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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육분천하(六分天下)
오늘의 중국문학
왕 샤오밍 王曉明
상하이대학 문화연구학과 교수, 당대문화연구센터 소장. 국내 소개된 저서로 『인간 루쉰』 『21세기 중국의 문화지도』(공저) 『고뇌하는 중국』(공저)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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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십여년 사이, 중국 대륙의 문학 판도는 크게 달라졌다.
먼저 ‘인터넷문학.’ 이것은 중국 대륙의 특수한 현상 같다. 다른 나라에도 인터넷문학이 있지만 그 기세가 중국처럼 왕성하지 않을뿐더러 ‘종이문학’에 가한 충격도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만큼 크지 않다. 1992년 전후 투야(圖雅)1) 같은 이들의 시와 소설을 다 합쳐도 중국대륙 인터넷문학의 역사는 채 이십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통계를 한번 보자. 주요 문학홈페이지 상하이톈신(上海天新)이 발표한 소설의 매수, 유명 인터넷소설의 접속량 및 댓글의 수, 대형서점 문학 신간코너에서 인터넷소설이 차지하는 비율을 따져보라. 그리고 인터넷소설이 영상물로 전환되는 규모, 지하철과 병원에서 모바일소설을 읽는 젊은이들의 열정을 살펴보라.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바야흐로 인터넷문학이 종이문학과 천하를 양분했다고.
이상한 일이 아니다. 중국은 문자 대국이다. 쓰려는 욕구로 몸이 달아오른 문학청년들이 해마다 수도 없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 거대한 호수가 지나갈 통로는 너무나 좁다. 큰 이야기는 일단 젖혀두자. 문학 영역만 보면, 모든 중요한 인쇄문학 매체가 각급의 정부기관에 속해 있다. 1990년대를 통틀어 문학매체에 대한 정부의 규제기준은 전반적으로 느슨해졌지만, 장기적 집단권위체제 아래 형성된 소위 ‘문학계’에서 규율의 경직성과 폐쇄성은 점점 더 강해져왔다. 정부 및 관변 출판사와 서점 그리고 각종 ‘제2의 경로’를 통해 합작한 민영자본이 만든 도서시장이 작가협회 같은 창작의 노후세력을 신속하게 대체했지만, 갑갑하고 보수적인 잠재규율이라는 면에서 그들은 좀처럼 작가협회에 뒤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한번 상상해보라. 컴퓨터가 보급되고 인터넷이 급속히 확산됐을 때 막혀 있던 문학의 물줄기가 얼마나 요동쳤겠는가. 지면에서 문학의 꿈을 이루지 못한 수천수만의 젊은이들이 물밀듯이 인터넷으로 진입했고, 그중 상당수가 ‘정치’와 ‘성(性)’이라는 종이문학의 두 금단구역으로 뛰어들었다. 적나라한 농담과 욕설들은 처음엔 다소 절제를 보이는가 싶더니 곧 거리낌 없는 색정 묘사가 인터넷상에 폭발했다.
물론 금단의 돌파를 시도한 작가가 종이세계에 없었던 건 아니다. 모옌(莫言)의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天堂蒜苔之歌, 1988), 쟈 핑와(賈平凹)의 『폐도(廢都)』(1993), (정치와 성이라는) 두 금단구역을 단번에 밟고 들어간 옌 렌커(閻連科)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爲人民服務, 2005)는 모두 그 명확한 예들이다. 그러나 잇따른 규제와 처벌로 작가들은 잠시—혹은 이후 오랫동안—주춤했고 그뒤를 따르는 바람도 잦아들었다.
인터넷은 다르다. 누군가 나서기만 하면 그뒤에는 무수한 독자군이 따른다. 당신이 한줄 가면 누군가는 열줄을 갈 것이다. 키보드를 두드리면 글은 즉각 올라온다. 독자의 반응도 실시간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물론 전부 가명이니 누가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 분명, 이런 식의 자유가 자아내는 흥분이 인터넷문학을 몰고 온 첫번째 물결이다.
