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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전2권), 휴머니스트 2011

타께우찌 요시미, 혹은 아시아라는 아포리아

 

 

류준필 柳浚弼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교수 pilsotm@inha.ac.kr

 

 

155_438『다케우치 요시미 선집』(윤여일 옮김, 이하 『선집』)이 나왔다. 크게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내심 얼마간의 두려움도 함께 찾아온다. 이 책의 번역에 어느정도 연루된 처지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역자 후기」, 1435면), 그래도 솔직한 심정이다. 타께우찌 요시미(竹內好)를 읽는 일은 여전히 곤혹과 고통이 수반되는 탓이다. 그 불편함을 침착하게 대면하기가 그다지 쉽지 않다. 그래서 회피하고 싶었고 짐짓 잃어버린 듯 흘려놓았다. 그렇게 떠넘기고 싶었는데, 이제 반송된 편지를 다시 쥐고 망연자실이다. 어디를 열어도 동일한 음성과 표정.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는 타께우찌 앞에서 나는 늘 추궁당한다.

환각인지 중독인지, 맨 처음 펴는 곳은 동일하다. “노예가 노예임을 거부하고 동시에 해방의 환상도 거부하는 것, 노예라는 자각을 품은 채로 노예인 것.” 타께우찌 자신의 말로 주석을 달면 이렇다. “자기임을 거절하고 동시에 자기 아님도 거부한다.”(「근대란 무엇인가」, 2249면) 분명 타께우찌의 말이지만, 타께우찌는 루쉰(鲁迅)을 통해서 들려준다. 일종의 복화술이다. 무지하므로 가능한 만용이겠으나, 타께우찌 요시미의 전집 17권이 모두 이 한 대목을 향한다.

이 글이 발표된 1948년은 강화(講和)논쟁이 한창이던 때다. 패전국-패배자 일본의 ‘독립’ 가능성이 초미의 관심이었다. 타께우찌는 자문한다. “나라가 독립을 상실했다고 알고 있는데도 슬프다는 감정은 뒤따르지 않는다.” “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나라의 독립과 이상」, 188면) 이어지는 자답. 항전파-투항파의 내전도 없이 ‘거국일치적 항복’과 ‘일억 총참회’로 빠르게 옮겨간 “815는 내게 굴욕의 사건이다.”(「굴욕의 사건」, 130면) 타께우찌에게 ‘독립’의 조건은 이런 것이다. 즉 패전-패배는 한번뿐이지만 그 패배를 가능하게 한 것은 ‘패배하지 않으려 싸웠다’는 ‘일차적 저항’이다. 여기에 다시 패배를 망각하려는 자신에 대한 ‘이차적 저항’이 지속되어야 독립에 이를 수 있다. “패배가 패배감으로 자각되기까지는 어떤 과정이 있었다. 저항의 지속이 그 조건이다. 저항이 없는 곳에서 패배는 일어나지 않는다.” “패배감에 대한 자각은 자신에게 패배한다는 이차적 패배를 거부하는 이차적 저항을 통해 일어난다.”(「근대란 무엇인가」, 2225면)

타께우찌는 이러한 이차적 저항의 계기를 루쉰(중국)에게서 읽어냈다. 루쉰은 “선각자가 아니”었고 “한번도 신시대의 방향을 제시하지 않았다”(「『루쉰』 초록」, 2112면)고 했다. 이차적 저항의 자리란 패배를 패배감의 자각으로 붙들어쥐는 자세일 수밖에 없다. 이런 사상적 태도는 상황 속에 내재하며 상황 변화를 추구할 때 생성되는 감각에 가깝다. 상황 바깥에서 논평하고 비판하는 것과는 전혀 방향이 다르다(비판의 위치 또한 비판 대상의 일부다). 내재하며 함께 요동치며 흐르되, 그렇게 흐르면서 함께 바뀌는 것. 그것이 ‘독립’이자 ‘혁명’이다.

1952년 일본은 독립했지만, 타께우찌의 ‘독립’운동은 그후로 더 타올랐다. 1950년대 전반 ‘내셔널리즘・민족・독립’ 등의 문제를 던지며 일구어낸 ‘국민문학논쟁’(1193~311면), 1960년의 안보조약개정 반대투쟁에 적극 참여하면서 제기한 다양한 문제들(1374~90면) 모두가 일본의 ‘독립’이라는 과제와 연결된다. 그 회심=독립으로 향하는 경로에는 ‘전쟁’과 ‘문명’이 숙명적 과제로 수반된다. 이 과제와 대결하는 타께우찌의 자세 또한 루쉰처럼 선각자의 그것이 아니다. 뒤돌아 앉은 채 다들 이미 떠나보냈다고 하는 것을 움켜쥔다.

