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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발레리 줄레조 『아파트 공화국』, 후마니타스 2007
이상한 나라의 초월적 통치자
우석훈 禹晳熏
성공회대 외래교수 honortomeadows@gmail.com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사상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이상한‘주의’로 변질되어 패거리와 작당을 만드는 데만 사용된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대체적으로 내가 우리나라 극우파들이나 우파들이 세상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방식에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쩌면 이렇게 변질된 사상에 대한 상식적 저항감 때문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이상한 현상이 90년대 중반 미국을 휩쓸었던 네오콘의 이상한 세상 인식을 맥락과 무관하게 기계적으로 재생산하는 우파들에게서만 발견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좌파들도 이상해서, 도대체 자신의 말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만약 우리나라를 이상한 우파와 이상한 좌파 들의 나라라고 정의한다면, 그중에서 가장 이상한 것이 한국의‘아파트’라는 데 나는 기꺼이 동의하고 싶다. 마치 전세계 모든 선진국들이 우리나라처럼 아파트를 잔뜩 지어놓고, 20평에 살면서 30평을 지향하고, 언젠가 40평에 살아야 겨우 태어난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비로소 세상을 돌아볼 수 있게 되는 양 여기는, 이 이상하면서도 도저히 동의하기 어려운 매우 특이한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대단히 한국적인” 상황이다.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좌파들은 물론이고 우파들에게도 지난 4년 동안 꽤 여러 경로를 거쳐서 대화를 시도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아파트에 살지 않으면 아파트에 대해서 도대체 뭘 아느냐고 되묻고,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당신도 그러고 사는 주제에 아파트에 대해 왜 트집을 잡느냐고 하고…… 이 요상한 논의구조는 사실상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상식적인 대화와 이른바 하버마스식의 합리적 소통을 가로막는 기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이와 비슷한 사례를 여성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그리고 지방과 풀뿌리 자치구조에 대한 논의에서도 발견했다. 아마 대부분의 논의가 이렇게 비상식적으로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의 논의구조가 우리나라의 좌파와 우파 모두가 동의하는‘아파트 중의 아파트’그리고‘상류층 중의 상류층’이 산다는 주상복합아파트인‘타워팰리스’에도 적용된다.
그래서인가? 결국 이 이상한 현상에 대한 진단을 위해 우리는 프랑스 지리학자라는 외국인의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시각을 빌려올 수밖에 없고,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한 우리의 자화상을 발레리 줄레조(Valérie Gelézeau)의 『아파트 공화국』(길혜연 옮김)이라는 저술에 비춰볼 수밖에 없다. 공정한 심판도, 모두가 믿고 동의할 수 있는 원로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소통 차단의 이 이상한 공화국에서 홀로 섬처럼 떠다니며 좌우를 초월한 유일한 통치자가 바로 아파트이다. 그리고 저자가 지적하는 모든 얘기, 심지어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하루살이 도시”(251면)라고 단언하는 마지막 진단까지 모두 사실이다. 불행히도 그리고 슬프게도, 그녀가 서울의 아파트 문명에 대해 진단한 내용은 정말로 사실이다. 아파트라는 건축양식을 통하여 통제적 문명을 재생산하고 있고, 그 안에서 중산층이 기꺼이 공동의 통제장치에 들어가고자 하며, 그럼으로써 21세기 한국경제가 건설산업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수학한 프랑스 고등사범학교는 멀리는 싸르트르 가깝게는 알뛰쎄르가 배우고 가르친 프랑스 최고 명문이며, 귀족을 가르치는 교육자를 양성하는 기관이다. 이 학교 학생들을‘노르말리앙’(Normalian)이라고 부르는데, 저자 역시 노르말리앙인 셈이다. 이 낯선 지리학자의 책을 보면서 느낀 가장 큰 자괴감은 나의 게으름이다. 나도 20대 대부분을 그녀가 공부했던 도시에서 보냈으며, 빠리나 런던 혹은 스위스의 쮜리히 같은 주요 도시들의 주택정책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고 서울의 방식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경제학의 관점에서는 잘 알고 있지만, 우리가 사는 이야기를 낯선 이방인의 목소리로 들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반성하게 된다.
서울이 과연 뭐가 그렇게 다른가? 70년대를 경계로 유럽의 도시들은 대부분 공동주택을 임대주택의 형태로 전환하고, 중산층은 개인주택 혹은 소규모 빌라의 형태로 옮겨가게 된다. 이런 일들은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그러지 않았다. 당연히 벌어져야 할 변화가 지체되는 동안에 서울에서는 재건축이라는 아주 이상한 부등가 교환장치를 통해 중산층 내부를 가르는 경제적 재분배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어떻게든 위쪽에 끼었던 사람들이 지금 한국의 지배층이 된 반면, 불운하게도 이 배에 타지 못한 사람은 하층민 쪽으로 내려앉게 되었다. 이 거대한 변화가 저자가 한국의 아파트에 대해 처음 연구를 시작한 1996년과 이 책의 출간 사이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이 변화를‘양극화’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주거양식과 문화에서 당연히 생겨나야 할 변화가 잠시 지체되는 동안 이런 재분배 메커니즘이 한국을 지옥으로 만든 셈이다. 당연히 저자를 제외한 한국의 지식인들 중 좌파나 우파, 그 누구에게도 학문적 알리바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이 변화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침묵했다. 무능하거나 악질, 둘 중 하나인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우리는 아파트라는 주거양식을 버려야 하는가? 물론 당연히 그래야 한다. 생태적이거나 민주적인 혹은 인간적인, 그 어떤 측면에서 검토하더라도 이 상황에서 아파트와 재건축이라는 방식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는 가난한 80% 이하의 국민들 혹은 20대 이하의 다음세대에게 아무런 희망과 행복을 제시할 수 없는 지옥 같은 재생산구조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어떻게? 그것은 이제 노르말리앙 지리학자가 아니라 한국의 지성이 답할 차례이다.
“공간이 좁아서 아파트에 살아야 한다!”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한다. 정말 그렇다. 이상한 나라여서 아파트를 짓고 또 지으며, 우리가 선진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리고 대다수의 국민들을 통제와 가난 속으로 밀어넣는 셈이다. 자, 이제 누가 이러한 진단에 대해서 답할 수 있는 지성이 되겠는가? 이 책의 후편이 나올 수 있을지, 그리고 과연 누가 그 문제의 답을 가지고 나올 수 있을지, 그게 저자가 우리에게 던진 진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