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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용옥 『중용한글역주』, 통나무 2011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용에 따른 삶인가

 

 

신정근 辛正根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교수 xhinjg@hanmail.net

 

 

15131『도올선생 중용강의(上)(통나무 1995)을 본 사람은 언제 하편이 나올까 기대해왔을 것이다. 근래 김용옥(金容沃)은 동방고전 한글역주 대전의 씨리즈 중 하나로 『중용한글역주』를 내놓았다(아울러 ‘강제하차’ 논란을 빚은 EBS 방송용 교재로 대중서 격인 『중용 인간의 맛』을 함께 선보였다). 이로써 그간 하편을 기다려온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켜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제목대로라면 사서오경의 묶음에 속하는 『중용』의 원문을 한글로 옮기고 풀이하는 데 초점이 있다. 실제로 책을 보면 688면의 분량 중 전례가 없을 정도로 긴 「통서(通序): 인문주의 혁명의 여명」(15~150면)이라는 서문을 싣고 이어서 주희의 『중용장구(中庸章句)』 서문을 주해하고서(153~91면) 거의 200면에 이르러서야 『중용』의 원문을 『중용장구』와 곁들여 번역하고 ‘옥안(沃案)’에 역주자의 해설을 달고 있다.

단순한 역주 형식이라면 서평할 거리가 드물겠지만 이 책은 통서와 역주에서 다양한 논의와 강한 주장을 담고 있으므로 서평을 시도할 길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중용』 텍스트를 둘러싼 해묵은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는지 살펴보고 역주 작업을 통해 김용옥이 밝히고자 하는 주장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사마천은 『중용』의 저자를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로 지목했다. 종래에는 이를 믿는다고 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색하고 따져본들 확증할 만한 증거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김용옥은 출토문헌과 전승문헌을 교차 분석하면서 자사가 한 주장의 내재적 일관성을 밝힌다. 「노목공문자사(魯穆公問子思)」에서 충신의 역할을 묻는 목공에게 자사는 “항상 임금의 나쁜 점(과실)을 지적하는 사람”이라고 답변했다(89면). 『예기』 「단궁(檀弓)」에서는, 타국으로 추방되었던 신하가 본국으로 돌아와 과거의 군주를 위해 상복을 입는 반복(反服)의 예를 묻자 자사는 당시 신하를 가볍게 내치는 상황에서 적의 앞잡이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대답했다. 두 곳에서 모두 자사의 비판정신이 드러난다. 이 비판은 칸트가 말하는 “인간의 인식능력 일반에 대한 자기검열, 즉 이성의 타당성의 범위와 한계를 규명하는 인식론적 의미”가 아니라 “권력자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항상 먼저 비판의 재판소를 차려야 한다”는 사회적 비판을 가리킨다(92~93면).

이러한 사회적 비판은 사회 지도층을 상대로 “그대가 진실로 바름으로써 본을 보인다면 이 땅에서 감히 그 누가 바르지 않을 수 있겠느뇨?”(93면)라고 일갈했던 공자의 말에도 나타나고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나의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하니 원망이 있을 수 없다”(94면)라는 『중용』의 한 구절에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중용』은 공자의 사상을 오롯이 이어받으면서 사회적 비판의식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는 자사의 저작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자사를 단순히 『중용』의 저자로 밝힌 것에 한정되지 않고 성인의 자손이라는 후광에 눌려 있던 자사를 사상가의 반열로 끌어올리는 정치한 논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명 ‘귀신장’이라 알려진 『중용』 16장은 종래 전체 맥락에서 불협화음을 일으킨다고 지적돼왔다. 김용옥은 귀신을 창조주의 존재 개념으로 보지 않고 천지 대자연에 내재하는 힘(406면)으로 보며, 또 인간의 삶을 “반드시 삶과 죽음이 연속체로서 인식되는 것”(420면)으로 보아서 불협화음을 협화음으로 읽어내는 길을 제시한다. 충분히 흥미를 끌 만한 해석이다.

