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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배지영 裵志瑛

1975년 서울 출생.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으로 『오란씨』가 있음. beassi@hanmail.net

 

 

 

 

그들과 함께 걷다

 

 

11월의 밤이었다. 남자는 탐욕스러운 기세로 밥을 먹었다. 여자는 젓가락을 든 손을 식탁에 올려놓은 채 냄비받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천천히 밥을 먹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라 그런지 여자의 낯빛은 아침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괜찮은 거야?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기를 기다렸다. 여자는 눈을 내리깐 채 갈치조림에 넣은 무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조금만 이상해도 연락해. 무전기를 쓰든 종을 울리든.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얇은 입술을 오물거릴 뿐이었다. 남자는 두툼하게 썰어놓은 햄 두조각을 젓가락으로 한꺼번에 찍어 입에 넣었다.

그건 좀……

여자가 남자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짜증스러운 표정이 여자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그만 갖다놔. 몸에 좋지도 않고.

남자는 여자를 물끄러미 건너다봤다.

왜 그렇게 봐?

여자가 물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올렸다.

이뻐서.

남자는 멋쩍게 웃었지만 여자는 웃지 않았다. 모욕이라도 당한 듯 얼굴을 붉혔다. 남자는 난처한 듯 미간을 긁었다. 손톱이 몇번 오가기 무섭게 살갗이 발갛게 일었다. 여자는 그걸 유심히 봤다.

시골로 갈까?

남자가 말했다.

냉동고도 만들어볼게. 당신이 원하는 것들은 천천히 나르면 그만이고. 뭐가 걱정이야.

여자가 젓가락을 식탁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거의 다 처리됐다며?

여긴 너무 넓어. 자꾸 기어나온다고.

몰라. 맘대로 해.

여자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남자는 수저를 빈 그릇 위에 포갠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거지는 둬. 씻고 나서 내가 할게.

남자는 자상한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자는 남자의 표정을 가식적이라 여겼다. 남자는 그릇을 개수대에 올려놓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듯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양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여자는 밥을 한술 듬뿍 떠서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샤워기의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도 들렸다. 일을 마치고 나면 목욕부터 하라는 간단한 요구를 남자는 끈질기게도 들어주지 않았다. 손만 대충 씻고 나와 허겁지겁 밥을 먹곤 했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역한 냄새 때문에 여자는 도무지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배가 당겨왔다. 남은 밥과 국을 음식물쓰레기 통에 버리고 그릇은 개수대에 올려놨다. 여자는 싱크대를 붙들고 숨을 골랐다.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당장 오늘이 될 수도 있었다. 준비를 많이 했지만 불안은 줄지 않았다. 숨을 쉬지 않은 아기가 태어났던 날의 기억이 그녀를 눌렀다. 여자는 아기를 강으로 떠내려보내는 남자의 벌건 목덜미가 마음에 걸렸다. 피부병이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성병의 증거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아기가 죽은 건지도 모른다고 여자는 멋대로 단죄했다.

밖에선 ‘걷는 자’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질질 끌며 걷는 그들의 발소리가 지긋지긋했다. 무리는 크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리는 곧 멀어졌다. 이어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개들마저 무리짓는 걸 좋아했고 걷는 자를 따라다녔다. 불과 이년 전만 해도 애완견으로 기르던 것들이다. 용케 집 안을 탈출하여 나온 개들은 무리를 지으면서 사나워졌다. 소리를 내며 걷는 자에겐 무조건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남자와 여자도 차로 이동하지 않을 땐 되도록 발소리나 말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밖이 어두워져 창문엔 여자 얼굴만 비쳤다. 그녀는 무표정한 자신의 얼굴을 낯설게 쳐다봤다. 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물을 틀었다. 설거지를 하겠다고 하고선 남자가 제대로 지킨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한 경기만 보고 나서, 한 캔만 마시고 나서, 책을 읽고 나서 하겠다고 하다가 결국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곯아떨어졌다.

왜 하필.

여자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세상엔 남자와 여자 단 둘뿐이었다. 여자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

 

남자는 욕실을 정리하지 않는 여자가 못마땅했다. 바닥엔 샴푸와 바디클렌저, 색색 병에 담긴 갖가지 화장품이 놓여 있었다. 남자는 실수인 양 그것을 발로 차 쓰러뜨렸다. 타일에 부딪히는 소리가 남자의 마음을 조금 후련하게 했다. 남자는 여자가 백화점에서 했던 행동을 잊을 수 없었다. 여자는 닥치는 대로 물건을 카트에 담았다.

에덴이 따로 없어!

여자는 소리를 질렀다.

고작 열쇠고리일 뿐인 것에 붙은 가격표를 보고 남자는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1년치 급여와 맞먹었다. 처음엔 남자도 물건을 골랐으나 곧 시들해졌다. 창문이 없는 백화점 안은 냄새로 지독했다. 특히 1층은 지하 식품매장에서 올라오는 냄새로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여자는 마스크도 쓰지 않고 백화점 곳곳을 돌아다녔다. 일을 마친 후의 남자 몸에서 나는 냄새에 예민하게 구는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남자는 비상전력이 가동되는 인근 공장의 냉장고과 냉동시설에 각종 식료품과 의료용품 등을 비축했다. 별다른 보관이 필요 없는 공산품은 필요할 때마다 가져오면 그만이었다. 부족한 건 없었다. 아니, 너무 넘쳐났다.

정작 남자를 감동시키는 건 사소한 것들이었다. 가령 따뜻한 물이나 쌓아놓고 먹을 수 있는 통조림이나 캔맥주 같은 것들.

남자는 샤워기를 틀었다. 수증기가 욕실 안을 채웠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기는 매번 그를 감동시켰다. 지붕엔 태양전지가 있고 지하실엔 석유로 작동되는 발전기도 있었다. 지하수를 이용한 별도의 상하수도 시설 역시 완벽했다. 남자도 여자처럼 에덴이 따로 없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남자는 세상 끝이 오기 전에도 몸에 냄새 풍기는 일을 했다. 하수관에 쌓인 퇴적물을 청소하고 노후한 관을 수리하는 일이었다. 떠벌릴 정도는 아니지만 준설원이라는 직업에 긍지도 있었다. 여러 일을 전전하다 얻게 된 자리였기에 애착이 컸다. 오물을 걷어내고 남자는 물청소까지 말끔히 했다. 그런다고 돈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몸만 축날 뿐이었다. 동료들은 빈정댔지만 남자는 자신만의 작업스타일을 고수했다.

그러나 일을 할수록 남자는 자신의 일이 부끄러워졌다. 시민들의 통행에 불편을 준다는 이유로 야간작업 지시가 내려왔을 때, 시급으로 계산되던 급여가 재료비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3개월 단위로 계약을 맺고 강제로 며칠씩 쉬게 할 때, 남자는 부끄러웠다. 남자는 그 일을 5년 동안 했다.

