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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황정은 소설집 『파씨의 입문』│작품론

 

시대의 빈곤을 응시하는 가난한 언어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소설의 고독』이 있음. myosu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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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정은(黃貞殷)은 용산참사에 대한 르뽀 형식의 산문 「입을 먹는 입」(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을 발표한 바 있다. 같은 제목이 그녀의 장편 『의 그림자』(민음사 2010)의 세번째 소제목에도 나온다. 2009823일, 남일당 분향소 앞을 지나가던 한 경찰은 분향을 요구하며 막아서는 유족의 입을 주먹으로 가격한다. 그리고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다. 황정은은 르뽀에서 쓴다. “사람은 입을 맞으면 아프다.” 『의 그림자』의 세번째 장 ‘입을 먹는 입’에서 유곤이라는 인물은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죽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아버지는 타워크레인의 추에 깔려 압사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는 말을 잃어간다. “나는 그 입도 보았습니다. 더없이 무기력한 입, 그림자에게 압도당하고 만 입, 그림자가 들락거려 혀가 검게 물드는 것도 모르고 조그맣게 벌어졌다 닫히곤 하는 그녀의 입을 보고 있었습니다.”(70~71면) 황정은에게 입은 ‘먹는 입’이면서 ‘말하는 입’이다. 생존과 인간적 존엄의 최저선. 그 입을 ‘먹는’ 또다른 입이 반드시 눈에 보이는 명백한 폭력의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간 황정은 소설은 부단히 증언해왔다. 황정은 소설은 입을 본다. 정확히는 입을 검게 물들이는 그림자를 응시한다. 그 검은 그림자와 싸우면서 매번 처음처럼 입을 떼고, 입에서 말을 꺼낸다. 그렇게 안간힘으로 태어나는 말은 “가마와 가마와 가마가 아닌 것”을 가려내고, ‘슬럼’이라는 단어에 담긴 언어적 폭력에 질문을 던진다. 때로 그 말은 모자나 모기씨, 곡도나 오뚝이, 묘씨 고양이와 같은, 억눌리고 이지러지고 배제된 ‘살아 있는 죽음’의 몸에 붙어 그들의 입을 열고 나온다. 황정은 소설에서 종종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화법이 발견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황정은 소설에는 사람들이 보는 것을 멈추고 떠난 자리에서 계속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 많다. 유곤씨가 보는 검게 물드는 어머니의 입이 그런 예의 하나일 것이다. 이때 그 시간의 증언으로서 황정은 소설을 생각한다면 일상의 화법이 낯설어지는 순간은 불가피하다. 거기에는 상징적 재현의 좌표를 얻지 못한 이름 없는 사물과 형상, 발화되지 못한 말의 파편과 잔해가 있다. 그 사물과 형상을 하나하나 처음으로 명명하고, 말의 파편과 잔해로부터 훼손되지 않은 새로운 말의 질서를 상상하는 무구한 소녀의 눈. 황정은 소설의 환상과 동화는 그 자리에서 태어난다.

 

 

2.

 

