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제임스 우드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창비 2011
소설의 미로를 헤쳐나가는 즐거운 산책
김태용 金兌墉
소설가 maranana@naver.com
“소설의 집에는 창(窓)은 여럿 있어도 문(門)은 두셋밖에 없다.”(14면) 영국 출신의 소설가이자 평론가 제임스 우드(James Wood)의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How Fiction Works, 설준규・설연지 옮김)는 이렇게 시작한다. 창은 외부를 바라보면서 통하고, 문은 외부로 드나들면서 통한다. 어떤 자들은 창을 문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바라보면 나가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많은 소설은 읽고 나도 창으로 머물러 있지만 어떤 소설은 곧 문이 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창과 문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의 장치들로 무장한 채 그것을 확장시키고 뒤섞으려고 시도한다. 그게 이 책의 미덕일까.
소설이란 무엇인가. 누가 묻고 누가 대답하는가. 누군가는 묻고 누군가는 대답한다. 누군가 물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어도 아무도 묻지 않는다. 아무도 묻지 않으니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다시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군가 말하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 부정할 수 없는 이 정의 속에 소설에 대한 요소가 숨어 있다. 이 단순한 사실을 다른 어휘로 되도록 복잡하게 풀어낸 것이 소설의 이론이다. 인칭과 시점과 서술과 묘사와 시간과 공간과 기타 등등. 소설가도 모르는 용어들이 소설의 이론서에는 가득하다. 많은 소설가들은 소설의 이론을 읽지 않는다.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소설가 지망생들은 소설의 이론을 찾아 읽는다.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소설가 지망생도 소설가가 되면 소설의 이론을 더는 읽지 않는다. 읽지 않는다고(않았다고) 시치미를 뗀다. 그것이 소설가의 미덕일까.
작가마다 소설이 안 써질 때 들춰보는 책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믿음에 회의하는 종교인이 경전을 찾아 읽듯이 작가에게 소설이 구원이자 종교라면 그에 걸맞은 서적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책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있어도 저마다 다른 책을 말할 것이다. 완벽한 소설이 없듯 완벽한 이론서도 없다. ‘완벽’까지 바라지도 말아야 한다. (과연 완벽이란 말이 소설에 걸맞은가?) 소설을 읽고 쓰게 만들어주는 서적이면 충분하다. 어떤 책이 우리를 도서관으로, 책상 앞으로 이끌어주는가.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딱딱한 이론서가 아니다. 만약 제목이 ‘무엇이 소설을 작동하게 만드는가’였다면 펼쳐보기도 전에 무슨 내용인지 대충 짐작하게 했을 것이다. 그것은 다소 따분한 짐작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역시 노골적으로 형식에 대한 문제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작동’이라는 단어와 만났을 때는 소설이 고정된, 죽은 형식적 결합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운동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소설은 살아 있는 유기체라고 여러 사람들이 말했다. 이것은 소설이 꿈틀대는 현실을 참되게 모방하여 빈틈없는 언어로 잘 조직해야 한다는 의미다(참되게, 빈틈없이, 잘 같은 어휘는 얼마나 막연하고 두루뭉술한가. 그만큼 소설을 설명하는 것이 힘들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소설은 삶과 인간에 대한 하나의 표본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믿으면서도 어느새 우리는 무수히 많은 소설들이 ‘소설을 모방한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현대소설이 현실과 엉겨 싸울 수 있는 중요한 생존의 몸부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설가는 현실과 동시에 ‘재현된 현실’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미래를 내장한 현실을 응시하면서 과거의 소설에서 빠져나가도록 애써야 한다.
이 책은 현실의 표본이 되는 소설보다 소설의 표본이 될 수 있는 소설을 다루고 있다. 소설가들이 어떻게 삶을 흡수해 재조립 혹은 재분열했는지 보여준다. 플로베르와 헨리 제임스에 대한 집중적인 인용과 인정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더불어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 W. G. 제발트, 토마스 베른하르트 같은, 소설의 극점에 찢어진 깃발을 꽂고 있는 작가들을 언급한다. 대략 보아도 소설가가 좋아하는 소설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소설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였다. 그들이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면 남몰래 수긍하면서 대놓고 면박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몇가지 흥미로운 대목들이 눈길을 끄는데, ‘당혹스럽게도’(embarrassingly)라는 한 낱말에 헨리 제임스의 천재성이 응축되어 있다는 다분히 미시적이면서도 작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어휘 사용법에 대한 세세한 설명이나(28면), “훌륭한 작가들이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면서 실제 사례를 들어 분석하는 부분은(38~46면) 유머러스하면서도 설득력을 갖고 있다. 또 하나, “마치 바닥이 유리로 된 보트에서 그 밑의 물고기 무리를 보는 듯하다”(168면) “옛 연인의 오래된 편지를 다시 읽지 않고는 배길 수 없기라도 하듯 나는 그(플로베르—인용자)에게로 돌아간다”(191면) 같은 소설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도 독자를 끌어당긴다.
자유간접화법에 대한 다소 지루한 서술과 더불어 ‘언어’와 ‘대화’ 부분은 외국이론서가 가진 난점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 장인 ‘진실, 관습,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이라는 유령이 떠돌고 있는 한국소설판에서 숙고할 만하다. 저자는 ‘리얼리즘’이라는 말 대신 ‘진실’이라는 말을 쓰자며 이렇게 설명한다. “일단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버리고 나면 어째서 카프카의 변신과 함순의 굶주림, 베께뜨의 끝내기가 있을 법하거나 전형적인 인간행동의 재현이 아니면서도 고통스럽게 진실된 텍스트인지를 해명할 수 있다.”(241면)
카프카, 함순, 베께뜨를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미덕을 갖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으나 쉽게 말할 수 없는 것과, 읽으려 했으나 읽지 못했던 소설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다시 읽고 다시 쓰고 다시 말해야 한다. 플라뇌르(산책자, 60면)가 되어 복잡한 소설의 미로를 헤매며. 진실로 소설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