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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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원 李承垣

1972년 서울 출생. 2000년『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어둠과 설탕』이 있음. weirdpoet@gmail.com

 

 

 

폐허의 섬 파르티타

 

 

건물의 사체가 먼지를 머금고 아직 직립해 있을 때

썩지 않는 생선 꼬리를 맡으며

나는 누구의 이름을 생각해냈던가

 

인공물이 자연에 근접하며 낡아간다 지워지고 흔들리며

 

지붕은 속살이 드러나

그곳에선 빤히 혼자라는 게 허기처럼 떠오르고

태양계를 벗어나는 탐사선처럼

깊은 수심 속으로 내려가는 죽음을 상상한다

 

살마다 녹슨 새장은 스스로를 속박한다

 

들떠 일어난 천장의 페인트가 나방처럼 날개를 젓고

버려진 스패너들 검어진다 네 얼굴처럼

 

묽게 칠한 그의 아랫도리가 가리고 있는

두개의 흐린 눈은

언제를 기억해내려 했던가

 

해가 흘린 피를 유리창이 반사한다

 

광택을 잃은 구층 아파트의 허물어지는 베란다

느리게 몸을 열고

거품을 무는 바다에서 새가 제 흰색을 공중에 그린다

 

짙은 물이 고인 거대한 욕조 바닥

마개를 뽑을 때 들리는 비명소리는 언제나 물리지 않았지만

더럽혀진 젖은 손가락은 결국 어디를 가리켰는가

 

 

 

137억년과 100분쇼

 

 

1

 

특유의 계절풍이 낯을 간질일 때 노천극장에 앉아 있었어

피어오른 풀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계단은 튼튼하게 바뀌어 있었지

이유 없이 북악 스카이웨이가 생각났어

예전에 걷고 걷고 또 걸었지만 발바닥만 아팠어

 

그때나 지금이나 라디오에선 한여름 밤의 꿈 또는 사랑해요 등의 노래가 나오는데

20년 전 12월 26일 저녁 신촌 거리

빨간 거위털 외투 흰 헝겊으로 만든 운동화를 신은 여학생이 떠오르게 하는 그 음악들

당대를 잃어버렸고 현재도 재해석의 여지조차 없어

 

활엽수는 인간과 상관없는 활엽수만의 생이 있다지만

분명히 저 나무는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다

 

사랑은 참고 믿고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질투와 의심 배신과 분노가 사랑이다

모두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두시간도 기다리기 힘들다

 

영원은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사랑이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 이런 게 재해석인 것 같아 용례가 성글긴 하지만

 

침실의 여학생을 자극하기 위한 작품이 왜 나쁘냐고?

 

2

 

공기가 물방울에 식는 것을 구경하며 분수대에 앉아 있었지

시장 후미진 곳에서 쓰레기가 부패하는 냄새를 맡고 싶었어

세계에서 가장 강렬한 비장미가 아닐지

남산육교에 서서 서울역을 바라보며 친구가 말했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가 본데 비틀즈보다 마이클 잭슨이고 베엠베보다 토요따 렉서스란 말이야 상을 받고 더 많이 팔리면 그게……

난 넷 다 싫어

말을 잘라서 나중에 미안했지만,

 

레슬리 스피커로 재생하는 하몬드 오르간같이 멋진 신파 음색을 내고 싶지만 벽돌처럼 딱딱하고 낡은 수건처럼 메마른 소리만 나오지

예를 들어 이런 식이야

 

부산이다 항구다 외국 도시 평양보다 이국적이다

바다에 갈매기 보이지 않는다

남포동 해운대 광안리보다 범일동 온천장 영도다

 

잊고 있었는데 왜 생각나게 하냐고 화를 내지만 망각을 각성으로 바꾸는 건 대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