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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권력교체를 넘어 한국사회 새판짜기로

2013년체제의 전망과 과제

 

 

김기원 金基元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저서로 『경제학포털』 『재벌개혁은 끝났는가』 등이 있음.

 

박창기 朴昌起
(주)엔오푸스 대표. 희망제작소 이사. (주)팍스넷(증권정보 인터넷기업) 창립.

 

정태인 鄭泰仁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역임. 저서로 『착한 것이 살아남는 경제의 숨겨진 법칙』 등이 있음.

 

이남주 李南周
성공회대 교수, 정치학. 본지 편집위원. 저서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 『동아시아의 지역질서』(공저)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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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

 

 

이남주(사회)  이번호 대화의 주제는 최근 진보개혁진영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2013년체제의 전망과 과제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을 크게 바꿔보는 큰 원(願)을 세우자는 건데, 단지 권력교체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한국사회를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비전이라는 의미에서 2013년체제라는 개념을 사용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2013년체제에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가는 앞으로 본격적으로 논의해봐야겠지요. 얼마 전 서울시장 보궐선거도 결과는 다행입니다만, 선거과정을 보면 그런 새로운 비전이 구체적으로 유권자에게 제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2013년 이후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자는 취지에서 이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오늘 참석해주신 분은 진보개혁적 경제정책에 관해 많은 글을 발표하신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의 김기원 교수님, 지난 노무현정부의 동북아시대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이후 한국경제의 방향에 대한 많은 논쟁에 참여해오신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님, 그리고 창비 독자들에게는 좀 낯선 분일 텐데, 정보통신 관련해 일해오시다 최근 에너지 관련 사업을 하시면서 한국사회 발전 방향에 관해 제언해주시는 박창기 엔오푸스 사장님입니다.

우선 이명박정부의 출범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87년 이후 민주화가 왜 더 진전되지 못하고 퇴행적인 과정을 겪어야 했는지부터 짚어보죠.

  

87년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

 

金基元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저서로 『경제학포털』『재벌개혁은 끝났는가』 등이 있음.

김기원

김기원  87년체제가 불안정한 과도기 체제의 성격이기 때문에 퇴행도 쉽게 일어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과도기 체제라는 의미는 87년에 박정희정권의 개발독재체제가 일단 해체는 됐는데 그후 새로운 선진체제가 안착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 원인은 한마디로 한국의 발전이 압축적이기 때문입니다. 서구에서는 긴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대체로 중상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복지주의, 시장만능주의 순으로 발전해왔다면, 우리는 개발독재체제로부터 정치적 독재는 어느정도 떨어져나갔지만 개발체제라고 하는 중상주의가 잔존해 있고, 그것과 자유주의, 복지주의, 시장만능주의가 각축을 벌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 속에서 이명박정부가 4대강사업 같은 중상주의 정책, 다른 한편으로 부자감세 같은 시장만능주의를 펼쳐나가면서 퇴행이 나타난다는 생각입니다.

역학관계 측면에서는 87년체제로부터 진전이 저해되고 있는 요인을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남한 내부의 수구보수세력이 강고한 반면 진보개혁세력은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87년 이후 흔들리고는 있지만 분단 상황이 여전한 남북의 적대적 긴장관계가 자유주의적 개혁, 복지주의적 진보를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시장만능주의죠. IMF사태 이후 글로벌 스탠더드 운운하면서 확산된 시장만능주의 이데올로기가 국내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제 생각에 이건 근본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도 아니고 중국이나 유럽을 봐도 시장만능주의에 의해 그 사회가 움직여가는 건 아니니까요.

 

이남주  우리 사회에서 주되게 극복되어야 할 문제로, 지구적 차원에서의 시장만능주의가 있고, 국내적 차원에서 보면 수구냉전적 질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두가지 과제를 어떻게 배합할 것인가가 진보개혁세력의 진로에 관한 여러 논쟁을 유발하고 있지요. 김기원 선생님의 말씀은 글로벌 시장만능주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대응방식에 따라 조절될 수 있는 반면, 남북관계에서 파생되는 수구보수 우위의 세력관계와 이념지형이 87년체제를 발전적으로 끌고 나가지 못한 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정태인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지니계수(계층간 소득분포의 불균형 정도를 나타내는 수편집자) 같은 양극화지표라든가 다른 경제지표를 보면 제일 좋았던 때가 1985~95년입니다. 이 시기에 양극화가 줄어들고 소득 등 모든 면에서 격차가 줄어들었죠. 저는 그게 87년의 영향이라고 생각해요. 전사회적으로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분배에 대한 요구가 강하게 분출했죠. 그런 흐름이 급격하게 꺾이는 게 1995년이고, 그 상징적인 사건이 김영삼정부의 세계화 선언이에요. 한데 관료들은 이미 8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에 경도되어 있었어요. 그게 정책으로는 별로 나타나지 않다가 95년부터 금융시장 개방이 큰 영향을 미치면서 외환위기를 불러왔죠. 사실 지표상으로 보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때의 지니계수가 악화되는 추세는 별로 다르지 않아요.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거의 같은 속도로 나빠졌는데, 다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는 세금을 통한 복지에 의해 조세 후 지니계수, 즉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는 완화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러다 이명박정부 와서는 그것에서도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죠. 이처럼 경제정책이 시장근본주의 말기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경제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봅니다. 진보세력의 힘이 약해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책기조 자체가 그랬던 거죠.

시장만능주의에 영향을 받은 건 국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교육투기와 부동산투기에 빠진 시대가 90년대 중반부터였죠. 그때부터 한국이 무한경쟁사회로 들어섰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졌어요. 2000년대 초에는 급기야 ‘부자 되세요’ 같은 구호가 널리 유행하더니 이런 분위기는 2008년 총선에서 정점에 달했죠. 특목고, 뉴타운을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동시에 내세웠고 그런 후보들을 국민이 뽑았다는 사실은 생활 속까지 시장근본주의가 침투되어 있었다는 방증이죠. 그게 이명박정권을 불러왔다고 봐요. 지금은 이명박정권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여기엔 미국 금융위기가 핵심적 원인이라고 봅니다. 미국식 씨스템, 시장만능주의, 생태 등 여러 문제가 동시에 불거지고 있죠. 이 위기가 쉽게 극복되진 않을 텐데 우리가 이런 시대변화를 어떻게 반영해 어떤 사회를 만드느냐가 2013년체제의 주요 내용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김기원  정원장님 이야기 중에서 사실관계보다 해석 부분을 보자면,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소득분배가 개선되는 경향은 노동권의 강화와 더불어 고축적이 일어난 시기니까 가능했던 거죠. 그것이 과잉축적으로까지 나타난 게 IMF사태를 불러온 내부적 요인인 거죠. 여기에 무분별한 개방이라고 하는 대외적 요인이 결합된 건데, 그런 고축적 속에서는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니까 자연히 임금이 상승하고 분배상태가 좋아지죠. 하지만 금융시장 개방 때문에 갑자기 상황이 악화된 건 아니라고 봅니다. 금융시장의 무분별한 개방이 IMF사태를 불러온 요인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IMF사태는 결국 자본주의의 공황상태잖아요. 공황이란 건 그 이전의 과잉축적을 조정하는 거고, 그 과정에서는 시장에서 고임금 상태가 조정됨으로써 분배구조가 나빠질 수밖에 없죠. 일단 IMF사태 직후에 분배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가 그후에는 상대적으로 크게 더 나빠지지는 않아요. 더구나 복지정책에 의한 가처분소득의 분배는 거의 일정하거나 오히려 개선되는 경향도 보이고 있어, 우리 민주정부들이 적극적으로 시장만능주의 정책을 썼기 때문에 이명박정부로 정권이 넘어갔다고 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朴昌起 (주)엔오푸스 대표. 희망제작소 이사. (주)팍스넷(증권정보 인터넷기업) 창립.

박창기

박창기  87년체제는 우리가 세계에서 유례없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룩한 체제라고 생각합니다.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나름대로 이를 극복해서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만들었고 세계 15위 경제강국이 됐으니까요. 그런데 국민은 그만큼 행복해지진 않은 것 같아요. 함께 잘사는 사회가 아니라 이권집단만 잘 사는 사회, 지나치게 경쟁에 내몰린 사회, 태어난 조건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경직된 사회가 돼버린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두분이 말씀하신 세계화와 금융자유화가 시장근본주의를 불러일으키고 다양한 문제의 근원이 됐다는 것은 거의 전세계적인 현상이죠. 그래서 우리가 쉽게 피해가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해요. 이명박정권이 탄생한 이유에 대해 저는 민주정부 10년간의 실정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노무현정부 말기에 민심이 등돌린 이유 중 하나가 빈부격차가 더 심해졌다는 거였죠. 그전까지만 해도 OECD 국가 중에서 빈곤층의 비율이 평균 아래였는데 이때 많이 올라갔죠.

