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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정환 시집 『드러남과 드러냄』, 강 2007
김정환의 한국어 문법
황현산 黃鉉産
문학평론가, 고려대 불문과 교수 septuor@hanafos.com
시집 『드러남과 드러냄』은, 시인으로서나 문화·사회 운동가로서나 김정환(金正煥)의 실천과 견딤이 그렇듯이, 한국 좌파문학의 알레고리라고 불러야 옳은데, 이때 알레고리라는 말은 표현하는 것이 표현되는 것이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하다는 뜻을 포함한다. 표현의 기술에서건 사물의 이치에서건, 그 역할을 때로는 번갈아서 때로는 동시에 서로 주고받고 교대하다가 마침내는 하나인지 둘인지 모르게 되는 이 관계를 설명하자면 통일이니 분산이니 깊이니 응축이니 운동이니 통섭이니 하는 말들을 힘겹게 나열해야 할 터이라, 우선 간단하게 김정환의 신기한 문법을 살펴보는 것이 낫겠다.
눈치 없는 유비는 믿음직한 관우와
우락부락한 장비를 현관에 거느린
주인도 우락부락한 제주도 해산물
전문 음식점이고 찬우물은 강화도 어드메쯤
정신이 확 드는 여관 이름이다. ‘아니라니까.
마을 이름이 원래 그렇다니까?’
-「오늘의 일기」 부분
이 여섯줄 시구의 골격을 간추리면‘유비는 음식점이고 찬우물은 여관 이름이다’정도의 말이 된다. 여기서 “유비”는 두번 주어가 된다. 한번은 관우와 장비를 거느린 자로서, 또 한번은 음식점 이름으로. 더불어 “거느린”의 주체 역시 둘이다. 그것은 처음에 “유비”였다가 “전문 음식점”으로 바뀐다. 어쩌면, “거느린”과 “주인도” 사이에 쉼표가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셋일 수도 있겠다. “유비”가 관형절의 주어일 때 그것은 음식점 이름과 관련된 사연에 대한 고찰 과정을 나타낸다는 점에서‘드러남’이며, 문장 전체의 주어가 될 때 그것은 한 장소의 명백한 표상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드러냄’이다. 그러나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관형절의 주어는 어떤 인간적 의도와 강렬하게 연결된다는 점에서‘드러냄’이 되며, 전체 문장의 주어는 인간적 의리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의 결과가 음식점 이름 하나로 나타났다는 점에서‘드러남’이 된다. 여관 이름 “찬우물”에 관해 말한다면, “정신이 확” 들게 하는 의도를 간직한다는 점에서‘드러냄’이지만, 본래 거기 있던 이름이라는 점에서‘드러남’이다. 그러나 “정신이 확” 드는 자연스런 결과와 따옴표 속의 따지는 말이 지닌 의도를 생각하면 이 관계 또한 역전된다.
드러내는 일과 드러나는 현상이 바뀔 때, 당연히 드러내는 자와 드러나는 것의 역할도 바뀐다. 주사(主辭)와 빈사(賓辭)의 이 역전은 작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도가 오히려 객체가 되고 저항하는 현실이 오히려 그 의도 실천의 주체가 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며, 또한 김정환의 실천과 견딤의 비밀을 나타내고 감추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해설을 제하고도 327면이 되는 이 시집의‘1권’에 관해서만 말한다면, 그것은 고등학교와 중학교의 졸업앨범을 생각의 밑그림으로 삼은, “새로운 과거와 오래된 미래”가, 또는 그도 저도 아닌 과거와 현재가 대화를 나누는 판타지아이다. 앨범은 건물과 교무와 담임의 사진을, 또는 등교의 풍경과 교훈을 앞세운 다음 반별로 편집되어 있다. 각반에는 급훈이 있고 그때 학생이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흑백으로 찍혀 있다. 급훈은 모두 좋은 말이다. 누구에게는 가슴에 새겨야 할 금과옥조였고, 누구에게는 억압이었고, 누구에게는 야망이었고, 누구에게는 인문학이었고, 누구에게는 단지 액틀의 장식이었을 이들 급훈은 그것을 바라보던 개개인의 운명과 무관했더라도, 그들이 지금 살고 있는 세상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들 급훈의 원천인, 그 변형이거나 왜곡인, 또는 그 확장이거나 발전인 온갖 이론과 가르침이, 또는 그에 대한 무시와 포기가 착종하는 어느 길목에서 동창들은 당연히 늙었으며, 혹은 병들거나 죽었고, 어제 만난 듯 생생하거나, 대강 3년에 한번씩 전화를 하거나, 얼굴과 이름이 헷갈린다. 사진은 그 얼굴 하나하나에서, 그 운명 하나하나에서, 구체적 감각이 되기도 하고 잡힌 것 없는 추상이 되기도 하고 그 총체가 되기도 한다.
이 시인이 얼굴 하나와 운명 하나에서, 또는 그 모든 것들의 조합에서 감각과 운명의 총체를 본다는 것은 한 시절이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사라짐을 말할 때마다 김정환의 언어는 예의 그 신기한 문법의 틀 속에, 더 정확하게는 틀의 없음 속에,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넣는다. 무수한 경구가 폭발하고 그 파편 하나하나는 경쾌하거나 슬픈 농담이 된다. (사실 유머가 아닌 경구가 언제 존재하기나 했던가.) 김정환의 특별한 재능은, 재능도 재능이지만 특별한 실천은, 가닥으로 가닥을 젖혀내는 이 말들의 힘으로, 이를테면 중학교 앨범의 또랑또랑한 얼굴들이 분화되거나 불순해지기 이전에 보관해둔 에로스를, 순화된 형식으로 다시 만난다. 보관된 에로스가 죽음이라면 순화된 에로스는 여전히 “모종의 책임”을 완수하려는 생명이며, 그 둘을 아우르는 것이‘김정환의’음악이다. 시인은 어느 페이지에서 “예술의 잔인한 위로”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사실 그에게서 음악-예술은 다른 세계로의 피신이 아니며, 행동의 유예조차도 아니다. 그것은 순화된 감각과 투명한 인식으로 실천할 삶의 비밀이며, 집중된 정신과 육체의 행동양식이다. 그것은 윤리의 무한한 드러남인 동시에 실천의 끝없는 드러냄이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시집을 다 읽기에 힘이 모자라는 사람은 끝에서 세번째 시 「실업의 잡무」를 우선 읽기 바란다. “나를 향하지 않고 나를 위한” 작전으로 “육신의 무표정이 붓고 뚱뚱하고 더부룩해”지는 아내에게 시인이 바치는 이 짧지 않은 산문시는 우리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연애시에 속한다. 향하지 않고 위할 때, 이론의 말도 감각의 표현도 음악이 될 것이다. 이 시집은 우리를 향해서 있지 않고 위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