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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13년체제 논의의 진전을 위하여
2013년체제 건설에서의 북한 변수
정현곤 鄭鉉坤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 집행위원장, 세교연구소 상임기획위원. 주요 논문으로 「남북사회문화교류 발전을 위한 방안」 「남북교류거버넌스의 실태 분석 및 평가」 등이 있음. jhkpeace@empas.com
지금 남과 북의 관계는 어디쯤 와 있을까? 남남처럼 지내는 데 아주 익숙해져 있지는 않더라도,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관계이기는 한 것일까? 새삼스런 이 질문은, 이명박정부를 지나는 동안 남북관계에 질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직감에 기초한다.
남북관계의 역사적 전환은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가지 중대한 변화가 있었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 우리는 또 2013년체제 건설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자각하고 있다. 2013년체제라는 것이 2012년 권력교체기를 주요한 계기로 포착하고 있음은 다 아는 바지만, 2012년의 역사적 하중이 단지 남한에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북에서 역시 2012년은 하나의 중대한 결절점이다. 2012년은 북의 체제성립 100년 역사가 꺾이는 해로, 북은 이른바 ‘강성대국’을 천명하고 있다. 게다가 북은 절대적 지도자를 잃고 총력체제를 가동중이다. 우리는 또 그들의 이런 행보가 미칠 영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우리가 2013년체제 논의에 남북관계를 포함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에 와서 2013년체제가 최소한의 남북 공유지점을 통과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1953년 정전체제 해소 문제다.
1. 2008년 8월 이후 한반도 정세와 대북정책 결산
남북관계 또는 북미관계에서, 북이 보이는 행동의 동기와 반경 그리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체제인정’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유효하다. 그 견해에 따르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는 균형적인 힘을 회복하려는 의지 속에서 상호대칭성이 관철되어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상호대칭성은, 말하자면 북의 핵과 미사일 개발이 미국을 위협할 것이라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미국의 공격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임을 동시에 인정하면서 이 상호위협을 감소시키자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2000년 10월의 북미공동코뮈니케로 표현되었다. 남북관계의 경우, 북에 체제인정을 보장하면서 마찬가지로 남한이 느끼고 있는 전쟁위협을 감소시킨다는 공감대가 있었고, 그것이 2000년 6・15공동선언의 의미1)라 본다.
지금에야 분명해졌지만 2009년 4월 북의 인공위성 발사와 5월의 2차 핵실험은 체제 내부의 동기가 더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것은 체제유지를 위한 본질적 동기와 그 연장선에서 후계구도를 완비해야 하는 특수한 동기까지를 말함이다. 우리가 알기에 북은 2009년 1월에 후계자를 선정하고 이를 내부에 통보했다. 그러나 여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북이 느꼈을 체제유지의 심각성이, 외부로부터 온다고 느꼈을 위협 인식과 매우 밀접하다는 사실이다. 우선 2008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의 뇌졸중 이후 남한정부가 북한붕괴론 쪽으로 자신을 무장해가고 있었다는 점이 그러했고,2) 이 시기 중국의 태도가 불분명했다고 북이 판단한 지점이 그것이다. 중국이 북의 지정학적 가치에 입각하여 대북관계의 전략을 새롭게 정리하던 시기가 2009년 가을이라고 본다면,3) 북으로서는 2008년 8월 이후의 시점에서 절대적 지도자의 유고상황에 따른 체제 안전보장에 관해 더욱 크게 우려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09년 4월 당시 북이 인공위성 발사를 강행한 일련의 사태 전개는 미국으로서는 조금 낯선 것일 수 있다. 2009년 초입에 출범하면서 대화 원칙을 천명하던 오바마 행정부의 선의에 대해 북이 거절한 형국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면 전개야말로 미국 내에 부정적 대북인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미국 내 인식이 북한붕괴론으로 이동하던 남한정부의 전략구도에 자신을 내맡긴 미국의 한계로 작용했다.
중국의 경우는 이미 지적한 대로 북이 핵실험까지 강행하고 난 후에야 전략적 협력관계로 돌아서는데, 이러한 결정에는 북의 핵실험이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북의 핵실험은 중국이 가진 대북 영향력의 실체를 폭로한 사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느꼈을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는, 그 이듬해에 있었던 천안함사건의 전개에서 좀더 선명해졌다. 천안함 ‘폭침’의 응징이라는 명목으로 미국 항공모함이 서해로 진입해 들어오려는 군사력 전개가 그것인데, 중국 포위라는 의미가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이같은 군사력 시위를 통해 일본 내 미군기지인 오끼나와의 후뗀마(普天間)를 유지시키고 항모전단의 군사력 전개범위를 급격히 확장했다.4)
그리고 미중과 남북, 그리고 일본까지 포함된 이같은 힘의 압축적 표출은 그해 11월 북한에 의한 연평도 포격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제 북을 통해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구도가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났다. 그리고 그런 충돌이 벌어지는 와중에서 북의 김정일 위원장은 강력한 북중연대의 길을 열고 1980년 6차 당대회 이후 중앙당 회의로는 30년 만에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의를 개최, 북 체제의 최대 위기라 할 수 있는 후계구도를 정돈했던 것이다.