 

 

민주정부 10년과 이명박정부가 남긴 것

 

정태인  노무현 대통령이 새시대의 장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구시대의 막내였다고 하는 표현은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씨스템의 경향과 민주정부의 지향이 부정합되어 있었던 거죠. 실제로 전세계적인 압력에 많이 끌려갔어요. 그때와 지금이 왜 다르냐면, 지금은 글로벌 씨스템의 압력이 줄어들고 오히려 혼란이 일면서 이렇게 갈 수도 있고 저렇게 갈 수도 있게 되었다는 점이죠. 글로벌 씨스템의 압력을 비껴서 새로운 전형을 만들 수도 있고, 경쟁일변도가 아니라 다같이 사는 방법도 가능하다는 데 국민적 공감대도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에 2013년체제에서 민주적·진보적 가치가 구현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물론 오랜 기간 혼란과 위기가 계속되다 보면 반대의 가능성도 있지만 민주정부 10년의 정세보다는 오히려 더 유리한 조건일 수 있습니다.

 

李南周 성공회대 교수, 정치학. 본지 편집위원. 저서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 『동아시아의 지역질서』(공저) 등이 있음.

이남주

이남주  지구적 차원의 변화가 새로운 비전의 모색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점은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국민이 사회적 불평등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인 2007~8년 당시 왜 그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세력이 아니라 이명박정부라는, 그 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먼 쪽을 지지했는가라는 점은 해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 앞으로 진보개혁세력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의 열쇠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추상적인 진보적 가치만 내세운다고 될 일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김기원  박사장님은 민주정부 10년의 실패가 이명박정부의 등장을 초래했다고 말씀하셨는데, 두 정부가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고는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지나친 혹평이 아닌가 합니다. 욕을 많이 먹은 집값문제만 해도 그 시기에 영국이나 스페인 같은 다른 선진국에선 집값이 더 올랐거든요. 공과 과를 잘 평가할 필요가 있어요. 다만 두 민주정부가 87년체제의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지니는데, 한계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그 때문에 국민이 이명박정권에 기대를 걸어봤지만 그것 역시 실패하니까 서울시장 보궐선거 같은 결과가 나온 거죠. 87년체제의 성과는 독재를 극복하고 노동권이 인정받게 된 것이고, 87년체제의 모순은 경제 차원에서 보면 불안, 불만, 고단함이라는 세개의 키워드로 설명될 것 같아요. 오늘날 한국은 구매력 기준의 1인당 GDP3만달러로, 이딸리아나 뉴질랜드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이처럼 선진국 수준임에도 불안하고 불만이 있고 고단하다는 것, 이게 87년체제의 문제인데, 이것이 어찌 보면 87년체제를 바람직한 2013년체제로 변화시키게끔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불안이라는 요소를 살펴보면, 과거의 고도성장단계에서는 성장 자체가 복지문제를 완화 혹은 은폐해왔습니다. 그런데 자본과 노동이 성숙하면서, 즉 산업구조가 선진국형에 도달하고 고령화가 진전되면서 중성장단계 또는 저성장단계로 진입했지만 이에 걸맞은 복지씨스템은 미비한 거죠. 자녀양육이나 실업이나 노후에 대한 불안이 그런 현상들입니다.

불안이 복지, 즉 재분배(2차분배)의 문제라면 불만은 1차분배의 문제입니다. 시장소득의 불공평에 대한 불만인 거죠.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불공평한 경쟁에 대한 불만, 한편으로 공공부문을 포함한 대기업 정규직과 다른 한편으로 비정규직 혹은 중소기업 근로자 사이의 부당한 격차, 즉 동일노동-동일임금이 적용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죠. 또 부패와 투기에 의한 불로소득이 과거보다 줄긴 했지만 여전히 지속되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고단함의 문제를 보면, 생산과 재생산에서 선진국 따라잡기 식의 성장모델이 87년 이후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그에 따라 과도한 입시경쟁, 장시간 노동, 노년 노동이 이어지죠. 우리나라는 노년층 노동비율과 자살률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어요. 이런 현상이 고단함을 가져오는 거죠. 이게 87년체제의 문제고 민주정부도 극복하지 못한 문제죠. 이에 대해 이명박정부에 기대했다가 또다시 실망한 상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鄭泰仁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역임. 저서로 『착한 것이 살아남는 경제의 숨겨진 법칙』 등이 있음.

정태인

정태인  주체 측면에서 지금 87년체제의 모순을 보자면, 우선 정당과 노동조합 등 여러 조직의 관계가 유럽과는 달리 파편화됐죠. 정권을 바꿔 자신들의 생각을 실천할 수 없으니까 사실상 민주노총의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노조는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해졌거든요. 이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떨어지고요. 고전적인 방식의 주체가 한국사회에서 실패했다는 거죠. 다만 시민사회는 세계에서 제일 강한 것 같아요. 아시아에서만 비교해도 일본 시민사회는 지역공동체로 너무 내려가서 중앙에 영향력이 없고, 중국은 아예 시민사회가 존재하지 않죠. 미국이나 유럽에도 우리처럼 역동적인 시민사회는 드문 것 같아요. 물론 민주화가 진전됨에 따라 공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방향으로 가야 되는데, 그동안은 민주화가 오히려 개인적 해결 쪽으로, 각자 ‘나는 경쟁에서 이길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게 하다 보니 이명박정권이 나왔고, 그게 지금은 깨졌다고 봅니다. 이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비전을 제시하면 국민이 받아들일 거라고 봐요. 2013년체제가 지금은 진보적 가치, 공동의 해결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불완전한 민주화와 시장권력의 강화

 

이남주  87년체제의 진전을 가로막았던 부분이 여전히 2013년체제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87년체제 이래 변화를 만든 힘은, 아래로부터의 압력과 행정부 장악을 통해서 얻었죠. 물론 국회에서도 일정한 동력이 나왔지요. 특히 민주정부 10년이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사회의 이념적·사회적·경제적 자원이 분단체제하에서 형성된 기득권층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분배된 상황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았고, 그것이 여러 개혁 시도를 좌절시킨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생각해요. 이처럼 한국적 맥락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러한 사회적인 힘 내지 자원의 불균등 분배라는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2013년체제도 좌절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김기원  87년체제가 지니는 정치사회적인 문제는 민주화가 불완전했다는 점이죠. 과거엔 독재정권이 우리 사회의 모든 세력을 견제했는데, 최상위의 독재권력이 떨어져나가니까 재벌, 언론, 검찰 같은 새로운 중간권력이 등장해요. 이에 대한 민주적 견제장치가 미비한 거죠. 한편으로 거대기업 노조도 노동자 내의 특권집단으로 부상하고 있는 점이 불완전한 민주화의 한 측면이죠. 또다른 측면은 지역주의 정당체제가 존속하고 계급계층 정당이 미처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당의 대표성 문제가 해결이 안되고 있어요.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은 어느 정당이 대변하는가, 미조직 노동자나 자영업자는 도대체 누가 대변하는가, 이런 문제가 있는 거죠. 그리고 남북관계에서 87년체제의 모순은 햇볕정책을 취하긴 했는데 안정적이지 못해서 이명박정부에 와서 쉽게 ‘비바람정책’으로 회귀하게 된 것입니다. 햇볕정책의 성과가 경제적 측면에 한정되었고 정치군사적 측면에서는 미비한 상황이거든요. 이러한 87년체제의 모순을 민주정부 때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이 2013년체제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박창기  과거 10년을 보면 외환위기 이후 우리 기업의 힘이 매우 강해졌죠. 외환위기 직후 우리나라 증시 시가총액이 300조원까지 떨어졌지만 지금 1000조원까지 올라왔잖아요. 그리고 국제경쟁력이 크게 높아지고 부채비율은 대폭 떨어졌어요. 이렇게 생산되는 부가가치의 양이 막대하기 때문에 선진국이 된 거죠. 그런데 집단화된 10퍼센트의 소수가 개별적인 90퍼센트의 다수를 착취하는 구조가 고착화되었어요. 재벌, 관료, 고임금 노동조합 같은 소수집단이 다수의 공익을 침해한다는 거죠. 특히 재벌의 지배주주들이 지배권을 악용해 회사에 손실을 입히면서 자기이익을 빼돌려요. 편법상속이나 비자금 조성 같은 탈법적인 재산 불리기가 노무현정부 시절에도 많이 있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삼성의 편법상속을 노무현정부가 사실상 인정해줬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대기업 노조나 전교조에서 지나치게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노력이 비정규직을 늘어나게 한 하나의 이유가 된다고 봅니다. 재벌은 시장만능주의 이데올로기를 이용했고, 대기업 노조는 진보나 평등 같은 이데올로기로 자신의 집단이익을 합리화했던 거죠. 관료집단, 언론인, 법조인, 의료인 같은 엘리뜨집단도 지나치게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흘렀어요. 대학등록금이 턱없이 비싸진 데는 대학교수들의 집단이기주의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이렇듯 각 터에서 기득권을 확보한 이권집단의 힘이 강해지는 경향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정태인  민주화를 이루고 독재를 타도한다는 게 국가의 약화로 나타날 수 있거든요. 국가의 약화가 한편으로는 시민권의 강화이지만 동시에 시장권력의 강화일 수 있죠. 상징적인 사건들이 몇개 있어요. 그중 국가가 재벌과 정책을 놓고 싸우다 처음으로 패배한 1988년 금리 논쟁이 있었죠. 통화량 증가냐 억제냐를 놓고 재벌과 줄다리기를 하던 조순 부총리가 금리자유화라고 해서 금리문제에서 후퇴하고 임금을 억제하는 데 합의하죠. 93년쯤에 김영삼 대통령이 고위관료들을 삼성연수원으로 보내기도 했어요. 이런 사건들에서 알 수 있듯 시장권력이 굉장히 강해졌어요. 우리 국민에게는 삼성이 김연아 같은, 국가대표 선수죠. 이런 면이 87년체제가 진보적 가치나 공동의 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에요.