동료 가운데 남자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이는 경력 20년차인 송 조장이었다. 송 조장은 아파트 하수도관 전문이었다. 그 일은 기술뿐 아니라 감이 있어야 했다. 층수가 높고 세대수가 많을수록 하수도관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송 조장이 가리킨 관의 윗부분을 전기드릴로 도려내면 정말 그곳은 기름덩어리와 오물로 틀어막혀 있었다. 송 조장은 오물을 걷어내고 분사노즐을 집어넣었다. 분사된 물이 역류해 오물과 함께 얼굴에 쏟아지기도 했으나 송 조장은 당황하지도 않고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신중한 그의 모습은 숙련된 전문의가 막힌 혈관을 찾아내 고난도 의술을 펼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남자가 감탄하면 송 조장은 별일 아니라는 듯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있었다. 주택가에 있는 하수관거를 청소하고 수리하는 일이었다. 몸집이 작고 날래지 않으면 지름 80센티미터도 안되는 하수도관에 기어들어가는 일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오롯이 남자의 몫이었다. 송 조장도 할 수 없었다. 그 점에서 남자는 자신이 준설원 B조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맨홀 아래 지하에서만 통용됐다. 일을 마쳐도 씻을 곳이 허락되지 않았다. 공공기관마저 그들에겐 샤워실을 내주지 않았다. 대중목욕탕이나 찜질방은 출입할 생각조차 못했다. 손님들의 항의를 받고 쫓겨났다는 최씨 이야기를 들으며 남자는 최씨를 탓했다. 남자는 작업차 호스에서 나오는 물로 몸을 씻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이를 딱딱 부딪치며 얼굴이나 손만 대충 씻고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배어버린 냄새 때문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수 없었다. 몇년을 굴러먹은 노숙자보다 더 지독한 냄새였다. 사람들은 코를 막으며 비켜섰다. 남자는 뻔뻔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집까지 걸어가곤 했다. 물 묻은 머리카락이 빳빳하게 얼어붙었다.

야간작업을 할 때면 남자는 출근하는 직장인들에 섞여 퇴근했다. 그들에겐 비누 냄새가 났다. 남자는 그들을 흘깃댔다. 신호등이 바뀌기 무섭게 횡단보도를 바삐 건너는 사람들, 지하철을 타려고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 무리를 지어 걷는 사람들. 남자는 냄새를 풍길까 멀찌감치 떨어져 가거나 벽에 바짝 붙어 빠르게 걸었다. 남자의 모습은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키는 평균치에 한참 못 미쳤고 얼굴은 평균치를 훌쩍 넘을 만큼 컸으나 이목구비는 희미했다. 걸음걸이도 우스꽝스러웠다. 걸음마를 떼는 시절 치명적인 사고로 교정 불가능한 걸음걸이를 갖게 된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어찌 보면 지병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두팔을 흔들었는데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남자는 외면했다.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인적 없는 골목길에 들어서면 남자는 종종 걷는 연습을 했다. 발을 쭉쭉 뻗기도 하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건들대며 걷기도 했다. 방자하게 팔자걸음을 해보기도 했다. 어느 것도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연습을 할수록 남자의 걸음걸이는 점점 괴상망측한 모습으로 변했다.

 

세상 끝이 왔을 때 남자는 지하철 공사중에 터진 하수도관을 수리하기 위해 지하에 있었다. 지하철 공사장 쪽 일은 최씨 담당이었다. 그날 최씨는 몸이 아파 결근했다. 유독가스 때문인지 오물 때문인지 피부가 벌겋게 일어나더니 입안마저 헐었다. 밥은 못 먹고 술만 꿀꺽꿀꺽 삼키더니 드디어 앓아누운 모양이었다. 별 수 없이 남자가 내려갔다. 남자는 고소공포증이 있었다. 깊은 지하로 내려가는 일은 높은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밧줄에 묶여 20여미터를 내려가는 동안 그는 두눈을 질끈 감았다. 오줌을 지릴 뻔했다. 무사히 바닥에 내려왔으나 진득한 퇴적물과 오물이 무릎께까지 차 있었다. 흡입 호스는 힘을 쓰지 못했다. 너무 깊이 수직으로 내려와 있어서 흡입력이 현저히 낮아진데다 물이 가득 차 있어 더욱 그러했다. 양수기를 내려달라고 해서 그는 물을 먼저 퍼냈다.

암벽 무너지겠어. 조심하게!

지하철 공사 관리소장이 근심이 되는지 내려다보며 소리를 쳤다. 남자는 양수기로 조심스럽게 물을 빼냈다. 그러자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됐다. 이어 권씨가 내려왔다. 남자는 흡입 호스를 붙잡았다. 권씨가 삽질을 해서 호스 입구로 오물을 밀어넣었다. 호스는 살아 있는 거대한 생명체라도 되듯 출렁댔다. 손목이 시큰거리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등엔 땀이 찼다. 습하고 불쾌한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 그의 콧속으로 훅훅 밀려들어왔다.

작업을 마치자 권씨가 먼저 줄을 타고 올라갔다. 권씨 뒷주머니에 꽂아놓은 손전등이 떨어지면서 남자의 얼굴을 아슬하게 스쳤다. 권씨가 무사히 지상으로 올라가고 난 뒤 남자가 뒤를 따랐다. 지하 5미터 표시금을 넘는 순간 굉음이 그의 귀를 먹먹하게 했다. 뒤이어 남자의 허리를 묶었던 줄이 맥없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옹벽이 출렁거렸다. 남자는 떨어졌다. 이대로 죽는구나.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 지나간 인생이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변변한 연애 한번 못했는데, 돈을 아끼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두다리 쭉 펴고 잘 수도 없는 고시원에서 소리죽여 살았는데, 왜 그렇게 살았을까. 고작 이렇게 죽으려고 그렇게 아득바득 살아왔던 걸까. 남자는 하필 철근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정신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극심한 두통이 몰려왔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했지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어둠에 두려움을 느꼈다.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공포와 추위에 남자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간신히 소리를 질렀다. 아무도 그를 도우러 내려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아래에 있는 걸 사람들이 깜박 잊은 건지도 몰랐다. 한번은 두고 나온 연장을 찾으러 잠시 내려갔던 사이 맨홀뚜껑이 닫힌 적이 있었다. 맨홀뚜껑을 밀어내려 했지만 꿈쩍도 안했다. 동료들이 장난치는 거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자 이건 장난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이 맞았다. 동료들은 정말 남자의 존재를 잊었던 것이다. 그들이 철수하기 무섭게 차 한대가 맨홀 위로 주차를 했다.