한편 2011년 5월 17일 한 언론은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국민 다수의 견해임을 확인해주는 여론조사 결과를 내놓았다.5) 그런데 이 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스스로 보수라 규정하는 사람들, 한나라당 지지자들에게서도 같은 견해가 발견된다는 점이었다. 당시 조사에서 대북정책 재검토 의견은 58.2%로, 지속되어야 한다는 34.9%보다 20% 이상 높게 나왔으며, 이 의견에는 54.25%의 보수층과 51.1%의 한나라당 지지층이 동의했다. 국민의 대다수가 이런 견해를 가진 가장 큰 이유는 북중협력 때문이라는 것이 당시 여론조사기관의 견해였다. 이런 힘이 작용한 탓일까, 이명박 대통령은 통일부장관을 현인택(玄仁澤)에서 류우익(柳佑益)으로 교체했다.
대북정책의 핵심축이 청와대를 통해 작동한다고 본다면 통일부 수장의 변경이 갖는 의미가 그리 크지는 않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의 미래보다 ‘당시’의 의미다.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했고 낙관적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과거의 행보는 안된다’는 의미가 ‘당시’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류우익 통일부의 의미였다.
물론 그 이전에 이명박정부가 대북정책의 전환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2009년 8월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 이후 조문정국에서 북이 가져온 남북정상회담 제안을 놓고 실제로 대북접촉을 추진한 사실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명박 대통령 본인조차 2010년 1월 28일 영국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연내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시도가 이명박정부의 일관성과 진정성에 기초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결국 2010년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사건에 직면하여, 이를 북의 소행으로 몰고가면서부터는 남북관계를 안보 문제로 비화시켰고, 또 이를 선거에 이용했다.
남북관계를 위해 뭔가 해보려 했다는 이명박정부에 대해 정상참작이 잘 안되는 이유가 2011년 5월에 다시 나타났다. 정부의 주요 당국자들이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북과의 비밀접촉에 나섰지만 이례적으로 그 내막이 폭로되면서 온갖 창피 속에 무산된 것이다. 한나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조차 대북압박정책의 실패가 명백해졌다면 정부가 이를 몰랐을 리 없고, 그것은 이명박정부로 하여금 남북관계 전환에 대한 정치적 욕구를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남북정상회담 개최 시도에 작용한 동기가 주로는 정치적 이해타산에 머물렀다는 것이고, 이 불순함이 ‘천안함 문제’를 야기했고, 또 스스로를 묶었다는 사실이다. 천안함 문제란 천안함사고의 원인을 북의 공격으로 성급하게 선언하고, 이에 따라 대북압박의 수단인 5・24조치를 시행한 것을 말함인데, 남북관계를 정상화하자면 어떤 식으로든 천안함사고에 대해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천안함사건 조사가 일종의 정치행위로 치우쳤다는 지적은 5월 20일의 조사 발표 및 그에 따른 5・24조치의 얼개가 이미 4월 19일과 21일 사이에 정해져가는 극적인 상황전개에서 확인되고 있다.6) 이 조치가 극적인 이유는, 적어도 공개적으로 4월 6일까지 합참정보작전처장, 국방부장관, 주한미군사령관, 국가정보원장이 북한 개입 사실을 부인해왔기 때문이다. 4월 16일 선체 공개 이후 파단면의 육안 인식에서 폭발 가능성을 읽은 것이 행위자를 북으로 몰아가는 정치행위의 추동력이 된 셈인데, 끝내 과학적 검증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안타까운 점은 더 있다. 현재의 남북관계를 규정하는 힘,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주로 북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것이 김정일 위원장이 보인 절치부심의 결과이자 이명박정부가 받은 성적표다. 그런 점에서 향후 남북관계는 북의 존재감을 더 강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2. 북한 체제운영에서의 변화 읽기
북한 체제의 현재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대답이 쉽지 않다. 북은 늘 모호하게 자신을 드러낸다.7) 그렇다면 대북정책은 어떤 근거에서 수행되는 것인가? 지금도 그 가치 지향이나 유용성에 있어 독보적인 대북포용정책의 경우, 대외적 안보환경이 개선된다면 북이 개혁과 개방에 나설 것이라는 진단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에 고개를 끄덕인다고 하더라도 북이 가는 그 길이 그리 평탄해 보이지는 않는다.