 

 

동아시아, 새로운 전략적 거점

 

이남주  2013년체제의 비전으로 이야기를 옮겨갔으면 합니다. 국내적 씨스템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의 변화가 동북아, 한반도 차원의 규정을 받는다는 점도 연관시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태인 선생님께서 최근 세계적 차원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민주적·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도 표명하셨는데, 이를 활용할 중요한 계기로 동아시아 협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이것이 다시 남한 내부의 개혁에 물꼬를 터줄 수도 있겠지요.

 

정태인  동아시아 시대가 온다는 얘기가 10년 전부터 나오기 시작했죠. 그때는 일본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었는데, 그후로 동아시아 시대라는 말이 마치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취급되다가 이번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G2체제, 즉 중국이 과거 일본처럼은 되지 않으리라는 게 확인된 셈이죠. G2체제를 통해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떤 위치를 점할 것이냐가 중요해졌죠. 노무현정부 당시 동북아시대위원회의 구상은 중간자 역할을 하자는 거였어요. 노대통령의 표현대로라면 동북아 균형자였죠. 그게 이제 더욱 중요한 시대가 되었어요.

 

박창기  2008년부터 전세계적으로 많은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공급이 부족한 시대에서 수요가 부족한 시대로 바뀐 것이에요. 인류 역사에서는 대체로 공급이 부족했죠. 그래서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소비가 되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법칙도 있었죠. 그런데 20세기 말부터는 생산능력의 과잉시대가 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중국이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기 때문이거든요. 문제는 유럽과 미국이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를 감수하면서도 그걸 소비해오면서 균형이 맞았는데 그 균형이 이제 깨졌다는 겁니다. 미국과 유럽이 노령화되면서 소비가 줄어들죠. 이번 금융위기의 핵심 원인 중의 하나도 이거라고 봐요. 새로운 시대, 즉 수요부족시대를 해결할 역량을 지닌 나라가 앞으로 세계경제를 이끌어나갈 강국이 될 겁니다.

여기에 한국이 세가지 측면에서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고 봐요. 첫째, 수요를 만들어낼 여지가 큽니다. 서민층, 빈곤층에 대한 복지를 강화해서 소비를 늘릴 수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은 이미 국민소득이 4,5만달러 선이지만 우리는 2만달러 수준이니 서민층에 일자리를 주고 복지혜택을 주면 소비가 늘어나고 소득도 10년 안에 3,4만 달러로 갈 수 있다고 봅니다. 둘째, 중국이 세계 최대의 소비증가국이 되었죠. 지리적·경험적·문화적으로 가까운 우리에게 엄청난 기회가 열린 거죠. 셋째는 북한의 존재인데요,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600~700달러 정도라고 보는데, 남북경제교류가 활발해지면 10~20년 안에 그 열배가 넘는 1만달러까지 가는 게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에게 기술과 노하우, 자본이 있기 때문에 그렇죠. 물론 전략을 잘 세워야 하고 국민적 동의가 있어야 하겠죠. 수요를 적극적으로 창출하는 전략으로 경제성장을 통해 세금을 더 걷고 복지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남주  동아시아가 지구적 자본주의 확장무대가 될지 아니면 새로운 성장모델을 만들어낼지의 문제가 여전히 제기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남북경제협력에 대해 신자유주의를 북한으로까지 확장하자는 것 아니냐라는 지적도 있었는데, 다른 경로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해보자는 것이지요.

 

정태인  지금은 과거 동북아시대위원회의 구상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이 많이 갖춰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금융협력 구상, 치앙마이 협정(Chiang Mai Initiative)의 확대, 여기에다 각국간 통화스와프까지 합쳐지고 있거든요. 한단계 더 나아가 공동 외환보유고 관리에 이르면 사실상 아시아통화기금의 전(前) 단계까지 가는 거죠. 동아시아 지역의 외환보유고가 4조달러가 넘어요. 2조달러 정도면 충분히 위기를 막을 수 있고, 나머지 2조달러를 역내 격차를 줄이는 데 쓸 수 있어요. 박사장님이 말씀하신 수요창출이 전후 유럽의 부흥에 큰 역할을 했는데, 동아시아의 미개발 지역에 공동기금을 써서 역내 격차를 해결하자는 비전이라면 중국이나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죠. 여기까진 국가간에 충분히 합의할 수 있다고 보는데, 에너지·생태문제는 좀 어려울 겁니다. 중국이 경제발전을 위해 에너지를 확보하면서 생태문제는 외면하는 전략으로 가기 때문이죠. 국가들끼리 해결하지 못한다면 시민사회가 나서야죠. 각국 시민들이 자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식으로요. 에너지·생태문제에서는 지금 아시아가 가장 후진적이니 유럽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중국의 부상, 위기인가 기회인가

 

이남주  전후 유럽의 부흥이 미국의 마셜플랜으로 가능한 것이었다면, 아시아는 일단 자기 돈으로 할 수 있는 조건이고,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데 이 노선을 세워서 간다면 아시아가 새로운 세계경제 발전의 엔진 기능을 할 것 같습니다. 저도 에너지·생태문제는 상당히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요. 한가지 긍정적인 면을 보자면 중국에서도 생태문제의 해결 없이는 성장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이미 인식하고 있고, 국가적 의제로 만들어 대응하려고 하거든요.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태인  지금 EU가 위기를 맞고 있잖아요. 근본적 원인은 역내 격차를 해소하지 않은 채 단일통화를 쓰고 있기 때문이죠. 동아시아에서도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역내 격차를 해소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중국은 자기 내륙의 문제를 먼저 생각하겠지만, 북한이나 몽골이나 동남아시아의 발전이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데 합의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중국의 역할 확대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일본이 여기 동조해 앞장서는 형국이었는데 지금은 일본이 빠지고 오히려 이명박정부가 그걸 막는 역할을 하겠다고 하니 상당히 시대역행적인 거죠.

 

김기원  중국과의 관계가 87년체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돌파구가 될 수 있느냐, 이건 좀 의문이 듭니다. 중국과 관계를 어떻게 맺든 간에 87년체제의 불안, 불만, 고단함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저는 중국이 87년체제 극복의 결정적인 열쇠라기보다는 동반발전의 대상이라고 생각해요. 동아시아의 동반발전이라는 차원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끌고 나가야 할 텐데,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너무 홀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요.(웃음) 한일FTA도 지난 정부에서 중단시켰죠. 환경이나 에너지문제에 대한 동아시아 차원의 대응이라는 면에서도 일본이 이 분야에서 앞서 있으니까 협력할 수 있겠고, 북한을 바람직한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가도록 도와준다고 할 때도 일본과의 공동노력이 필요한데, 너무 일본을 소홀히 하는 게 아닌가요. 워낙 중국의 힘이 강대해지고 있으니까 대등한 차원에서 협력하기 위해서도 일본과의 관계를 지금보다는 돈독히 다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말을 보태고 싶습니다.