동료들은 늘 자리잡던 술집 구석에 앉았다. 송 조장이 남자는 왜 안 왔느냐고 물었다. 권씨는 남자가 하수도관에서 주운 금반지를 팔러 간 모양이라고 대답했다. 하수도관을 청소하다보면 가끔 동전을 주웠고 일이 끝나면 그걸로 커피를 뽑아먹곤 했다. 그런데 그날 남자는 금반지를 주웠다. 흔치 않은 행운이었다. 거하게 회식을 해야겠다고 했다. 시킨 음식이 다 나오고 술잔이 서너번 돌았음에도 남자가 오지 않았다. 이자식, 혼자 먹고 튄 거 아니야,라며 최씨가 투덜댔다. 그때 권씨 호주머니에서 반지가 나왔다. 동료들은 맨홀 위에 떡하니 주차해놓은 차 주인을 전화로 불러내고 뚜껑을 당겨 열었다. 술냄새 풍기는 동료들은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남자를 손전등으로 비춰가며 키득거렸다. 남자는 무척 화가 났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남자는 또 그런 일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엔 금반지도 줍지 않았으니 마음을 단단히 먹자고 다짐했다. 지하철 공사장이니 통로만 잘 찾으면 쉽게 밖으로 나갈 수 있으리라 편하게 생각하려 했다.

그는 몸을 낮추고 바닥을 더듬었다. 밀도 높은 어둠에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 분간이 안됐다. 미처 처리 안된 침출토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축축하게 잡혔다. 권씨 주머니에서 떨어졌던 손전등이 어딘가 있을 게 분명했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튀어나온 철근과 옹벽의 절리에 남자의 얼굴과 어깨가 긁히고 부딪혔다. 손전등의 뭉툭하고 짧은 손잡이가 잡히자 남자는 안도했다. 남자는 지하통로를 찾아보려 했다. 옹벽이 무너질 수 있다는 관리소장의 말이 떠올랐다. 실제로 벽이 무너져 통로가 막혀 있었다. 좁은 하수도관으로 기어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벽면에 몸을 붙여 한발짝씩 발을 뗐다. 얼마 못 가 귀가 울리고 속이 메스꺼워졌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남자가 하수도관을 빠져나와 굴착 작업중인 지하철로를 헤맨 건 46시간 동안이었다. 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추위에 곱은 손으로 받아먹었다. 오수인지 지하수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맛은 달았다.

남자가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세상은, 아니 인류는 종말을 맞은 이후였다. 사람들은 모조리 시체가 돼 있었다. 남자가 생각하는 종말이란 물이 세상을 쓸어버리는 거였다. 어린시절 그는 잡지에서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사는 천재 과학자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종말에 대비해 최신식 방주를 만들어 동물 한쌍씩을 넣어 기른다고 했다. 살아남아야 하는 쪽은 그런 사람이었다. 남자가 ‘최후의 인간’이 된다는 건 스스로도 납득이 안됐다.

어쨌든 현실의 종말은 싱겁기 짝이 없었다. 돌연한 인류의 죽음으로 끝장이 났다. 전염병이 돈 것도 아니고 핵폭발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약한 지진을 제외하곤 별다른 이상징후도 없었다는 것이 나중에 여자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징조도 예고도 없이 사람들은 한날한시 일제히 숨이 멎은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그뒤에 일어났다. 그들이 죽은 지 정확히 사흘 만에 벌떡 일어난 것이다. 딱 사흘치의 부패만 진행된 채 더이상 썩지도 않았다. 꽤 차갑던 이른 봄이라 부패도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시체는 시체였다. 그들은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시체가 된 채 걸어다니니 ‘부활’이라 하긴 곤란했다. 영화에서처럼 살아남은 사람을 물어뜯지도 않으니 ‘좀비’라 칭하기엔 어쩐지 박진감이 부족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그들을 ‘걷는 자’라 했다.

걷는 자들은 홀로 다니는 법이 없었다. 앞사람의 등짝에 자석이라도 붙은 듯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긴 줄을 이루었다. 무리의 수는 제각각이었고 한 무리가 다른 무리 뒤로 붙지 않았다. 그들은 앞선 자를 묵묵히 따라 걸어다녔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밤이고 낮이고 그야말로 정처 없이 걷고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왜 하필 우리 둘만 살아남은 걸까.

여자는 ‘왜 하필’이란 표현을 자주 썼다.

어쩌면.

남자가 뜸을 들였다.

깜박 잊은지도.

뭘?

우리를.

 

*

 

샤워를 마친 남자가 소파에 앉았다. 그는 어제 보다 만 레슬링 경기가 녹화된 DVD를 켰다. 남자는 미국 프로레슬링 경기에 빠져 있었다. 개떼에게 쫓겨 들어간 어느 집에서 발견한 것이라 했다. 그 집 책장엔 「스맥다운 VS. 로」 녹화 DVD가 날짜를 기록한 스티커가 붙은 채 빼곡히 꽂혀 있었다. 남자는 순서대로 경기를 관람했다. 초반엔 ‘더 락’을 좋아하더니 최근엔 비열하고 난폭한 ‘트리플H’에 꽂혀 있었다. 더 락이 빠지자 맥 풀린 경기에서 인기 없는 챔피언 자리를 근근이 이어가고 있는 트리플H가 맘에 든다고 했다.

설명해줄 테니 앉아봐.

남자는 캔맥주를 따서 여자의 손에 쥐여주었다. 여자는 덩치 큰 사내들이 팬티 한장만 걸친 채 땀에 번들번들 젖어 끌어안고 누르고 조이고 집어던지는 것이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입에 문 물을 뿜어내며 등장하는 모습은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철제의자를 상대선수 머리에 던져 피를 줄줄 쏟게 만드는 것을 보며 열광하는 관중도, 그걸 보고 키득거리는 남자의 웃음소리도 끔찍했다.

행복하지 않아?

남자는 옆에 앉은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남자는 행복하다고 했다. 여자는 자신도 그렇다고 대꾸했으나 진심이 아니었다.

여자는 주방 의자에 앉아, 거실 소파에 파묻혀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이제 여자는 남자 곁에서 레슬링 경기를 보지 않는다. 남자 역시 선수들의 캐릭터나 경기스타일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을뿐더러 같이 보자고 권하지도 않는다.

캔맥주를 들이켜는 남자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남자는 피스타치오를 위로 던져 받아먹었다. 레슬러들이 으르렁거리듯 씹어뱉는 목소리와 우우 와아 질러대는 관중의 함성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앞에 펼쳐놓은 책을 덮었다. 표지엔 배를 내민 산모가 활짝 웃고 있었다. 여자는 표지를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책은 다 읽었어?

여자는 남자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남자는 얼른 대답을 않고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볼륨을 줄였다.

무슨 책?

남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사실 남자의 대답이 뻔하다는 것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너무 피곤해. 알잖아.

남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고 다시 볼륨을 키웠다.

