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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유동 『충적세 문명』, 도서출판 길 2011
문명에 대한 비극적 사유, 그 너머에는
안재원 安在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numeniu@snu.ac.kr
책을 읽는 내내 후회했다. 제목만 보고 덜컥 서평을 맡겠다고 한 것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책은 일단 양적인 면에서도 큰 산이었고, 내용에 있어서도 큰 바다였다. 허나, 약속은 약속인지라 책을 항해하던 중에 들었던 몇 단상으로 서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저자 김유동(金裕東) 교수의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만난 적도, 그의 책을 읽은 적도 없다. 『충적세 문명: 1만년 인간문화의 비교문화구조학적 성찰』이 나에겐 처음이다. 그의 한없는 독서와 끝없는 사유에 경의를 표한다. 우선, ‘한없는 독서’에 대해 말하자. 분과학문의 고유성과 전문성이라는 틀에 갇혀 ‘전공 폐쇄장애’를 앓고 있는 요즘의 인문학자들이 걸었던 길과는 다른 노정에서 찾아낸 새로운 이야기들이, 그의 글 읽기가 어떠했고,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흔적이 이 책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도대체 어떤 담대한 도전의식을 가졌기에, 동양과 서양의 고전은 물론 심지어 아메리카 인디언의 이야기까지 한곳에 모아 삭히고 있을까? 저 뚝심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게 무언지 자못 궁금했다.
궁금함은 자연스럽게 저자의 ‘끝없는 사유’로 옮겨갔다. 그의 사유에는 세 유형의 지식인(persona)이 등장한다. 어떤 때는 1960년대 독일 지식인의 모습이, 어떤 때는 1930년대 유럽 지식인의 모습도 포착된다. 여기에는 자기 학문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어느 독일 유학생의 모습도 오버랩 된다. 책은 이 세 유형의 인물이 순환-반복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인물들의 이런 등장방식 덕분에 서사구조는 복잡하나 논지는 간명한 편이다. 가끔은 그들 사이에 있는 간극을 메우며 따라가는 것이 어렵기는 해도 말이다. 따라서 책은, 이야기가 넘치지만 메시지는 간결한 편이다. 문명이란 지배와 소유의 구조를 연장하고 확장하기 위한 장치(apparatus)고, 이 장치는 자연(natura)에 어긋난 인위에 불과하다는 게 그 요지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과 물음이 명쾌한 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물론 혁명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애당초 정치혁명이 일어난다 해서 자연과의 어긋남에서 탄생한 문명의 비극적 구조 자체가 해소되는 것도 아니기에. 저자가 책의 바탕에 깔려 있는 비극적 사유를, 아니 더 나아가 묵시적인(apocalyptic) 세계관을 더 끝까지 밀고 나가 인류문명에 원래 처음부터 설정되어 있는 비극적 구조를 예리하게 해부해주기를 나는 기대했다. 아직 우리에게는, 그러니까 한국어로 저술된 서적들에는 묵시적인 세계관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삶과 세상 전체를 묵직한 필체로 그려낸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자는 딱 거기에서 사유를 멈춰버리고 말았다. ‘거기’란 저자가 마지막에 소개하는 카프카(F. Kafka)의『법 앞에서』다.
법은 인간을 길들이고 가두는 울타리다. 이런 이유에서 개별적 존재의 차원에서 한 인간이 ‘법’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개체로서 한 인간은 “법 앞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법은 한 인간을 구속하는 문명의 기제이기 때문이다. 법과 개인 사이에 설정된 이런 비극적인 구조를 발견하고 절규한 이가 카프카다. 사실 카프카가 이를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소포클레스가 이미 발견한 사실이기에.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법이 개인을 구속하는 장치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법이 종종 개체인 한 인간에게는 구속의 기제이지만, 유적(類的) 존재인 인류에게는 필수적인 토대다. 바로 여기에서 자연과 문명이 확연히 구분되고, 또한 문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입지점이 확보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하지만 책은 이에 대해 명시적인 언급이 없다. 문명이란 본래 개체적 존재인 한 인간(homo particularis)과 자연의 대립구도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유적 존재인 인류(homo generalis) 역사와 자연의 대비에서 더욱 분명하게 구별된다. 인류 역사와 자연의 관계에서 형성된 이 충적체(沖積體)는 단순한 역사적 퇴적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기관(organum)이며, 따라서 문명은 그 자체가 일종의 생생지체(生生之體)다.
