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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정록 李楨錄
1964년 홍성 출생. 1989년 대전일보,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풋사과의 주름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제비꽃 여인숙』 『의자』 등이 있음. mojiran@hanmail.net
울음의 진화
포대기에 싸인 너는 울음으로 존재한다 울음소리는 어미에게로만 향한다 한 생명의 뿌리가 동백꽃처럼 빨갛다
한해두해 팥단자와 떡국을 먹는다 어미젖이면 족했던 네 울음은 귀 뚫린 이 모두 듣고 눈 달린 이 모두 보아라 태풍 만난 우듬지처럼 두손 두발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아기집에서 놀던 손발짓 그대로다 그러나 눈물로 세상의 양수를 다 채울 수는 없다 멈칫멈칫 두리번거린다 토막울음 운다
다시 십수년 너도 사랑을 앓는 나이 섧고도 부끄러워라 자궁처럼 이불 둥글게 말아 눈물 슬어놓는다 스스로 만든 동굴의 눅눅함으로 살집 부풀린다 슬픔도 무게가 있음을 안다 제 어둠을 팔베개하고 등짝으로 운다 땅이 꺼진다는 것을 안다 정확히 세번 무거운 어깨로 눈물샘 뿜어올린 뒤 딱 한번 등짝 내려뜨린다 습지도 결국 잦아든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짓는 그늘이 그중 두텁다는 것을 안다
어느덧 너도 손차양 아득한 세월의 어미아비가 된다 손발 고요해진다 어깨를 들먹이지 않는다 눈에 밟히는 살붙이들 반대쪽으로 등 돌려 마른 눈자위 훔친다 이제야 울음은 진화의 꼭지에 다다른다 졸아붙은 눈물샘 대신 콧물이나 훌쩍인다 양수에서 출발한 손짓발짓은 콧물로 마침표를 찍는다 하지만 콧물의 나날은 짧다 시원의 탯줄인 양 쫄쫄거리다 멎는다 이젠 헛기침으로도 끌어올릴 게 없다 기침의 끝자리에 목숨만이 간당거린다
눈물은 드디어 끝장난다 흡(吸)! 눈물의 길마저 거둬들인다 순간 임종을 지키던 피붙이들의 손발과 어깨와 콧구멍이 바빠진다 슬하 남은 것들이 저승으로 떠난 너의 첫 날숨을 울음으로 들여앉힌다 호(呼)! 숨통은 한통속인 것이다 둥근 우주의 숨길이 그리하여 한 끈으로 이어진다
금강조경원
박수근의 화폭에서 방금 옮겨 심은 듯한 모과나무. 많은 나무 중에 그 못생긴 모과나무에 마음 쏠립니다. 값이 나가서가 아니라 까치집 때문이죠. 엿장수 가위처럼 척척 맞아떨어지는 새끼까치와 어미까치의 노랫가락 때문이죠.
눈 내리는 날이면 까치집이 꼭 삼베 보자기 덮여 있는 들밥 같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추운 손발로 피안을 건너오셨군요. 높은 자리에 밥을 모셔야 하니라, 그래야 마음도 높아지지. 뼈마디 삭정이로 지은 고봉밥을 외다리밥상에 차려놓으셨군요.
올봄에는 좋은 나무가 한그루 더 생겼습니다. 흰 두루마기 백송 한 주가 새로이 까치둥지를 품었거든요. 아버지께서도 돌아오신 거죠. 이젠 목덜미가 좀 뻑지근해지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일이 더 늘어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