 

정태인  유럽합중국(USE) 건설 논의는 거의 100년이라는 역사가 있어요. 레닌이 1915년에 그에 관한 글을 쓴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에 비해 동아시아 논의의 역사는 30년 정도에 불과하죠. 새로운 동아시아 씨스템의 운영원리, 어떤 사회를 지향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활발해지는 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U의 형성 당시로 되돌아가보면, 미국의 입장에서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공동체로서 유럽의 공동체 성립을 방조했는데, 동아시아는 이에 비해 나쁜 조건이죠. 미국 입장에서는 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이 공동체 안에 있으니 어떻게든 견제하려고 하겠죠. 미국을 구슬리고 압력을 완화시키는 정책을 써야 하는 거죠. 또 하나, 중국 역시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김교수님 말씀하고도 통하는데, 일본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거죠. 러시아나 동남아도 유력한 세력이 될 수 있죠. 중국과 미국 어느 쪽의 패권도 원치 않는 나라들의 연합이라고 할까요. 러시아, 남북한, 일본, 동남아시아까지 연결하는 연합을 형성하는 것도 분명히 중요한 전략입니다. 이건 동북아시대위원회 때와는 다른 거죠. 그때는 중국이 지금만큼 크지 않았으니까요.

 

 

동아시아 구상 속에서의 남북경협

 

이남주  이런 국제적 환경을 남한의 개혁과 잘 연결하기 위한 고리를 찾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동북아-북한-남한이 새로운 차원의 협력구도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고, 나진항 개발이나 신의주-딴뚱(丹東) 개발에선 구체적인 진전도 있습니다. 이런 조건들과 기존의 남북경협사업을 연결시킨다면 한국사회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새로운 동력이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요?

 

박창기  북한문제가 참 어렵고 복잡하잖아요. 군사적·이념적 문제에다 국제관계와 국내정치까지 얽혀 있는데, 저는 ‘경제집중전략’을 써보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핵이나 군사, 인권, 세습 문제도 일단 미루고 오로지 경제만 갖고 얘기하자는 겁니다. 개성공단에는 현재 약 5만명의 북한사람이 일하고 있는데, 가족을 포함하면 20만명이 개성공단에 의존하죠. 이 사업을 5년간 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사업의 규모를 지금의 10배로 늘리자는 겁니다. 그러면 노동자 50만명, 가족 200만명에, 관련 경제인구까지 합쳐 600만명 정도, 즉 북한인구의 약 25퍼센트가 개성공단 덕분에 먹고살 수 있게 되죠. 만약 이렇게 되면 북한이 절대로 무리하게 행동할 수 없어요. 미국과 중국에 넘어간 대북정책의 주도권도 우리가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핵위협과 전쟁 가능성도 낮아지고 인권, 세습 문제도 풀릴 수 있습니다.

개성공단과 비슷한 것을 금강산 주변과 철원 등지에도 만들어놓으면,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은 거의 없어진다고 볼 수 있죠. 그 지역들이 핵심 군사지역이니까요.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은 지금 수익은 잘 내고 있는데, 문제는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안정만 되면 투자를 많이 하고 싶어합니다. 이를 통해 북한경제가 발전하고 대규모 수요도 발생할 겁니다. 발전소, 도로, 상수도 같은 사회간접자본을 대거 건설하고 주택도 400만 가구 이상을 지어야 합니다. 시멘트, 철강, 전기가 엄청나게 필요하죠. 북쪽 광산에 풍부한 자원이 있는데 투자수익성이 매우 높습니다. 인건비에 비해 노동력의 질은 굉장히 좋고요. 복잡한 정치나 외교 문제와 구분하여 경제협력을 진행시켜 북한에서 대규모 수요가 발생한다면 가장 이익을 보는 건 북한주민이고 두번째는 남한기업이죠.

 

이남주  여기엔 두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북한의 경제성장과 남한의 경제씨스템 변화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경제협력에 집중한다고 했을 때도 정치적 요인 때문에 한순간 날아갈 수도 있으니 이를 대비해 최소한의 정치적 환경을 어떻게 구축할지입니다.

 

김기원  이명박정부 들어와서 남북관계가 비바람정책으로 인해 엉망이 되는 바람에 북한과 중국이 대단히 밀접해졌고, 이에 대해 한국의 보수파나 진보파 모두 우려하고 있어요. 비유하자면 이혼한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사귀는 게 속 쓰린 상황이 아닌지.(웃음) 북중관계를 통해 북한인민이 기본적인 삶을 유지하는 건 좋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북한은 주로 광산물이나 수산물을 제공하고 중국으로부터 쌀과 경공업 생필품을 받는 식의 분업구조예요. 이를 통해서는 북한이 제대로 된 산업발전을 이루기 힘든데, 그 역할은 남한이 맡아야 할 것이고, 박사장님 말씀대로 개성공단 같은 걸 여러개 짓는 것도 방안이겠지요.

지금 개성공단에는 중소기업만 잔뜩 가 있는데, 대기업도 진출을 해야죠. 과거에 대우가 남포공단에 위탁가공을 맡기고 현대그룹은 관광사업을 했지, 제조업이 본격적으로 진출한 건 아니잖아요. 예컨대 10·4선언에서 나왔던 안변(安邊) 조선협력단지 같은 게 실현되면 이야기가 확 달라질 거고, 대기업의 사회적 영향력을 감안하면 남북관계에서 한단계 더 말뚝을 박게 된다는 거죠. 개성공단 같은 걸 양적으로 확대해가는 동시에 질적으로 대기업 제조업이 진출하면 남북관계가 역진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산업인프라를 정비하는 겁니다. 한·중·일 공동지원을 통해 전력, 철도, 도로 같은 기반시설을 지원하고 대기업 제조업이 진출하면 남북경협이 한단계 올라갈 수 있죠. 인권이니 세습이니 하면서 북한정치에 간섭하면 득보다 실이 많죠. 그런 문제는 남한의 인권단체에서 발언해야지 정부가 나설 사안은 아니거든요. 그러나 정치적인 개성공단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남북연락사무소 같은 정치적 차원의 개성공단을 만들어서, 박사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경제협력에 집중하되, 이를 정치적으로 보강함으로써 남북연합 등의 진전된 남북정치관계로 나아가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태인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일단 이명박정부 정책대로 하면 안된다는 건 확실히 증명됐습니다.(웃음) 이명박정부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정책은 일견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게임으로 치면 ‘반복 죄수의 딜레마’(각자 이익만 추구하다 서로 손해를 입는 상황을 가리키는 게임이편집자)예요. 북한이 그걸 ‘치킨게임’으로 바꿔버려 결국 손해 많이 보는 쪽이 포기하고 지는 형국으로 변한 거죠. 그래서 응징은 할 수 없고 계속 당해야만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반면 햇볕정책은 ‘사슴사냥 게임’(상호협력을 통해 서로의 이익이 커진다는 게임이편집자)이었죠. 핵문제에 관해서는 햇볕정책 더하기 6자회담이 평화협정을 맺고 평화공동체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상 제일 중요한 건 상호신뢰인데, 자잘한 문제 하나만 걸려도 안되는 게 남북사업이에요. 남북 철도연결사업을 예로 들자면, 여기엔 김일성의 유훈(遺訓)이 있어요. 남북간 철도를 복원하면 동해선(부산-나진)이나 경의선(서울-평양-신의주)으로 연결하라는 거죠. 그런데 가장 합리적인 건 경원선(서울-원산)이에요. 동해선일 경우 부산으로 들어온 물량 중 수도권으로 오는 게 65퍼센트인데, 이게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하바롭스끄로 가야 하죠. 더구나 남쪽의 동해선 일부 구간은 현재 끊어져 있어요. 하지만 경원선은 수도권에서 원산을 거쳐 하바롭스끄로 바로 갈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건 유훈과 다르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제안한 건 일단 경의선과 청년이천선(황해도 평산-강원도 세포)을 따라 북한의 동해를 거쳐 간다는 건데, 이건 북한의 중앙을 관통하는 길이에요. 동북아위원회의 구상은 이에 맞춰 영동선을 놓자는 거였어요. 동해선 위쪽은 연결되어 있으니까, 수도권 물량이 영동선을 따라 가면 북측의 바람과도 맞는 거죠.

