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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이현 鄭梨賢
1972년 서울 출생. 2002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연인들』 등이 있음. deepoem@hanmail.net
장편연재 1
내 모든 것
프롤로그
김정일이 죽었다. 2011년 12월 19일 정오, 나는 혼자 점심을 먹고 있었다. 밥 한공기와 그저께 끓인 감자국, 멸치볶음과 김치에 도시락용 김을 곁들인 간소한 식사였다. 습관적으로 켜둔 스마트폰의 FM라디오 어플리케이션에서 그 소식이 흘러나왔을 때 나는 창문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털구름이 걸린 자리는 공기가 희박할 것 같았다. 아닐지도 모른다. 안에서 밖의 세계에 대하여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나는 이어폰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자국 국물을 개수대에 따라 버리고 남은 찌꺼기들을 음식물쓰레기통에 쏟아부었다. 침묵 속에서 세제 거품을 많이 내어 천천히 설거지를 했다.
집을 나서면서 썬글라스를 쓰는 것은 비 오는 날이나 눈 내리는 날이나 변함없는 나만의 작은 의식이다. 진갈색 렌즈 너머의 거리는 침침하고 적막했다. 나는 털목도리를 칭칭 감고서 정직한 보폭으로 걸었다. 건조하고 쌀쌀한 날씨였다. 나는 정면만 바라보며 걸어갔다. 아무데도 두리번거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요새는 가끔 내 인생의 목표가 오로지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용히 닳아가는 것.
도봉산행 7호선 전철은 오후 1시 39분에 도착했다. 어제 이맘때보다 2분 느렸다. 빈자리에 앉는 것과 동시에 눈을 감았다. 곧 노원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올 때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지하철로 오가는 동안 신문이나 책을 보는 것은 남의 얘기일 뿐이다. 어쩔 수 없이 필요한 학습교재를 제외하곤 나는 여간해서는 신문도 책도 읽지 않았다. 영화를 안 본 지도 아주 오래되었다. 뇌 속에 새로운 것을 단 한톨도 집어넣고 싶지 않다. 나는 다만 퍼내고 또 퍼내고 싶다. 쩍쩍 갈라진 밑바닥이 다 드러날 때까지.
돌이켜보면 지난 삶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받는 과정이었다. 비효율적인 인생이다. 절망스럽지는 않다. 대부분의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세상에는 기어이 무엇인가가 되고자 안간힘 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구 위의 모든 산 이름을 외우거나 스와힐리어 공부를 하거나 꿀벌을 치거나 인공수정을 하거나 시를 쓰거나. 그래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스무살 이후로 나는 생에 대해 어떤 기대도 품지 않아왔다. 아주 가끔 그때의 나를 꿈속에서 만난다. 잠결에 나는 그 장면을 숨죽여 내려다본다. 구겨진 황토색 세수타월, 그 아래 수놓인 ‘京仁山岳會雪嶽山登頂記念’이라는 궁서체 글자, 빳빳하게 굳어가는 그녀의 왼쪽 새끼손가락, 손톱에 발린 요사스러운 형광연둣빛 매니큐어,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마룻바닥, 그 위에 점점이 흩뿌려진 핏방울, 핏방울들을. 깨어나면 찬물로 오래 세수를 하고 이를 닦는다. 텅 빈 위장에 뜨거운 인스턴트커피를 들이부으면서, 누구하고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안도한다.
1층엔 편의점과 헤어숍, 치킨집, 안경원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2층엔 교회와 피씨방이 나란히 들어선 오래된 건물이 일년째 내가 출근하는 곳이었다. 나는 3층으로 오르는 계단참에서 썬글라스를 벗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하버드보습학원의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후덥지근한 기운이 이마에 훅 끼쳐왔다. 오후 느지막이 출근해 자정께 퇴근하는 것이 이 직업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밤마다 내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할 필요도 없었고, 아침마다 억지로 눈뜰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밤 9시 45분을 혼자 견디지 않아도 되었다.
책상 위에 놓인 시간표를 확인했다. 오늘도 다섯시간이었다. 나는 매일 네시간이나 다섯시간씩 강의를 했다. 그만큼을 내리 떠들다보면 나중에는 말하기 전에 뇌에서 한번 거르는 과정이 절로 생략되어버리곤 했다. 한시간 전 다른 반에서 했던 농담을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또 던지고 있음을 깨닫고 진절머리가 난 적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애초에 직업을 찾아야 했을 때 내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대학에 입학했으나 졸업장은 가지지 않은, 즉 대학 중퇴자에 불과한 젊고 안 예쁜 여자가 택할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았다.
—사회쌤, 일찍 오셨네.
부원장이자 중등부 국어강사인 김이 턱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제가 몇살 위라는 걸 알고부터 은근슬쩍 존대어미를 잘라먹는 사내였다.
—좀 전에 이상한 전화 왔었는데.
—전화요?
—응. 웬 여자가, 쌤 이름 대면서 바꿔달라는 거야. 처음엔 학부모인 줄 알았지. 안 계시다고 했더니 전화번호를 묻네? 개인 연락처는 알려드리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했더니, 쌤이 혹시 78년생 맞는지 확인해달래.
—그래서요?
—아마 그럴 거라고 했지. 그랬더니 머뭇대다가 또 묻더라고. 혹시 집이 반포 아니냐고. 사회쌤 집, 그쪽 아니잖아, 그치?
—네.
—낌새가 좀 이상해서 잘 모르겠다고 하고 끊었어.
