. 불효자 낯부끄럽지도 않니? 어서 사란 말이야. 그런 명령을 내리는 것이 머리인지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명령에 맞서 카드 쥔 손가락을 꽉 모으고 절대로 펴지 않은 것은 타고난 자본주의적 본능인가?
정장녀는 이런 말까지 했다. 내가 이곳저곳 다녀보니까, 참, 자식들이 문제야! 우리 어머님들이나 아버님들은 당장 여기저기 아프니까, 이 욕조기를 많이들 갖고 싶어하시는데, 자식들이 어떻게 한평생 자기 키워준 부모한테 욕조기 하나 사주는 걸 아까워할 수가 있어? 어느 집은 말예요, 딸이 그래. 엄마, 고무다라이에서 목욕하면 되잖아! 아니, 우리 어머님들이 욕조기에서 반신욕 좀 하면 안돼? 꼭 그 겨울에 김장 담글 때나 쓰던 고무다라이에다 물 받아가며 해야 되냐고! 에이 몹쓸 아들 며느리들!
아내가 대거리를 했다.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그렇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쇼부를 보려고 하시면 안되죠! 정말 좋은 물건이고 꼭 필요하다 싶으면 며칠이 지나도 사긴 꼭 사요! 단돈 몇만원짜리 물건도 요모조모 따져보고 생각해보고 신중을 기하는데, 무려 사백만원짜리 물건을 지금 이 자리에서 안 사면 안될 것처럼, 천하의 불효자로 몰아가면서까지 이러시는 거 참말 불쾌해요. 친척 아주머니를 대동하고 오셔서, 지금 누굴 겁박하는 건가요? ……좋아요, 저희가 욕조기를 산다고 쳐요.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가 또 있어요. 어머님 아버님 집에 과연 이걸 설치할 수 있겠느냐는 거죠. 집구조가 매우 독특하단 말이에요.
어머니가 모처럼 사분거렸다. 아버지가 직접 만든 집이라 이 모양이다. 돈 든다고 목수 한번 부르고 미장이 한번 부른 거 빼고는 혼자 다 지으셨어. 처음엔 괜찮더니만 지은 지 삼십년은 돼가잖냐. 이게 고쳐서 될 집이 아녀. 이왕 손대려면 싹 뜯고 새로 지어야지.
어머니 말씀이 맞아요. 욕조기를 들여놓으려면 현재 옥외 욕실을 완전히 뜯어고치는 대공사가 불가피해요. 그러니 설령 우리 부부가 욕조기를 사드리고 싶어도, 아버님이 욕실을 새로 짓겠다는 결정을 하지 않으시면 욕조기를 들여놓을 자리가 없다는 거죠.
그거야, 재어보면 알지요. 아주머니, 욕실이 어디인지 알지요? 정장녀가 가방에서 줄자를 빼어들더니 후닥닥 뛰어나갔다. 아주머니가 강아지처럼 쫓아나갔다.
‘런닝맨’이 끝나고 아들녀석은, 시끄러워 테레비를 못본다니께! 사투리를 내지르고 꺼졌는데 작은방에서 만화 삼국지를 복습하는 모양이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 부부와 어머니만 남겨지니 난감했다. 어머니한테 여쭤보기라도 해야 하나, 이거 쓰시겠냐고? 어머니가 쓰시겠다면 사드릴게요. 아내가 아무리 길길이 날뛰어도 목숨을 걸고 사드릴게요. 끝내 말이 나와주질 않았다. 어머니에게 몹시 가혹한 질문일 듯했다. 아내도 어머니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기는 한데 쉬이 하지를 못하는 듯했다.
갑자기 어머니가 피식 웃었다. 느이 여동생도 그랬다.
뭘요?
너, 엄마 욕조기 좀 사줄래? 장난으로 물어봤더니 그러더라. 고무다라이에다 하면 되잖아.
어머니는 웃으라고 한 얘길까. 욕조기 생각만 하다가는 미칠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듣다 만 얘기가 퍼뜩 생각났다. 어머니, 아까 그 아버지 동창분 그래서 어떻게 돌아가신 거예요?
