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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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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金錦姬

1979년 부산 출생.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novelist79@hanmail.net

 

 

 

센티멘털도 하루이틀*

 

그 나라 사람들은 하루를 여섯시간씩 네번으로 나눈다고 했다. 아누차와 김의 대화를 들어보니 그랬다. 그곳에서는 새벽 한시, 아침 한시, 오후 한시, 밤 한시, 이렇게 네번의 한시를 만난다. ‘띠능’ ‘몽 차오’ ‘바이 몽’ ‘능툼’. 같은 한시라도 이름은 다 달랐다. 감춰졌던 시간의 결들이 페이스트리 빵처럼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인생도 두배쯤 더 늘어날 것 같았다.

그전에 살던 중국인에 비하면 태국인 아누차는 유령처럼 조용한 세입자였다. 종종 월세가 밀리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술은 덜 마셨다. 다만 부엌도 없는 방인데 자주 요리를 해서 문제였다. 홍은 향신료 냄새를 왜 이렇게 풍기냐고 따졌다가 김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다. 너무 매정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누차는 고향 음식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홍이 외출한 틈을 노려 여전히 요리를 했다.

홍은 이혼한 지 칠년 만에 이 다세대주택을 샀다. 옥탑방까지 사층이었고 일곱가구가 살았다. 원래는 한 집이던 반지하에 두 가구를 들이는 바람에 월세를 더 낸 쪽만 실내 화장실을 쓸 수 있었다. 십만원이 그렇게 큰 차이라고 외할아버지는 역설했다. “백만원은 또 어떻고.” 보증금을 그만큼 더 주면 지상에서 살 수 있었다. 거기다 세를 올리면 더 넓은 방을 쓸 수 있고, 전세로 돌리면 작은 베란다를 가질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그런 게 세상이니라” 했다.

어쩐지 치사하다고 생각했지만 말대꾸할 수는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집 여러채로 재산을 불려온 어엿한 임대사업자니까. 2002년, 홍이 아홉살이나 어린 김을 재혼 상대로 데려왔을 때도 외할아버지의 분석은 임대사업자다웠다. 김이 홍의 다세대주택에서 세나 받아먹으며 편하게 살 심산이라는 것이었다. “세—에나 받아먹으며”라고 할 때 외할아버지는 신발창에 붙은 껌을 들여다보듯 언짢은 말투였다. 결혼 초만 해도 외할아버지와 김 사이에는 쟁 하는 긴장이 일곤 했다. 세법이 개정돼 부동산세를 더 내야 했을 때 그 긴장은 정점에 달했다. 외할아버지는 그 당시 정권을 뽑은 ‘손모가지들’을 싹 다 잘라야 한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면서 언쟁은 사라졌다. 외할아버지는 여전히 김을 ‘빨갱이’라고 불렀지만 김은 더이상 “그런 시절은 지났습니다”라고 대꾸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삼수생이 되었다는 소식을 김과 홍에게 어떻게 알리나. 스물한살에 애엄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나는 마당 평상에 걸터앉았다. 수능을 망친 표는 결과도 안 보고 외국으로 떠났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학원에 다니겠다고 했다. 나는 말리지 않았고 임신했다는 말도 안 꺼냈다. 표는 매사에 진지해서 오히려 상황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내가 널 쿨하게 놔주마, 이렇게 생각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막상 병원에 가보니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혈액검사로 임신을 확인하고 초음파 사진을 찍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하자, 간호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술 가능한 방법들을 설명했다. 습관적으로 볼펜을 까딱까딱 흔들면서 몇몇 단어를 메모해주었는데 ‘9주’ ‘흡입’ ‘약물’ ‘분쇄’ 같은 말이었다. 나는 흘려써서 ‘ㄹ’자가 형체도 없이 풀려버린 간호사의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오래 남을 것 없이 얼른 날아가고 싶은 듯한 필체였다. 평소에도 겁이 많았던 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결국 산모수첩을 구겨넣고 병원을 나왔다.

어쩌다 재수생들 사이에서도 가장 볼품없던 애와 연애했을까? 그건 일종의 연민 때문이다. 판단을 잘못했거나 남자 보는 눈이 없었던 게 아니란 말이다. 누가 따져물으면 그렇게 말하리라 생각했다. 이를테면 김과 홍이, 외할아버지가, 친구들이. 그렇다면 그놈의 연민은 어디서 왔나. 나는 평상 다리를 툭툭 찼다. 그건 바로 집 때문이었다.

내가 크는 동안 집에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세입자들이 들락거렸다. 직업도 다양했다. 정육점 직원, 간호조무사, 대리운전 기사, 마트 계산원, 애견 미용사, 보험설계사, 요가 강사, 물리치료사…… 개중에는 도둑이나 사기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인중개사였던 홍은 집에 거의 없었고 세입자들은 낮에도 한둘쯤 남아 있었다. 그들은 내 것까지 중국음식을 시켜주거나, 내 줄넘기 횟수를 세어주었다. 아주 가끔은 반대로 하기도 했다.

열두세살 무렵 지하방에는 긴 머리칼의 여자가 세들었다. 여자는 의수를 낀 남자와 살았는데 비 오는 날이면 비빔국수를 만들었다. 국수 면발은 여자의 머릿결처럼 윤이 흘렀고 양념장은 청양고추를 넣어 매콤했다. 홍은 그때도 세입자들에게 깐깐해서 짐차로 대문을 막아놓는다고 한소리하곤 했다. 하지만 컵라면이나 햄버거 따위에 물린 나는 일부러 여자의 방을 서성이다 국수를 얻어먹었다.