북한 체제운영에서 하나의 분기점은 내부 생산력 고갈에 대한 인식 여부인데, 북 스스로는 1980년대 중반에 이를 느꼈다고 짐작된다. 이 시기부터 북은 늘 내적 긴장과 외적 긴장이 얽혀 돌아갔다. 여기서 내적 긴장이란 조선노동당 통치의 정당성 수준을 말하는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식의주(‘의식주’를 바꿔 부르는 북한어) 문제에서 발생한다. 사실 이번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의 북한의 권력지도는 내부의 긴장이 권력관계에서 발생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외적 긴장이란 대외관계를 지칭하는 것인데, 실제 북한주민의 생활은 외적 관계와 밀접하다.
국제 냉전체제가 유지되던 시기에 북은 중국, 소련과의 ‘우호가격’ 덕분에 낮은 수입가의 혜택을 보았다. 이 시기에 북의 대외관계는 사회주의권에 제한되어 있었지만 자체의 자원 동원도 원활했던 덕에 상황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북의 내부자원 동원 여력이 있던 1970년대도 북은 제3세계와의 외교를 활발히 벌였다. 북은 1975년 10월 UN 30차 총회에서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사령부의 해체를 이끌어낸 적도 있다.8) 이런 흐름이 1980년대를 지나면서는 변한다. 북이 서구 자원을 끌어오기 위해 합영법(合營法)을 도입하던 1984년이 하나의 고비라 할 수 있다. 당시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9) 북은 이 시기에 ‘8・3인민소비품생산운동’도 내놓는데, 이는 예비자원을 동원하려는 시도였다.10) 결국 자력갱생에 대한 심정적 의존이 대외자원의 필요성에 대한 절박감을 낮추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를 시작으로 사회주의권 해체가 이어지자 그 안이함의 실체가 드러났다. 이 시기 북은 대외무역의 급격한 축소로 인해 국가재정이 거의 반토막 나는 과정을 겪었다.11)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5년부터 내리 3년간 닥친 자연재해는 일거에 북의 농업생산력을 붕괴시켰고, 식의주 문제가 심각하게 부각되었다. 굶어죽는 자가 속출하는 지독한 고난의 행군이었다. 북은 고통스런 내핍을 겪은 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근본적 개선을 위한 새로운 선택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북이 2001년 신년사설을 통해 “고난의 행군에서 승리한 기세로 새 세기의 진격로를 열어나가자”12)며 평가했던 그 선택은 북에 어떤 교훈을 주었을까?
2012년 초입에 우리는 북한에 대한 새로운 지표 두가지를 접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는 북한의 휴대폰 사용자가 100만명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러시아 극동 아무르주지사 코제먀코가 발표한 내용, 즉 수백명의 북한 노동자가 아무르주 건설을 담당할 것이며, 또한 미개간 농지를 북에 제공한다는 사실이다.13) 북한에서 휴대폰 가격은 250유로에 달하며, 한달 사용료도 20유로에 육박한다고 한다. 기관 수요자를 30만명으로 잡아도 70만명의 개인이 휴대폰을 사용한다는 것인데, 그 재원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구매계층이 개성공단에서 배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조중’ 합작지구인 황금평・위화도 경제특구와 라선 경제특구도 이제 막 시작하는 것이고 보면,14) 이 공간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시장을 통해 성장한 개인이거나 해외파견 노동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2000년 이후 북의 변화에 남이 기여한 몫은 실제 어느 정도일까? 여기 매우 냉정한 평가가 있다.15) 그것은 북이 야심차게 내놓았던 7・1개혁조치조차 남한의 도움이 없이 추진되었다는 지적인데, 부시 행정부의 방해가 주범이었다. 그후 금강산 관광은 현금 지원을 이유로, 10만명의 북한 노동자를 고용했던 위탁가공업은 5・24조치로, 농업 구조개혁 가능성을 열었던 비료지원은 남북관계 악화로 모두 휘청거렸다. 결국 남은 것은 개성공단 하나다. 그런 점에서 지금 남북관계는 낮은 질로 전락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북한의 새로운 구매층이 보유한 여유자금이 시장 확대에 기여하리라는 예측을 해볼 수 있겠는데, 아직은 성급하다. 휴대폰 등 대개의 새로운 시장 유통은 당국에 의해 관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시장’을 포섭한 ‘국가계획’의 의미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들 국가계획 부문이 시장 부문을 통해 잉여를 수취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확충해온 북한 사회주의 현상에 대한 인식은 북한 연구자들의 일반적 이해였기 때문이다.16) 문제는 향후 이 관계가 어찌될 것인가인데 여기에는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중국 같은 시장 역할의 확대다. 주지하듯이 중국의 시장은 농업개혁을 통해 개인 자본가를 형성했으며, 이들이 소비재・생산재・노동시장 등 다양한 상품시장을 통해 사영기업 및 향촌기업을 조직하면서 시장과 연계, 계획 외의 비국유 부문을 형성했다고 이해된다.17) 이러한 중국의 시장현상을 지금의 북한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장의 의미를 소상품 생산으로 좁힌다면 경우가 다르다. 비록 북한의 시장에는 아직은 수입품이 다수며, 시장의 확대가 상품생산으로 체계화되지 않았지만 최소 수준의 상품생산에는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전체 생산활동의 5~10%가 계획 외 생산이었고, 2002년 7・1조치에 따라 소비재의 경우는 생산액의 30%를 시장에 판매할 수 있다. 