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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촌평
 

미셸 푸꼬 『안전, 영토, 인구』, 난장 2011 

푸꼬의 귀환, 또는 자유주의 비판의 새 도구상자

 

 

장진범 張鎭范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aporia96@gmail.com

 

 

16876국내에 소개된 미셸 푸꼬(Michel Foucault)의 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감시와 처벌』(1975)일 것이다. ‘규율’이나 ‘미시권력’ ‘판옵티콘’ 등 오늘날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널리 쓰이는 개념이 대개 이 책에서 처음 등장했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이들 개념을 중심으로 한 국내의 푸꼬 소개는, 적잖은 제한과 편향을 초래하기도 했다. 특히 (국가를 위시한) 거시권력 대 미시권력이라는 배타적 이항대립이 문제였다. 어떤 이들은 푸꼬에 대한 나름의 이해에 따라 거시적 접근을 부차화했고, 다른 이들은 거시적 접근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푸꼬로는 그런 분석이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이유는 정반대이지만 결과는 같았는데, 통상 거시적이라고 간주되는 문제, 가령 국가 분석에 푸꼬의 개념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도 그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1997)를 비롯하여, 1976년 이후 꼴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이 속속 출판되면서, 푸꼬 연구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그 시발점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첫 강에서, 지난 5년간의 연구를 ‘진척이 없고, 반복되며, 결실이 없다’고 평한 푸꼬의 ‘자기비판’, 그리고 이 교착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제기한 ‘생명관리권력’(bio-pouvoir)이라는 개념이다. 최근 번역된 푸꼬의 1977~78년 강의 『안전, 영토, 인구』(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연구모임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1) 역시, 그해 강의의 목표가 생명관리권력의 연구임을 강의 전체의 첫 문장(17면)으로 명시하는 한편, 『감시와 처벌』의 핵심 명제가 “틀린 것일 수도 있”(87면)다고 고백하고, 판옵티콘이라는 개념에 관해서도 “근대적인 사고방식이지만 매우 고루한 사고방식”(104면)이라고 평가한다. 이 정도면 그저 관심사나 연구주제를 바꾼 정도가 아니라, 1976년을 전후해 일종의 ‘단절’이라고까지 부를 법한 심대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이 단절이 1976년 이전의 작업 일체를 무효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의 개념들로는 제대로 사고할 수 없거나 핵심을 꿰뚫지 못하는 문제를 새로운 개념으로써 정식화하는 한편, 이에 입각해 기존 개념들의 지위를 조정하고 그것이 유효할 수 있는 조건을 정확하게 규정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단절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여러가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18세기 자유주의의 성격규정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하려 한다. 『감시와 처벌』이 보기에 18세기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법적이고 정치적인 자유주의였다. 그런데 이 법적・정치적 형식과 제도의 어두운 이면에서, 실은 불평등하고 불균형한 신체적 규율과 감시, 처벌 따위의 미시권력이 작동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자유(주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것이 『감시와 처벌』의 요지 중 하나다. 이때 자유주의에 고유한 모순은 형식과 실질, 이상과 현실 사이의 구성적 괴리가 된다. 반면 『안전, 영토, 인구』가 18세기 자유주의의 요체로 보는 것은, “하게 내버려두고 일어나도록 내버려둬라”(86면)는 구호로 요약되는 ‘경제적 자유주의’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그 자체의 법칙, 원리, 메커니즘에 따라 발전하고 굴러가고 그 자체의 경로를 밟는”(86면) ‘인구’라는 새로운 현실 또는 차라리 ‘자연’(nature, 본성)에 상응하며, 역으로 이 ‘인구’를 다루려면 주권이나 규율 같은 외재적 강제보다는, 이 자연성의 ‘객관적 법칙’을 인식하고 ‘조절’하는 새로운 지식-권력이 필요한데, 이는 미시권력으로 환원되지 않는 거시적 성격을 지닌다. 한편 식량난에 대한 자유주의의 해법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인구의 ‘자기조절’의 본질적 이면은 일부 사람들을 굶어 “죽게 내버려두는” 것, 나아가 이런 ‘자연적 최적상태’—곧 자신의 아사(餓死)—에 저항하려는 이들을 인구에서 배제하고 억압하는 적극적 국가개입이다. 이제 자연성의 이름으로 인민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상황으로 내모는 것이 자유주의의 고유한 모순이 되는 셈이다.