이와 관련된 결정적인 단서 가운데 하나가 실은 법이다. 문명은 인류 역사 위에서 충적된 무엇이고, 살아 움직이는 무엇이며, 그 무엇의 뿌리 가운데 하나가 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명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하고자 할 때, 개인 차원이 아니라 인류라는 유적 차원에서 문명에 접근하려는 시선이, 특히 법의 관점에서 문명에 접근하는 것도 나름 의미있는 접근일 것이다. 요컨대, 자연과 문명 사이에 있는 비극적 구조는, 한 개체로서의 인간과 자연 사이에 있는 관계에서가 아니라, 유적 존재로서 인류와 자연 사이에 있는 관계의 분석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에 대한 접근의 한 대상으로서 문명과 법의 상관성에 대한 저자의 고민과 문제 제기는 인상적이다. 하지만 저자는 한 개체로서 인간의 문제를 고민한 카프카의 절규에서 멈추고 말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개인과 문명 사이에 있는 비극적 구조를 탐색하는 저술이나, 문명과 자연 사이에 있는 비극적 구조를 온전히 밝힌 분석은 아니다. 안티고네나 카프카의 절규가 개인 차원에서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테면 유적 존재인 인류에게도 그 절규가 통용되는지는 아직 검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이왕 저자가 인류 문명에 대한 비판을 선언한 마당인지라, 특히 문명과 자연 사이에 있는 비극적 구조를 매개하는 ‘법’의 관점에서 문명에 비판적 해부를 해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저자는 “법 앞에서”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 설정을 개인과 문명의 관계로 한정한 탓이리라.
사실, 책은 문명에 대한 ‘묵시’적인 비판서는 아니고, 문명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을 촉구하는 교양서에 가깝다. 서양문명에 대한 절망이 책의 중심에 깊숙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옆에는 동양문명에 대한 희망도 다른 한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시도한 지배와 소유의 근간-구조로 삼고 있는 현대문명, 그러니까 그 긴장이 고조되어 어쩌면 비등점에 도달한 자본주의의 대안이 동양문명에서 찾아질 수 있을까. 내 생각엔, 저자가 밑바탕에 깔고 시작하는 소유와 지배의 구조를 기본 특징으로 갖는 문명의 비극적 구조는 동양문명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물론 힘의 역학관계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동양이 세계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한 것도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소유와 지배 구조라는 문명의 중핵이 분쇄될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더 강화될지도 모른다. 당장 중국의 경제성장과 여기에서 파생하는 문제에 대해, 동양의 전통적 사상이, 예컨대 저자가 자주 언급하는 예컨대 노장(老莊)사상이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방법론으로 제시된 ‘비교문화구조학’이 인류 문명의 비극적 구조의 해부에 얼마나 효율적인지도 잘 모르겠다. 차라리 책 전반에 깔려 있는 묵시적 세계관을 좀더 밀고나갔으면 좋았을 것이다. 서양문화를 만든 서양고전에 들이댄 칼날을 동양고전에도 마찬가지로 들이대었으면 어땠을까. 인류 문명을 바라보는 시선을 서양에서 동양으로 수평적으로 이동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류의 관점에서 문명을 고찰하는 사유의 지평이 마련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덧붙이는 말이다. 물론 이게 쉬운 일은 아니다. 저자가 이 어려운 작업을 계속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