김용옥이 작은 단행본 분량의 「통서」를 왜 썼을까? 두가지의 이유가 있을 듯하다. 하나는 독자와 『중용』 사이에 놓인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김용옥식 『중용』 읽기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그는 먼저 독자들이 “텍스트를 접근해 들어가는 시각의 대강을 파악”(81면)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개념적・추상적 사고에 바탕을 둔 서양철학과 달리 일상적・실제적 삶에 바탕을 둔 중용의 삶에 관심을 가지도록 제안한다.

서두에서 김용옥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목사가 찾아온 신도들에게 “예수가 누구여?” “예수 믿는다고 구원 얻을 수 있깐?” 했다는 일화를 소개한다(20면). 이는 자극적인 소재를 동원해 독자를 당황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본질과 동서양 철학의 차이를 되묻기 위한 장치다. 한 예로 병에 걸리기 전에 예수를 위해 살았던 사람이 한갓 병 때문에 예수를 기억하지 못하고 나아가 불경한 짓을 저지른다면 ‘예수’는 어떤 존재일까? ‘예수’는 고유명사에 지나지 않고 그런 만큼 “피상적이고 외재적이며 비본질적인 사태”(21면)에 지나지 않게 된다.

중용의 삶 또는 『중용』에 집약된 동양철학의 가치는 사람을 고유명사의 개념적 인식의 자명성으로 이끄는 서양의 종교나 철학과 다르다. 중용의 삶은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원초적 경험사태이자 예(禮)를 통해 이론과 실천의 괴리를 허용하지 않는 전일적 인간화의 과정이다. 이런 측면에서 『중용』의 신독(愼獨)은 내면적 주체성의 심화라는 종적(縱的) 깊이만이 아니라 오륜(五倫) 같은 삶의 일상성의 배양이라는 횡적(橫的) 연대를 통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420면). 논의의 결을 곱씹어볼 만하다.

이 책을 독파하려면 두가지에 주의해야겠다. 하나는 글이 결론을 향해 최단 거리를 일직선으로 달려가지 않고 논의가 꼬리에 꼬리를 물듯 새로운 화제로 끊임없이 확장되면서 서서히 진행된다는 점이다. 나는 이를 수형도(樹型圖)식 글쓰기라고 명명하고자 한다(그의 글을 읽다 보면, 바둑판을 우주로 보고 귀보다 중앙을 두텁게 하여 세상을 만든 신처럼 바둑을 두던 타께미야 마사끼武宮正樹의 우주류宇宙流 바둑이 생각난다. 이 바둑은 철저하게 귀로 파고들어 실리를 챙기는 이창호에 의해 패하면서 퇴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글쓰기는 전작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특성으로 김용옥식 글에 익숙한 독자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을 듯하다.

다른 하나는 논증과정에 한번씩 희망사항(wishful thinking)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예컨대 98면의 글쓰기를 살펴보자. 김용옥은 사마천이 곡부(曲阜, 공자의 고향)를 방문해 당시에 보존되어 ‘있었을’ 정보를 입수‘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어서 곡부에서 수집한 정보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단정하고 자사의 『중용』 저술은 “역사적 사실에 속한다”고 결론내린다. 나도 사마천이 뭘 보았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그렇게 되었다고 단정한다면 이는 희망사항일 뿐 엄밀한 논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중용은 이 책 뒷날개에서 “21세기 동아시아의 새로운 가치 방향”이라고 할 만큼 중요할 수 있다. 다만 이 책을 읽고 중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용에 따른 삶인지 알 수 있도록 구체적 일상적 지도가 함께 들어 있었으면 좋았겠다. 이는 「번역에 관한 하나의 원칙을 논함」에 나오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실제로 명사화된 개념의 풀이가 아니라, 문장을 구성하는 신택스(syntax, 구문)에 ‘상응’하는 오늘 우리말의 신택스이다”(193면)라는 주장에 상응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