또 하나 제약조건은 재경부였습니다. 북한의 철도를 개선해야 되는데 정보가 없으니 어떻게 예산을 세우느냐는 거였어요. 이 면에서는 상황이 상당히 급진전되고 있어서 희망을 갖는 게, 러시아 가스관 사업 때문입니다. 이 사업이 성사되려면 가스관과 함께 철도와 통신망 같은 인프라까지 개선해야 하는데, 그러면 북한 내부가 다 공개되기 때문에 상당한 신뢰가 필요하죠. 이 사업을 통해 신뢰를 쌓으면 이게 대북사업의 기폭제가 될 수 있어요. 문제는 언제나, 굉장히 오래 걸린다는 겁니다. 어쨌든 이 부분을 합의해서 러시아와 함께 북한의 내부 인프라를 건설하자고 하면 한국 입장에서도 에너지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니 반대할 수 없어요. 또 국제적인 공동사업이니 북한이 거부하기도 어렵죠. 북한 퍼주기에 대한 국내 비판도 피할 수 있고요. 여기에는 김교수님도 말씀하셨지만 대기업 진출이 중요합니다. 북한의 가장 큰 불만이 왜 현대나 삼성은 안 오냐는 거예요. 들어오면 믿겠다는 거죠. 국내 대기업이 북한에 들어간다면 한진중공업처럼 필리핀 쑤빅에 조선소를 지을 이유가 전혀 없거든요. 이런 것들이 이루어진다면 남북경협은 급진전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벌개혁의 원칙과 방향

 

이남주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87년체제의 가장 중요한 한계 중의 하나가 사회양극화의 심화인데, 이게 경제 씨스템으로 보면 재벌 주도와 수출의존형 성장 메커니즘에 의해 만들어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80년대까지는 대중적으로 재벌에 대한 반감이 강했는데 90년대 이후 재벌이 글로벌 플레이어로 도약하면서 국가발전의 상징처럼 이미지화된 것 같아요. 그러다가 최근 몇년 사이엔 상황이 또 바뀌어 심지어 『조선일보』에서도 재벌문제를 제기하고 있죠. 재벌이 다시 심각한 경제적·사회적 폐해로 대두되는데 이를 87년체제의 한계 극복과 연결할 필요가 있어요.

 

김기원  재벌개혁은 흔히 오해하듯이 재벌 죽이기, 재벌 혼내기가 아니라 재벌 거듭나게 하기인 거죠. 이와 아울러 재벌과 다른 경제부문 사이에 균형을 찾는다는 걸 원칙으로 삼는다면 크게 세가지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어요. 첫째, 재벌그룹 내부 면에선 황제경영의 지속과 총수의 부패 및 무능 문제입니다. 이걸 해결하려면 경영의 투명성・책임성・전문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투명성이 핵심고리예요. 그걸 확보하려면 검찰과 법원이 온전히 제 할 일을 하면 됩니다. 사실 그게 쉽지는 않죠. 기득권층이 서로 다 연결되어서 그런데, 검찰이나 판사는 재벌한테 돈 안 받아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 직업적 자긍심을 회복하면 불가능하진 않아요.

둘째, 재벌그룹 외부 면에선 중소기업에 대한 재벌의 수탈과 힘의 불균형 문제입니다. 힘의 불균형을 근본적으로 완화하는 데는 두가지 접근이 있습니다. 하나는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죠. 정부가 보호해서 힘을 갖는 게 아니라 자생력이 생기면 이른바 갑과 을의 관계가 완화될 수 있어요. 중소기업 노동자가 오래 근무하면서 숙련도를 높이고 생산성을 올리면 됩니다. 일본이나 독일에서 중소기업이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대기업과의 경쟁이나 협상에서 덜 억압받는 이유는 바로 그 씨스템 덕분입니다. 그러려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실질임금격차를 줄여야 돼요. 공공부문은 민주적 견제에 의해 임금을 낮추고, 대기업부문은 그럴 수 없으니 사회 전체적인 복지를 강화해서 (중소기업 노동자에게) 간접임금을 주는 거죠. 실질임금격차를 줄이고 중소기업 노동자의 생산성을 향상시켜 경쟁력을 키우는 게 기본이죠. 또 하나는 일시적인 건데, 경쟁력이 올라갈 때까지 협상력을 제공하는 방법이에요. 예컨대 상대적 약자인 노동자가 노조를 설립해서 자본과 협상할 수 있도록 하듯이 중소기업들의 연합체에 강력한 단체협상권을 부여하는 방법이죠.

셋째, 재벌그룹과 한국사회 전체의 문제인데, 재벌그룹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상호 견제해야 할 산업과 금융을 재벌이 함께 장악하고 있음은 물론 정계, 관계, 법조계, 언론계, 학계를 포섭하고 오염시키죠. 이걸 해결하려면 금산분리원칙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론 검찰이 제대로 서고 선거제도를 돈이 덜 들게 고쳐야 합니다. 이미 SNS 덕분에 돈 덜 드는 선거가 가능해지고 있는데, 한단계 진전시켜 가령 독일식의 비례대표제를 대폭 강화하는 식으로 가면 돈 들 일이 크게 없죠. 그리고 학계부터 재벌한테 돈 받는 일을 안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사회 지도층의 자체정화가 필요한 것이죠.

 

박창기  재벌문제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방법은 기업과 지배주주를 확실히 분리해서 얘기하는 겁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회사는 우리 국민의 귀중한 자산이고 인재들의 소중한 일터니 앞으로도 잘 키워야 됩니다. 이 회사들을 지배하는 일부 오너가 탈법적으로 기업의 이익을 갉아먹고 자기 배를 불려온 게 문제죠. 특히 과거 4,5년 사이에 너무 도가 지나쳐졌어요. 불법을 하지 말고 떳떳하게 경영하라는 겁니다. 일단 순환출자구조를 전면 금지하고, 금산분리를 엄격히 지켜야 합니다. 지금은 은산분리, 즉 은행과 산업을 분리하는 정도이지요. 증권회사 만들어서 그룹의 영향력을 이용해 주가를 올리잖아요. 심각한 건 개인이 지분을 갖고 있는 회사와 그룹계열사를 거래시키는 것이에요. 영향력을 이용해 회사에 손해를 입히고 자기의 이익을 취하면 불법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비자금 조성, 배임, 횡령, 불법 로비 같은 건 법대로 처벌하면 되죠. 그래도 계속 불법을 저지른다면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해서 오너를 바꾸면 됩니다. 국민의 지지와 공감대만 형성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태인  두가지만 보충하고 싶어요. 첫째는 재벌기업 위주의 거시정책이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거죠. 재벌 대기업의 수출을 위해서 환율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게 되면 그게 물가상승이나 소득분배 악화를 만들어내거든요. 정책의 편향성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기획재정부가 재벌의 이익을 위해 여러가지 거시정책을 만들게 되는데, 굉장히 위험할 수 있어요. 둘째는 감세입니다. 기업에 대한 세금을 깎아주다 보니 복지재원이 부족하죠. 또 하나 얘기 안된 중요한 것이, 재벌이 더 진출할 데가 어디가 남았느냐 하면 바로 공공써비스 영역이에요. 삼성이 가장 노리는 건 건강보험 시장이죠. 만일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이 악화되면 그 틈에 민간보험으로 들어와서 미국의 의료보험 같은 것을 팔 생각인 듯한데, 이건 국민의 삶과 직결된 문제죠. 한미FTA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 정부정책에 의해 공공성이 약화되고 거기에 재벌이 들어오게 되면 나중에 되돌릴 방법이 없다는 거죠. 재벌이 한미FTA에 동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재벌이 공공써비스와 연관된 영역으로 진출하는 것은 적극 규제해야 합니다.

 

 

대기업 의존 아닌 성장, 어떻게 가능한가

 

이남주  재벌을 어느정도 규제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는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는 재벌 아닌 다른 성장동력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던질 것 같습니다.