여자는 글씨를 아주 잘 썼다. 반듯하고 둥글고 흐트러짐 없이 마치 스케이트를 타듯 종이 위를 미끄러졌다. 글자들을 보며 나만 감탄하는 건 아니었다. 여자가 글씨를 쓸 때면 남자도 하, 하고 무릎을 쳤다. 남자는 마치 자기가 글씨를 쓰는 듯 한쪽만 남은 손가락들을 꼼지락거리기도 했다. 그러면 홍은 자기들끼리는 얼굴만 봐도 좋은가 보지, 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 무렵 내 방에는 ‘이중칼날 칼가리’ ‘써라운드 이어폰’ 같은 글씨를 연습한 종이들이 굴러다녔다. 내가 여자의 ‘양귀비 염색약’ ‘오동나무 효도손’을 완벽하게 따라쓸 수 있을 때쯤, 남자의 발걸음이 끊겼다. 남자는 왜 그랬는지 평상에다 의수를 벗어놓고 갔는데 여자는 그걸 화단에 꽂아두었다. 남자의 몸에서 떨어져나오자 그것은 하나도 손 같지 않았다. 대신 넝쿨이 손가락을 휘감고 자라면서 꽤 훌륭한 지지대가 되었다. 마당에 꽃나무를 심기는 했지만 너무 바빠서 돌볼 겨를이 없었던 홍은 그게 있는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여자도 짐을 챙겨 사라졌다. 의수가 뽑혀나간 자리에는 클로버가 수북했다. 세간 몇가지를 남기고 갔는데 고장난 세탁기도 한대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방 안 곳곳에 숨어 있는 소주병을 찾아서 세탁기를 가지러 온 고물장수에게 팔았다. 마흔여덟병이었다.

나는 방을 서성이면서 여자의 글씨가 적힌 종이를 주웠다. ‘매직 스펀지’ ‘한국산 바늘’ 이외에 ‘애드벌룬’ ‘보잉747’ ‘인공위성’ 같은, 용도를 알 수 없는 말들도 있었다. 그러다 아름다운 글씨체로 쓰인 ‘쥐덫’ ‘바퀴’ ‘박멸’ 같은 단어가 주는 어떤 아이러니와 비애를 비로소 눈치챘다. 이런 글씨를 쓰는 사람이 불행해지는 건 불공평하다 생각했고 눈물이 났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자 김은 무척 감동받은 눈치였다. “훌륭하구나.” 김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격려했다. 새아빠가 꽤 마음에 들었던 나로서는 기분 좋은 칭찬이었다. 김은 그런 마음을 연민이라 한다고 했다. 연민,이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 말은 사랑과 비슷했지만 온도는 좀더 낮았고 덜 비밀스럽고 오래된 듯 느껴졌다.

 

일단 김에게 알리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섰다. 김은 지금쯤 동네 운동장에 있을 것이다. 한 계절 전에 축구심판 3급 자격증을 따더니 경기만 있으면 심판을 맡았다. 자격증은 협회교육을 이수하고 시험을 치르면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축구심판으로 직업을 바꾸려나, 나는 생각했다. 김은 수학강사가 싫다며 한동안 공사장 인부, 농산물 직판장 배달원, 삼겹살집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했다. 신선한—신성한이었을 수도 있다—육체노동을 하겠다고 해서 홍에게 핀잔을 들었다. 그러나 일년쯤 직업의 세계를 유랑하던 김은 결국 학원강사로 되돌아갔다. 난 좀 실망했다. 모험의 세계로 떠난 칼잡이가 조용히 돌아와 푸줏간에서 고기 써는 걸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건 내 미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우선 대학부터 붙어야겠지만.

이따금 축구공이 허공으로 솟았다 떨어질 뿐 운동장은 고요했다. 김은 팔자걸음의 사내에게 반칙을 주고 있었다. 동네축구에서 너무 빡빡하게 군다며 사내가 투덜댔다. 김은 수첩에 무언가를 적더니 손을 흔들어 경기를 재개시켰다. 김은 동네축구라는 말을 싫어했다. 동네에서 한다고 축구가 축구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다, 작다고 해서 보잘것없고 사소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예를 들어 0은 작지만 이 세상에서 0이 얼마나 중요하냐. 컴퓨터나 인터넷만 해도 01, 이진법 체계잖니. 0이 없으면 1도 없어. 하물며 2, 3, 4, 5는 말해서 뭐해?”

모두 사실대로 말할까, 나는 고민했다. 김은 홍과 좀 다르니까. 하지만 입을 여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아무 말 안한다고 없던 일이 되지는 않겠지만. 이윽고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퍼지고 경기가 끝났다. 김은 내 어두운 얼굴을 보더니 입시 결과는 묻지도 않았다. 우리는 스탠드에 앉아서 텅 빈 운동장을 지켜봤다. “기죽지 마라.” “글쎄……” “늦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냐.”