타께우찌는 「근대의 초극」에서 아시아에 대한 침략전쟁과 대동아(태평양)전쟁을 구분하고, 대동아공영의 울트라 내셔널리즘 속에서 내셔널리즘의 변혁적 계기를 되짚고자 한다. 동시에 ‘절대 평화’의 짝이 되는 ‘전쟁 일반’이라는 인식틀을 거부한다. 역사 속으로의 진입이 난망하기 때문이다. “대동아전쟁은 식민지 침략전쟁인 동시에 제국주의에 대한 전쟁”이라 규정하고, 이 아포리아를 염두에 둘 때 ‘15년 전쟁’은 “연속되었지만 단계마다 성격을 달리했고 또한 몇가지 가능성을 선택하면서 진행”된 것이라 한다(1141~43면). 그러므로 “전쟁의 이중구조를 비집고 들어가 그것을 구분하고, 그렇게 전쟁의 성격을 바”꿀 수 있어야만, 태평양전쟁의 현실에 작용하는 사상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 전쟁의 이중구조는 오롯이 일본 근대의 아포리아다.

타께우찌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독립’을 목도하지 못했다. 그 과제는 사후에도 이어졌지만, 타께우찌만큼 자각적인 지식인이 등장하지는 못한 듯하다. 아마 타께우찌도 예감한 것으로 보인다. 1960년의 안보투쟁에서 15년 전에 있었어야 할 저항의 계기를 보았지만 동시에 그속에는 전후세대와의 단절감도 기입되었다. 여기서 다시 타께우찌는 ‘전쟁체험의 일반화’라는 과제를 건져내었다(「전쟁체험의 일반화에 대하여」, 1391~403면). 타께우찌로서는, 이제 ‘독립’조차도 스스로에 대한 사상적 갱신을 수행해야 한다고 예감한 것이 아니었을까.

윤여일(尹汝一)이 번역한 『선집』 저본은 일본의 소장 중국연구자 두 사람(마루까와 테쯔시丸川哲・스즈끼 마사히사鈴木將久)의 작업으로, ‘타께우찌 요시미 독회’를 운영하며 토론한 성과다. 『선집』의 수록 글 선정에는 중국인 연구자 쑨 꺼(孫歌)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의 그림자가 적잖이 느껴진다. 이 『선집』의 번역으로 인해 ‘타께우찌 요시미’는 이제 한・중・일 지식인이 공통으로 참조하는 텍스트로 기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타께우찌가 남긴 유산을 활용하는 일이란 게 누가 타께우찌를 더 잘, 정확히 아는가를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각자의 사회역사적 경험 속에서 타께우찌적 계기를 문제화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서구이면서 동시에 아시아이고자 한다.’ 타께우찌가 일본의 근대를 매개로 던진 아시아적 근대의 아포리아다. 이것이 이른바 ‘동아시아의 부상’이 운위되는 21세기에도 동시대성을 구성하는지 따지는 과제는 지금 여기의 몫이다. 1961년에 타께우찌가 “서양이 낳은 보편가치를 보다 고양하기 위해 동양의 힘으로 서양을 변혁한다, 이것이 동과 서가 직면한 오늘날의 문제”라고 암시한 바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감당하려면 “자기 안에 독자적인 것이 없어서는 안”될 터이다. 그것은 “아마도 실체로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방법으로는, 즉 주체 형성의 과정으로는 있지 않겠는가.”(「방법으로서의 아시아」, 264면)

1990년대에 카또오 노리히로(加藤典洋)의 「패전후론」(『사죄와 망언 사이』, 서은혜 옮김, 창작과비평 1998)이 촉발한 역사인식 논쟁도, 타께우찌의 ‘독립’과 ‘전쟁체험의 일반화’가 일본의 여전한 과제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자국 전사자에 대한 애도와 타국 민중에 대한 사죄의 선후 문제도 거론되었지만, 전쟁의 이중구조나 일본 근대화의 아포리아에 육박하진 못했다. ‘전쟁 일반’처럼 ‘타자 일반’이 일본의 국민적 주체와 대립하여 추상화될 뿐, 그 구조 자체에 균열을 내려 한 타께우찌의 ‘아시아’는 생성되지 못했다. 곤혹과 고통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타께우찌 요시미의 『선집』을 외면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외부의 적이 또렷해지는 그만큼 자기 내부에 적이 깃들어 있는지 모른다. 타께우찌가 집요하게 추궁하는 지점은 여기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일이 아닐까.

21세기는 동아시아의 시대가 되리라는 예견들이 적잖이 등장하고 있다. 타께우찌 자신이 예감한 상황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20세기와는 다른 21세기를 그려보기란 쉽지 않다. 무엇보다 타께우찌적 과제가 이월된 채 이어지고 있다. 타께우찌의 아포리아는 ‘서구-비서구’, ‘선진-후진’, ‘침략-저항’ 등 이항대립의 자명성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고투의 궤적이다. 타께우찌의 ‘독립’이 그렇듯이 20세기의 연속이 아닌 21세기가 그냥 주어지지는 않는다. 자기 스스로의 경험 속에서 사상적 자원을 끄집어내는 지난한 고투 없이는 불가능하다. 『선집』의 번역이 소중한 이유이다. 다만 이 『선집』도 방편일 뿐이다. 타께우찌 그 자신의 전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