몇초 간, 눈앞의 풍경이 노랗게 탈색되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제1부
김일성이 죽었다. 1994년 7월 9일 정오 북한의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김일성 주석이 7월 8일 새벽 2시 사망했다는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남한의 방송 3사는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일제히 김일성 사망과 관련된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화면을 지켜보았다. 미리 준비해두다니 지들끼리는 이미 다 알고 있던 게 분명하다며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치밀하게 짜인 한편의 드라마에 불과하다고 믿기도 했다.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는 토요일이었으며, 교실을 나와 교문까지 걸었을 뿐인데도 겨드랑이가 축축하게 젖어올 정도로 무더운 날이었다.
—거대한 찜통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아.
지혜가 중얼거렸다. 준모가 또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킁, 킁, 씨팔, 다 죽어버려. 미친년.
평소보다 큰 소리였다. 앞에서 팔짱을 끼고 가던 여자애 둘이 흘끔 뒤를 돌아다보았다. 준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킁, 킁.
—죄송해요.
내가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쪽 보고 그런 게 아니라 얘가 아파서 그래요. 뚜렛장애라는 병이거든요.
진지한 표정으로 최대한 정성을 다해, 그러나 한편으론 우리에게는 별 대수로울 것 없는 일상적인 일임을 이해시키는 게 중요했다. 이런 식의 사과라면 중학교 때부터 천번은 더 했을 것이다.
—일학년 이반 김미진, 아빠는 사당동 행복치과 원장. 팔반 오현정, 쌍둥이 동생 있음. 둘 다 반포국, 세화여중 출신. 두달 전부터 경남독서실 다님.
눈살을 찡그리던 여자애들이 저만치 앞서 가버리자 지혜가 속사포처럼 빨리 읊었다.
—아우, 들리겠다.
나는 소곤거리면서 그녀의 팔뚝을 꼬집었다.
—씨팔, 다 좆같은 년들, 킁, 킁.
준모가 욕설을 마구 쏟아냈다.
—킁, 킁, 아 오늘 왜 자꾸 이러지. 킁, 미안해.
매일 그러는데도 착한 준모는 매일 미안해했다. 우리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천천히 학교에서 멀어졌다. 시험 잘 봤느냐, 그런 문제를 내다니 수학선생은 미친 게 틀림없다 같은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시험이 끝났으니 이제부터 뭘 하며 놀 건지 같은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평소처럼 어슬렁어슬렁 그저 걸었다.
—그럼 이제 전쟁 나는 건가?
내가 침묵을 깼다.
—킁, 킁, 내 생각엔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킁, 킁.
준모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미국하고 중국이, 킁, 어떻게 나오는지가 중요하겠지. 킁, 킁, 워낙 차근차근 후계구도를 준비해놔서, 킁, 그렇게 쉽게 흔들리진 않을 거야, 킁, 불안하긴 하겠지만, 씨팔, 좆같아, 킁, 킁, 김정일이 어떤 사람인지는 더, 킁, 킁, 지켜봐야지. 킁.
준모의 의견은 역시나 차분하고 논리적이었다. 지혜가 앵무새처럼 빠르게 중얼거렸다.
—김정일, 현직 북한 국방위원회 위원장, 1942년 2월 16일생, 아버지는 김일성, 어머니는 김정숙.
—그리고?
—응?
—그래서 김정일이 어떤 사람이냐고.
—그야 나도 모르지.
지혜가 혀를 쏙 내밀었다.
—작년 6월 25일 저녁 7시 30분, 독서실 가다가 배고파서 분식집 들렀거든. 독서실 아래 짱구네분식 있잖아. 떡볶이 천원, 김밥 천원, 거기서 우연히 탁자에 있는 신문을 봤는데 6・25 특집이더라. 거기까지만 읽고 덮어버렸어.
지혜는 한번 듣거나 본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았다. 단순히 암기력이 뛰어난 수준이 아니었다. 말도, 글도, 이미지도 그녀의 뇌에 잠깐이라도 머물렀던 것은 모두 밖으로 흘러나가는 법 없이 영원히 거기 남았다. 특정한 정보를 습득한 시간과 장소, 주위 풍경까지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가 타고난 이 기기묘묘한 능력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급비밀이었다. 세상에 그 비밀을 아는 이라곤 나와 준모 단 둘뿐이었다. 나는 평균 이하의 기억력을 보유한 인간이지만, 생애 최초로 우리에게 그 은밀한 사실을 고백하던 중학교 일학년 이맘때의 지혜 모습만은 어제 일인 듯 생생히 기억한다.
마흔살쯤 되면, 열네살이나 열일곱살이나 다 똑같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될까? 까마득하지만 삼년 전에 우리는 열네살이었고 지혜와 준모와 나는 주공 3단지 놀이터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서쪽 하늘 너머로 주홍빛 해가 지고 있었다.
—잊어버리고 싶어 죽겠는데 잊어버려지지가 않아. 1985년 크리스마스이브, 아빠가 엄마를 죽도록 때렸어. 머리 여섯대, 얼굴 열두대, 갈비뼈 스무대. 그때 아빠는 아놀드 파마 짝퉁 검정 스웨터를 입고 있었어. 가슴에 우산 로고가 빨강 노랑 초록 하양이었어. 진퉁은 빨강 노랑 하양 초록인데. 엄마는 하늘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어. 왼쪽 겨드랑이부터 팔까지 다 찢어져서 다음날 내가 갖다 버렸지.
지혜 아버지의 너무도 평범하고 선량해 보이던 얼굴을 떠올리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는 한참을 꺽꺽 울었고, 내가 건네준 휴대용 크리넥스 티슈를 절반이나 쓰며 오래도록 코를 풀었다.
—1989년 8월 5일, 수영코치가 나 구해준다면서 물속에서 오른쪽 가슴을 콱 움켜쥐었던 거. 그것도 잊어버렸으면 좋겠어.
—야,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래. 난 자기 팬티 속으로 손 넣어보라던 놈도 만났는데.