김은 무너진 갱도에서 살아 돌아온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붕괴의 전조가 있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재빨리 도망치다가 목숨을 잃었지만 그 자리에 다리가 얼어붙었던 아버지는 살아남았다는 얘기였다. 어둠속에서 김의 아버지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냄새 맡을 수도 없었다. 심지어 꼬집어도 감각이 없었다. 그래서 김의 아버지는 앞으로 살 수 있을까가 아니라, 대체 지금 살아 있는 걸까를 고민했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어둠이 사라지고 “거기 있나?” 하고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운동장을 나와 편의점에서 호빵을 사먹었다. 우리 것을 꺼내자마자 아르바이트생은 찜기의 코드를 뽑았다. “학원에 등록해야지?” “글쎄……” 맞은편 산부인과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대학에 떨어진 날 이런 결정을 해도 괜찮을까. 김은 배가 고팠는지 호빵 두개를 몇번 씹지도 않고 삼켰다. 그러고는 우리가 서울에서 가장 늦도록 호빵을 사먹었을걸,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처량맞은 기분이었다.

 

김과 헤어져 걷는 동안 새봄, 장미, 마리아, 정다운 같은 이름의 병원들을 지나쳤다. 생각보다 산부인과 병원은 많았지만 이름이 너무 화사해서 기가 죽었다. 지하철역으로 가면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능시험을 보겠다는 애가 둘, 휴학했던 대학으로 돌아가겠다는 애가 하나, 일단 합격한 대학에 들어가 전과를 하겠다는 애가 하나였다. 외할아버지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받지 않았다. 대학은 놓쳐버린 풍선처럼 달려가 잡으려고 하면 자꾸만 발끝에 차여 달아난다. 5점이 더 있으면 사년제에, 10점이 있으면 국립대에, 20점이 있으면 ‘인(in) 서울’ 할 수 있는데, 30점이면 또 어떻고. 외할아버지의 임대업이나 대학이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하프나 한대 살걸.” 전화를 끊으며 한 애가 말했다. “그거 하나 있으면 대학은 문제 없다던데.”

누군가 등을 두드려서 돌아보았더니 재수학원을 같이 다녔던 마였다. 친한 사이도 아니라서 우리는 봄이 왔네, 꽃이 피었네 하며 역으로 내려갔다. 친구들이 마가 이상하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트위터에서 만난 팔로워들의 상갓집을 다 찾아간다고 했다. 애들은 마가 누구보다 문상을 자주 다녔을 거라며 ‘문상맨’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옷차림도 그랬다. 양복은 그렇다 해도 검은 넥타이는 아무 때나 매지 않으니까.

마는 내 앞에서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나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었다. 핑계를 대고 다음 지하철을 탈까 망설이고 있을 때 마가 “어제 지나가다 표를 봤는데…… 연수 안 갔나?” 했다. “어디서?” “주택가에서.” “주택가 어디?” “주택가였는데 설명하긴 힘들어.” 마는 나를 힐끔 봤다. 막상 표가 떠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역 근처야?” “왜?” “돈을 꿔줬거든.” “얼마나?” “오백만원.” “전화 안 돼?” “없앴어.” 마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놀랐다. “잡아야겠네.” 드디어 마는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넣었다.

“너, 지하철 선로 보면 무슨 생각 들어?” 나는 마가 가리키는, S자로 굽은 선로를 바라보았다. 저런 걸 보면서도 뭘 생각해야 하나 싶었다. 마는 선로를 보면 서울이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영화에서처럼 박물관이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서울이 그렇다니. 친구들 말대로 마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는 우리가 서울에 사는 게 아니라, 사실은 서울이 우리를 거점으로 생명을 유지한다고 했다. “생각해봐. 빌딩, 아파트, 다리, 하수도, 도로들은 너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거야.”

나는 이런 이야기 말고 어디서 표를 봤는지 말해주기를 바랐지만 마한테는 아파트만 해도 사십년이면 재건축을 한다고 대답했다. “부순다고 사라지진 않지.” 마의 말투는 나직했지만 꽤 단호했다. “낡은 것을 교체하면서 영원히 불멸하는 거야.” 서울 여기저기를 잇는 선로들은 사람으로 치면 등뼈인 셈이라고도 했다. “학교는 어떻게 됐어?” 내가 화제를 돌렸다. “수능, 안 봤어.” 마는 심드렁하게 말하더니, 언젠가 표를 봤던 골목으로 안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내 소식을 들은 외할아버지는 모두 김의 탓이라고 역정을 냈다. 내가 중학생 때 사교육을 안 시키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언제 적인데 내 인생이 갈팡질팡할 때마다 외할아버지는 그 일을 끄집어냈다. 그때는 학원을 가는 대신, 김이 제안한 대로 『월든』이나 『위대한 개츠비』 같은 책을 읽었다. 김이 몸담은 정당의 당원모임에 가서 토론회가 멱살잡이로 변질되는 과정을 구경하기도 했다. 주말농장에도 갔는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흙은 특유의 냄새가 있었고 모종들은 부드러웠다. 바람이 잎들을 타넘으면 내 팔에도 기분 나쁘지 않게 소름이 돋았다.

좋았던 몇달은 이내 끝나버렸다. 성적이 곤두박질쳤기 때문이다. 김이 나를 어떤 아이로 키우고 싶어하는지는 눈치챘지만, 기대에 부응할 수는 없었다. 나는 종합반 등원과 영수 특별과외가 필요한 그저그런 중학생으로 되돌아갔다.

언젠가 물으니 김도 더이상 당원모임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거긴 껍데기가 너무 많은 허수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뛰어든 곳이 권투, 레슬링, 축구 같은 스포츠였다. 숫자로 치자면 진짜 룰이 지배하는 자연수의 세계라고 했다. 운동이 좋으면 그냥 좋다고 할 것이지 김은 항상 이유가 많았다. 생선가시 같던 몸에 살이 붙고 혈색도 좋아졌지만 김의 스포츠 정신에는 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취미치고는 절박했고 열정에 비해서는 즐기지 못했다.