남자는 이전 세상의 마지막 남자, 바야흐로 지금 세상의 첫 남자다. 그렇다면 그는 태어날 아기를 위해 의사도 되어주고 선생님도 되어주어야 했다. 듬직한 기술자나 유능한 사냥꾼도 되어야 했다. 그러나 시골로 가자는 말뿐, 그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어디로 갈지조차 결정하지 못했다. 여자는 소파 옆에 쌓아놓은 농사법이나 각종 기술 관련 책들을 노려보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거실에서 캔 찌그러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급 목재로 만들어놓은 천장 패널을 올려다봤다. 원래 이곳은 장교 출신 노인이 살던 집이다. 부인과는 일찌감치 사별한 듯했지만 일 봐주는 아주머니 손이 야무진 모양이었다. 수납이 깔끔하게 되어 있었고 취향은 고급스러웠다. 평수가 넓지 않은 것이 불만이었지만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주택 앞 도로는 넓고 주변엔 큰 건물이 없어 안전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얼마 뒤 맥주캔 따는 소리, 흘러내리는 거품을 쩝쩝 핥는 소리, 꿀꺽꿀꺽 술을 마시고 트림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하필.

여자는 두눈을 꾹 감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

 

사실 여자는 꼴 보기 싫은 인간이 모두 죽어나자빠진 지금 세상이 마음에 들었다. 배기가스를 내뿜는 자동차들이 일시에 멈춘 도시의 공기는 굳이 시골로 갈 필요도 없이 맑고 상쾌했다. 일하러가 아니라 아무 물건이나 집어오기 위해 백화점에 간다는 사실도 그녀를 기쁘게 했다. 도시엔 백화점이 많았다.

여자는 세상 끝날까지 백화점에서 일했다. 백화점 지하 6층의 주차요금 정산원이었다. 그때만 해도 백화점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었다. 정산원 유니폼을 입은 채로는 백화점 안 화장실도 이용할 수 없었다. 규정이었다. 근무시간이 끝나면 백화점도 폐장을 했다.

시작한 지 석달 만에 안구건조증이 생겼고 다섯달 만에 비염이 생겼다. 눈인사를 하며 지내던 지하주차장 담당 청소부 아줌마가 안 보인다 싶더니 폐암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코를 풀 때마다 까만 콧물이 나오고 한번 걸린 감기가 좀체 낫지 않던 여자는 더럭 겁이 났다.

기침감기가 낫질 않아.

지하 6층 화장실에서 여자가 아줌마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순환근무가 약속됐지만 경력이 길지 않은 여자는 지상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기껏해야 지하 1층이었다.

S는 여자에게 친절했다. 목이 많이 아프죠? 깍듯한 존댓말을 하며 건강음료를 건넸다. 그가 입은 양복은 고급스러웠고 그에게 잘 어울렸다. 반듯한 미소도 마음에 들었다. 중저음의 목소리는 늘 여자를 설레게 했다. 부드러운 손길로 여자를 위로했다. 주차유도 아르바이트생 J는 여자에게 충고했다.

그 사람 유부남이야. 뻔하잖아.

그러나 여자의 생각은 달랐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젊은 여자와 자보겠다는 생각에 S가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건 아니라고 믿었다. 드라마에나 나오는 추잡한 불륜이 아니었다. 여자는 S가 이혼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의 가정을 지켜주고 싶었고 자신의 사랑도 이어가길 원했다.

영수증을 잃어버렸다잖아.

외제차를 몰고 온 늙다리가 소리부터 질러댔다.

고객님, 죄송합니다. 무료주차권이나 구매하신 영수증이 없으시면 주차료 삼천원을 주셔야 합니다.

심장이 벌떡벌떡 뛰었지만 여자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산소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마주한 여자는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여자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씨발년아, 내가 여기서 매번 얼마나 사는지 알아?

뒤에 밀려 있는 자동차들이 클랙슨을 울려댔다. 귀가 아팠다. 공회전을 하는 자동차들의 배기가스가 여자의 가슴을 조여왔다. 엔진에서 나온 열기가 얼굴을 달궜다. 백화점이 이대로 무너져버리면 좋겠다고 여자는 바랐다. 어차피 S는 주차장을 빠져나간 뒤였다. 저 늙은이가 외제차와 함께 찌그러진다면 여자는 자신도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적선하는 셈 치고 줘버려. 이런 데 일하는 것들은 위아래를 모른다니까.

옆자리에 인형처럼 앉아 있던 젊은 아가씨가 늙다리를 거들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주차료를 주시지 않으시면……

여자의 목소리는 더 낭랑해졌다.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그런 여자의 얼굴 위로 꼬깃한 지폐가 스쳤다.

뭐 해. 차단기나 올려.

늙다리가 소리쳤다. 여자는 차단기 버튼을 눌렀다. 출발하는 외제차의 시커먼 배기가스가 그녀가 앉아 있는 정산소 부스 안으로 뿜어들어왔다.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때다. 갑자기 정산소가 흔들렸다. 뒤이어 온 차가 차단기를 박으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경적과 경보음이 뒤섞였다. 백화점이 무너지는구나. 여자는 방금 자신이 내뱉은 저주가 이렇게 빨리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순간 여자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만 떠오를 뿐이었다. S가 슬퍼할까. 금방 잊겠지. 그럴 것이 분명했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눈이 두려워 변변한 데이트 한번 못했는데, 주말에 먼저 연락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는데, 왜 그렇게 살았을까. 고작 이렇게 죽을 바엔 결단을 내렸어야 했다. S를 가지든 헤어지든. 둘 중 하나는 했어야 했다.

그리고 비명이 들리는가 싶더니 사람들의 소리가 일시에 멈췄다. 음소거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듯 일제히. 브레이크를 잡지 못한 차들이 멋대로 추돌했다. 주차권 리더기가 떨어지면서 여자의 코를 깼다. 그 바람에 여자는 정신을 차렸다. 까만 코피가 흘렀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허겁지겁 정산소 밖으로 나간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독가스라도 살포된 걸까. 사람들은 주차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쇼핑백을 든 채로, 시동을 걸다가 운전대에 엎어진 채로. 그들은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여자는 피 나는 코와 입을 틀어막고 지상을 향해 뛰어올라갔다. 멋대로 달려나가는 차를 피해, 쓰러진 사람들을 피해 지상까지 올라간 여자는 또 비명을 질렀다. 차도엔 추돌한 차들이 무리지어 연기를 뿜어내며 경보음을 울려대고 있었으나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심장이, 숨이 멈춰 있었다. 각종 기계음과 사람 목소리를 녹음한 안내음만 그 자리를 대신했다. 끔찍한 침묵이었다.

텔레비전은 비상시스템이 작동되는지 태연하게 녹화방송이 나왔다. 숨이 끊겨 엎드러진 앵커를 묵묵히 비추고 있는 뉴스 프로그램도 있었다. 이틀이 지나자 대개의 방송은 모두 정지됐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였다. 연결되긴 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활동하고 있다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나중엔 그마저도 정지됐다.

왜 하필……

여자는 혼자만 살아남은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여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어디 사람 없나요. 죽지 않은 사람, 어디 없나요.