 

정태인  중소기업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 빼곤 없어요. 중소기업 생산성이 높아지지 않는 이유 중 적어도 절반은 하청문제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건 공정거래 관점에서 규제해야 되겠죠. 또 하나, 부동산 가격도 중소기업 생산성을 높이는 데 방해가 됩니다. 안산공단에 있는 중소기업들 중 절반은 부동산 임대업을 해요. 공장 운영하는 것보다 공장부지를 임대하는 게 훨씬 쉽게 돈을 벌기 때문이죠. 경제자유구역이니 산업단지 같은 걸 만들어서 외국기업에 제공해왔는데 그걸 중소기업한테 주는 정책을 펴야죠. 중소기업 생산성을 높이는 데는 클러스터 형성이 거의 유일하게 남은 산업정책인데, 이건 우리나라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클러스터라고 하면 대개 씰리콘밸리형, 즉 대기업이 첨단사업을 하는 걸 떠올리지만, 사실 중소기업으로 이루어져서 높은 생산성을 보이는 곳이 많이 있죠. 독일이나 일본 말고도 이딸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Emilia Romagna) 같은 곳은 그야말로 중소기업으로만 세계 최고의 생산성을 발휘하는 네트워크를 만들고 지방정부가 지원하는 형태로 되어 있죠. 농촌지대였으니까 농산물산업이 당연히 있고, 우유가 있으면 우유 포장산업이 있고, 그 포장재를 만드는 기계산업이 있는 식이에요. 페라리 같은 유명 자동차산업도 있고, 안하는 게 없어요. 그러니까 엄청난 고용수요가 있고 부가가치도 굉장히 높아요. 중소기업만 가지고도 1인당 GDP4만달러니까요. 우리도 중소기업의 생산성을 높여 경제의 반 이상을 담당하도록 한다면 중소기업과 재벌의 관계도, 내수와 수출의 균형도 가능해지죠.

 

이남주  한국에서는 아직 중소기업이 활로를 못 찾고 있어 그런 발전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도 있을 텐데, 어떤 것 같습니까?

 

박창기  두가지 말씀을 드리면, 하나는 중소기업 대책에만 너무 집중하지 말고 대기업도 많이 키우자는 겁니다. 우리나라 30대 대기업 가운데 1970년대 이후에 탄생한 그룹은 하나도 없어요. 미국은 2년 전인가 조사를 보니 40대 기업 중에 16개가 1975년 이후에 생겼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새로운 좋은 기업이 탄생할 수 있는 씨스템이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거죠. 60년대 이후 큰 기업이 생겨나기 어려웠다는 증거지요. 미국에서는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가 76년에 창업한 후에 많이 생겼죠. 우리나라에서 70년대 이후에 크게 성장한 대표적 기업은 웅진그룹입니다. 저는 웅진 같은 기업이 많이 생기는 기업생태계를 만들어야 된다고 봐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재벌중심 구조를 깨야 됩니다. 재벌들을 분할하면 많은 큰 기업이 생긴단 말이죠. 왜 큰 기업이 중요하냐면, 큰 기업은 좋은 일자리잖아요. 그런데 큰 기업을 더 키우는 정책은 별로 얘기하지 않죠.

다른 하나는, 저는 수출지향적인 중소기업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가장 좋은 사례가 독일의 ‘히든 챔피언’이라는 모델인데요. 잘 알려지지 않은 소재와 부품 기업들인데 세계시장에서는 2,3위 안에 들어갑니다. 이런 기업이 많기 때문에 독일경제가 건실하고 몇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보다 수출량이 더 많았죠. 우리나라에서도 이처럼 자기 분야에서 세계 몇위 안에 드는 기업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일각에서 얘기하는, 수출비중이 너무 크고 대외의존도가 높으니까 내수 위주로 가자는 의견에는 동의하기 어려워요. 히든 챔피언은 대개 수출이 90퍼센트 이상입니다. 덧붙여, 일본에는 좋은 소재부품 기업이 많은데 그들이 이제 노쇠하고 있어요. 우리가 그걸 갖고 온다면 기계분야에서의 세계적인 경쟁력을 더 높일 수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강하게 지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지 확대와 증세의 방정식을 풀자

 

이남주  사회양극화와 관련해서 복지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고 좀 전에 김교수님은 중소기업 발전의 토대로서 복지정책의 필요성도 말씀하셨죠. 복지를 강화하자는 데는 이견이 크게 있지는 않은데 어떤 절차와 방법으로 추진할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김기원  우리 사회가 2013년체제든 뭐든 바람직한 체제로 가기 위한 과제의 하나는 진보고 다른 하나는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시장과 국가의 양적 측면에서 시장의 역할을 더 늘리자는 게 보수고 국가의 역할을 더 늘리자는 게 진보라고 볼 수 있겠죠. 보수는 개인적 책임을 강조하고 진보는 사회적 연대를 강조합니다. 진보의 반대가 보수라면 개혁의 반대는 수구입니다. 개혁은 시장과 국가의 질을 개선하는 것, 즉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 국가의 효율성과 민주성을 강화하는 것이고, 수구는 여기에 반대하죠. 중소기업과 대기업을 보면 자본 내에서의 분단, 즉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발전하기 힘든 조건이 존재합니다. 노동자 사이에도 분단이 있죠. 이걸 극복하는 걸 개혁이라고 본다면, 진보의 과제인 복지 강화가 자본과 노동 각각의 분단 해소에 도움이 되는 데서 보듯이 진보와 개혁은 상호작용합니다. 그리고 복지에서 북유럽 수준으로의 ‘단번 도약’은 불가능하고, 고지를 하나씩 확보해가는 진지전이 될 수밖에 없어요. 87년체제가 기동전이라면 2013년체제는 진지전이죠.

복지지출 방향은 두가지에 초점을 맞춰야 됩니다. 하나는 시급한 복지가 있습니다. 일례가 노인복지 부문이죠. 노인 자살률이 지난 20년 동안 5배 늘어났고, 75세 이상의 경우는 OECD 평균의 5배나 돼요. 또 하나는 복지를 하더라도 성장친화적인 복지를 해야죠. 성장이라는 말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진보파도 있는데 성장친화적인 복지라야 지속 가능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가족과 교육과 고용 분야죠. 그리고 보편적 복지냐 잔여적 복지냐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 일단 우리는 보편적 복지가 워낙 안돼 있으니까 그것을 기본으로 하되 사안에 따라서는 잔여적 복지도 수용할 수 있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4대보험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것이 보편적 복지냐 잔여적 복지냐를 떠나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재원을 조달할까, 여기서 정치적인 전략과 전술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증세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다수의 공감을 얻고 저항을 최소화하는 세련된 혹은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죠. 낭비적인 지출을 줄이고, 부자·재벌 감세를 철회하고, 그 다음에 필요하면 국민의 합의를 토대로 증세를 하는 거죠. 그리고 증세를 해도 투기소득과 불로소득에서부터 먼저 하는 거죠. 예를 들어 자본이득세를 신설하되, 그것에 대한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증권거래세는 좀 낮춘다든가 일정 차액 이상에 대해서만으로 한정한다든가 하는 기술적인 고려가 있어야 해요. 또 국민에게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려면 보편적 납세의 필요성도 설득해야 합니다.

 

박창기  지난 8월에 발표한 민주당 복지계획을 보면 세금 신설이나 세율 증가를 특별히 하지 않고 20~30조원의 세금을 더 걷겠다고 발표했어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중 하나가 건강보험료를 많이 올리는 계획이더라고요. 일부에서는 우리나라의 부가가치세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낮기 때문에 올리자고 하는데, 저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봐요. 그래서 제가 제안하는 게, 자본이득세와 탄소세를 적극 활용하자는 겁니다. 자본이득세는 OECD 대부분 나라에서 20퍼센트 정도 내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없거든요. 이자소득세보다 이게 덜 나쁜 세금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이득세가 있으면 외국투자자가 안 들어온다고들 하는데, 외국투자자가 돈 빌려줬다 급하게 가져가고 주식시장에 빠르게 들락날락하는 건 우리 경제에 오히려 해가 되죠. 공장을 세우거나 연구소를 짓는 실질적 투자엔 예외규정을 두면 됩니다. 자본이득세는 부가가치세 올리는 것보다 국민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하나가 탄소세인데요, 전기요금에 50퍼센트의 세금을 부과하는 겁니다. 이걸로 20조원 정도의 세금을 걷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생산적 복지에 비유하자면 생산적 세금이라고 봐요. 우리나라는 전기가 너무 싸다 보니 상당한 낭비가 있죠. 전기가 과도하게 싸고 휘발유는 과도하게 비싸기 때문에 여기서 왜곡이 생깁니다. 에너지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데, 이 때문에 시장질서가 흔들리는 거죠. 그래서 휘발유세를 내리고 전기세를 대폭 올려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현재 우리나라 한 가정이 1년에 평균 50만원 정도 전기요금을 내는데 가정당 20만원 정도를 더 내게 됩니다. 대신에 휘발유에 포함된 교육세 등을 빼면 상당히 상쇄될 거예요. 그리고 저소득층 가정을 특별히 배려하면 서민의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그 부담을 지는 건 전기를 많이 쓰는 금속 관련 기업들입니다. 이렇게 하면 전기 낭비가 줄고 핵발전소 추가 건설 필요성도 줄고 탄소배출 감축이라는 국제적 의무에도 부합하죠.