홍은 마흔여덟살 생일을 맞았다. 삼수생 딸을 둔 데다 내일모레가 쉰이라 홍의 기분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자기 혼자 아등바등해봐야 뭣하냐고 낮에도 늘어져 있었다. 그러자 곤란해진 건 우리였다. 아누차는 몰래 요리하느라, 김과 나는 각자의 한가한 오후를 감추느라 그랬다. 김은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밀린 월급을 받지 못한 채 학원에서 해고됐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원생 수가 줄어 사양길을 걷고 있던 학원이 정부의 심야교습 제한으로 더 어려워졌다고 했다. 그건 김이 열렬히 지지했던 정부 정책들이라서, 홍은 “저 죽을 줄 모르다가 이렇게 됐지” 하며 혀를 찼다.

홍의 친구들이 놀러 온 날에는 김과 함께 아누차의 방에 갔다. 김은 그곳이 자신의 첫 자취방 같다고 했다. 그 말을 하려고 날 데려간 모양이었다. 자기 어려웠던 시절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걸 보면 김도 늙긴 늙었다. 방 안에는 한국어로 물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테레비’ ‘가방’ ‘장판’ ‘문고리’…… ‘형광등’이라고 쓴 종이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아주 곧고 긴장된 글씨체였다.

벽에는 사진들도 붙어 있었다. 김은 그중 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돌담을 타고 내려온 나무뿌리들이 불상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아누차는 그것이 태국에서 아주 유명한 불상이라고 말했다. 수십갈래로 나뉜 나무뿌리들은 불상의 수호자처럼, 혹은 파괴자처럼 보였다. 그 앞에서 아누차는 머리카락과 눈썹을 민 채 주황색 승복을 입고 있었다. 출가를 했었다고 해서 놀랐더니, 태국에서는 성인 남자라면 얼마 동안 다들 그렇게 한다고 했다. “모두가 부처네.” 김이 말하자 아누차가 “사장님, 부처예요.” 대답했다.

 

마는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 있었다. 여전히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얼굴도 들지 않고 말했다. “가자.” 우리는 마의 표현대로라면 서울의 등뼈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정말 표가 살던 동네라서 긴장했다. 학생들로 넘쳐나는 학원가를 지나 오르막을 오르니 오래된 단독주택들이 오밀조밀한 골목이었다. 마는 지나치게 빨리 걸어서 내가 허둥지둥 뒤따르게 되었다. 아니면 무엇을 들여다보는지 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골목은 너무 좁아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였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집에서는 누군가가 분갈이 중이었다. 그림자가 드리운 골목에는 푸릇한 이끼가 돋아 있었다. 흐린 날이면 표에게서도 이 골목처럼 습습한 냄새가 났다. 재수생들이 모여 있는 교실이란 대체로 조용했지만 팽팽한 긴장과 신경질적인 불안이 흐르게 마련이었다. 표에게서 나는 냄새는 그래서 예외적이었다.

마는 골목에 서서 담을 자세히 보라고 말했다. 담을 철거하지 않은 채 시멘트를 발라 무너진 부분을 올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멘트가 깨어져나가면 벽돌을 쌓아서 담을 유지한다고 했다. 마는 이런 흔적들이 이를테면 서울의 나이테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표가 살았던 고시원을 지났다. 창문이 열리더니 여자애 하나가 양치를 하며 골목을 내려다봤다.

독서실에서 졸리면 표는 일종의 숫자퍼즐인 스도쿠 책을 꺼내 빈칸을 채웠다. 표와 처음 말을 트던 날, 스도쿠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다. 표는 ‘數獨’이라는 일본어를 영어식으로 읽은 것인데 ‘스’는 숫자, ‘도쿠’는 홀로라는 뜻이라고 대답했다. “모든 숫자는 완벽히 홀로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참 고독한 말이네.” 표는 그 말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렸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도로에서는 케이블 매립공사를 하고 있었다. 홈이 파여 있는 거대한 검은 관으로 수십가닥의 케이블이 묻히고 있었다. 포클레인이 퍼나르는 아스팔트 파편은 인부들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났다. 우체국과 은행 사이로 새롭게 들어선 점포에서는 한 사내가 그라인더로 철근을 다듬고 있었다. 불꽃이 분수처럼 화려하게 일었다 사라졌다. 우리는 노점에서 붕어빵을 사먹었다. 이미 수북한데도 여자는 붕어빵을 자꾸 구워냈다.

“사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게 무수한 세포들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과정이거든.” 마는 서울도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무수한 것들을 통해 살아간다고 했다. 사람도 그중 하나인데 서울을 넓히고 보수하는 역할을 담당한단다. “이를테면 하수인, 하수인이란 말이야.” “그거 씁쓸한데.” 건성으로 말했더니 마가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정색했다. 무엇을 짓거나 부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있다고 했다. “그게 어딘데?” 나는 분명 마가 어떤 종교 같은 것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마는 두 손으로 자판 두드리는 시늉을 하더니 앞서 걸었다.

마가 표를 봤다던 골목에는 타이어의 바람이 빠진 자전거가 한대 놓여 있었다. 한낮이라 조용했고 멀리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표는 어쩌고 있었어?” “걷고 있었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가 구부정한 표가 주머니에 손을 감춘 채 걷는 모습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본 표의 얼굴은 아무리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건 표가 떠들어대던 뉴욕이나 런던, 멜버른, 밴쿠버 같은 도시들의 이름만큼이나 멀었다.