여자는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며 거리를 활보했다. 아무데나 전화를 걸어봤지만 녹음되지 않은, 살아 있는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인류가 전멸하다니 믿기지 않았다. 천재지변이든 핵폭발이든 전염병이든 전조라도 있어야 했다. 전원을 빼버린 것처럼 모두가 한날한시 숨이 멎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숨을 쉬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시체가 된 채 걸어다니며 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여자는 백화점 옥상으로 올라갔다. 무섭고 끔찍해서 살 수가 없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또다른 한 사람, 남자를 만났다.

 

*

 

여자는 건물 옥상에 서 있었다. 위태로워 보였다. 몸을 난간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몸을 던질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발견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안돼요. 떨어지면 안돼요. 여기 사람이 있잖아요. 당신처럼 살아 있는 사람이 있잖아요.

남자는 필사적이었다. 겉옷을 벗어 들고 미친 듯이 펄럭였다. 남자를 발견한 여자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의 긴 머리칼이 깃발처럼 나부꼈다. 얼마나 오래 소리를 질렀을까. 여자는 천천히 한쪽 손을 들었다. 하얀 손바닥이 남자를 향해 수줍게 흔들렸다. 여자의 등 뒤로 해가 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자에겐 빛이 났다. 세상의 모든 빛이 그녀 머리 위에서 시작됐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그녀에게서 비롯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요.

남자는 여자와 온전한 하나가 되는 순간 말했다. 시체들이 걸어다니는 지옥 같은 세상이 여자를 안는 순간 황홀한 천국으로 바뀌었다. 일이 끊어질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었다. 의류수거함에서 꺼낸 점퍼를 몇년째 입으면서 덜덜 떨지 않아도 됐다. 세상의 귀하고 값진 물건들이 오직 남자와 여자를 위해 존재했다. 세상의 자연은 남자와 여자를 위해 싱싱하게 약동하고 있었다. 자연과 문명이 모두 남자와 여자의 소유였다.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누리면서 아름다운 반쪽과 평생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남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하를 돌아다니고 냄새를 풍기며 걸어다닐 때엔 언감생심 꿈꿀 수 없던 여자, 젊고 아름다운 여자, 감히 만져볼 수도 없었던 그런 여자와 함께.

여자가 임신을 하자 남자는 태어날 아이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했다. 음식을 비축하고 신선한 채소와 육류를 구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었다. 테마파크 안엔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식탁 위에 오르는 것들’이란 주제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각종 채소는 물론이고 과실수도 있었다. 닭과 오리, 돼지, 소 같은 가축도 키우고 있었다. 도시 아이들을 위해 교육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었으나 이젠 남자와 여자에게 유용한 식량공급처가 됐다. 남자는 이곳에 들러 물을 주고 먹이를 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본업인 양 걷는 자의 무리를 강물에 빠트리는 일을 했다. 무리 앞에 선 자를 장대로 밀어서 강가로 몰고 가면 됐다. 앞에 선 자가 걷는 대로 무리는 줄을 지어 따라갔다. 흡사 강물로 빨려들어가듯 무리는 걸어들어갔다. 죽어서까지 쉬지 못하고 걷는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걷는 자를 빠트리는 일을 하느라 쉬지 못하는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걷는 자들은 강물에 완전히 잠기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어떤 작용 때문인지 몰라도 비로소 썩는 시체가 됐다. 남자는 침례를 행하는 사도처럼 진지했다. 강물로 들어간 자들이 자신에게 고마워할 거라고 남자는 멋대로 생각했다.

남자는 시큰거리는 오른 손목을 왼쪽 손으로 주물렀다. 새 세상의 첫 남자로서 보잘것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스칸디나비아의 과학자가 살아남았다면 그는 어떤 일을 했을까. 걷는 자를 처리하는 것보다 훨씬 중차대한 일을 하지 않았을까. 그 ‘다른 일’이란 무얼까. 아무리 고민해도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리지어 걷는 자들은 더럽고 위험했다. 치명적인 병균을 퍼뜨릴 수도 있었다. 발길에 차이거나 밟힐 수도 있었다. 세상의 쓰레기를 처리하지 않고 새 세상을 시작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아마도, 남자는 생각했다. 물이 마르고 방주에서 걸어나온 자들도 뭍에 쌓여 있을 쓰레기와 시체들 처리하는 일을 가장 먼저 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걸어다니는 시체를 처리하는 일은 훨씬 깔끔하고 보람됐다. 남자는 편하게 생각했다.

준설원 B조의 무리를 강물에 빠트린 날은 우울했다. 송 조장이 맨앞에 서 있었다. 남자는 송 조장의 등짝을 장대로 밀었다. 송 조장은 생각보다 등이 많이 굽어 있었다. 너무 세게 밀면 넘어질 수 있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막대기를 가져다 댔다.

먼저 가시는 거예요. 이젠 편히 쉬세요.

송 조장이 강물로 걸어들어가는 동안 남자가 말했다. 입김이 나왔다. 송 조장은 몸을 휘청거리며 물속으로 발을 디뎠다. 그의 가슴까지 물이 잠겼다. 송 조장의 팔이 위로 쑥 떠올랐다. 부력 때문이겠지만 마치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문득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솟구쳤다. 남자는 무리를 따라 첨벙첨벙 강물을 밟아 들어갔다. 무릎이 잠기고 허리가 잠기고, 심장이 멎을 듯한 얼음장 같은 물이 가슴께에 이르러서야 남자는 걸음을 멈췄다. 무리 위를 떠도는 괭이갈매기의 앙칼진 소리가 비로소 그의 귀에 들어왔다. 남자는 멍하니 서서 잠겨가는 송 조장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언뜻 송 조장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도 같았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남자는 송 조장을 아버지처럼 여겼다. 그러나 남자의 실제 아비는 술주정뱅이였다. 어미는 얼굴도 몰랐다. 아비의 매질을 못 견뎌 일찌감치 도망쳤다는 사실만 먼 친척을 통해 들었을 뿐이다. 그날 남자는 차가운 강물에 몸을 담근 채, 송 조장과 팀원들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걸 끝까지 지켜봤다. 무리에서 떨어진 야생오리 한마리가 거리낌 없이 남자 앞으로 자맥질하며 다가왔다. 샛노란 털이 까만 부리 옆에 호를 그렸고 까만 눈알 옆에는 선명한 초록색 털이 나 있었다. 남자가 손을 뻗자 오리는 진저리치듯 두 날개를 퍼덕이더니 날아올랐다. 그 바람에 남자는 머리까지 흠뻑 젖고 말았다. 남자는 뒤돌아섰다. 강가에는 까마귀떼가 앉아 흙을 파헤치고 팔짝대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남자는 두손을 허우적거리며 강둑까지 헤쳐 올라왔다. 오한으로 몸을 떨며 젖은 옷을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남자는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강둑으로 다시 밀려온 시체 몇구를 실어 구덩이에 밀어넣고 불태웠다. 걷는 자를 처리하는 남자의 작업스타일이었다. 부풀어오른 여자의 배를 태우며 밝은 불꽃이 타올랐다. 남자는 젖은 옷을 말렸다. 구역질나는 연기에 남자는 기침을 했고, 침을 그러모아 땅바닥에 뱉고는 뒤돌아섰다. 고층빌딩의 유리창으로 붉은 해가 반사돼 눈을 찔렀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남자는, 시체들로 가득한 세상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만들어갈, 새 세상의 아담이었다.