생산재의 경우도 2007년에 5% 수준에서 시장 판매를 허용했다는 조사가 있다.18)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시장 폐쇄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식의주 공급의 내적 긴장을 내부자원 동원으로 푸는 한계점은 이미 오래전에 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논점은 계획 외 시장의 성장 가능성과 그 사회세력화를 검토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목할 점은 북한이 라선시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라선시의 매대 규모는 1997년에 4천개 수준이었다. 지금 지린성(吉林省)의 투자계획에 따르면 이 매대는 향후 3만개 수준으로 증가한다. 라선시가 경제특구라는 점에서 제한적이지만 시장을 늘리되 국가 유통망에 넣겠다는 북의 구상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개성, 라선, 황금평 같은 특구나 노동자의 해외파견 등 외부와의 경계면 형성을 통해 생산력 구성을 확장해가는 것, 그리고 이 과정을 북 지도층의 유일 통치력에 복종시키는 것, 성공 여부를 떠나 이것이 고난의 행군 이후 지난 12년간의 통치경험이자 현재의 지향점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3. 분단체제의 변화와 2013년체제
2013년체제에 대해서는 점점 더 공감대가 넓어지는 중이다. 이 체제는 “87년체제에서의 민주화가 새로운 단계로 약진할뿐더러 그동안의 극심한 양극화 경향을 반전시키고 국가모델을 생명친화적인 복지사회로 바꾸며 정의・연대・신뢰 같은 기본적인 덕목을 존중하는 사회분위기를 재생하는 등의 과제를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핵심적 의제의 하나이자 어떤 의미로는 여타 의제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이 ‘1953년체제의 해소’ 작업”19)이다.
여기서 말하는 1953년체제는 정전협정체제로 한정되어 이해되기도 하고, 또 그것이 오래 지속되면서 성립한 분단체제라는 의미로 확장되기도 한다. 어찌 되었건 분단체제에 대해 정리하지 않고서 1953년체제 해소를 제대로 다루기는 어렵다. 그럴 때 문제는 분단체제가 변화되어온 역사적 맥락이다.20)
우리가 4・19나 87년 6월항쟁을 놓고 말할 때, 그것이 우리 내부의 동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4・19가 다시 5・16쿠데타에 짓눌리고, 87년 민주화가 지체되어온 역작용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러한 역진 혹은 지체는 분단체제가 작용한 결과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4・19와 6월항쟁 자체도 분단체제의 작용력을 극복한 것임이 분명하다. 중요한 점은 4・19에서 5・16으로 뒤집혀간 힘의 작용력과 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에 대한 역작용의 힘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단체제가 민주주의 운동에 의해 끊임없이 약화되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남북한 각각의 개혁 속에서 분단체제가 혁파되어간다는 이 역사적 맥락이 분단체제론의 정수이기도 하다.
분단체제는 2000년 6・15공동선언을 통해 결정적 타격을 받았다. 남북의 지배층은 더이상 서로를 매개로 민중의 이익에 반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구조를 재생산할 명분을 상실했다. 그리고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 이르러서 남북 상호의 이해관계는 오히려 민중의 이해관계에 더욱 근접하게 된다. 혹자는 이명박정부 시절 분단체제가 다시 강화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의 대표적인 예가 천안함사건에 대한 특정한 시각이다. 북이 천안함 공격을 통해 이를 내치에 이용하고, 우리 정부 역시 이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분단체제를 고정화된 구조로 봄으로써 생기는 인식의 오류다. 이 인식이 성립하려면 북은 천안함을 공격하고 이를 공공연하게 떠들었어야 했으며, 또 이 정부는 선거에서 이겼어야 했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현실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북은 천안함사건을 부인하고, 이것이 오히려 중국과의 관계를 더욱 밀착시키는 계기가 되는 데서 자신의 이익을 찾았다.
그렇다면 지금 분단체제는 어떤 지경에 와 있을까?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변모해갈까? 가장 바람직하기야 교류협력을 통해 민족경제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겠으나, 그러자면 1953년체제를 돌파해야 한다. 1953년체제에 대해 말하자면, 거기에는 60년에 근접하는 생애만큼 누적된 복잡함이 있다. 그리고 숱한 협상 속에서 풀려온 과정도 있다. 여기서는 당사자인 북의 태도가 중요할 텐데, 그와 더불어 미국의 인식 변화도 연동되어 작용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북은 정전체체 해소와 관련해서 남북 불가침선언, 북미 평화협정 체결, 그리고 주한미군 철수라는 도식을 유지했다. 이 도식은 적어도 2002년 10월 2차 북핵 문제가 불거지고 새롭게 소집된 6자회담이 3차에 이를 때까지는 결정적인 변경이 없었다고 보인다. 물론 주한미군에 대해서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한반도 주둔에 대한 양해가 있었다. 또 1998년 6월에 열린 유엔사령부와 북한군 장성급 회담에서 북이 남・북・미 3자의 ‘잠정평화협정’을 내놓아 한국이 협정의 당사자가 되는 문제도 해결의 가닥이 잡힌 바 있다. 당사자 문제는 북의 북미평화협정 주장에 균열을 내는 결정적 사안이었기에 중요한 내용이다.