그놈이 외사촌 오빠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얼굴에 점 위치, 갯수까지 다 기억난다고. 왼쪽 뺨에 다섯개, 오른쪽에 일곱개. 내 귀에 불어넣던 거친 숨소리, 그때 나던 담배 냄새도. 그러곤 탈의실에 들어왔는데 다른 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옷 갈아입고 있는 거야. 너무나 평화롭게. 탈의실에서 나오던 노래가 뭐였냐면, 집시 집시 집시 집시 여인.
—그러면 수업시간에 배운 것도 하나도 안 잊어버린단 말이야?
—응. 선생님이 한번 얘기했던 건. 휴……
그녀는 아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 성적은.
준모가 무슨 그런 실례되는 말을 하느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희가 보기엔 이상하겠지. 하지만 들키지 않으려면 어쩔 수가 없어.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지혜는 일부러 답안지에 정답과 오답을 적당히 섞어 쓴다고 했다.
—한 번호로만 찍으면 편하겠지만 나중에 의심받을 수도 있잖아.
그녀의 존재론적 고충을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여러모로 평범한 두뇌를 타고난 나로서는 아무래도 깊이 공감하기가 불가능했다. 나는 아까부터 정말로 궁금했던 질문을 입 밖에 냈다.
—근데 말이야. 꼭 그렇게 숨겨야 돼?
—응?
—왜 그래야 되는지 잘 모르겠어. 딴 사람들이 알아도 나쁠 것 없잖아.
지혜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야, 정말이지 나는 조용히 살고 싶거든!
그녀는 티슈의 나머지 절반을 소모하며 울었다. 나와 준모는 친구의 눈물이 그치기만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때였다.
—음, 음, 음, 음!
옆에서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준모 입에서 갑자기 그 소리가 터져나왔다.
—음(0.1초 쉬고), 음(0.2초 쉬고), 음(0.1초 쉬고), 음(0.2초 쉬고)……
스타카토처럼 높고 짧은, 딸꾹질도 아니고 신음도 아닌,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던 그 소리. 준모가 ‘악마’라고 표현하던 그 소리가 또 그의 영혼을 무단 침범한 것이다.
—음, 음, 음, 음, 음, 미안해, 지혜야, 음, 음, 음, 음.
—뭐가 미안해. 바보야.
—너 우는데, 음, 음, 음, 음, 음.
—박준모, 너 짜증나.
이윽고 눈물을 멈춘 지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가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해.
—알았어. 고마워. 음, 음, 음, 음, 음.
생각해보면 그래도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 준모에게는 아직 함부로 쌍욕을 내뱉는 욕설 틱이 찾아오기 전이었으며, 지혜의 기억중추가 감당해야 하는 정보량도 지금보다 적었다. 나, 나에게도, 어쨌거나. 지나고 보니 그랬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아직도 셋이 같은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다니 이거야말로 기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강 갈까?
내 제안에 지혜와 준모가 심드렁하게, 그러든지,라고 대답했다.
—배고프니까 뭐 먹고 가자.
—가서 먹자.
우리는 710번 버스를 타고 잠원동으로 갔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한강시민공원 잠원지구였다. 이유? 그런 건 없었다. 그냥 느낌이었다. 굴다리 앞 구멍가게에서 캔디바 세개를 샀다. 우리는 하드 하나씩을 입에 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서 굴다리 밑을 통과했다. 시민공원도 부글거리는 태양 아래 있긴 마찬가지였다. 벌겋게 익은 얼굴로 연방 목의 땀을 닦아내는 준모를 쓱 쳐다보다 지혜가 중얼거렸다.
—준모야. 긴 바지 진짜 덥지? 내가 남는 교복치마 한벌 가져다줄까?
우리는 다 같이 픽 웃었다. 한강도 펄펄 끓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열치열이라는 한자성어를 실천할 의도는 없었지만 마땅히 배를 채울 만한 건 사발면뿐이었다. 매점 주인이 용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 건네주었다.
—설마 강물을 퍼다 끓인 건 아니겠지?
—끓이면, 킁, 킁, 살균돼서 괜찮아, 씨팔, 킁.
라면은 기막히게 맛이 없었다. 아무도 먼저 일어나자고 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일사병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제일 전망 좋은 곳에 앉아 강을 바라봤다. 정수리에 직사광선이 정통으로 내리꽂혔다. 어디선가 목청껏 매미가 울었다. 주차된 자동차 지붕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냄새가 먼지에 뒤섞여 풍겨왔다. 강물은 눈부시게 반짝였다.
—갈까?
내가 말하자 지혜와 준모가 그럴까,라고 아까보다는 조금 절박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다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굴다리를 지나 바깥 세계로 나왔다. 친구들과는 잠원역 사거리에서 헤어졌다. 지혜와 준모는 같은 버스를 탔지만 나는 다른 버스를 타야 했다. 나도 작년까지는 친구들과 같은 동네에 살았다. 이제는 아니다. 먼저 버스에 올라탄 친구들이 손을 흔들었다. 정류장에 서서 나도 손을 흔들었다. 차가 떠나자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나는 혼자가 되었다. 괜찮았다. 나는 이어폰을 귓속 깊숙이 찔러넣었다.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이 흘러나왔다. 둘이 되어버린 날 잊은 것 같은 너의 모습에 하나일 때보다 난 외롭고 허전해. 메탈리카, 많이 양보해도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음악만 음악이라고 믿는 준모가 이 사실을 알면 슬픈 표정으로 어떻게든 나를 설득하려 들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런 노래가 듣고 싶다. 네가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그래서 넌 둘이 될 수 있었던 거야.
이제 한남동으로 가야 했다.