 

*

 

남자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갔다. 텔레비전 전원을 끄고 남자가 먹다 남긴 캔맥주를 집어들었다. 남은 맥주는 싱크대 개수구에 버리고 빈 캔은 쓰레기통에 살며시 넣었다. 남자 목 아래에 베개를 받쳐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불을 끄려다가 여자는 소파 옆에 서서 남자를 내려다봤다. 숨쉴 때마다 벌건 목울대가 오르내렸다. 털이 무성한 남자의 종아리는 상체에 비해 유난히 가늘어 보였다. 여자는 발끝까지 이불을 끌어다주었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걷는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귀를 기울였다. 개떼도 그들을 따라 가버린 듯했다. 어디선가 경보음이 대기를 울렸다. 처음엔 남자와 함께 소리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살아 있는 누군가 있으리란 기대가 있었다. 물론 아무도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사라진 도시는 난데없는 소음과 소동에 휩싸이곤 했다. 자동차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기 전까지는 경보음과 경적이 매일 거리를 울렸다. 걷는 자들이 무리지어 다니면서 차에 부딪치기도 하고 차 안에 갇힌 자들이 끊임없이 몸을 버르적거리며 운전대에 머리를 쿵쿵 박아댔기 때문이다. 폭설에 갈라진 아스팔트 틈으로 풀이 자랐고 경보시스템이 정지된 건물과 공장은 화재로 무너져내리기도 했다. 폭우와 폭한을 거치는 동안 거리의 하수도관이 터졌다. 인류가 멸망하고 고작 두번째 가을을 맞이하건만 도시는 빠르게 붕괴하고 있었다. 여자는 문 앞에 세워놓은 경차에 시동을 걸었다.

여자는 제지공장 마당에 차를 세웠다. 창고는 예전부터 비어 있던 곳처럼 보였다. 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걸쇠를 잠그지 않고 문고리에 꽂아놓은 채였다. 문을 옆으로 밀자 어쩔 수 없이 시취가 코를 찔렀다. 여자는 코를 막지 않았다. S에 대한 예의였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한기에 몸을 조금 떨었다. 여자는 S를 찾아 손전등의 불빛을 비췄다. S는 꽤 넓다고 할 수 있는 창고 안을 빙빙 돌며 걷고 있었다. 바닥에 쌓아놓은 종이더미들이 마구 흐트러진 채 밟혀 있었다. 여자는 S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곁에 서서 그와 함께 걸었다.

여자는 S를 발견했을 때를 떠올렸다. 도로의 차 안에 S는 갇혀 있었다. 뜨거운 햇볕이 아스팔트를 달구고 있었다. 차 안은 더욱 뜨거울 터였다. 신호대기에 걸려 있던 모양인지 차는 멀쩡했다. 여자는 전면창으로 S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세상 끝 날이 왔을 때 S를 찾았다.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도로를 돌아디며 차문을 열었다. 걷는 자를 처리하는 남자를 돕는 거라 생각했으나 S를 발견하는 순간 그것이 거짓이었음을 깨달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반가웠으나 난처했다. 기묘한 분노가 솟구치기도 했다. 여자는 S의 잘생긴 얼굴에 들러붙은 쇠파리 한마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차 안에서 그를 꺼낸 것은 날벌레가 열댓마리쯤으로 늘어났을 때다.

여자는 축 늘어진 S의 손을 펴 자신의 손바닥을 갖다댔다. 그럴 리 없으나 체온이 느껴지는 듯했다. 여자는 조심스레 S의 손을 쥐었다. 길고 굵은 그의 손가락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여자는 신성한 의식이라도 치르듯 S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움켜쥐었다 놓았다.

왜 하필 당신이었을까.

여자는 S를 올려다보다가 그의 툭 튀어나온 이마를 손가락으로 쓰다듬기 위해 발꿈치를 들었다. 창고로 데려오자마자 여자는 S의 몸을 소독하고 새옷으로 갈아입혔다. 여자의 취향대로 향수도 뿌렸다.

왜 하필 당신이 아니었을까.

우뚝 솟은 콧대와 두툼한 입술도 쓰다듬었다. 차가웠다. 그럴 리 없는 데도 초점 없는 S의 풀린 동공이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를 만져주었으면 좋겠어. 위로해주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만 사랑했어야 했어.

여자는 중얼거리며 S의 얼굴을 비추던 손전등을 내렸다. 여자는 그의 곁에 섰다. 그와 함께 걷다가 차츰 발걸음을 늦췄다. 여자는 자리에 서서 혼자 걸어가는 S의 낯선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사진과 달라 보였다. 여자는 그의 뒷모습을 몰래 사진 찍어서 지갑에 갖고 다녔다. S의 지갑에는 가족사진이 들어 있었다. 활짝 웃는 아내는 아름다웠다. 어린 아들은 아빠를 꼭 빼닮았다.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여자가 뺏거나 낄 자리가 아니었다. 애써 모른 체하고 있었지만 여자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다 당신 때문이야. 난 건강한 아기를 낳아야 해. 어쨌든 난……

여자는 소리를 지르다가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S의 걸음걸이는 여느 걷는 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두발을 질질 끌며 두손을 어디에 둘지 모르는 사람처럼 휘젓고 다녔다.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무게중심을 잃은 듯 휘청거렸다. 뒷모습마저 당당하게 느껴지던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자는 알고 있었다. S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여자가 뺏거나 낄 수 없었다. 여자는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대신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하필.

여자는 창고의 문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가운만 걸치고 나온 것이 후회됐다. 파랗게 언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S는 열린 문을 향해 몸을 틀었다. 걷는 자는 열려 있는 문이나 탁 트인 공간을 잘도 찾았다. 그는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머뭇거리지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저 혼자 걸어가는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여자는 충동에 휩싸여 S의 뒤를 따라 걸었다. 누군가를 무작정 따라 걷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여자는 걸음을 멈췄다. 한기를 느끼며 가운깃을 그러모아 잡았다. 여자는 세워둔 차 안으로 뒤뚱거리며 뛰어들어갔다. 운전대를 붙잡고 심호흡 했다. 그리고 S가 어둠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S의 모습이 마침내 보이지 않자 후련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남자가 강물로 밀어내겠지, 여자는 생각했다. 룸미러로 자신의 얼굴을 봤다.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려 했지만 잘 안됐다. 여자는 시동을 걸었다. 그러곤 코를 벌름거렸다. 손바닥에 코를 댄 여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여자는 창문을 열었다. 그러고 콘솔박스에서 물티슈를 꺼내 손바닥과 코밑을 닦으며 운전했다. 차가운 바람이 귀와 볼을 얼얼하게 때렸다. 통증이 밀려왔다 사라졌다.