황정은 소설 속 인물들이 그들을 옥죄고 일그러뜨리는 기이한 세상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무심하거나 단순한 태도로 반응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령 아버지가 모자로 변하고, 아내가 오뚝이로 변해도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은 그런 사태를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런 일이 전혀 놀랍지 않은데,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세상에 ‘이미’ 그들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환상 혹은 우화적 맥락의 과장을 전제하더라도, 여기에 세상에 대한 막막한 비관 혹은 절망이 반어적 시선으로 깔려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첫번째 소설집 이후 장편 『의 그림자』와 이번 소설집 『파씨의 입문』(창비 2012)에 실린 작품들로 미루어보건대, 황정은 소설에서 환상의 노출은 그 빈도와 강도가 조금 억제되는 대신, 세계에 대한 절망적 진단과 분노의 항의는 조금 더 직접적이고 강렬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면서 절망적 풍경의 틈새에서 미미하게 숨쉬고 있는 어떤 선의(善意) 혹은 윤리의 황정은식 풍경은 전과는 또다른 소설적 간곡함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어딘가로 한없이 떨어지고 있는 죽은 자(혹은 죽음을 상상하는 자)가 일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낙하하다」에는 근자에 황정은 소설이 도달한 세계상(世界像)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삽화가 나온다. 예전에 화자가 읽은 어떤 이야기에 나오는 방. 사방이 널빤지로 덮인 궤짝 모양의 방 안에서 늙은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다. 방에는 식은 난로, 양철 컵이 놓인 탁자, 그리고 시멘트 개수대가 있다. 그런데 개수구멍이 없다. 늙은 남자는 오후의 외출을 기다리며 누군가 만들어놓은 “저 망측한 구조물”에 대한 근심에 잠겨 있다. 이른바 카프카적 상황. 그런데 화자는 생각한다. 그 방엔 문이 없지 않은가. 시계도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오후가 와도 오후가 온 줄 어떻게 알겠는가. “오후는 이미 그 방의 바깥에서 수천번 수만번은 왔다가 가버리지 않았을까. (…) 더는 오지 않는 게 아닐까.” 화자의 생각은 이어진다. 방의 바깥엔 무엇이 있을까. “아무도 아무것도 세계랄 것도 없는 진공이나 아닐까.” 그렇다면 그런 진공에 갇힌 방은? “그건 지옥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방이 일종의 우화 속 공간이라면, 좀더 리얼리티를 갖춘 비슷한 공간이 「뼈 도둑」에 나온다. 교외의 허허벌판에 서 있는 낡은 집 한채. 사방 벌판으로는 식용견 개장을 대문으로 삼은 이웃집 하나뿐인 그곳. 사랑하는 남자가 죽은 뒤 「뼈 도둑」의 남자가 찾아 들어간 그 빈집의 부엌 겸 욕실은 외양간을 개조한 곳인데, 거기 개수대에도 개수구멍이 없다. “물은 고인 채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인간세계의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된 채 죽어가는 고양이가 화자로 등장하는 「묘씨생(猫氏生)」에서 고양이를 거두어준 곡씨 노인이 사는 상가 꼭대기의 창 없는 방도 있다. 개수대야 말할 것도 없고 전기나 가스도 들어오지 않는 그 좁은 방. 곡씨 노인은 상가 사람들이 길가에 내놓은 식판에서 남은 음식을 거두어 먹으며 살다 사라진다.

이 반복되는 방의 형상에서 우리는 구조화된 항상적인 예외상태, 최소한의 안전판마저 무너져내리고 있는 우리 시대 벌거벗은 생존의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최근 황정은 소설의 세계 이해, 현실 인식의 어떤 측면을 짐작해본다고 해도 그다지 무리는 아니리라. 그러나 개수구멍 없는 개수대라는 기이한 구조물은 황정은 소설의 고유한 미학의 전개와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기형(畸形/奇形)이라는 점에서 모자, 곡도, 오뚝이, 모기씨 등으로 몸을 바꾸어온 괴이한 사물의 계보를 잇는다. 그러나 개인적 불행에서 말미암았든 사회적 압력에서 연원했든 견딜 수 없는 정신적 외상의 차원에서 객관화된 환상의 자리는 여기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개수구멍 없는 개수대의 형상은 환상의 개입 없이도 현실의 극명함을 떠맡는다.

작은 방에서 이렇다 할 희망 없이 사는 우리 시대 젊은 장삼이사들의 이야기를 평이하게 들려주는 「양산 펴기」에 눈길이 머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학을 나왔지만 안정적이지 못한 직장에서 저임금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젊은이가 「양산 펴기」의 화자다. 그는 동거하는 연인에게 일인분 3만원 하는 장어를 사주려고 바자회 아르바이트를 한다. 일당 5만원을 받고 양산과 스카프를 파는 일이다. 바자회장 앞 구청에서 노점상과 철거민의 집회가 열리면서 바자회 매장의 물건 파는 소리와 집회의 구호가 섞인다. “로베르따 디 까메르노 웬말이냐 자외선 차단 노점상 됩니다 생존 양산 쓰시면 물러나라……”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화자는 보리개떡을 파는 트럭을 본다. “보리갯 떡 보리갯 떡 보리 떡 보리 떡 보릿 떡……” 확성기 소리와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피로한 모습은 화자의 눈에 눈물이 맺히게 한다. 집에 돌아와 잠든 화자는 바자회장에서 물건 파는 소리를 잠꼬대로 내뱉는다. 동거하는 연인 녹두는 묻는다. “그거, 시()야?” “노래”라고 화자는 잠결에 대답한다. 먹고살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돌아갈 곳을 잃고 떠도는 세상의 풍경이 여기에 있다. 그 말들이 낯설게 분절되며 시와 노래로 몸을 바꾸는 지점만으로도 황정은 소설은 세계의 불행과 일그러짐을 조용히 포착한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이미 충분히 ‘오뚝이들’이다.