 

다시 학원에 등록했지만 병원 앞을 서성이면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느날은 한강둔치의 볕이 너무 따뜻해서, 어느날은 길고양이가 내 손을 핥아서, 어느날은 좋아하던 가수가 세상을 떠나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수업시간에는 종이 위를 경쾌하게 흐르던 여자의 글씨를 연습했다. 글씨체는 엇비슷했지만 그전과 같은 감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러다 인생이 망하겠다 싶어서 병원으로 발을 들여다놓기도 했다. 프린터의 롤러 자국이 선명한 수술 동의서에는 ‘자궁 천공’ ‘흡인성 폐렴’ ‘출혈’을 경고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동의서에 연달아 동그라미를 쳤다. 그럴 때마다 물수제비처럼 마음을 건너가는 슬픔이 문제였다. 나는 최대한 냉정한 글씨로 주민등록번호를 적다가도 끝내 서명자란에 싸인을 마치지 못하고 나왔다.

병원 홈페이지에서 받아 본 초음파 사진에는 그라데이션으로 펼쳐진 어둠이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장마저 아주 진한 어둠으로 나타나 있었다. 너무 짙어서 텅 비어 있는 듯한 어둠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휴대전화의 창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어딘가 가리키는 화살표만 아니라면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내 몸이라는 건 더더욱. 삭제 버튼을 누르자 사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언제든 다시 불러낼 수 있었다. 그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사모님 없죠?” 아누차가 아시아 식품이라고 쓰인 커다란 비닐봉투를 든 채 물었다. 나는 밤늦게나 돌아올 거라고 알려주었다. 아누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다. 도마 소리를 듣자니 몸이 노곤해지면서 눈이 감겼다. 무언가 두툼한 것을 써는지 칼은 속닥속닥, 도마에 부딪혔다. 그리고 칼이 단번에 무언가를 자르면서 도마에 부딪히는 소리, 절구 찧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시큼한 냄새를 맡다가 평상에서 일어났다. 뱃속이 출렁거리며 신물이 나는 시기가 지나니 이제 뭐든 먹어야 속이 편했다. “뭐 만들어요?” 방문을 두드리자 아누차는 놀란 것 같았다. 그래도 문을 열어주며 들어오라고 했다.

상에는 태국어로 이름이 적힌 쏘스병들이 나란히 있었다. 네모반듯한 글자들은 요가하는 사람의 유연한 몸처럼 보였다. 아누차는 개구리참외를 썰었다. 원래는 파파야로 해야 하지만 한국에서는 너무 비싸다고 말했다. 음식 이름은 쏨땀이었다. 새콤하고 매웠지만 속이 시원해졌다. 오징어를 넣은 볶음밥에서는 재채기가 날 만큼 자극적인 냄새가 풍겼다. 여러번 이름을 가르쳐줬지만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무슨 일 해요?” 아누차는 ‘대한정밀금형기계공업사’라는 회사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 긴 이름만으로는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누차의 입에서 나온 ‘밀링’ ‘면삭’ ‘선반’ ‘도금’ 같은 단어는 마치 외국인 이름처럼 들렸다. 아누차는 기계를 만든다고 간단히 말했다. “어떤 기계?” “기계 만드는 기계.” 공장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면 기계가 필요한데 그 기계 역시 어떤 기계에서 만들어진단다. “그럼 그 공장의 기계는 어디서 만들어요?” 아누차는 그 기계 역시 또다른 기계에서 만들어진다고 답했다. 우리는 좀 허탈하게 웃었다.

“요리 안 귀찮아요?” “태국에서 요리 잘 안했어요.” 한국에 오면서 요리하는 시간이 늘었는데 처음에는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여기가 마음에 드냐고 묻자 아누차는 바빠, 너무 바빠, 하며 손사래 쳤다. “월급은 많아요?” 아누차가 어깨를 으쓱했다. 한국에 처음 와서는 지하철 건설현장에서 일했는데 그때가 차라리 더 나았다. 아누차는 자기가 웬만한 한국사람들은 가볼 수 없는 서울의 가장 밑바닥까지 가봤다고 했다. 조금은 자랑스러운 투였다. “거긴 어떤데요?” 아누차는 가만히 생각하고는 아무것도 없더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물었다. “밥냄새 나요?” 냄새를 맡아봤지만 잘 모르겠어서 나는 “전혀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외출에서 돌아온 홍은 금세 알아챘고 한번만 더 걸려보라며 별렀다.

그날 밤, 나는 홍과 같이 텔레비전을 보다가 김을 어떻게 만났느냐고 물었다. “그딴 건 알아서 뭐하게.” 그러면서도 홍은 자기가 김의 자취방을 얻어주었다고 얘기했다. “저 화석들을 신줏단지마냥 모셔놨더라. 자기 아버지가 탄광에서 가져온 거라고.” 처음 그 말을 들은 홍은 마음이 짠했다고 했다. 나는 거실장을 들여다봤다. 화석들은 동생의 상장들과 과실주에 가려져 궁색해 보였다. 줄기가 가늘고 작은 잎들이 달려 있는 건 고사리 같았다. 누군가 성의없게 그린 듯한 빗금은 잎사귀의 수맥이었다. 홍이 황갈색 돌을 가리켰다. “저런 걸 흔적화석이라 부른다나.” 음각으로 중심선이 있고 양옆에 작고 볼록한 마디들이 이어져 있었다. 홍은 삼엽충이 지나간 흔적이라고 했다. 단지 뭐가 지나갔을 뿐인데 화석이라니, 좀 이상했다.