우리나라가 한해 150조원 정도 에너지를 수입하는데 전기값이 50퍼센트 오르면 10조원 정도 에너지수입이 감소하게 되고, 이것의 경제적 효과가 30조원 정도 된다고 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에너지 절약산업이 크게 발달한다는 겁니다. LED조명, 풍력발전, 태양에너지발전, 전기자동차 등 세계적으로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산업에서 우리 기업들의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인데, 국내의 전기가격이 너무 싸서 수요가 적습니다. 전기가격이 오르면 국내수요가 커져서 이 산업분야가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면 세계적으로 우리 기업들이 선두가 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요. 그래서 전기에 매기는 세금은 생산적 세금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세금을 100퍼센트까지도 올릴 수 있다고 봐요. 우리 전기값이 일본의 3분의 1, 독일의 4분의 1, 이딸리아의 5분의 1에 불과하니까요.

 

정태인  보편적 복지에서는 분명 무임승차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복지 비판론자들은 복지혜택이 많아지면 사람들이 일 안한다고 하죠. 무임승차 문제는 두군데서 일어날 수 있는데, 첫째는 세금을 왜 나만 내느냐라는 생각입니다. 조세정의 관점에서 특히 탈세는 큰 범죄라는 인식이 확립되어야 세금 내는 것이 손해라는 생각을 안하게 됩니다. 둘째는 주로 보수진영에서 주장하는 건데, 복지혜택을 많이 받으면 일을 안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조사결과를 보면 대다수가 당사자의 노력과 무관하게 불행을 당하는 경우 혜택을 주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아요. 반면 자기 노력 없이 받는 복지에는 반대예요. 결국 복지를 받는 사람이 노력한다는 걸 보여주면 돼요. 예를 들어 저소득층 자산형성 프로그램 같은 것은 좋은 정책이죠. 또 실업수당을 받는 사람이 이직이나 취직을 위해 교육받는 것을 노력으로 간주하는 것, 복지 수혜자가 놀고도 혜택을 받는다는 이미지를 없애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또 하나는, 복지를 국가만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국가와 시장과 사회적 경제가 결합되는 복지가 가장 좋은 모델이에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활성화되진 않았지만 그중에 제일 익숙한 게 협동조합이죠. 일례로 의료생협은 써비스 전달 면에서도 실제로 대단히 효율적이고, 주치의 제도 역할을 하기 때문에 환자가 대형병원으로 몰리는 일도 막을 수 있고 불필요한 검진이나 오진도 줄어들죠. 이처럼 공동체 차원, 말단 차원에서 사회적 경제와 복지를 연결하는 것도 고민해야 됩니다.

 

이남주  87년체제는 주로 정치적 측면에서의 발전이었죠. 새로운 씨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민사회가 주창형(advocacy) 운동에서 생협 등 새로운 경제 씨스템 같은 토대를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게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촛불시위 이후에 가장 중요한 함의 중의 하나였던 것 같아요.

 

정태인  사회적 경제, 풀뿌리 경제가 더욱 중요해진다고 생각해요. 한나라당이 선거에서 항상 득을 보는 이유가 복덕방이나 요식업의 보증표 때문이잖아요. 사실 그게 다 풀뿌리 경제,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얘긴데,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을 개정하면 생협이 더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고 사회적 기업의 생태계도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생활영역에서 주민이 참여하는 경제권을 넓혀나갈수록 경제를 효율화할 뿐 아니라 진보개혁세력의 정치에도 도움이 되죠.

 

 

연합정치 발전과 다층적 거버넌스 개편

 

이남주  이제 거버넌스 얘기로 넘어갔으면 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진보개혁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했을 때 좋은 정책이 있어도 현실에서 집행력이 떨어지고 기득권의 저항을 극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정부도 그런 한계를 보였죠. 2013년체제의 희망적 비전의 실현을 어떻게 보장할지의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창기  먼저 이런 점을 짚어봤으면 해요. 2013년체제가 향후 30년 내지 50년의 국가비전을 논의한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패러다임의 변화잖아요. 87년체제와 ‘자본주의 3.0’ 시대가 시장만능주의 경제학이 지배하던 때라면,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과 시대정신이 필요하고, 그것을 정리하는 게 아주 중요하고 봅니다. 저는 나름대로 두 사람의 이론에 주목하고 있어요. 기업과 사회가치의 관계를 이론화한 마이클 포터(Michael Porter), 사회집단이론을 정립한 맨커 올슨(Mancur Olson)인데, 마이클 포터가 그런 얘기를 해요. 자본주의를 다시 발명해야 된다, 앞으로 기업은 주주와 종업원을 위해서는 물론 지역사회와 국민, 인류에 공헌할 수 있는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의무라고요. 이런 이론을 토대로 우리도 재벌개혁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맨커 올슨은 이권집단이 누적되면 경제가 후퇴하고 사회가 경직되어 결국은 국가가 망한다, 특수이익집단으로 가득 찬 사회는 마치 유리그릇 상점에서 레슬링 선수들이 싸우는 것과 같다고 해요. 가져가는 것보다 깨지는 것이 더 많다는 거죠. 이 이론은 시장을 중시하지만 너무 많은 부분을 이권집단이 가져간다면 시장이 무너진다는 거죠.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이권집단의 이익추구도 자유경제질서에 부합하므로 그대로 놔두면 된다는 거였는데 그걸 정면으로 반박하는 거예요. 87년체제가 전두환과 하나회라는 사조직이 공익을 착취하는 구조를 국민이 뒤집은 사건이라면, 2013년체제는 재벌과 수많은 이권집단이 늘어나면서 견디기 어려울 정도가 된 상황을 뒤집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김기원  바람직한 체제의 기본원리가 무엇인지 밝히기는 크게 어렵진 않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효율성이고 또 하나는 민주성이죠. 이때 민주성은 절차적 민주성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민주성까지 포함합니다. 그런데 이념과 정책을 바로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어떻게 실행할지의 거버넌스 문제가 존재하죠. 여기선 진보와 개혁의 걸림돌을 어떻게 돌파할지가 관건입니다. 우선 진보개혁세력이 연대해야 한다는 건 당연하죠. 돈이나 조직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보수수구세력과 대결하는 상황에서 진보개혁세력이 분열한다면 죽도 밥도 안되는 거죠. 선거에서뿐 아니라 집권 후 통치에서도 연대가 필수적인데, 이게 제대로 안된 것이 민주정부 10년을 헤매게 만든 중요한 요인입니다. 유럽 같은 내각제가 당장 불가능한 현실에서는 야권대통합이 가장 바람직한 연대의 형태가 아닌가 해요. 만약 대통합이 불가능하다면 공동정부가 차선인데, 이미 경남에서 실시하고 있고 강원도는 했다가 깨졌죠. 이런 경험을 종합해서 연대의 형태를 꾸려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좀 구체적인 이야기인데, 2013년체제를 준비한다면 사실 우리나라 같은 대통령제하에서는 선거 준비 때문에 정작 통치 준비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어요. 당선 자체가 중요하니 에너지를 온통 거기에 쏟잖아요. 그래서 생각해본 것 중의 하나가 국무총리를 비롯해 주요 그림자 내각을 미리 발표해서 통치 준비를 하자는 거예요. 브라질의 룰라가 이렇게 했는데, 문민정부 10년을 보니 너무 준비 없이 통치에 들어섰어요. 또 2013년체제를 추진할 때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싶어요. 한걸음씩 나가되 집중하자는 거죠. 그래서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역할을 분담해서 대통령은 정치적 과제를 챙기고 국무총리는 행정적 과제를 챙기는 식으로 가자는 겁니다. 물론 노무현정부 시절에도 국무총리실에 권한을 많이 이양했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정치는 자기세력을 묶어세우고 반대세력을 흐트러뜨리고 중간세력을 끌어당기는 거잖아요. 그런 정치적인 과제에 대통령과 청와대가 집중할 수 있도록 통치를 꾸려가면 어떨까 합니다.