북이 한층 명확하게 전통적 도식을 변경하고 이를 명문화한 것은 제5차 6자회담 2단계 회의의 성과물인 2005년 9・19공동성명에서다. 여기서 북은 북미평화협정을 북미수교와 당사자간 평화협정으로 조정했다. 이러한 북의 태도 변경에는 미국의 입장 변화가 작용했는데, 이미 제4차 6자회담에서 미국은 ‘북미수교’를 북핵 해결의 한 해법으로 연계시키는 구상을 내놓았던 것이 주효했다.
주지하듯이 9・19 합의 틀은 그후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에 예치된 북한 돈의 성격 문제로 큰 홍역을 겪는다. 그리고 그 대결 끝에 드디어 부시 대통령의 입에서 종전조약 구상이 나왔다. 부시 대통령의 언급이 조약이냐 협정이냐에 대해서는 판단이 엇갈린다. 2006년 11월 18일 하노이 한미정상회담에서는 ‘조약’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이며,21) 2007년 9월 7일 씨드니 한미정상회담에서는 ‘평화협정’으로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22) 하여간 이러한 내용은 2007년 남북정상선언에서는 종전선언을 먼저 추진하는 것으로 조정되어 반영된다. 10・4남북정상선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나가기로 하였다.” 여기까지다.
이제 변화된 사정을 살펴보자. 우선 남북정상선언에서의 이 합의는 한국에서의 정권교체로 무시되었다. 그리고 북미간에도 핵물질 검증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고, 2008년 12월 6자회담 수석대표 접촉을 끝으로 6자회담은 2012년 1월 25일 현재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그후 북은 2차 핵실험에 이어 2009년 6월 13일 우라늄 농축작업을 선언했고, 이듬해 2010년 11월 그 관련 시설인 2000여기의 원심분리기를 공개했다. 이러한 과정에는 북의 비핵화 우선조치를 요구하며 대북제재를 추진해온 한미의 ‘전략적 인내’가 마주하고 있다. 2012년 1월 12일 국제비정부기구 핵위협방지구상(NTI)은 ‘핵물질 안전지수’ 보고서를 통해 북한을 세계 9대 핵보유국에 포함시켰다.23) 최근까지의 상황이다.
우리는 역시 종전선언 합의점에 서서 시작할 테지만 다음의 한가지에 대해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6자회담이 재개되어 한반도 비핵화 문제가 평화협정 논의와 동시에 진행된다면 북의 변화된 핵능력 전체가 협상대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북의 입장이다. 2005년 7월 22일 발표된 외무성 성명이 하나의 교본이다. 이 성명에는 “평화체제 수립은 조선반도 비핵화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노정”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비교적 최근의 것으로는 2011년 7월 27일 조선중앙통신에 실린 「정전협정과 조선반도」란 논평이다. 이 논평에서 북은 “평화협정 체결은 비핵화를 포함한 조선반도 문제 해결의 첫걸음”24)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북미 뉴욕 1차 접촉 직전에 나온 것이므로 미국에 던지는 메시지로 볼 수 있다. 그보다 앞선 7월 24일 북한 외무상 박의춘(朴義春)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연설하면서 “대화와 협상을 통해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고 비핵화를 추진하려는 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일관된 입장”25)임을 밝혔다. 이러한 맥락은 평화체제가 구축되는 방향에서 북의 모든 핵능력이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떠한가? 북의 2차 핵실험 이후인 2009년 11월 21일, 클린턴(H. Clinton) 국무장관은 그해 12월 8일로 예정된 보즈워스(S. Bosworth)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평양 방문을 앞두고, 북한이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비핵화를 추진하면 북미관계 정상화와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 체결과 경제지원 등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는다. 당시 클린턴 장관의 발언은 “관계정상화와 평화조약 체결을 검토할 것입니다.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26)인데, 이는 논의하겠다는 명백한 의사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시 변화해야 할 지점은 한국정부였다.
4. 남북연합 전략이 필요하다
평화체제와 한반도 비핵화의 병행 여부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면 다음으로는 그 둘의 동시 해결에 걸리는 시간을 검토해야 한다.