유년 시절에 누구나 한번은 상상해보았을 것이다. 나의 탄생이,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위태로운 비밀에 연루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지금은 진흙으로 지은 집에 살지만 언젠가 고귀한 혈통을 되찾는다면 뾰족한 지붕의 유리성에 넓고 아름다운 방과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나만의 큰 창을 가지게 될 거라고. 택시가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한참 달려 마침내 어딘가에 멈춰섰을 때, 아빠와 내가 장미덩굴이 늘어진 벽돌 담장을 지나 육중한 검은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을 때 나는 그날이 왔음을 직감했다. 잠시 후 덜컹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아빠의 손을 꼭 쥐었다. 아빠는 다른 손으로 사자머리 모양의 황동주물 손잡이를 세게 밀었다.
키가 크고 빼빼 마른 중년 여자와, 배가 많이 나오고 얼굴이 네모난 중년 남자가 정원에 서 있었다. 그들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인사드려야지.
할머니라고 불린 여자가 각목처럼 빳빳한 팔을 내게 뻗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옹송그리고 엉덩이를 뒤로 뺐다. 똥을 싼 것이다. 기저귀를 뗀 지 여러해 지나도록 한 적 없는 실수였다. 똥을 쌌다고 내 입으로는 차마 말할 수 없었으므로, 그로부터 몇분 뒤 더이상 숨기기 어려운 괴이쩍은 냄새에 의해 발견될 때까지 내 엉덩이와 팬티 사이에는 뭉글뭉글한 똥덩어리가 매달려 있었다.
내 상태를 확인하고서 아빠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고, 여기서는 절대 아랫도리를 씻지 않겠노라고 고집을 피웠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뻐꾸기 새끼처럼 나는 엄마만 찾았다. 처음엔 어쩔 줄을 모르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얼굴이 급속히 짜증스럽게 변해갔다. 그럴수록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세게 울었다.
—얘가 원래 이러지 않는데. 착한데.
아빠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빠는 내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봐 노심초사했다. 나는 그 중년 남녀가 나의 숨겨진 친부모라고 확신했다. 아빠가 여기에 날 두고 혼자 가버릴 거라는 예감이 너무도 구체적으로 들이닥쳐서,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쳤다.
—안돼! 세미야. 앉지 마. 앉지 마.
아빠가 절규했다. 고체 형태이던 배변물이 엉덩이의 압력으로 짓뭉개졌다. 다섯살 인생 처음으로 맞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것이 그 집에 관련된 내 최초의 기억이었다. 그뒤로 이만큼 잊지 못할 만한 사건은 없었다. 아빠를 따라 일년에 한두번씩 그 집에 갔다. 엄마는 늘 집에 혼자 남겨두고 갔다. 짧으면 두시간 길면 네시간쯤 머물렀는데, 그 집에서는 소변조차 마렵지 않았다. 꼬박꼬박 그랬다. 한살 한살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환상을 믿지 않게 되었다.
노인네들의 말처럼, 사람 일은 정말로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다. 내가, 내 발로 기어들어가 그 집에 살게 되다니.
그 집에 가려면 버스에서 내려서 좀 걸어야 했고, 유엔빌리지라고 쓴 푯말을 지나 담장 높은 단독주택과 값비싼 빌라가 늘어선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야 했다. 평소에도 인적 드문 동네이긴 하지만 이런 날씨에 걸어다니는 사람은 역시 나 하나밖에 없었다. 언덕 중턱에 위치한 집에 도착할 때까지 행인은커녕 개미 새끼 한마리 만나지 못했다. 할머니는 당연히 내가 택시를 타고 다니는 줄로 알고 있었다.
—김기사 팽팽 논다. 뭐 하러 사서 고생인데?
할머니는 길에서 직접 택시를 잡아타는 행동을 고생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손녀딸이 버스를 두번 갈아타고 언덕을 등산하듯 기어올라 귀가하는 걸 알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릴 것이다. 물론 들킬 염려는 없었다. 할머니와 내가 버스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일은 백번 기절했다 깨어나도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확신컨대, 할머니는 지난 이십년 동안 시내버스를 단 한번도 타지 않았을 것이다. 좌석버스도 마찬가지다. 비난하려는 건 아니다. 부자 할머니를 두었다고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생각하면 잇몸이, 콧날이, 손가락 끝이, 일제히 시렸다.
할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이 집에서 나의 새로운 보호자 역할을 공식적으로 담당하는 사람은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용돈을 주었고, 할머니에게 성적표를 보여주어야 했다. 할머니가 나를 미워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큰아들이 낳은 아이이고, 그녀의 유일한 손녀이니까. 그 앞에서 주눅들고 싶지 않지만, 그렇지만, 나는 종종 비겁해진다. 기사 아저씨가 모는 검은 그랜저 뒷자리에 앉아 등하교하는 것이 죽어도 싫다고 할머니에게 대놓고 말할 수가 없었다. 대신 고모를 통해 간접적으로 간곡한 거절의 의사를 전달했다.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면서 그 계집애 고집 한번 대단하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고모가 나중에 전해준 얘기다. 고모가 많이 순화시킨 내용임에 분명했다. 할머니가 그뒤에 한마디 덧붙이지 않았을 리가 없단 걸 나는 잘 알았다.
—그 피가 어디 가겠나.
자주는 아니지만 잊을 만하면 한번씩 할머니는 저렇게 말했다. 처음 듣고서는 몹시 당혹스러웠다. 그 짧고 냉랭한 혼잣말 안에 도사린 기묘한 저주의 기운 탓이었다. 이제는 아니다. 할머니 앞에서 갑자기 날아온 야구공에 뒤통수를 가격당한 어수룩한 여자아이 같은 표정을 무방비로 드러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매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무려나 할머니는 간단명료한 결론을 내렸고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절충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등교할 때는 타고, 올 땐 맘대로 해라.