“근데 쉽지 않아.” 홍이 마른세수를 하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능력없는 남편이랑 살다가 이렇게 나만 늙는다.” 홍은 자기가 못해본 걸 내가 누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학 가고 외국에서 공부도 하고 근사한 직장에서 성공한다. 서울 중심가 어디에 아파트를 사고 해치백 자동차를 몰며 주말에는 도쿄나 홍콩으로 짧은 여행을 떠난다. 홍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식빵처럼 부풀어올랐다. “얼마나 좋은 세상이니?” 홍은 내가 그렇게 못할 거라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건 내가 삼수생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골목을 잘못 가르쳐준 것 같다며 마가 연락을 해왔다. 공교롭게도 병원 앞을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가로수 가지치기를 하던 인부들이 나더러 비키라고 소리를 질렀다. 새 움이 튼 은행나무 가지들이 잘려나왔다. 나는 건물 쪽으로 몸을 붙이고는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물었다. 노량진역에서 만나자고 해서 그쪽으로 가는데 마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급한 일이 생겼다고 했다. “어딜 잠깐 들러야 하는데…… 기다리기 뭣하면 같이 갈래?” 마는 오늘도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걸을 때마다 엉덩이와 무릎 부분이 반질반질하게 보였다. 자기 차림은 생각 않고 마는 나더러 왜 그 후드 티셔츠만 입느냐고 물었다. 요 며칠 옷차림 따위는 신경도 못 쓰긴 했다. 아랫배가 묵직해진 것 같아서 레깅스나 원피스는 입을 수 없었다.

마가 날 데리고 간 곳은 장례식장이었다. 국화와 사철이 꽂힌 화환들을 지나치면서 마는 눈에 띌 정도로 두리번거렸다. “누가 죽었는데?” 친구의 당숙이 세상을 떠났는데 빈소를 찾는 중이라고 했다. 친구의 당숙까지 챙기는구나 싶어서 마가 다르게 보였다. 하지만 어찌 된 건지 마는 당숙을 여읜 친구를 영 찾지 못했다. 울음소리와 웃음소리, 누구를 부르는 소리, 와장창 그릇 깨지는 소리, 전화벨 소리, 아이들이 숨바꼭질하는 소리, 곡하는 소리가 뒤섞이는 가운데 관 하나가 옮겨졌다.

보다 못한 내가 이름이 뭐냐고 묻자 마는 ‘빌리브 오어 낫’이라고 했다. 외국인인가 했더니 트위터 닉네임이었다. 얼굴은 모르냐고 했더니 클라크 케이블 사진이 있는 프로필을 보여주었다. “이 사람이 장례식장에 있는 건 확실해?” 마가 한창 올라오고 있는 트윗들을 보여줬다. 머릿고기도 인터넷으로 구입 가능한가요? 당숙이 좋아하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억울하면 출세해라. 출세를 해라. 제목 아시는 분요. 장례식장에서 꽃값이며 식대를 너무 많이 요구하네요. 물론입니다. 항암 주사 믿지 마세요. 치즈는 100퍼센트 뉴질랜드산입니다. 신대방동도 배달 가능해요. 장례식장 앞에 목련이 폈습니다. 당숙은 다시 태어나면 느릅나무가 되고 싶다고 하셨죠.

나는 복도의 맨 마지막 빈소에서 마처럼 줄곧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는 한 남자를 지목했다. 마는 남자를 가만히 지켜보더니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얼마 전 안경테 바꿨다는 글을 올렸는데 저런 색이라고 했다. 가게는 어쩌고 왔을까, 마가 걱정했다. 얼굴도 모르면서 남자의 일상에 대해서는 꿰고 있었다. 피자가게를 하는데 오랜만에 단체주문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는 저 남자가 맞다고 하면서도 가서 알은체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냥 장례식장을 나왔다. “인사라도 하지?” “그건 안돼.” “왜?” 마는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발을 옮기는 순간, 거대한 슬픔과 마주칠 거라고 했다. “그러면 왜 몰래 사람들 얼굴을 보러 오는 건데?” 마는 그건 망원경으로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별이 거기 있고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보고 싶어하니까.

물어보니 마의 닉네임은 ‘슬픔이여 안녕’이었다. ‘문상맨’보다 서정적인 이름이기는 했다. 온라인에서는 슬픔이 사라지느냐고 묻자, 마는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소유해야 할 것도, 고쳐주어야 할 것도, 철마다 갈아주어야 하는 것도, 심지어 소리도, 냄새도, 빛도, 어둠도, 내 몸도, 죽음도 없다. 마는 그래도 우리의 흔적들은 그곳에 남을 거라고 했다. 그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이고 그렇기에 무한한 인터넷을 떠돌며 영원히 남을 수 있다.

나는 문득 ‘한국산 바늘’ ‘오동나무 효도손’을 남기고 간 여자가 생각났다. 지하철에서 마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김처럼 내 연민을 높이 사지는 않았다. 마는 그 방을 굴러다녔던 ‘애드벌룬’ ‘보잉747’ ‘인공위성’ 같은 말들이 무엇일까만 궁금해했다. 무슨 뜻인지 알 듯 말 듯 하다고 했다. 내가 십년 동안 생각해도 풀 수 없던 걸 어떻게 알겠느냐 싶어서 기대도 안했다.