어? ……니이, 그 아저씨! 그 아저씨가 한사코 용돈 팔십만원만 달라고 하니께, 아줌마가 아저씨가 벌어온 돈뭉치를 집어던졌디야. 하필이면 아저씨 이마에다가. 아이구, 칠순 노인네가 마누라한테 돈으로 맞았으니 속이 오죽했겠냐. 다른 남편 같으면 마누라를 패잡았을 텐데 그 아저씨가 참 얌전한 사람이거든. 달라고 떼쓰던 돈을 한장도 안 줍고 밖으로 나가더니, 계속 안 들어오더랴. 이틀이 지나도록 안 들어오니께 산지사방으로 찾아다녔지만 못 찾았지. 보름이 돼서야 집에서 한참 떨어진 엉뚱한 산속에서 발견됐지 뭐냐. 죽은 분도 안됐지만, 산 사람도 안됐어야. 아줌마가 남편 죽으라고 돈을 던졌겠냐. 남편이 철없는 소리 한다고 여겨서 분김에 던졌겠지. 하필이면 그게 이마에 맞아갖고! 나도 제과점 다닐 때 맞아봐서 안다만 이마든 뒤통수든 돈으로 맞으면 정말 아프다. 농약 들이마시고 싶을 정도로! 그런디 웃기는 건 소문을 낸 사람이 그 마누라여. 장례 치를 때 하도 속상해서 그런가 문상객한테 스스로 그 얘기를 발설했디야. 자기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모를 얘기 아녀? 그래서 이상하기는 혀. 설마 마누라가 스스로 자기 쥑일년 만들 소리를 냈을까. 말 만들기 좋아하는 누가 그냥저냥 지껄인 소리가 정말인 것처럼 소문난 걸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혀. 혹시 철없는 자식들 때문에 퍼진 소문일 수도 있을겨. 아버지가 갑자기 왜 돌아가셨나 어머니한테 묻고 캐고 하다가 대강 헤아린 얘기가 소문이 된 것일 수도 있어. 소문이 참 무서운 법이여.
손님들이 돌아왔다. 정장녀는 30쎈티미터가량 뽑은 줄자를 휘두르며 주절댔다. 욕조기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아요. 업체 사람들이 공사까지 해주니까 새로 짓지 않고도 욕실을 손쉽게 새단장할 수 있겠어요. 일석이조네요! 일단 일을 저지르는 게 최선이에요. 카드를 긁어놓으면 어쩌겠어요. 자식들이 효도선물 사버렸다는데, 아버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겠어요. 정장녀는 내게 강제로 카드결제기를 안기기라도 할 태세였다.
안 긁으면 그 줄자로 내 목이라도 베겠다는 겁니까? 어디서 줄자로 삿대질이야?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내는 손님들을 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가 보았다. 아버님이 무섭습니다. 아버님과 상의해서 결정할게요. 이만 돌아가셔서 기다리시는 게 좋겠어요. 제발 좀 돌아가주세요. 어머니, 피곤하셔서 주무셔야 돼요.
아주머니가 내게 하소연하듯 물었다. 판돈아, 너는 왜 네 안사람만 말 시키고 워째 말 한마디가 없냐. 네가 가장 아니냐? 네가 어머니 아들 아녀? 네 생각을 말해보란 말이다. 욕조기 놔드리는 게 자식의 도리 아니겠냐?
저도…… 아버지가 무섭습니다.
어머니도 뒤를 이었다. 나도 애들 아버지가 무서워. 애들 아버지 허락 안 받고 무슨 일을 저질렀다가는 다 쫓겨날 각오를 해야 혀. 얘들도 아버지가 무서워서 지들 마음대로 무슨 일을 한 적이 없다니께.
어머니는 혹시 품었을지도 모를 욕조기에 대한 희망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 버린 듯했다. 하여 아들과 며느리를 돈 못 쓰는 불효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듯했다.
무서운 아버지가 별안간 문을 열고 들어와, 뭐 하는 짓이여, 당장 꺼지지 못해! 하고 상황을 정리해주었으면 좋겠다. 마흔한살이 되어도 아버지를 찾을 수밖에 없는 내가 불쌍하고 한심했다. 아버지는 정말 곤히 잠드셨나보다.
정장녀는 욕조기를 팔기 전에는, 그러니까 내가 계약서를 쓰거나 카드를 긁기 전에는 절대로 일어서지 않을 결심인 듯했다. 저 정도 인내와 끈기와 뻔뻔함은 있어야 뭘 팔아도 팔 수 있을 테다. 손뼉이라도 쳐주어야 하나.
욕조기 하나가 팔리면, 아주머니에게는 얼마나 떨어질까. 친척을 몇명이나 소개해주고 그중에 몇명이 사야, 아주머니가 구입한 욕조기 값이 나올까. 아주머니, 진정 만병이 치료되는 효험이라도 보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돌아다니시면 언제 욕조기에 몸을 담그나요?
아내가 없었다면 나는 벌써 카드를 긁고 지금쯤 그걸 왜 샀지 전전긍긍하며, 미쳤지 미쳤어 자책하고 있지 않을까. 정장녀와 당당히 맞서고 있는 아내에게 손뼉을 쳐주고 싶었다.
어머니의 속은 얼마나 너더분할까. 오늘밤 어머니가 일기를 쓴다면 뭐라고 쓸지 겁이 났다.
불효의 시간은 더디더디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