다행히 김기사 아저씨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 교문과 한 정거장은 떨어진 곳에서, 그것도 대로변이 아닌 골목길에 세워달라는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걷는 게 좋아서요. 다이어트도 할 겸.
나는 내릴 때마다 굳이 안해도 될 변명을 차비 대신 지불하곤 했다. 아저씨가 미안해할까 봐서다. 지혜가 자주 하는 말대로, 미친 천사병이 틈만 나면 도지는지도 모른다. 나는 누가 볼세라 아주 조심조심 차문을 열고, 재빨리 밖으로 내려서고, 그보다 더 빨리 차문을 닫았다. 3초 전 저 대형 쎄단 뒷자리의 번들번들한 가죽시트를 홀로 점유한, 부자의 손녀는 절대로 내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그 검정 괴물 같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장면을 아무한테도 들키기 싫었다. 만약 지혜와 준모가 알기라도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친구들은 우리집 사업이 또다시 망했고, 그래서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고만 알고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네서 학교를 다니는 것만 알았지 그들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에 대해서는 몰랐다. 내가 솔직히 털어놓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적극적으로 속이지 않았는데도 거짓말에 해당될까. 그럴 것이다. 나중에 느끼는 배신감의 강도는 똑같을 테니. 그 생각만 하면 죄책감으로 가슴이 빠그라질 것 같았다. 친구들에게 한 거짓말은 맹세코 그것뿐이었다.
굳게 닫힌 검은색 철문 앞에서 검정이 얼마나 위압적인 색깔인지 새삼 깨닫는다. 덜컹, 나를 위해 문이 열렸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피워올린 이파리들로 정원이 푸르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일주일에 두번 방문하는 정원사에게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다. 엄마가 LA의 한국 식료품점 계산대에서 신라면과 초코파이에 바코드를 찍어주며 받는 시급은 얼마나 될까. 널따란 정원을 가로질러 안으로 향할 때마다 나는 숨을 후루룩 들이마신다. 어릴 적 예방주사를 맞을 때 주삿바늘의 통증을 잊기 위해 그랬던 것처럼, 검지손톱 끝으로 엄지손가락을 꽉 누르고 싶어진다.
거실에서는 할머니가 가죽소파에 엉덩이를 파묻은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수백명의 평양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오열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음소거가 된 것도 아닌데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빨갱이들은 아무튼.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나는 조용히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오후 늦게 전화가 걸려왔다.
—오여사님 계신가요?
여자는 높은 톤의 간드러진 목소리로 할머니를 찾았다.
—네. 잠시만요.
—저기 혹시 아영씨?
—저, 아닌데요.
—어머나. 실례했네.
—누구시라고 전해드릴까요?
저쪽에서, 그러면 이 집에서 너는 누구냐고 캐물어올까 두려워서 나는 허겁지겁 말을 잘랐다.
—이촌동 송여사라고 전해줘요.
자기가 자기더러 ‘여사’라고 부르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나는 할머니 방의 내선번호를 눌러 전화를 연결해주었다. 내 방 수화기를 그대로 귀에 대고 오여사와 송여사의 통화를 훔쳐 들었다.
—사모님, 지난번 말씀드렸던 그 총각. 내일 시간을 내보겠다고 하네요.
—갑자기 그러면 되나. 우리 애도 워낙 바빠서 어떨지 모르겠네.
역시 할머니다운 고압적 자세였다. 집에서는 고모를 폐기처분 직전의 솜 터진 헝겊인형 취급하면서 밖에다 하는 말은 이토록 달랐다. 고모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당신의 자존심 때문일 터였다.
—아유, 사모님, 이쪽은 평일에는 꼼짝없이 연수원에 붙잡혀 있는 신세니까 드린 말씀이죠.
할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사모님, 어째 맘에 안 드세요?
—우리는 임용된 사람으로 찾는데.
—아유, 걱정 마세요. 성적 아주 좋대요. 법원이고 검찰이고 골라 갈 수 있다고.
—전공은?
—상경대예요.
—성골은 못 되네.
—법학은 부전공으로 했대요.
—그깟 부전공은 무슨.
할머니가 코웃음을 곁들여 일축했다. 그들은 남자의 출신 대학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서울대 출신이라는 전제가 지극히 당연했기 때문이다.
—부친은?
할머니는 심드렁한 척 다시 물었다. 감이 왔다. 할머니는 이 찌를 덥석 물고 싶지 않은 거였다. 다만 우아하게 물고 싶은 거였다.
—고등학교 교감 하다 퇴임했고요. 가진 거는 크게 없어도 집안이 두루 얌전해요.
—개천 용, 영 별론데. 부모님 고향은 어디고?
—둘 다 대구예요. 어머니가 김옥숙 여사랑 경북여고 동기고.
—그래?
할머니가 처음으로 솔깃해하는 기미를 노출하더니, ‘특별히 한번 나가주기는 하겠으나 탐탁지는 않으니 곧바로 다음 타자를 대기시켜두어라’는 선에서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두시, 조선호텔로 할게요. 터가 좋아서 성사가 잘된다잖아요.
—그거야 서로 만나봐야 알지.
저녁 식탁에서 그 얘기를 하면서 할머니는 짜증부터 냈다.
—미친년. 그렇게 잘 알면 진즉에 그리로 잡든지.
지금껏 고모의 맞선이 성공하지 못한 까닭을 영험하지 못한 장소 탓, 아니 영험한 장소를 미리 섭외하지 못한 주선자 탓으로 돌리고 싶은가 보았다.
—사람이 진중하지가 못해. 말도 자주 바꾸고.
입으로는 송여사를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이번에 구해온 혼처에 대해서는 은근히 흡족한 눈치였다.