평화체제는 크게 보아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 북미수교 그리고 항구적 평화보장 관리기구 형성으로 구성될 수 있다. 여기에 직접적 요소는 아니지만 명백히 영향을 미치리라고 보는 남북경제공동체 형성도 깊이 고려해야 한다. 북방한계선(NLL)을 포함한 경계선 확정이나 유엔사령부 해체, 군비통제 등은 평화협정에 들어갈 문제인데, 이를 풀어가는 데서 북미수교 여부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북미수교는 또 핵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게다가 미 의회가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인권 문제를 들고 나올 것이 확실하다. 여기서 우리는 1953년 정전체제 해소가 북핵 문제와 동시에 풀려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북핵 문제라면, 우리가 모범으로 삼고 있는 9・19공동성명에서나 또 2・13합의에서 이미 교본이 나와 있다. 북의 핵시설・핵물질・핵무기로 큰 구획을 나누고, 이를 세분화해 각 단계별로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세워 핵폐기로 가는 경로를 설계한 것이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복병들이 있어 합의 전체를 중지시키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음도 이미 확인되었다.
이 문제를 풀자면 다음의 세가지 원칙에 담긴 지혜를 찾아내야 한다. 첫째는 북핵 문제를 남북관계 발전과 함께 풀라는 것이다. 둘째는 북핵 문제를 한반도 평화체제와 함께 풀라는 것이다.27) 그리고 셋째는 평화체제를 남북연합과 같은 통일지향체제와 함께 풀라는 것이다.28) 여기에는 남북경제협력, 북핵 문제, 평화체제, 남북연합 등 굵직한 주제들이 포함되는데, 마찬가지로 그 각각이 다른 것의 전제로 작용하지만 결코 먼저 완결될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이 표현되어 있다. 또한 그 속에는 더 중요한 뜻이 있다.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지적들은, 관계된 모든 것이 미래를 향해가는 과정이라면 뭇 세상사와 다를 바 없다는 단순함을 드러내준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를 잃지 않고 매순간 올바르게 갈 길을 선택하는 지혜로움이다.
남북연합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여타의 문제들은 연결시키는 중요한 고리로 떠오른다. 왜 그런가?
핵심은 북을 둘러싼 전략적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가지다. ‘안보에서 성장’으로 가는 것이 하나라면 ‘자주’를 강조하는 것이 다른 하나다. 이러한 환경은 북의 핵전력 강화와 북중협력구도에 따라 결과한 것이다. 여기서 ‘자주’의 문제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새롭게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이 북이 남북경제협력을 원하는 내적 동기로 작용한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스스로의 생존 중심을 확보하고서 대남관계에 나서리라는 것이다. 관련하여 북은 10・4남북정상선언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 이는 또한 ‘성장’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10・4선언에는 여러 경제협력 사업이 있지만 그 중심은 역시 개성공단의 양적・질적 확대이지 싶다. 개성은 5・24조치에도 살아남은 남북협력 공단이다. 북으로서는 개성공단을 계획한 대로 3단계 2천만평까지 세워내면서, 해주공단까지 확장되는 10・4선언의 구상이 필요한 것이다. 이 구상이 서해에서의 공동어로, 평화수역과 연계되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구성한다. 10・4선언의 여러 기획은 우리 측이 제시한 것들인데, 2007년 당시만 해도 북은 이런 정도를 스스로 고안하지 못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10・4선언이 남북정상회담, 총리급 회담, 그리고 각 분야별 장관급 회담의 운영 틀을 확정해놓았다는 점이다. 예상컨대 ‘자주’와 ‘성장’의 키워드는 이런 남북연합 수준의 운영과 결합할 수 있다.
이런 얘기들을 통해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복잡한 가운데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는 목적지고, 그것이 10・4선언에서 이미 단초를 열어놓은 남북연합이 아니냐는 것이다.29)
남북연합 전략이 섰다면 실행 차원의 지혜로움을 보태야 한다. 여기서는 세가지만 강조하려 한다. 일단 종전선언에서 출발할 수 있다면, 10・4선언이 이행되면서 북한과 미국은 수교 이전이라도 평양과 워싱턴에 연락사무소를 둘 수 있다. 둘째로, 종전선언으로 평화협정 논의가 실질화되면 북핵 문제의 해결방식이 바뀐다. 이 시점에서 한반도 비핵화 협상은 북의 핵능력 전체를 놓고 계산하게 되는데, 이럴 때 각 단계별 검증은 이미 걸림돌이 아니게 된다. 셋째로 서해경계선 문제는 끝까지 우리를 괴롭힐 사안이겠지만, 평화협정을 논의하는 남・북・미・중의 4자 틀에서라면 접근이 쉬워진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이 있다. 앞에서 북이 외부와의 관계 확장으로 새로운 생산력을 확충하면서 수령제 통치체제를 유지하려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북한의 방향을 ‘(어쩔 수 없는) 세계화로의, 통제된 행진’이라 설명해볼 수 있다면, 이런 북과 소통할 수 있는 남한의 조건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개방성과 통제라는 이중성 위에서 남한은 전혀 변하지 않으면서 북만 변화시키려는 개방전략이 설자리는 없어 보인다. 이 구도에서 북의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남한사회의 개혁이다. 그런 점에서 2013년체제 건설에 있어서의 결정적 변수는 북에 있기보다는 남에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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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본질적 의미를 ‘체제인정’의 관점에서 서술한 글로는 졸고 「6・15공동선언 10년 읽기: 체제인정의 고단한 길을 넘어」, 『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318~35면 참고.