우리는 고시원 골목에 다다랐다.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한낮인데도 볕이 들지 않았다. 마는 장례식장에 가줬으니 같이 표를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고시원 한쪽 벽에 그물망이 다 떨어진 농구 골대가 달려 있어서 우리는 구긴 신문지로 자유투를 던졌다. 바람에 날려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신문지를 버리려는데 스도쿠 코너가 눈에 띄었다. 가로와 세로가 아홉칸씩인 사각형에 73, 2 같은 숫자들이 띄엄띄엄 적혀 있었다. 이걸 풀면 표에게 다 이야기하겠다고 생각했다. 해가 질 때까지 끙끙댔지만 한칸도 풀 수 없었다. “13 옆에 있을 수 없고 7은 같은 7 옆에 있으면 안되지.” 이마를 찌푸리며 표가 조심스럽게 숫자를 써넣던 게 생각났다. 숫자들의 관계를 알아내려고 고심했지만, 이제 보니 결국 그건 정해진 칸만큼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주말이 되자 외할아버지가 김과 나를 불렀다. 셋집들을 차로 한바퀴 돌자고 했다. “자네는 언제 일 나갈 건가?” “알아보고 있습니다.” “알아보다가 아까운 청춘 다 가네.” 김이 더이상 대답하지 않자 외할아버지는 정 할 게 없으면 자기 일이나 좀 도우라고 했다. 웬일로 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저러다 김이 “세—에나 받아먹으며” 살겠구나 싶었다. 이제 칼잡이는 윤이 나게 닦은 검을 액자에 넣어 거실에 잘 걸어놓을 생각인 것이다. 나는 썰렁한 분위기를 깨려고 콧노래를 불렀다. 물론 그럴 기분은 아니었다.

어제 김은 모든 걸 알게 됐다. 그건 사소한 실수였다. 일기를 쓰는 블로그에서 로그아웃하지 않았고 그 창을 김이 열었다. 내가 부탁하자 김은 당분간 홍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물론 그냥 넘어가겠다는 건 아니었다. 다음주까지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내가 우물쭈물 사과하자 김은 “나한테 미안할 건 없다”라고 말했다. 듣고 보니 그랬다. “제 나이 때마다 할 일이 있는데 감상적으로 굴지 마라. 센티멘털도 하루이틀이지.”

김의 말은 내 뺨을 한대 올려붙이듯 지나갔다. 말투는 따뜻할 것도 차가울 것도 없었지만 센티멘털이라는 단어가 마음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무심하게 붙은 듯한 하루이틀에도 어떤 가시 같은 것이 있었다. 그간의 날들과 결별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 좋아질 것 없다는 닳고 닳은 냉소였다. 나는 연민에서 센티멘털까지 말의 온도차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다음주까지.” 김이 경고하듯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한번 더 말했다.

외할아버지의 상가에는 깡마른 사내가 당구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내는 구청에서 건물을 살펴보고 갔다고 했다. “지반이 약하다나.” 사내는 벽에 사선으로 간 균열을 가리켰다. 월세를 내기는커녕 보증금 받아서 나가야 할 판이라는 것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자기가 서울 토박이인데 여기는 개천 한줄기 흐른 적 없고 전쟁 때도 말짱했다고 반박했다. “그뒤로 지하철을 팠는지, 하수도를 묻었는지 알게 뭐예요.” 사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시내를 지나다가 외할아버지는 “저걸 좀 봐라” 했다. 공익근무요원들이 지하철역으로 가는 계단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왜 저러는 줄 아나?” “봄맞이 대청소 하나 보죠.” 김이 말했다. 흐헹, 외할아버지는 웃는 건지 못마땅하다는 건지 모를 소리를 냈다. 외할아버지는 계단을 적셔서 노인들이 못 앉게 하려는 거라고 말했다. 다시 창밖을 보니 종로였다.

또다른 빌라에는 커다란 장미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삿짐센터에서 찍은 검고 푸른 스탬프들이 꽃잎을 좀먹어가고 있었다. 이름은 ‘테라스 빌라’였지만 테라스는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리비아에 가서 번 돈으로 이 빌라를 샀다고 했다. 모래폭풍이 한번 일면 정지 작업이 수포로 돌아가 허허벌판이 돼버리는 곳이었다. 자재를 싣고 오다가 길을 잃은 적도 있는데 거기서 신기루를 봤다고 했다. 커다란 궁전이 모래 위로 남실대며 떠올랐다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더라고 말했다. 어쩌면 진짜였는지도 모른다고.

라디오 채널을 돌리다가 불교방송이 잡혔다. 외할아버지는 거기에 맞춰놓으라고 했다. “채우지 못한 욕심이 마음을 어지럽게 합니까?” 성우는 이렇게 묻고는 『반야심경』의 한구절을 소개했다. 외할아버지는 손으로 의자를 치면서 흥얼흥얼 따라했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외국어처럼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말들 속에는 처량함 같은 게 있었다. “사리자여.” 성우가 방금 읽은 구절을 설명했다. “물질은 비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고 비어 있다는 것은 물질과 다르지 않다. 물질이 곧 공이고 공한 그 모습이 물질이니 우리의 의식이나 행동이나 마음 또한 마찬가지니라.” 메아리 효과가 있어서 목소리는 아주 근엄하고 극적으로 들렸다.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냐?” 외할아버지는 연신 감탄했지만 성우가 “성불하십시오” 할 즈음에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표에게서 이메일을 받았다. 김이 말한 데드라인에서 이틀 전이었다. “여기서는 그라운드 제로가 바로 보여.” 첫마디가 그랬다. 그 공터에 세계무역센터가 있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했다. 표가 갔을 때 이미 거긴 그라운드 제로였으니까. 관광객과 추모객, 카메라맨, 정치인, 시위대만 아니라면 그 빌딩이 있었다는 건 실감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지금은 세계에서 몇째 가는 고층빌딩을 다시 짓고 있는 중이라고 전했다. 그러면 그곳이 그라운드 제로였다는 사실도 곧 잊히고 말 것이었다.