—이번에도 그런 옷 입고 나가면 죽을 줄 알아라.
—무슨 옷?
국을 떠먹고 있던 고모가 천진하게 물었다. 그녀는 벌써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지혜의 기억력과 반대의 의미에서, 고모의 기억력도 진정 알아줄 만했다.
—까마귀 새끼처럼 시커멓고 마녀 같은 옷.
할머니가 딱 집어 말했다. 고모가 사랑하는 고스(goth) 패션을 가리키는 거였다. 고모가 언젠가 한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휘감아 치렁치렁한 긴치마를 발목까지 늘어뜨리고 목에는 해골바가지 모양의 목걸이, 팔에는 금속팔찌를 주렁주렁 낀 차림으로 맞선 자리에 나갔던 것이다. 입술에는 펄이 번쩍이는 은색 립스틱을 발랐을 게 분명했다. 이비인후과 개업의였던 상대방은 이십여분 만에 자리를 떴으며, 이후 고모에 대해 더이상 코멘트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아 그때 옷 때문이 아니라 구두 때문이라니까. 그 남자 키가 내 눈썹까지밖에 안 왔어.
할머니의 콧등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벽돌 같은 그놈의 굽 좀 신지 말라고!
—내가 큰 게 아니라 지가 작은 거지.
나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모시조개를 넣어 끓인 된장쑥국, 표고버섯과 두부가 듬뿍 들어간 쇠고기전골, 통째로 구운 큼지막한 굴비 두마리, 새콤달콤하게 무친 배추겉절이, 천일염을 뿌려 구운 광양 김, 나물은 두종류였는데 시금치나물과 호박나물이었다. 자주 바뀌던 가정부들 중 요리 실력이 제일 나았던 순천댁 아줌마의 솜씨였다. 이런 소담한 밥상 앞에서 할머니와 고모, 두 모녀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어쩔 수가 없었다. 식욕이 급작스레 사그라졌다.
—두시라고? 약속 있어!
고모가 비명을 질렀다. 할머니는 뉘 집 개가 떠드느냐는 표정으로 무시했다.
—취소해. 백점 만점은 아니어도 총점이 팔십오는 넘는다. 집이 좀 빠지는데, 너무 유복하게 자란 놈들은 이기적이고 책임감이 없어서 나중에 지 자식 입에 뭐가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지나치게 유복하게 자란 아빠를 가진 나는 공연히 눈을 내리깔아야 했다. 아빠를 그렇게 키운 게 바로 할머니 당신이면서도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열쇠 세개 준비해야것네.
순천댁 아줌마가 갑자기 눈치없이 끼어들었다. 할머니가 이맛살을 와락 찌푸렸다.
—하여간 드라마 탓이야. 요즘 판검사가 무슨 대수라고. 품위 없게.
할머니가 품위를 따질 때마다 나는 혹시 내가 그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싶어 혼란스러워지곤 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열쇠를 가져오려면 지들이 가져와야지. 우리 딸이 빠지는 데가 어디 있어?
—풋.
고모가 실소를 터뜨렸다. 제 귀로 듣기에도 가당치 않았나 보다. 이런 면이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고모는 이 집 사람 같지 않았다. 단순하고 맑고 악의가 없었다. 겉으론 밝아 보여도 속이 복잡하고 자주 우울해지는 나하고는 근본이 달랐다. 지난 어린이날에는 방문을 쑥 열고 들어오더니 난데없이 수표 두장을 내밀기도 했다. 어린이날 선물이라고 했다.
—나 어린이 아닌데.
—오오 그러셔. 내 눈에는 꼬맹이거든.
고모는 손가락으로 내 코를 움켜쥐고 톡 잡아당겼더랬다.
—엄마, 인정할 건 인정해.
고모가 지겨워 죽겠다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내가 남들보다 잘난 게 뭐 있어.
나는 말없이 애먼 생선살만 발랐다. 쿰쿰하고 고릿한 굴비 맛이 입속에 퍼졌다.
고모는 저녁을 먹자마자 외출 채비를 했다. 여덟시 반에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단다. 토요일 밤 여덟시 반. 장소가 어딘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모가 갈아입은 옷이 이미 여러가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가 ‘전투복’이라 부르는, 몸에 꼭 붙는 슬리브리스 원피스는 엉덩이를 간신히 가릴 만한 길이에 흰색이었다.
—화이트라고 다 똑같은 게 아니야. 이렇게 조금 톡톡하면서 형광빛 도는 거 있잖아. 다른 색 다 필요 없어. 나이트 조명에선 이거 하나면 끝이야. 아, 하나 더 있다. 이거.
그녀는 가슴께를 가리키며 눈을 찡긋했다. 볼륨업 브래지어였다. 나는 좀 불안해졌다.
—언제 와?
—많이는 안 늦을 거야. 이제 체력 달려서 오래도 못 놀아.
고모는 나와 열살 차이였다.
—할아버지 오시면.
—공장 내려갔잖아. 내일이나 오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사단이 터진 게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한달에 열흘은 만취해 새벽녘에 기어들어오는 딸내미의 행태에 대해 그녀의 아버지이자 나의 할아버지인 윤기봉 회장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엔간한 일은 할머니가 원천 차단했던 덕분이다. 소소한 가정사에 일일이 참견을 하기에 할아버지는 지나치게 바쁘고 공사가 두루 다망했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 새벽. 일찌감치 골프를 나가던 할아버지와, 그날따라 평소보다 약간 더 진하게, 새벽 두시 나이트가 끝나고 (본인의 주장에 의거하면) 2차 가라오케, 3차 실내포장마차의 코스로 놀다 들어오던 고모가 정원 한가운데 목련나무 밑에서 딱 마주치고 만 것이다. 여름 해는 주책없이 일찌감치 떠올라 있었고 세상은 이미 환했다. 간밤 그녀의 얼굴을 반짝이게 했던 값비싼 화장품 잔여물이 죄다 얼룩져 엉망으로 번져 있는 뺨을 향해 할아버지는 다짜고짜 솥뚜껑만한 손바닥을 휘둘렀다. 맞은 사람도 때린 사람도 함께 놀랐을, 0.5초 만에 일어난 사고였다. 고모는 그 자리에 고꾸라졌고, 사고를 목격한 운전기사에 의해 거실로 옮겨졌다. 응급실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냐며 순천댁 아줌마가 호들갑을 떨었지만, 할머니는 단호했다.
