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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신경림 申庚林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1956년 『문학예술』로 등단. 시집 『농무』 『새재』 『달 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등이 있음.
그 집이 아름답다
저분이 선생님이시다. 삼촌의 외경어린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그 사랑방은 주춧돌도 집터도 남아 있지 않다.
모란과 작약이 있던 마당에 칙칙한 개망초가 어지럽게 피어 스산하다.
그는 모시 중의 차림이다. 어느새 그보다도 나이가 많아진 내가 그 앞에 앉아 있다.
선생은 평양을 가보았소? 개성을 가보았소? 그것이 당신이 꿈꾸던 아름다운 세상이었소? 나는 묻고, 그는 대답이 없다. 먼 산만 보고 있다.
그 안채도 우물도 간 곳이 없다. 울 너머로 내다보던 살구나무도 없다.
묵밭에 개망초만 스산하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묵밭은 허옇게 빛이 바랜다. 산도 하늘도 허옇게 바랜다.
그의 뜻을 따라 목숨을 버린 젊은이들의 넋이 허옇게 바랜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그 집은 재생된다.
사랑방과 대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던 우물과 그 앞의 살구나무가 되살아나고, 집 뒤로 늘어섰던 대추나무들이 되살아난다.
그는 모시 중의 차림이다.
개망초와 젊은 넋들이 묵밭을 허옇게 덮고 있지만,
그 집이 아름답다, 그가 이룬 것이 없어 아름답고 그의 꿈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더욱 아름답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아름답고 아무것도 남길 것이 없어 아름답다.
그 집이 아름답다, 구름처럼 가벼워서 아름답다.
내 젊은날의 꿈처럼 허망해서 아름답다.
즐거운 나의 집
사랑방에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은 텃도지가 밀려 잔뜩 주눅이 든 허리 굽은 새우젓 장수다.
건넌방에는 아버지가 계신다.
금광 덕대를 하는 삼촌에다 금방앗간을 하는 금이빨이 자랑인 두집담 주인과 어울려
머리를 맞대고 하루 종일 무슨 주판질이다.
할머니는 헛간에서 국수틀을 돌리시고 어머니는 안방에서 재봉틀을 돌리신다.
찌걱찌걱찌걱…… 할머니는 일이 힘들어 볼이 부우셨고,
돌돌돌돌…… 어머니는 기계 바느질이 즐거워 입을 벙긋대신다.
나는 사랑방 건넌방 헛간 안방을 오가며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한다.
중원군 노은면 연하리 470, 충주시 역전동 477의 49, 혹은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227의 29.
이렇게 옮겨 살아도 이 그림은 깨어지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사랑방에 아버지는 건넌방에, 할머니는 헛간에 어머니는 안방에 계신다.
내가 어려서부터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외지로 떠돈 건 이에서 벗어나고자 해서였으리.
어쩌랴, 바다를 건너 딴 나라도 가고 딴 세상을 헤매다가도 돌아오면 다시 그 자리니.
저승에 가도 이 틀 속에서 살 것인가, 나는 그것이 싫지만.
어느새 할아버지보다도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아지면서 나는 나의 이 집이 좋아졌다.
사랑방과 건넌방과 헛간과 안방을 오가면서
철없는 아이가 되어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하면서
나는 더없이 행복하다, 이 그림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