2) 각국 정부나 기업의 비공개자료를 폭로하는 기관인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 국무부 외교문서는 이명박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북한붕괴론에 집착했음을 잘 보여준다. 『민중의소리』 2010.12.6; 북한 급변사태 대비계획으로 이해된 ‘부흥’계획이 노출된 것이 2010년 1월 13일인데, 이 계획은 2009년 하반기부터 작성되었다고 알려졌다. 『문화일보』 2010.1.13.
3) 중국의 입장이 변화한 정확한 시기는 알기 어렵지만 2차 핵실험 이후 북을 맹비난하던 중국 관방언론 『환치우스바오(環球時報)』가 UN의 대북제재가 논의되던 6월 18일에 “Time for US to show N. Korea some goodwill”이라는 논설을 실어 미국에 북한의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행동에 나서라고 촉구한 것이 변화의 계기라는 지적에 주목하려 한다. 이남주 「중국의 전략과 한반도의 선택」, 한반도평화포럼 2009년 11월 월례토론회 발표문. http://www.koreapeace.co.kr(2012.1.25 검색). 그리고 그해 10월 5일 원 자바오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의 공항영접과 수십만 평양시민의 환영을 받은 일, 방문기간 북중경제협력을 확인함으로써 대북제재가 무력해질 것임을 분명히 드러낸 일이 중국의 전략적 태도 결정에서 마침표로 이해된다. 따라서 중국의 입장 정리는 그 두 시기 사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4) 후뗀마 기지를 둘러싼 미일간 갈등은 2009년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통해 총리가 된 하또야마 유끼오(鳩山由紀夫)의 기지이전 공약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2010년 5월 22일에 천안함사건을 이유로 기지이전 공약을 철회했으며 그로부터 열흘 후 물러났다. 그후 7월에 동해에서 미 항모전단이 참가한 가운데 한미군사훈련이 실시되었고 여기에 일본 해상자위대가 참관했다. 미 클린턴 국무장관은 그해 7월 베트남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남중국해 제해권 문제를 거론하며 중국을 자극했고, 9월에는 중일간 댜오위다오(釣魚島, 센까꾸열도) 분쟁, 러일간 꾸릴열도 분쟁에도 개입한다. 이에 맞서 중국은 서해와 동중국해에서의 군사훈련 모습을 공개하고 5월과 8월에 김정일 위원장과 후 진타오 주석의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황준호 「천안함, 시대의 화두가 되다」, 『창작과비평』 2010년 겨울호, 504~505면 참고.
5) 『매일경제』 2011.5.17 참조.
6) 2010년 4월 19일 당시 김태영(金泰榮) 국방부장관이 북한의 소행을 언급하고 나왔고, 20일에는 대통령이 나서서 북의 개입 물증을 찾겠다고 야당 대표와의 회동에서 약속했으며, 21일에는 정부의 외교 및 안보 부처가 북의 소행일 것에 대비한 검토에 들어간다. 이때의 검토사항들이 5・24조치의 뼈대를 이룬다. 졸고 「천안함사건의 흐름과 반전」, 강태호 엮음 『천안함을 묻는다』(창비 2010) 참조.
7) 여기 두개의 통계가 있다. 하나는 유엔아동기금(UNICEF)이 2012년 1월 25일에 발표한 자료로, 북한 함경남북도, 양강도, 강원도의 6개월 이상 5세 미만의 아동 중 80% 정도가 영양실조 상태라고 보고되어 있다. 이 조사는 신빙성이 높다. 왜냐하면 2011년 11월 말 북한 보건성의 협력하에 1천여명의 의사가 파견되어 조사대상 25개 시군에 사는 아동 약 21만명의 88% 수준에서 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다른 통계는 세계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이 2011년 11월 발표한 것으로, 2011년 북한의 식량생산이 2010년보다 8.5% 증가한 550만톤(도정 후 정곡기준 466만톤)에 달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이러한 수치는 북한의 1년 수요량 540만톤(정곡)에 비해 74만톤이 부족한 양이지만, 북한의 연간 식량수입량 32만여톤 수준과 올해 중국과 미국으로부터 받을 지원분을 포함할 때 크게 부족하지 않은 양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대북지원이 필요한지 불필요한지를 판정하는 일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8) 북한 외교에서 1970년대는 ‘세계화’로 지칭된다. 적어도 1970~74년 북한이 서방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도입한 플랜트 총액은 5억 7천만달러 이상이었다. 북은 1975년에 8월 페루에서 열린 비동맹외상회의를 통해 정식 회원이 되었고, 그 결실이 그해 10월의 UN 총회 결의안 가결이다. 정규섭 『북한 외교의 어제와 오늘』, 일신사 1999, 134~37면.