—창피하게 어딜.
고모는 냉장고에서 꺼낸 생고기를 랩으로 둘둘 말아 눈가에 붙이고는, 입덧하는 임신부처럼 연신 웩웩댔다. 나는 약국이 문 열기를 기다려 멍이 빨리 빠지는 연고와 숙취에 잘 듣는 약을 사왔다. 동네 약국 말고 저기 길 건너로 갔다 오라고, 약을 사러 나서는 내 등뒤에다 할머니가 여러번 신신당부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잘 들여다보면 고모의 왼쪽 뺨에는 아직도 그날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조카님, 잘 부탁해.
고모는 내 앞머리를 슉슉 쓰다듬고는 제 삐삐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곤 지갑에서 수표 한장을 꺼냈다.
—괜찮아.
—바보야. 챙길 거는 분명하게 챙기는 거야.
이럴 때야말로 고모가 할머니 딸이라는 실감이 났다. 고모가 덧붙였다.
—사고 싶은 거 사. 네 나이 때는 갖고 싶은 거 다 가져야 된다.
고모는 몰랐다. 사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니다. 사고 싶고 갖고 싶은 게 있어도 돈이 생기면 모아야 한다는 걸. 나는 이 집에 와서 돈이 생기면 될 수 있는 대로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었다. 통장은 제법 두둑이 불어났다. 아직 용도는 정해지지 않았다. 엄마를 보러 가기 위한 항공료가 될 수도 있고, 엄마가 돌아오기 위한 항공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엄마가 오면 여기 머물 수는 없을 테니 같이 살 집을 얻을 때 보탤 수 있으면 좋겠다고 나는 내심 바라고 있었다. 고모 같은 사람은 무슨 뜻인지 평생 모를 말이었다.
고모는 어느새 바람처럼 나가버렸다. 나는 하이텔 단말기를 들고 고모 방으로 들어갔다. 고모가 올 때까지 이 방에 있다가, 새벽녘 고모가 집 앞에서 삐삐를 치면 얼른 내려가 문을 열어주는 것이 우리의 계약 내용이었다. 고모 방에는 화장품과 옷과 향수가 그득했지만 책은 거의 없었다. 몇년째 적만 걸어두고 있다지만 명색이 대학원생인데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고모는 공공연하게 난 공부가 제일 싫어,라고 떠들고 다녔다. 나 역시 공부를 잘했던 적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은 15등과 25등 사이를 왕복했다. 그쪽 머리를 타고나지 못한 게 집안내력이라고 생각하면 급격히 우울해졌다. 오늘 기말고사가 끝났는데 아무한테서도 ‘시험은 어땠니?’라는 질문을 받지 못했다. 아니, 이 집에서는 내가 시험이 끝났다는 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방 안의 불을 끄고 책상 위의 작은 스탠드를 켰다. 단말기와 전화선을 연결하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01410으로 한번만에 접속이 되었다. 삐삐삐, 뚜뚜뚜, 익숙한 연결음이었다. 어둠 속에서 단말기 모니터의 시퍼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꼭 반포 우리집의 내 조그만 방에 앉아 있는 것처럼 아늑했다. 조그맣던 내 방, 잘 있을까? 누가 살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 방의 주인은 꼭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이텔에 접속하자마자 대화방에서 초대 신청이 왔다. ID: romantiger, 일명 낭만호랑님이다. 대화방에는 prelude73님도 함께 있었다.
romantiger : 세미님 방가. 오랜만. 바빴어요?
semiupda : 네. 방가방가. 시험이었어요.
romantiger : 글쿠나. 그럼 이제 놀 일만 남았네요.
semiupda : 네. 근데 제가 원래 잘 못 놀아서.
prelude73 : 못 노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배우면 되지용.
낭만호랑님은 스물한살, 전자공학과를 휴학하고 방위병 입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prelude73님은 스물두살, 유아교육과를 다니고 있었는데 세상에서 아이들이 제일 무섭다고 했다. 몇달 전 영화동호회 ‘시네마천국’ 채팅방에서 우연히 만난 뒤 가끔씩 셋이 이렇게 모이곤 했다. 현실에서 만나면 어떨지 몰라도 통신에서 우리는 동등했다. 언니 오빠라고 부를 필요도 없었고 그들도 나에게 세미야,가 아니라 세미님,이라고 부르며 꼭 존대를 해주었다.
romantiger : 그럼 세미님 지금 열일곱살?
semiupda : 네. 열일곱살.
romantiger : 열일곱. 와 좋은 나이다. 그렇지만 난 절대 돌아가기 싫어요. 미안미안.
prelude73 : 하하. 호랭님 너무해. 세미님 상처 받겠다. 그런데 나도 돌아가기 싫어요. 미안.
semiupda : 저도 제 나이 별로예요.
romantiger : 열여덟보다는 열아홉이 낫고 열아홉보다는 스물이 낫고, 뭐 그런 거죠.
prelude73 : 근데 문제는 스물 넘으면 갑자기 팍 꺾인다는 거. ㅠㅠ
주로 그들이 떠들고 나는 간간이 맞장구를 칠 뿐이지만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그들 말대로 정말 열일곱보다는 열여덟이 낫고 열아홉은 더 나을까? 스물에 가까운 나이라서? 어쨌든 그건 직접 스물이 되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좋은지 안 좋은지 확인하기 위해 미리 당겨 살아볼 수는 없는 일이므로.
