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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그것은 정말 꿈이었을까

최정례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조연정 曺淵正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순진함의 유혹을 넘어서」 「구조적 폭력 시대의 타나톨로지(thanatology)」 등이 있음. yeoner@naver.com

 

 

2031장자의 나비 꿈에 대해 라깡(J. Lancan)이 말했듯 ‘장자가 꾼 나비 꿈’과 ‘나비가 꾼 장자 꿈’ 사이의 혼동에서 필요한 것은 ‘장자라는 현실’과 ‘나비라는 실재’의 대칭을 확인하는 일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꿈의 지위다. 지젝(S. Žižek)이 라깡과 더불어 꿈과 현실의 관계를 실재와 환상의 관계로 논하며 강조한 것은 꿈이야말로 자기 욕망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 “이건 꿈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일상의 현실이 “꿈의 의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장치일 수 있다(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2002, 92면). 돌아가야 할 곳은 꿈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에서 안전함을 느낀다. 꿈속에만 머물며 욕망의 실재와 함께하는 일은 말 그대로 끔찍한 악몽일 것이다. 하지만 진실한 ‘나’와 마주하기 위해서라면 꿈과 현실 사이를 부단히 넘나드는 일이 요청된다.

최정례(崔正禮)의 다섯번째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문학과지성사 2011)에서 시인은 꿈 이야기를 자주 한다. 존재하지 않는 남쪽의 어느 역을 찾아 기차를 타고 가는 꿈, 남편의 여자를 ‘언니, 언니’라고 부르며 기다리는 꿈,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닌 가족과 재회하는 꿈 등 특별할 것도 없는 꿈속 장면들이 시집 곳곳에 있다. 일상적 논리나 정연한 질서를 가볍게 뛰어넘는 시의 세계가 꿈의 세계와 친연성을 지닌다는 것은 상식에 가까울 텐데, 최정례의 시에서 재연되는 꿈은 조금 특이한 데가 있다. 꿈 장면이 그 자체로 묘사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꿈 장면이 그려질 때는 어김없이 그것이 꿈이었다고 말하는 화자가 함께 등장한다. 시인은 생생한 꿈속 장면을 복기하며 “어리둥절”(「어리둥절」)해하다가도, “금세 알아챘지요, 꿈이라는 것”(「홍수 뒤」)이라고 간단히 말해버린다. 꿈을 그리기보다는 꿈을 말한다고 해야 할까. 이제껏 최정례의 시는 과거와 현재를 병치하며 어떤 아픈 ‘기억’에 몰두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이번 시집에 이르러 그녀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면서도 결국 그것들을 분리해 인식하는 과정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꿈 장면을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지만 최정례의 시는 단순히 ‘착란(錯亂)’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오히려 ‘착각(錯覺)’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착각은 착란과 각성(覺醒)의 연이은 사태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 ‘꿈꾸기’와 ‘꿈에서 깨어나기’라는 일련의 과정은 착각의 대표적 현상일 텐데, 최정례가 혼동하는 것은 비단 꿈과 현실뿐이 아니다. “팔월인데 어쩌자고 흰 눈이 펄펄 내렸던 걸까”라며 “터무니없는 풍경 속에 들었던”(「팔월에 펄펄」) 일을 의아해하기도 하고, “착각하고 봄이 왔”(「착각하고 봄이 왔다」)다고 말해보기도 한다. “아는 사람의 걸어가는 뒷모습”이 결국 “아득하게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쓸쓸한 착각의 순간이 그려지기도 한다(「몽롱의 4월」). 시인은 눈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쓸쓸함을 “이쪽 세상에서 저쪽 세상을 바라보는”(같은 시) 것이라 비유한다.

착각을 깨달을 때의 ‘어리둥절’은 외로움을 표현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최정례가 착각 속에서 주로 대면하는 것은 “생시처럼 왔다”(「도둑들」) 가는 헤어진 가족이다. 그녀는 꿈속에서 “엄마가 앓는 소리”(「굴비」)를 듣고, 꿈에서 깨어나서는 “꿈속에 버리고 온 아버지”(「논」)를 애닳아한다. 이런 인물들이 시인 개인에게 특별한 그리움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같은 인지의 오작동 속에서 최정례의 시가 강조하는 것은 특정 대상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착각하고 봄이 왔다」)는 느낌이 들 때의 순간적인 외로움이다. 그녀는 ‘꿈일 뿐이야’라고 말하면서도, 각성 이후의 삶에 깊게 새겨진 황량함을 떨쳐내지 못한다. “작가회의”로부터 “시인 최정례 부음”이라는 “이상한 문자”를 받은 시인이 “회의에 참석한 적도 없고, 절친한 사람도 없는데 누구에게 내가 살아 있다고 주장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벙깍 호수」에서는, 저 황량함이 결국 스스로 살아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막막함으로까지 확장된다. 현실의 정합성을 잠시나마 흔들어보는 ‘착각’의 인식론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에까지 가닿는 것이다.

장자가 나비이고 나비가 장자라는 동어반복의 착란에 빠져버리지 않고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라는 각성의 상태를 유지하며, 최정례의 시는 삶의 진실 혹은 ‘나’라는 존재가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 서늘한 순간을 담백하게 그려 보인다. 시인이 단정한 어조로 ‘어리둥절’을 호소하며 우리에게 남긴 예리한 질문은 이런 것이다. 그것은 정말 꿈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