9) 합영법 제정 이후 북한은 1989년까지 총 53건의 합영 실적을 내놓는데, 프랑스와의 1건을 제외하고는 서방과의 실적은 없다. 1987년에 북은 140개 서방 채권은행단에 의해 채무불이행 국가로 지정되었고 이후 조총련을 제외하고 북에 투자하는 기업은 없었다. 정규섭, 같은 책 195~96면.
10) 임수호 『계획과 시장의 공존』, 삼성경제연구소 2008, 77~78면.
11) 사회주의권 붕괴에 따른 파급이 북에 나타난 과정은 사안별로 조금 다르다. 우선 국가재정의 경우는 1995년부터 반영되는데, 당시 세입이 243억원, 세출이 242억원이었다. 이는 1994년의 416억원, 414억원에 비해 50%를 겨우 넘기는 수준이다. 무역의 삭감은 1991년에 즉각 나타나는데, 소련과의 무역 규모가 3억 6500만 달러로 전년의 22억 2300만달러에 비해 거의 1/7수준으로 급감했다. 1990년 당시 대소련 무역량이 전체 무역량의 53.1%임을 감안한다면 그 타격을 실감할 수 있다. 임수호, 같은 책 93~100면.
12) 북의 신년사설은 1997년이 ‘고난의 행군’의 마무리 단계임을 적시하고 있다. “모두 다 올해의 고난의 행군에서 영예로운 승리자가 되자”는 구호가 그해에 나왔다. 그리고 1998년 신년사설에서 비로소 “‘고난의 행군’의 어려운 고비를 성과적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전진과 비약의 돌파구를 열어놓았다”는 자평을 내놓는다.
13) 『세계일보』 2012.1.21.
14) 북한과 중국은 황금평・위화도 경제특구 개발 착공식을 2011년 6월 8일, 라선 특구 착공식을 6월 9일 치렀다.
15) 남북이 2000년 이후 협력의 새로운 기회를 맞았지만 서로 기여하며 내부 변화를 함께 풀어가지 못했다는 평가는 서동만 「남북이 함께하는 ‘2008년체제’」, 서동만저작집간행위원회 엮음 『북조선 연구』, 창비 2010, 406~26면 참조.
16) 양문수 「소유제 변화 없는 시장화정책」, 윤덕규 엮음 『사회주의 체제전환에 대한 비교연구』, 한울 2008, 121~51면.
17) 박희진 「북한과 중국의 경제개혁 비교연구: 계획과 시장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2006).
18) 임수호, 앞의 책 153면.
19) 백낙청 『2013년체제 만들기』, 창비 2012, 61면.
20) 한반도 분단체제에 대한 이해는 남북 재생산구조의 상호의존성을 직시하는 ‘분단체제론’의 인식이 심도있는데, 남북 각각의 내적 개혁과 변혁이 분단체제 극복의 요체라 본다. 이는 민주화와 통일이 내적으로 연관된 작업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종엽 「분단체제와 87년체제」, 『87년체제론』, 창비 2009, 41~42면.
21) 서주석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 실장은 종전조약 또는 평화조약이라고 증언한다. 김종대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 나무와숲 2010, 475면.
22) 국정홍보처 『참여정부 국정운영백서 8: 일지/자료』, 2008, 476면; 조약(treaty)의 경우 미 상원 2/3 이상의 찬성으로 비준되고, 협정(agreement)의 경우는 미 상하양원의 과반수 찬성으로 비준된다고 알려져 있다. 백낙청, 앞의 책 164면.
23) 『서울신문』 2012.1.12.
24) 『연합뉴스』 2011.7.29.
25) 『연합뉴스』 2011.7.24.
26) KBS뉴스 2009.11.21.
27) “북핵 문제는 미북 적대관계의 산물로서 미북관계가 정상화되고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될 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며 오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미북관계 개선과 북핵폐기의 여건과 환경을 조성해나가야 한다.” 임동원 「남북화해협력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2011년 11월 8일 한반도평화아카데미 발표문(http://www.koreapeace.co.kr 2012.1.27 검색)
28)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북미관계가 정상화되며 외부의 경제지원이 증대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분단국가의 체제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 결국 6・15공동선언 제2항에 이미 제시된 남북연합이라는 해법을 본격적으로 추구하는 길밖에 없다.” 백낙청 「‘포용정책 2.0’을 향하여」,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84면.
29) 이에 대해 이종석은 평화협정 이전이라도 남북연합으로 나아가기 위한 틀을 하나하나 쌓아나가자고 주장한다. 그 예시로 남북장관급의 남북관계발전위원회(가칭)와 상설 사무처를 제안하고 있다. 이종석 「2013년체제와 평화・안보전략」 세교연구소・한반도평화포럼 공동주최 심포지엄 ‘‘2013년 체제’를 향하여’(2011.11.25) 자료집 14~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