그렇다면 이 불행한 세상을 바꿀 길은 없을까. 「묘씨생」의 고양이는 다섯번 죽고 다섯번 살아난 뒤 다시 쓰레기더미 위에 버려져 자신의 죽음과 함께 “이 몸을 더럽히는 세계가 완파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낙하하다」에서 외롭고 절망적인 떨어짐이 계속되는 것처럼 묘씨의 눈으로 그려진 인간의 세계에는 좀처럼 구원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고양이에게 입김을 불어넣고, 버려질 줄 알면서도 노랫말을 적어 이웃에게 선물하는 곡씨 노인의 행동은 한점 미미한 울림을 남긴다. 「낙하하다」의 화자가 떨어지면서 떠올리는 “완고한 얼굴”의 이야기도 있다. “입을 꼭 다문 얼굴, 말이 졸아붙은 듯한 얼굴, 더는 꿈꾸지 않는 듯하고 실제로 꿈꾸는 데 익숙하지 않은 얼굴, 더는 꿈꾸지 않아 나도 보지 않고 남도 보지 않는 얼굴.” 전철역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출구 방향을 물어왔고, 화자가 길을 가르쳐주자 그 ‘완고한 얼굴’의 아주머니는 “문득 울 듯한 얼굴을 하고” 화자의 팔을 잡고 “친절하게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하고 말한다. 화자는 그 “뜻밖의 환대”에 놀라는 아주머니의 ‘완고한 얼굴’에서 그 자신의 것이기도 한 쓰라린 소외의 얼굴을 보며 끝도 없는 허공을 “외롭고 두려운” 마음으로 떨어져내린다. 황정은 소설은 이 지점에서 이웃이라는 타자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취약성을 절망적으로 증언하지만, 이웃의 얼굴을 소생시키는 작은 환대의 순간을 잊지 않으려 한다. 「디디의 우산」의 디디는 상고를 졸업하고 식자재센터에서 매달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계약직 점원으로 일하고 있다. “터무니없는 방”에서 디디와 동거하는 초등학교 동창 도도는 화물센터에서 식판 세척일을 하는데, 세척액 때문에 만성적인 발진에 시달리고 있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거리에서 행상을 시작한 또다른 동창 비비는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비비를 만나 얻은 한권의 책, 제목의 마지막 두음절 ‘혁명’을 소리내어 읽다 디디는 깜짝 놀란다. 디디는 ‘돈’의 세상에 분노하지만, 그녀의 ‘혁명’은 집들이에 찾아온 친구들의 우산을 챙겨주는 일에 깃든다. “어쨌든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 『의 그림자』에 나오는 전구점 오무사의 이야기를 덧붙일 수도 있다. 오무사의 할아버지는 전구에 불량품이 있거나 전구가 깨질 경우 손님들이 겪을 불편을 생각해, 덤으로 전구 하나를 더 넣어준다. 그리고 전자상가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부근 상점들과 함께 오무사는 사라진다. 우리는 이 선의의 목록들이 개수구멍 없는 개수대의 방으로 상징되는 끝없는 추락의 현실 한편에서 희미하게 전송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행위들은 미약하고 종종 무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벤야민(W. Benjamin)이 카프카(F. Kafka)를 두고 말했던 “좌절한 자의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있다. 벤야민은 썼다. “카프카에게는 적어도 다음의 것들은 분명하였다. 첫째로, 도와주기 위해서 누군가 한 사람은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로, 어떤 바보의 도움만이 진정한 의미의 도움이라는 점이다.”(발터 벤야민 「좌절한 자의 순수성과 아름다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옮김, 민음사 1983)