자기조절능력을 갖춘 이 인구는 물론 ‘자연적’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기술과 지식의 오랜 상호작용의 상관물이며, ‘자연성’이라는 표상마저 지식-권력의 효과다. 『안전, 영토, 인구』는 18세기 이래 세계를 지배한 이 경제적 자유주의에 관한 계보학이다. 이 계보학이 다루는 시간적 범위는 멀리 기원전 8세기부터 가까이 18세기까지 무려 2500년에 이른다. 또한 그 대상도 마끼아벨리의 『군주론』(1513)을 둘러싸고 유럽 일대에서 벌어진 통치술 논쟁, ‘종속화(assujettissement)에 의한 개인화’라는 독특한 주체화 기획을 발명한 기독교의 ‘사목권력’, 유럽을 뒤흔든 여러 정치적・과학적・정치적 격변 끝에 출현한 ‘국가이성’ 기획, 그리고 이 모든 요소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한 독특한 지식체계이자 권력기술로서 등장한 18세기의 ‘경제적 자유주의’ 등 다채롭기 이를 데 없다. 이 계보학의 끝에서 우리는, 영국 정치학자 밥 제솝(Bob Jessop)의 표현을 빌리자면, 근대적 ‘국가 효과’에 관한 탁월한 통찰을 만나게 된다.

미시권력과 거시권력의 부당대립을 비웃는 듯한 이상의 분석은 어떤 현재적 함의를 지닐까? 첫째, 18세기 이후 자유주의에서 헤게모니를 쥔 것이 경제적 자유주의라면, 자유주의 비판의 핵심은 당연히 경제적 자유주의 또는 경제(학) 비판이 된다. 알다시피 1990년대 이후 많은 이들은 맑스주의적인 경제(학) 비판을 ‘경제환원론’으로 폄하하면서 맑스주의의 이론적 대안 중 하나로 푸꼬를 지목했다. 그런데 맑스주의의 가장 강력한 이론적 적수로 간주되었던 푸꼬가, 18세기 시점에 비가역적으로 나타난 경제적 자유주의의 승리를 계보학적으로 분석하면서 결국 맑스주의적인 경제(학) 비판의 중요성을 간접적이고 암묵적으로 시인하는 역설로 『안전, 영토, 인구』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분명한 것은 『안전, 영토, 인구』가 경제적 자유주의 비판이라는 의제를 전면에 제기하며, 이 문제에 관해서는 맑스주의 전통이 여전히 생명력을 지닌다는 점이다. 둘째, 경제적 자유주의는 ‘시장방임주의’, 즉 국가개입에 대한 원칙적 부정 따위가 아니고, ‘통치성’의 한 형태, 즉 경제와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개입의 원칙과 목표, 수단에 관한 독특한 논리로 이해해야 한다. 사태가 이렇다면 자유주의, 오늘날이라면 신자유주의를 비판할 때 그 이유로 국가개입의 축소를 들고 그 대안으로 국가개입의 확대를 제시하는 것은 초점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닐 수 없다. 신자유주의는 국가개입의 축소나 철수를 주장하는 소극적 전략이 아니라 국가개입의 원칙과 목표, 수단을 근본적으로 변경함으로써 국가와 경제, (시민)사회 전반을 ‘개조’하려 드는 공세적 전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전, 영토, 인구』를 지금까지의 신자유주의 비판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강한 의미의 ‘현재적’ 개입으로 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옮긴이와 편집자의 공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푸꼬 강의록 번역과 달리 『안전, 영토, 인구』와 이어지는 일련의 강의록 번역은 푸꼬 전공자나 관련 연구자를 중심으로 일관성있게 기획되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어 원문이나 영역본에서도 보기 드문 상세한 각주와 각종 그림을 새로 넣어 독서에 큰 도움과 즐거움을 준다. 앞으로의 강의록 번역이 더욱 기대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