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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도종환 都鍾煥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1984년 동인지『분단시대』로 등단. 시집『접시 꽃 당신』『당신은 누구십니까』『부드러운 직선』『해인으로 가는 길』등이 있음. djhpoem@hanmail.net
골짜기의 밤
열사흘 달이 구름에 지워졌다 나뭇잎에 가렸다 하면서 산 위를 지나가는 밤에는 소쩍새만 우는 게 아니었다 가까운 산비탈에서 칼로 긋는 듯한 산짐승의 비명소리도 들렸다 구절초 잎도 당단풍나무도 일순 긴장하여 소리나는 쪽을 향하지만 골짜기 물은 같은 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마을 이장이 면 직원과 다녀간 다음 날 법주리에도 포수가 배치되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멧돼지에 대한 불평이 많았다 나뭇잎이 지고 골짜기가 눈으로 덮이는 밤이면 산짐승들은 문 바로 앞에까지 와 서성거리다 가곤 했다 다리가 짧은 삵이나 너구리가 숫눈에 푹푹 빠지며 꼬리를 길게 끌고 간 자국도 보였다
눈길을 걸어 짐승들이 맨발로 물을 마시러 왔다가 얼음만 핥고 간 어둑새벽에는 도끼로 계곡의 얼음을 깨주어야 했다 눈비를 피할 마땅한 굴도 없이 마른 풀 사이에 쪼그려 앉아 밤을 새웠을 암고라니를 생각하며 그것들이 다니는 외길목이나 텃밭에 푸른 채소를 뿌려주기도 하였다 짝짓기 때를 빼고는 혼자 다니는 짐승들이 많았다 가시덤불 속에서도 어둠 속에서도 그들이 혼자라는 것을 오래 생각하였다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도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 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