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초점
은하를 유랑하는 키키하이커에 대한 안내서
김산 시집 『키키』
양경언 梁景彦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참된 치욕의 서사 혹은 거짓된 영광의 시: 김민정론」이 있음.
purplesea32@hanmail.net
성곽을 벗어난 자들에게 유랑은 운명이다. 성곽 내부에 있는 자들의 입장에선 이들을 ‘추방’했다고 여겨야 할 일이다. 그래야 성곽이 정당해진다. 그러나 무언가로부터 ‘추방’된 삶이란 그 무언가가 규정하는 틀 이외의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무한의 위치에 서는 삶이기도 하다. 성곽 밖의 ‘모든 세상’은 성곽을 떠난 자들의 전유(專有)를 통해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여기, “문 하나 사이에 두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성곽이 부여한 “나의 이름”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고” 다만 “모든 세상의 이름”이 “허허벌판”으로 다가왔다고(「어쩌면 허허벌판」, 키키, 민음사 2011) 자백하는 자가 있다. 성곽으로부터 등을 돌렸을 때에야 그자의 눈에는 보였을 것이다. 거기, 성곽이란 모두가 “제국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에 눈멀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곳임을, 때문에 “땟국이 줄줄 흐르는 추악하고 추잡한 피”가 난무하는 곳(「지구인」)임을. 그러니까 그 ‘허허벌판’을 감당하는 자, 성곽의 인위를 견딜 수 없어 거짓을 포기하고 차라리 “주석이 필요 없는 행간”을 유랑하기로 한 자(「은하야 사랑해」), 그자를 우리는 ‘키키’(「키키」)라 부르기로 한다.
키키는 ‘사람’인가? 아닌 것 같다. 성곽이 부여한 ‘지구인’이란 이름을 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성곽이 부여하는 권리에 눈멀지 않은 그 이탈자 키키는 ‘이탈’을 ‘유랑’으로 치환하며, 자신이 탄생한 세계가 이역(異域)이 되어버린 상황을 통해 성곽 그 자체의 불온함을 제기한다. 키키가 전하는 ‘최후의 고해’는 고정된 상징도, 단일한 의미도 아니다. 과거에 주어졌던 말의 부정으로부터 새로운 말의 생성을 예감하는 여로에 선 키키의 몸짓은 그래서 시적인 행위로 비친다. 이 몸짓은 철저히 방치되어 있는 까닭에 ‘먼지들의 종족’과 같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키키는 아무 생각도 없이 국경 수비대를 조롱하며 전진한다.”(「키키」) 키키가 ‘잘 모르겠다’고,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명백히 성곽 안을 의심하고, 배후를 캐물을 수밖에 없는 단초를 우리에게 던져줄 때, 독자인 우리는 추방된 세계에서가 아닌 유랑하는 세계에서 생성하는 말들을 경험하게 된다.
가령 키키가 자신의 성곽 내부에서의 궤적을 좇아 기억을 재구축하고 새로운 시간을 세공하는 모습을 보라. “월곡동 산 번지 삼만원짜리 사글세 방에 누워”(‘월곡’동은 ‘달〔月〕’이 ‘우는〔哭〕’ 성곽 내부의 상황에 대한 명명으로 읽힌다. ‘곡(哭)’은 키키를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정념이다. 「哭」이란 시편에서 키키가 자신의 탄생지점으로부터 떠나야만 그 정념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모습이 등장하기도 한다) “더 깊은 더 오래된 소리들을 듣기 위해” “지지직, 아무리 돌려도 수신되지 않는 라디오”에 작은 귀를 바짝 대고 다가갔던 이십년 전, 키키는 부모님의 포장마차에 매달린 “십오 촉 샛별”이 “입춘”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을 목도했었다. 당시를 떠올리는 순간, 그 기억은 키키가 ‘금성’을 처음 보았던 때로, 즉 지구 밖의 세계와 처음 교감하기 시작한 상황으로 새로이 각인된다(「금성 라디오」). 성곽에서의 나날에 대한 기억을 조명할수록, ‘굽은 등’의 자세로 잠들었던 밤의 ‘막막함’은 은하의 별들도 모두 한 방향으로 울고 있을지 모른다는 묘한 연대감을 부추기는 느낌으로(「하현」), 수술 후 통증 때문에 뒤척였던 밤의 ‘혼란’은 세계의 ‘불완전한 규율’을 환기하게 하여 “무릎들의 소요를 무릅쓰고”서라도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는, 유랑의 정당성에 대한 인식으로(「술후」) 거듭난다. 유랑을 하는 자에게 출발지점의 시간은 현재를 위해 소환되는 것이다. 따라서 키키의 유랑에서 새로운 말을 줍는 방식은 ‘그러니까’ ‘고로’와 같이 접속사를 활용하여 과거에 습관적으로 알았던 내용을 재의미화하거나(「지문의 시차」, 「달달」, 「날아라 손오공」), 기존 특정 인물들에 키키만의 고유한 이름을 부여하는(「불량소년 체험기」, 「연인들」) 것이다. 성곽 밖의 “사물들은 형체를 갖지 못”하므로, “없으므로 있어서 환”해지는 여기, 은하를 유랑하는 자가 할 일은 바로 없는 ‘발자국’을 만들고, 그 ‘발자국’을 다시 확인함으로써 새롭고도 무한한 세계를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빙원」).
키키는 말한다. “눈을 비비고 나의 몸에 인각된 내 안의 네 문장을 더듬어보아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나의 봉인된 문장의 열쇠를 자! 너에게 주노니” 당신이 성곽을 박차고 나갈 때 “하! 많은 날들이 갔고 많은 날들이 도래했”음을 알지어다(「문장강화」). 누군가에게는 추방된, 누군가에게는 없는 존재인 키키, 이 사소한 느낌의 말이 “살아서” “존립한다”(「키키」). 한낱 먼지가 되어 시적인 몸짓을 감행하는 자, 다시 주시하건대, 그자는 분사된 형태로 유랑하는 하이커 키키, 키키, ‘키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