여자는 남자를 보고 말았다. 앞에 서 있던 걷는 자의 옆구리를 꾹꾹 찌르고 밀며 남자는 행렬의 방향을 조정해나갔다. 남자는 가장 앞에 서 있던 걷는 자를 무사히 강가로 인도했다. 그런 다음 모터보트에 올라타고선, 앞선 자가 강물에 완전히 잠길 때까지 장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숙련된 솜씨였다. 백화점 옥상에 선 여자는 쌍안경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쌍안경에 붙은 가격표를 보니 여자가 받던 월급보다 비쌌다. 여자는 백화점 매장을 여기저기 살피며 물건을 골랐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상황에서 가격표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태어날 아기 옷이나 장난감을 골랐다. 색다른 느낌을 줄 수 있는 촛대와 와인잔도 골랐다. 카트에 물건을 담는 것은 여자의 취미이자 도시를 떠나고 싶지 않은 이유기도 했다. 백화점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도시가 구석구석 잘 보였다. 쇼핑을 끝내고 노을 진 강물을 바라보는 일은 여자에게 아름다운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걷는 자의 수도 많이 줄어든 것 같았다. 도시는 네개의 강줄기로 둘러싸여 있었고 강은 곧장 바다로 흘렀다. 남자가 앞선 자를 성공적으로 강물로 인도하자 그 뒤를 따르던 걷는 자들은 가만둬도 줄줄이 강물로 걸어들어갔다. 여자는 남자를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보트를 타고 다시 강둑으로 되돌아왔다. 그러곤 무리의 맨 뒤에 선 걷는 자에게 다가갔다. 쌍안경을 댄 여자의 얼굴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남자는 맨 뒤에 서 있던 걷는 자의 몸을 밧줄로 묶더니 강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뭍으로 끌어냈다. 하필 날씨는 화창했다. 시야를 가리던 물안개조차 없었다. 묶인 자는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자였다. 이윽고 남자의 허연 궁둥짝이 보였다. 여자는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여자는 손을 내렸다.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쌍안경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자신이 무엇을 봤는지 이해했다. 여자는 더러운 것을 쏟아내고 싶었다.

 

*

 

남자는 어두운 거실을 서성대며 걸었다. 그날 둔치에서 보았던 어룽거리는 빛을 떠올렸다.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여자의 긴 머리가 나부끼고 있었다. 여자의 손에서 빛나던 반사체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현기증이 몰려왔다. 남자는 두손을 비비며 거실 안을 빙빙 돌았다. 어차피 세상엔 남자와 여자 단 둘뿐이었다. 남자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가깝게 들리자 남자는 얼른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여자가 찬바람을 안고 들어왔다. 여자는 잰걸음으로 화장실로 곧장 들어갔다. 물줄기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오른팔을 들어 두눈 위에 올려놓았다. 팔에 힘을 주었다. 누런 빛 조각이 흩어지더니 곧 사라졌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남자가 다시 눈을 뜬 건 여자의 비명소리 때문이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맨발에 피스타치오 껍질이 밟혔다. 여자가 방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침대 시트가 젖어 있었다.

양수가 터졌어.

스탠드 불빛에 비친 여자 얼굴은 명암이 극명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한쪽 뺨에 들러붙어 있었다. 남자는 방의 불을 켰다. 여자의 두눈이 충혈돼 있었다. 자궁 입구가 벌어져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붙잡았다. 땀으로 축축했다.

침착해. 숨을 쉬어. 알지?

여자는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그냥 서 있으면 어떡해.

그제야 남자는 따뜻한 물을 깨끗한 대야에 담아왔다. 미리 준비해뒀던 면수건, 소독해놓은 가위와 소독약도 가져와 침대 옆 다탁에 올려놨다. 그리고 또 뭐가 필요하더라. 남자는 모든 것들이 까마득하고 기억나지 않았다.

여자가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 괜찮아.

남자는 허둥거리며 다가가 여자의 등을 쓸어내렸다.

뭐가 괜찮아? 난 안 괜찮아.

여자가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두려움에 헐떡이고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뺨엔 경련이 일었다. 잠옷은 땀에 젖어 살이 비쳤다.

남자는 그때가 떠올라 아찔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첫 아기는 숨을 쉬지 않았다. 남자는 관을 준비했다. 그러나 여자는 아기를 강물로 떠나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기도를 하자고 했다. 여자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 때문이야.

여자가 울부짖었다.

운이 없었을 뿐이야.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다 너 때문이야. 이 병신새끼야.

허옇게 트고 갈라진 여자의 아랫입술에 빨간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불길했던 기억을 지우며 손수건을 접어 여자 입에 물려주었다. 그러나 여자는 고개를 흔들며 거부했다. 여자의 질구로 까만 머리가 비쳤다. 남자는 소리 지르는 여자의 손을 꼭 잡았다. 이마에 손바닥을 얹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여자가 길게 비명을 질렀을 때 아기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머리가 나왔어. 소리치지 마. 숨을 참았다가 길게 쉬어야 해.

그러나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남자는 쩔쩔맸다.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남자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여자가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때 여자의 벌린 다리 사이로 아기가 미끄러지듯 쑥 나왔다. 남자는 온몸이 떨렸다. 무력한 자신이 한심했다. 남자는 아기를 받았다. 아기의 미끌미끌한 몸에서 빛이 났다. 세상의 모든 빛이 아기에게서 시작됐다. 세상의 생명이 비로소 약동했다.

남자는 소독한 가위로 탯줄을 잘랐다. 아기의 입과 코에 묻은 것들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미지근하게 식은 물에 아기를 씻겼다. 아기는 작고 연약하고 순결했다. 남자는 자신의 손이 너무 크고 거칠게 느껴졌다. 아기를 만지기엔 부자연스러운 손이었다. 불만스러웠고 불안했고 그리고 가슴이 벅찼다. 부드러운 극세사 타월로 아기를 감쌌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남자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아기는 숨을 쉬고 있었다. 귀한 숨이었다. 다디단 숨이었다. 따뜻한 숨이었다. 팔딱거리는 생명력이 가득한 숨이었다. 아기는 두눈을 꾹 감고 빨간 입을 벌려 힘차게 울어댔다. 자그마한 얼굴도 가느다란 팔과 다리도 온통 빨갰다. 여자는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의 눈이 순하게 끔벅이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마워.

남자가 땀에 젖은 여자의 머리와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남자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여자의 손등과 손목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 날 용서해줘. 당신은 나의 구세주야.

여자도 눈물이 나왔다. 남자는 눈물이 흐르는 여자의 눈에 입을 맞췄다.

 

*

 

클래식 명작선에 담긴 음악이 집 안을 채웠다. 여자는 요즘 음악에 빠져 있었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귀가 열린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베버의 「사냥꾼의 합창」이었다. 여자는 아기가 깰까봐 볼륨을 낮췄다.