그때 지혜에게서 쪽지가 왔다.
대기방에 있는데 나 들어가면 안돼? 방 좀 늘려줘.
방장에게 어렵게 부탁해 지혜를 초대했다. 그러나 단란하던 대화방 분위기는 그녀가 들어오고부터 엉망이 되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는커녕 나한테만 들리는 귓속말 기능으로 연신 속삭여댔던 것이다.
(jhleeee : 왜 나만 남들과 다를까. 아까 지나가다 잠깐 본 드라마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등장인물의 대사가 내 머릿속에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어. 세미야,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되니?)
(semiupda : 좋은 점도 많잖아. 억지로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jhleeee : 넌 내가 아니니까 내 고통이 어떤지 모르겠지. 하지만 나는……)
내가 위로했지만 지혜는 들으려 하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말만 계속했다. 나는 낭만호랑님과 prelude73님이 나누는 대화에 끼지 못하고 결국 지혜와 둘이서만 얘기하는 꼴이 되었다. 그들의 눈에는 우리의 대화가 보이지 않으니, 친구 사이인 둘이만 잠수를 탔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의도 아니거니와 솔직하게 말해 재미도 없었다. 지혜는 유독 피씨통신 상에서 평소보다 훨씬 자기중심적이 되었고 징징대는 성격으로 변모하곤 했다.
(jhleeee : 준모도 불렀는데 치사하게 안 오네?)
지혜가 짜증을 냈다. 준모는 ‘김일성 사후 북한체제의 변화와 전망’이라는 이름의 이상한 대화방을 개설하고 열혈 토론 중이라고 했다.
(jhleeee : 아까 잠깐 들어갔었는데 잘난 척 캡이야. 빨리 오라고 네가 또 불러봐)
나와 지혜에게 피씨통신의 세계를 알려준 사람이 바로 준모였다. 어쩌면 준모가 이 공간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여기에서 그는 아무런 제약도 흘깃거림도 없이 맘껏 말할 수 있었다. 저녁과 밤 시간에 그는 거의 항상 통신망에 접속 중이었고 주로 열린광장인 플라자나 토론방에서 어른 논객들과 놀았다. 꽤 이름도 알려진 것 같았다. 가끔 찾아보면 플라자에 논리정연한 글도 여럿 써서 조회수도 높았다.
(jhleeee : 내가 이런 얘기 한 적 있나? 내가 남들하고 다르다는 걸 눈치챈 건 네살 때였어. 내가 돌 무렵에 아빠가 까만 강아지 한마리를 얻어왔었거든. 근데 금방 죽어서 뒷산에 묻었어. 어른들은 내가 그걸 기억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하고 몇해 뒤 그 얘길 꺼낸 거지. 그런데 어른들 기억이 엉망진창인 거야. 이름도 못 지어줬다는 둥, 갈색 강아지였다는 둥, 이틀 만에 죽었다는 둥, 상처 하나 없었다는 둥. 나는 다 기억하는데. 이름은 코코였고, 우리집에 도착한 지 정확히 쉰여섯시간 만에 죽었고 털이 반드르르한 검은 개였고 왼쪽 귀 안에 빨간 상처 딱지가 있었어. 죽기 직전에 노란색 쌀가루가 섞인 설사를 세번 했다는 것도, 땅에 묻을 때 얼굴에 파리 세마리가 앉아 있었다는 것도 나는 다 기억나는걸. 지금도 생생하게)
지혜의 속삭임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새 prelude73님과 낭만호랑님은 방을 나가버렸다. 준모도 이리로 오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준모에게 몰래 쪽지로 ‘여기 신경쓰지 말고 재미있게 놀아’라고 보냈다. 어쩌겠는가. 이것이 비밀을 알고 있는 자의 의무일 것이다. 그것은 우정과 비슷한 의미일까?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semiupda : 지혜야. 넌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워. 나는 네가 너무 부러운걸.
남을 달래주고 안아주기엔 지금 나도 너무 무기력하단다,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지혜의 이야기를 몇시간 동안 들어주다보니 철야근무를 하고 돌아가는 정신과 의사처럼 파김치가 되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겼고, 고모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슬슬 졸음이 왔다. 나는 억지로 눈꺼풀을 밀어올리며 이렇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 분명하다. 지혜 덕분에 고모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고모에게도 감사해야 했다. 이런 작은 기다림들로 나는 큰 기다림을 견디고 있었으므로.
일요일 오후, 고모는 결국 할머니에게 굴복했다. 처음부터 그럴 수밖에 없게 정해진 게임이었다. 그녀는 맞선 장소에 나가기 위해 3센티미터 굽이 달린 크림색 구두에 발을 꿰었다. 어젯밤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조신한 차림새였다. 무릎을 덮을락 말락 한 치마 길이는 그렇다 쳐도, 이 삼복더위 한복판에 긴팔 재킷과 커피색 스타킹까지 갖춰 입은 건 또 뭐란 말인가.
—어때?
고모가 제법 진지하게 물어왔으므로 나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예뻐.
—정말? 그럴 줄 알았어.
고모가 씩 웃었다.
—잘하고 와.
나는 성의를 다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흰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이 그후로도 오래도록 눈에 밟혔다. 1994년 7월 10일, 아직까지는 모든 게 평화롭던 일요일 대낮이었다. 한시간 후 나의 고모 윤아영은 첫번째 남편 김태식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