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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아닐 아난타스와미 『물리학의 최전선』, 휴먼사이언스 2011
현대의 진정한 모험
이강영 李康榮
건국대 물리학부 연구교수 kylee14214@gmail.com
아름다운 플루겔호른의 멜로디와 강한 비트가 어우러진 척 맨지오니의 「싼체스네 아이들」은 어떻게 연주해도 아름다운 곡이어서 빅 밴드, 합창, 오케스트라 등 수많은 버전이 있다. 이 곡은 인류학자 오스카 루이스가 멕시코시티의 빈민층 가족을 한 사람 한 사람 인터뷰해서 쓴 같은 제목의 책을 스크린에 옮긴 1978년 영화의 테마곡이다.
이제는 인류학의 고전이 된 이 책의 저자 오스카 루이스는 책의 서두에서 “예전에는 인류학을 연구하려면 오지의 미개인 부족을 찾았으나, 이제 인류학을 위해서는 대도시를 찾아야 한다”고 썼다. 루이스의 글을 읽고 문득 선반 위의 지구본을 쳐다본다. 세계 어디에서도 우리가 모르는 원시종족을 찾기 어려운 것처럼, 지구상에서 인간이 가보지 못한 곳은 이제 거의 없다. 더이상 아문센이나 콜럼버스처럼 미지의 세계에 도전할 일은 없다. 현대인에게 탐험이란 과거의 일, 아니면 누가 더 높은 산을 많이 올랐느냐 하는 식의 인간의 능력에 도전하는 일이 되었다. 우리 시대에 진정한 탐험이란 무엇일까?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이라는 현대물리학의 거대한 업적 위에서, 오늘날 인간이 물질의 구조와 우주의 참 모습에 대해 이해하는 바는 이전 시대와 비할 수 없다. 인간의 감각과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한 많은 개념들이 새로이 조작적으로 정의되고 검증되었으며, 그에 따라 인간의 통제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자연현상에 관한 부분적인 법칙이 아니라 전체상을 가지게 되었다. 비유하자면, 현대 이전의 지식이 부분 부분에 대한 지식을 쌓아놓은 것이었다면, 20세기 이후에는 불완전하나마 전체의 모습이 담긴 지도를 그리는 데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실 이 지도의 많은 부분은 이론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지도의 빠진 부분을 채우고, 지도가 과연 옳은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아주 이상한 것들, 일상의 개념으로는 정의하기조차 어려운 존재를 찾고 있다. 별들보다 수십배나 많은 양이 우주에 가득하지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 우리은하 중심에서 혹은 우리은하 바깥의 저 먼 은하에서 만들어져 수십만광년을 날아온, 수조개 중에서 겨우 몇개가 보일까 말까 한 뉴트리노(neutrino, 中性微子), 우리 우주를 폭발적으로 팽창시키고 있는 에너지의 비밀을 쥐고 있는 초신성(超新星), 원자와 지구와 별 같은 보통의 물질과 대칭을 이루는 반(反)물질, 우주 초기에 생겨난 빛, 우주가 인플레이션이라는 급팽창을 할 때 나온 중력파의 흔적인 편광, 아직 인간이 한번도 보지 못하고 이론적으로만 예측하고 있는 초대칭 입자 등이 바로 그런 존재다.
이런 존재를 발견하기 위해 물리학자들은 현재 인간이 가진 최첨단 기술을 동원해서 실험장치를 구상하고 설계한다. 칠레 북부 아따까마사막의 빠라날산에 있는 초대형망원경(VLT)은 무려 8.2미터의 거울로 되어있는데, 이보다 거울이 더 커지면 움직일 때 중력에 의해서 거울 자체가 변해버리는 것을 제어할 수 없으므로 이는 한덩어리로 된 거울로 가능한 최대의 크기다. 한편 스위스 제네바 근처의 원형 터널에 위치한 입자가속 충돌장치인 LHC(Large Hadron Collider)는 27킬로미터에 이르는 가속기 전체가 우주공간보다 차가운 영하 272도로 냉각되어 수천개의 초전도 자석에 의해 조종되며, 양성자빔이 지나가는 길은 측정이 불가능한 수준의 진공이다. 크기는 그보다 작지만 미국 미네쏘타의 쑤던광산에 설치된 암흑물질 탐색장치인 CDMS(Cryogenic Dark Matter Search)는 LHC보다 더욱 낮은 영하 273.11도라는 극저온을 유지한다. 이는 절대 0도에서 불과 0.04도 떨어진 온도다.
어쩌면 물리학자들이 찾고자 하는 것이 고대인이 머릿속에서 그리던 용이나 괴물 같은 상상의 존재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고도의 실험장치란 용과 싸우는 신비의 검이나 마법 같은 것에 비할 수도 있다. 이렇듯 현대의 모험이란 바로 자연현상의 신비를 풀기 위한 과학자들의 도전이다. 그리고 모험이란 말에 걸맞게도, 환상적인 존재를 현기증 나는 기술로 붙잡기 위해, 그들은 지구의 극한을 찾아가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얼어붙은 러시아의 바이깔호수, 남아프리카 칼라하리사막의 불모의 땅 카루,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곳인 칠레 북부의 아따까마사막, 그리고 말 그대로 지구의 끝인 남극에서 이 현대의 모험가들은 실험장치를 건설하고 자연의 혹독함을 견디며 외로운 실험을 묵묵히 수행한다.
이렇게 극한의 장소를 찾아가는 이유는, 우주에 흩어진 아주 희미한 신호를 극도의 정밀한 기기로 붙잡기 위해서다. 과학자들이 원하는 것은 저자의 표현대로 “절대적인 고요”다. 그 속에서 과학은 우주의 근원, 물질의 창조를 탐구하고 우리의 존재를 숙고한다.
『물리학의 최전선』(The Edge of Physics, 김연중 옮김)은 이런 이야기를 담은 아주 특별한 기행문이다. 과학 저널리스트인 저자 아닐 아난타스와미(Anil Ananthaswamy)는 소설을 쓰기 위해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인 천체물리학자 쌔울 펄뮤터를 만난 후(펄뮤터는 작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소설보다 더 흥미로운 최신의 물리학 실험을 찾아 4년 동안 폐광의 깊은 굴속부터 불모의 사막과 얼어붙은 호수 위와 해발 4천미터의 산 정상을 거쳐 남극에 이르는 탐사를 하고 이 책을 내놓았다. 책의 제목처럼 저자가 찾아가는 곳은 극한의 지점(edge)이다. 이는 문명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의미인 동시에 현대물리학이 현재 도달한 탐구의 최전선이라는 의미에서의 극한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픽션보다 더 흥미로운 논픽션이며 현대의 진정한 모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