 

이남주  정원장님은 노무현정부 때 국정에 참여하시면서 당시 바깥에서 비판도 많이 받으셨는데(웃음) 그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태인  아까 새로운 사회경제적 가치 얘기가 나왔는데, 마이클 포터의 이론은 이해당사자 자본주의에 제일 가까운 것 같아요. 기업이 주주의 것이 아니고 기업과 관련되어 있는 노동자, 경영자, 지역주민까지 이해당사자가 전부 관여하고 참여해야 된다는 거죠. 주류경제학에는 원래 효율성 개념밖에 없습니다. 공정성과 정의 개념이 없는 것이 경제학의 특징이고 그런 점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도 경제학자들의 특징이에요.(웃음) 상당히 잘 돌아가는 시장에서의 효율성을 얘기하는 건 문제가 없었는데, 시장 밖의 사회에 필요한 여러가지에 대해서도 경제학을 원용해 조직해온 것이 붕괴해버렸죠. 이제는 효율성과 함께 정의나 공정성을 논의해야 합니다. 공공성의 개념에서 시장과 국가의 경계는 모든 사람이 참여해서 확정해야 하는 거죠. 이런 논의들이 최근 숙의(熟議)민주주의라는 지향점으로 모아진 것 같아요. 경제학의 여러가지 자원, 민주주의론, 정의론을 모아서 앞으로의 비전을 구성할 수 있겠죠.

아까 그림자 내각을 말씀하셨는데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연합이라는 건 원래 선거 후 연합이잖아요. 내각제에서 선거를 치른 다음에 조각(組閣)을 하는 건데 선거 전 연합은 그림자 내각을 발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효과적입니다. 선거 후 연합은 내가 찍은 사람들이 실제로 정부를 꾸릴지 예측하지 못하는 반면에, 선거 전 연합은 어떤 사람이 정권을 담당할지 알게 해주죠. 저는 선거 전 연합을 하게 되면 그림자 내각을 발표하고 내각 전체에 대해 투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우리처럼 정당정치가 안되는 나라에서 대통령의 자의성도 어느정도 견제할 수 있다고 봅니다.

 

박창기  그걸 법제화할 수 있나요?

 

정태인  그보다는 선거전략일 수 있겠죠. 한쪽에서 내각을 발표하면 다른 쪽에서도 할 수밖에 없는 거고, 그럼 실상 미래의 내각을 사전에 비호(庇護)해주는 투표가 되겠죠. 저는 장기적으로는 내각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여야의 교체에 따라 정책기조가 너무 확확 바뀌어서 장기정책이 불가능하거든요. 5년 내에 효과를 볼 수 있는 정책에 집중하고 수단도 단기적인 것만 쓰죠. 그래서 노무현정부 때 대통령위원회가 시도된 것인데, 그보다는 국회에 미래위원회 같은 걸 만들어 여야 합의로 장기적인 방향을 설정하는 것, 내각제가 안되면 이렇게라도 해야죠. 예컨대 핀란드에서 교육개혁을 40년 동안 했는데, 의회 미래위원회에서 방향을 정해 꾸준히 추진해온 겁니다. 우리의 경우 지나치게 많은 국책연구원의 절반 정도를 국회로 이동시켜, 연구자가 자기 신념에 따라 자기와 맞는 당의 정책을 만들고 토론한다면, 정치의 품질도 훨씬 높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 차원의 거버넌스를 얘기하자면,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의 정의론을 참고할 만해요. 경제적 차원의 재분배, 그리고 문화적 차원의 인정(認定), 그리고 앞으로는 중요한 게 대표성의 문제인데, 국제영역에서 케인즈주의-베스트팔렌 체제의 틀이 폐기된 지 오래되었음에도 그것을 대표하는 씨스템이 없어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죠. 우리 현실에선 당장 한미FTA의 투자자국가소송제(ISD) 같은 거예요. 이렇게 공공영역을 사적인 중재부에 맡겨버리는 건 국제공공행정의 영역이 없기 때문이죠. 지금 EU가 그런 장치를 만드는 중인데, 기업의 이익만 대변되는 국제영역에서 민주주의가 진전되려면 동아시아에서도 각국 시민들의 공동의 이해를 반영하는 정치 씨스템을 만들어내야죠. 동아시아 공동체로 가기 전에 동아시아 의회 비슷한 걸 실험하고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는 게 필요합니다.

 

김기원  2013년체제의 추진동력은 물론 대통령과 정당이 중심이지만 시민의 광범한 압력 혹은 지원이 필요합니다. 현재 한국 상황에서는 노조가 사익집단화된 측면이 꽤 있어서 이게 중심동력이 되기는 힘들다고 봐요. 북유럽의 노조는 노동자 다수를 포함하는 공익집단인데 반해 한국의 노조는 소수집단이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복지의 추동력 같은 중심동력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남은 게 시민사회인데, 조직화되어 있지 않죠. 촛불시위와 희망버스 같은 현상은 시민이 사회문제에 유동적으로 결합하는 양상인 것 같아요. 두 운동에서 주요 시민단체건 노조건 어느 쪽도 중심적인 역할을 못했죠. 시민과 사회문제, 혹은 시민과 정당의 새로운 결합방식이 맹아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이고, 이걸 예컨대 SNS 같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할지를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남주  거버넌스 문제에 관해 시민사회적 차원, 일국가적인 차원, 동아시아적 차원 모두 간단하게나마 짚어졌습니다. 저는 이 논의가 과거보다는 매우 진전됐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정부가 출범할 때는 새로운 거버넌스를 위한 사회적 합의나 네트워크를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었죠. 반면 지난 지자체 선거를 보면 선거연합에서부터 거버넌스에 접근할 수 있는 기초가 형성되고 공동정부도 구성되어 운영한 경험도 있으니 이를 기초로 국가 차원에서도 선거 승리를 위한 연대를 넘어 좋은 통치를 위한 연대, 거버넌스 구조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와 관련한 구상이 좀더 구체화될 필요가 있겠지요. 이것이 연합정치 발전과 2013년체제론의 핵심적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3년, 희망의 비전을 만들자

 

정태인  2013년체제의 주역은 사실 20,30대인데 오늘은 주인공을 빼놓고 이야기하는 격이 됐네요.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자리도 있었으면 해요. 젊은층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을지…… 전 다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요샌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묻혀 있어요. 20,30대가 인구 구성만큼 정치에 참여하게 하고 『창비』 같은 잡지에 그들의 목소리가 더 많이 반영되고 더 많이 토론되는 게 2013년체제 성공의 한가지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기원  반한나라당 세력이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2013년체제 만들기가 좀더 쉬워질 텐데, 만약에 그렇게 안되고 한나라당이 정권을 이어간다 하더라도 민심의 변화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불행히 반한나라당 세력이 집권하지 못하더라도 바람직한 체제를 위해 계속 노력하는 자세는 필요하지요. 한가지 덧붙이면 진보개혁진영이 권력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도 중요합니다. 민주정부 10년을 반성한다면서 나온 이런저런 책들을 봐도 예컨대 검찰, 국정원, 국세청 같은 권력을 그냥 방치 또는 포기하는 게 옳은 길이라는 듯이 나오거든요. 그런 권력을 악용하면 당연히 안되지만 방치하거나 포기한다면, 그렇다면 권력을 무엇 때문에 잡았는가라는 의문이 들어요. 2013년체제의 달성을 위해서는 권력을 어떻게 행사할지도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걸 못하면 재벌이나 관료를 어떻게 상대합니까. 예컨대 진보개혁세력이 들어선 교육청이나 지자체 같은 데서도 그 지역의 관료, 언론과의 관계가 굉장히 복잡하고 이걸 잘 통제하지 못하면 일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거든요.

 

이남주  노무현정부 시절에는 권력 운영의 합리성이나 분권을 강조한 반면,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부족했어요. 그것도 2013년체제가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연합정치 논의가 내년 총선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정치적 지분을 어떻게 나눌 지의 계산이 아니라 2013년체제의 목표는 무엇이고 어떤 거버넌스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것인가란 고민으로 진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논의과정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문제를 극복하고 2012년의 승리를 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좌담이 이러한 점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2011.10.28 가톨릭청년회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