「옹기전(甕器傳)」에서 “서쪽에 다섯개가 있어”라고 중얼거리는 항아리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어린 소녀다. 버려지고, 묻히고, 폐기되고, 망각되는 것들의 목소리. 세상이 보기에 항아리의 목소리를 따라 서쪽으로 가는 행위는 “헛짓”이고 “뒤처”지는 일이다. 소녀는 항아리의 형상에서 어느 전시장에서 본,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기형의 태아들을 떠올린다. 소녀는 나침반을 들고 서쪽으로 간다. 그러나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항아리를 묻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달아나는 정도다. 거듭 “안 묻을 건데요”라고 대답하기. 벼랑 위에 도착한 소녀는 저편 도시를 바라본다. 도시의 불빛들이 삐걱거리며 주저앉고 멀리서 독 터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는 가운데 소녀는 절벽 끝에 앉아 있다. 항아리를 옆에 두고. 여기가 서쪽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기다림이 시작된 것이다. 막막하지만 순수한 기다림의 형상. 우리는 묻게 된다. 소녀는 항아리를 지키며 이 도시에서 살아가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3.

 

황정은 소설은 언어를 적고 좁게 사용한다. 인물들의 대화가 특히 그러하지만, 상황의 묘사나 서술에 쓰이는 언어도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문학적 풍성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여기에는 과잉을 경계하고 절제하는 미니멀리스트의 손길보다는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는 언어의 화용론(話用論)을 억눌리고 배제된 자들의 현실과 관점에서 새로이 작성해보려는 의지가 있다. 자전소설 형식으로 제출된 「파씨의 입문」에서 ‘파도’라는 말을 처음으로 듣고 기억하고, 그것을 사람의 형상을 한 생물로 상상하는, 파씨 최초의 기억이자 질문, 최초의 정서가 시작된 지점이 황정은 소설에서 언제든 반복되는 원풍경(原風景)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파씨의 군 위문편지는 ‘세계 평화’ 대신 ‘추위’를 묻는다. “어제저녁에 추웠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추울 예정입니다, (…) 거긴 춥습니까, 세계는 춥습니까, (…) 아저씨가 너무 추워서 지금 울고 있다면 세계는 빌어먹게 나쁜 곳입니다.” 황정은 소설 고유의 환상 역시 이 언어적 상징계의 재구축 시도와 무관하지 않다. 이때 환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것일 따름이다. 이 언어들의 낯선 배열과 질서는 미학적이기보다 윤리적이다. 문학적 언어의 가난은 감수되어야 한다. 곰과 밈, 검정, 유도, 녹두, 디디, 도도, 파씨 등 인물의 명명조차 어느정도 탈인간의 분위기를 띤다. 적은 것으로 견디며 어떻게든 새로이 시작해보려는 결의가 황정은 소설에는 있다.

이미 주어져 있는 배열과 질서의 체계로는 환원되지 않는 잉여적 부가물의 발생을 ‘사건’(알랭 바디우)이라고 한다면, 「뼈 도둑」은 불사(不)의 존재로 우리를 사유하고 실천하는 사랑의 사건을 보여준다. 죽은 연인의 뼛가루를 갖기 위해 대피령이 내린 혹한과 폭설의 세상 속으로 이백여 킬로미터를 걸어가는 한 남자의 결단은 그를 이전과는 다른 지평 위에 펼쳐놓는다. 이들의 사랑이 세상으로부터 비난받고 거부당한 동성애라는 점은 중요하면서도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남자의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남자가 내디딘 한발 한발은 그가 그러면서 꿈꾸었던 것처럼 ‘완전’을 향한 걸음이다. 개수구멍 없는 개수대의 ‘가망 없는’ 현실은 이제 다른 가능성의 숨소리에 열려 있다. “하, 후, 하, 후.” 이 숨소리와 함께 우리도 상상한다. “문이 열리고, 텅 빈 납골당으로 들어서는 사람, 눈사람과도 같은 거인”을. 황정은 소설은 우리 시대의 빈곤을 가난한 언어로 응시한다. 그러나 그 가난은 무언가를 개시하는 가난이다. “하. 후. 하.” 이 숨소리를 오래 기억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