아기를 낳은 뒤 여자의 허리엔 제법 살이 붙었다. 여자는 부풀어 있는 자신의 몸이 결코 싫지 않았다. 그 몸에서 나오는 젖이 아기를 살찌웠다. 그것이 여자를 기쁘게 했다. 아기는 평균보다 3킬로그램이 더 나갔다. 옹알이도 시작했다.

여자는 주방으로 나가 물에 데친 햄을 건져내 양파와 피망과 함께 프라이팬에 볶았다. 얼음물에 담가뒀던 양상추를 꺼내 테마파크 비닐하우스에서 따온 방울토마토와 파슬리를 넣고 샐러드를 만들었다. 닭이 아침에 낳은 신선한 달걀로 계란찜도 했다.

여자는 남자를 깨우기 위해 침실로 갔다. 침실에 있는 거울이 여자의 얼굴을 비췄다. 환하다 할 수 있을 법한 미소였다. 여자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인상을 찌푸리다가 다시 입술 끝을 올렸다. 여자는 자고 있는 남자의 이마에 젖은 손바닥을 가져다댔다.

차가워.

남자는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오늘은 아기 만드는 일이나 할까.

여자는 남자 품에 안긴 채 가만히 있었다. 여자와 남자는 아기를 많이 낳을 계획이었다. 아이 혼자 이 세상을 살게 할 수 없었다. 땅 위에 움직이는 시체들을 처리하려면 함께 도우며 살아갈 형제가 있어야 했다. 많을수록 좋았다. 그들은 생육하고 번성해야 했다. 어쩌면 그것이 살아남은 여자와 남자의 의무인지도 몰랐다. 남자는 여자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우리 아이들은 누구와 결혼하지?

여자가 말했다.

또 걱정이다. 아직 돌도 안 지났어.

남자는 여자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남자는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부신 눈을 끔벅이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잖아.

남자는 검지로 여자의 이마에서 콧날로 그리고 아랫입술을 훑어내려가며 만졌다. 그의 손이 낯설게 느껴졌다. 여자는 조금 긴장이 됐다. 손이 여자의 배를 쓸어내려가니 기분이 풀렸다.

어딘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우리 같은?

여자가 물었다.

착한 사람, 우리처럼.

남자의 말에 여자는 수긍한다는 듯 미소 지었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우아한 아침이었다. 자식에게 이런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 여자는 기뻤다. 세상 사람들이 모조리 죽지 않았다면, 여자와 남자는 인스턴트 음식으로 한끼를 해치웠을 것이다. 아기는 불결한 점심과 간식을 먹이는, 선생의 히스테리로 행여 매나 맞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하는, 허름한 동네 어린이집에서 유년기를 보냈을 것이다. 여자는 부푼 젖을 물리지도 못한 채 시커먼 콧물을 흘리고 가래침을 뱉으며 지하 주차요금 정산소에서 계속 일했을 것이다. 아니다. 의미없는 관계에 질질 끌려 유부남에게 이용당하다 버려졌을 것이다. 남자도 다르지 않았다. 유독가스를 맡으며 컴컴한 맨홀 아래서 오물을 퍼내고 청소하다가 만성 피부병에 걸렸을 것이다. 몸을 긁어대는 남자와의 잠자리는 여자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어차피.

남자는 만족스럽다는 듯 눈을 감았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었어. 몰려다니는 꼴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

다시 시작하면 돼.

여자가 대꾸했다.

눈을 감은 채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완벽한 세상이 된 건지도 몰라.

그럼, 우리 둘을 위한.

아이들을 위한.

남자는 눈을 뜨고 여자를 바라봤다. 둘은 실로 오랜만에 서로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때 밖에서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남자와 여자는 한번 더 했을 것이다. 여자는 자동차 소리에 귀가 밝았다. 남자보다 여자가 먼저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 창문으로 걸어가면서 음악을 껐다. 곧이어 요란한 경적소리가 들렸다. 차 안에 갇힌 걷는 자 때문에 어쩌다 울린 소리가 아니었다.

봐, 말끔히 처리해놨잖아. 누가 있는 게 분명해.

사람의 목소리였다. 확성기를 통해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여자는 반가움보다 낯선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다.

어이, 누구 살아 있으면 나와.

씨발, 그러면 나오겠냐. 존댓말을 써야지.

입냄새 나. 저리 치워.

두 남성의 경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확성기는 몇번 귀를 찌르는 삑삑 소리를 내며 그들의 잡담까지 그대로 퍼뜨렸다.

여기 살아서 좆나게 시체 처리해주신 님아, 어서 나오세요. 우리 반갑게 인사해요.

씨발, 그게…… 어, 저게 뭐야.

이윽고 총소리가 귀를 찢었다.

좀비새끼잖아. 깜짝이야.

빙신새끼, 다리를 쏴야지.

다시 드르륵 갈겨대는 총소리가 들렸다.

소리로만 들리던 그들의 정체가 마침내 여자의 눈에도 포착됐다. 커다란 트럭 한대가 집 앞 도로를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여자는 재빨리 현관문을 걸어잠그고 거실 창의 커튼을 내렸다. 방 안에 있던 남자가 총을 쥔 채 긴장된 표정으로 여자 곁에 섰다.

뭐야?

남자의 벌렁대는 심장 요동이 여자의 닿은 어깨로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잠깐만.

여자는 커튼을 슬쩍 걷어 밖을 내다봤다. 트럭 뒤 적재함에 대여섯명의 남녀가 있었다. 걷는 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한때 남자가 즐겨보던 레슬링 선수처럼 팬티 한장만 입은 채 생기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무릎 사이에 얼굴을 끼고 등뼈가 드러나도록 웅크리고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클랙슨을 울려.

운전석 차창으로 고개 하나가 주욱 빠져나왔다. 이십대 초반쯤 되어 보였다. 금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껌을 쫙쫙 씹고 있었다.

청소부야.

뭐래?

여기 있는 새끼.

좆까.

씨발, 내기할래?

둘의 찧고 까불며 떠드는 소리가 거리로 쩡쩡하게 울려퍼졌다.

저것들이 지금 뭐라는 거야?

얼굴이 벌게진 남자가 발끈했다. 밖으로 나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여자는 남자의 팔뚝을 붙잡았다.

여보, 그냥 있어봐. 제발.

노동으로 단련된 남자의 팔뚝은 단단해져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팔을 더욱 꼭 붙들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시골로 가자고 했잖아.

남자의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일제히 짖어대는 개소리가 들렸다.

개들이 오고 있어.

여자는 탄성을 지르듯 낮게 속삭였다. 달려오는 개떼의 소리가 차츰 커졌다. 남자는 숨을 들이마시며 현관걸쇠가 잠긴 것을 다시 확인했다. 여자는 남자의 허리를 힘껏 감싸안았다. 남자는 시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는 아내의 어깨를 꼭 붙들었다.

왜 하필.

여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는 가만히 서서 그들이 도시를 떠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