표는 뉴욕에서 ‘스시맨’이 되었다고 했다. 한인이 운영하는 초밥집인데 석달 만에 일자리를 구한 사람은 드물다고도 했다. 넌 초밥을 좋아하지 않지만, 하고 표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고는 초밥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초밥이 맛있으려면 칠그램, 이백구십칠개의 밥알이 필요하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말도 적었다. “단번에 그만큼 쥐려고 연습 중이야. 주방장은 무조건 빨리 쌓아놓으라고 하지만.” 마지막에 표는 답장을 꼭 보내라고 했다. 그날 그렇게 헤어진 건 정말 미안해,라고도.

나는 창을 올려 “여기서는 그라운드 제로가 바로 보여”라는 문장을 다시 읽어보았다. “나는 스시맨이 되었어”라는 문장도. “정말 미안해”는 읽지 않았다. 회신 버튼을 누르고도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표에게로 이메일이 가는 동안은 잴 수조차 없는 짧은 시간일 것이다. 수많은 영과 일이 자리를 바꾸는 순간, 어떤 이야기든 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냥 이메일을 지웠다. 지금 내게도 이백구십칠개의 위안이 필요한데 여기서는 그라운드 제로가 안 보였다.

 

수술이 잡힌 날, 홍이 밥을 먹다 말고 이게 무슨 냄새야, 했다. 그길로 홍은 아누차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누차는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밥을 볶고 있다가 갑자기 뛰어들어온 홍 때문에 놀랐다. 그뒤부터는 홍과 아누차의 말이 달라서 누가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홍은 아누차가 자기를 떠밀었다고 했고 아누차는 흥분한 홍이 문턱에 걸려 넘어졌다고 했다. 뒤늦게 달려온 김은 홍과 아누차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누차를 손가락으로 지목하면서 나가라고 했다. 운동장에서처럼 단호하고 완강한 표정이었다. 부엌 없는 집에서 살림을 하는 건 계약 위반이라고 김이 말했다.

아누차는 잠자코 짐을 쌌다. 문가에 놓여 있던 커다란 이민가방은 언제라도 떠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아누차의 가방은 모퉁이를 돌아 천천히 사라졌다.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한동안 바퀴 소리가 들렸다. 빈방에는 물건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만 남았다. 김이 청소를 하면서 그걸 떼어냈다. 아무리 조심해도 뜯은 흔적은 남았다.

시간 맞춰 병원으로 갔는데 의사가 자리에 없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삼십분 뒤에 다시 오기로 하고 좀 걸었다. 금식이라서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속이 쓰렸다. 편의점에서는 품목을 바꿔 와플을 팔고 있었다. 수술이 끝나고 나면 잇몸이 시큰하도록 단 저것을 먹으리라고 생각했다. 수술 날짜를 잡던 날, 간호사는 잠깐 자고 나오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동의서에 아무렇게나 싸인했다. 그건 누구의 이름이 아니라 의미없는 낙서 같았다.

나뭇가지들에는 요철처럼 움이 터 있었다. ‘오피스텔 분양’ ‘1억에 4채’ ‘평생 연금’ 같은 문구를 달고 애드벌룬이 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이십분이 남아 있었다. 아누차는 어디로 갔을까. 색색의 스니커즈를 팔고 있는 노점을 지나쳤다. 자동차들이 서 있는 도로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언젠가 외할아버지가 보았다던 신기루처럼 아지랑이는 서울을 좀 몽환적으로 만들었다.

그때 마가 전화를 걸어왔다. 날 속인 게 괘씸해서 받지 않으려 했지만 한편으론 안부가 궁금하기도 했다. 마는 이번에도 어느 골목에서 표를 봤다고 했다. “안 갈래?” 온라인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골목에서는 왜 자꾸 표를 찾는 걸까. 난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했다. “돈은 받았어?” “응. 이자까지 쳐주던걸.” 마는 잘됐네, 하면서도 어딘가 아쉬운 투였다. 오분 전이라서 나는 좀 서둘러 걸었다. 마는 자기가 그 문제를 풀었다고 했다. 스도쿠 이야기인가 했더니 여자가 남긴 글씨들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흥미가 생겨서 걸음을 멈췄다. “바늘에서 인공위성까지.” 마는 여자가 그렇게 써 붙이고 물건을 팔러 다녔을 거라고 했다.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거울조각 하나가 떨어진 게 보였다. 그것은 손가락만했지만 빛을 되비추며 반짝였다. 보행신호가 들어오고 남은 시간의 숫자가 하나씩 줄어갔다. 마가 듣고 있느냐고 물어서 나는 으응, 했다. 이윽고 숫자는 영이 됐고 정지신호가 켜졌다. 보도에는 블록들이 모양을 맞춰 새로 깔리고 있었다. 전선들은 넝쿨처럼 얽혀 바닥으로 향했다. 그 옆으로 빈 수레를 밀며 노인들이 지나갔다. 신호가 다시 들어왔지만 발을 떼지는 않았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고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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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조장은의 세번째 개인전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