자유의 회오리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치솟은 인터넷문학 작가의 제1세대는 대부분 종이문학에 대한 도전적 자세를 감추지 않았다. 일순 ‘종이’를 ‘전통’과 동일시하는 언설이 퍼져나갔다. 당시 중국에서 ‘전통’의 첫번째 의미는 ‘퇴물’이었다. 2000년 1월, ‘룽수샤(榕樹下)’라는 싸이트가 개최한 ‘제1회 인터넷창작문학작품상 시상식’에는 갓 등단한 인터넷작가(리 쉰환李尋歡, 안니바오베이安妮寶貝, 닝 차이선寧財神, 시거Siege)와 수많은 원로작가(위 츄위余秋雨, 왕 안이王安憶, 왕 숴王朔)가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상하이센터시어터(上海商城劇院)에서 열린 이 호화로운 의식은 새로운 문학세상의 ‘출현’을 명징하게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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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인터넷문학이 치켜든 자유의 깃발이 고공행진을 하던 바로 그때, 대자본이 손을 내밀었다. 중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각종 ‘민영’자본이 다양한 경로로 문화영역에 침투했다. 그러나 자본의 부족으로, 혹은 ‘문학’의 시장가치에 대한 부정적 판단으로 인해, ‘민영’자본은 인터넷문학에 본격적으로 진입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국자본이 여기에서 잠시 기웃거렸지만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었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이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영화에서 온라인게임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비주얼문화 생산의 연이은 각축전은 일군의 ‘민영’회사들의 덩치를 크게 불렸다. 지난 십년간 인터넷문학의 꾸준한 성장을 주시해온 이들이 단번에 거대한 호재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2008년 7월, 온라인게임으로 출발하여 상하이에 본사를 세운 성다회사(盛大公司)는 자본금 1억위안을 들여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4대 문학싸이트를 일거에 사들였다. 거기다 진작에 손에 넣은 ‘치디엔중원왕(起點中文網)’을 합쳐 성다원쉬에(盛大文學)주식회사를 세우고는 ‘문학창작’으로 이윤을 창출하는 새로운 사업들을 거침없이 밀어부쳤다. 단순하고 원시적인 ‘온라인 유료 읽기’부터 온갖 현란한 형식의 멀티미디어 제작, 그리고 작가와의 복잡한 이윤분배 방식 등이 도입됐다.
대자본의 직접 개입으로 강화된 인터넷문학의 영리성은 인터넷문학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자본증식’을 향한 무한한 욕망은 어느 순간 ‘자유로운 창조’라는 놀이의 정신을 대체했고 인터넷문학을 움직이는 주요한 손이 되었다. 잠재적 독자를 면밀히 분석한 ‘성다원쉬에회사’와 그 동종업자들은 신속하게 ‘장르소설’을 서점 판매대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이를 기초로 이미 수중에 있던 온갖 문화매체와 테크놀로지, 특히 다양한 인터넷 비주얼상품들을 총동원하여 문학의 ‘장르적’ 및 멀티미디어적 속성을 대폭 확대해나갔다. ‘치디엔중원왕’을 예로 들면, 홈페이지에 게시된 열여섯가지 문학장르 중 대략 절반은 인터넷문학 발흥 이전의 통속소설에서는 없던 것—있었다 해도 고정된 장르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그중 삼분의 일은 명백하게 기성‘문학’의 범위 바깥에 있던 것들이다. 소설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만화, 연속극, MTV, 온라인게임 같은 다른 형식의 대본인 듯한……
상업적 방식이 문학을 대규모로 경영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작가의 두뇌, 통속소설 팬들의 패턴화된 감상 습관, 젊은 네티즌의 멀티미디어에 대한 열광…… 이 모든 것이 문학 생산의 데이터가 되었다. 다른 나라의 대자본들이 영화와 건축, 음악, 미술, 온라인게임 등에 몰려 ‘창의산업’을 일으킬 때, 중국 대자본의 탁월한 안목은 문학을 통해 돈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성다원쉬에’의 주도 아래 인터넷문학을 통째로 집어삼킨 것이 그 첫단계이다.
둘째, 셋째 단계도 있다. ‘성다원쉬에회사’의 CEO 허우 샤오챵(侯小强)이 예견하듯 ‘성다원쉬에’의 전면적 추진 아래 장차 인터넷문학과 종이문학은 하나가 될 것이다. “전통문학이니 인터넷문학이니 하는 건 없습니다. 문학은 그저 문학이죠. 이른바 ‘인터넷문학’이란 말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겁니다. 앞으로의 문학은 인터넷 플랫폼 위에서 통일될 테니까요. 그것이 바로 ‘성다원쉬에’가 하는 일입니다. 이미 중국작가협회와도 합작을 시작했어요. 이제 곧 주류로 인정받게 될 겁니다.”2)
거대한 자본이 있기에 이런 거대한 야심도 생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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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아직까지는 ‘성다원쉬에’가 인터넷세계에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는 못하고 있다. 대자본은 식욕만 왕성할 뿐 관심의 폭은 좁다. 모든 것을 돈 되는 것으로 만들 기세지만, 일단 수지가 안 맞는다 싶으면 쥐고 있던 것도 금세 놓아버린다. 작가와 독자의 ‘즉각적’인 상호접촉은 인터넷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래서 나오자마자 ‘성다’ 같은 문학기업에 눈도장을 찍힌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호접촉의 산만하고 가변적인 성격은 ‘성다원쉬에’가 추구하는 패턴화와는 필경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인터넷문학이 아직까지는 대자본에 치밀하게 개간당하지 않은 황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호접촉 덕에 인터넷문학은 발흥 당시의 자유로운 기풍이 크게 퇴조한 후에도 ‘성다원쉬에’의 높은 담벽 바깥에서 자기만의 한자락 토양을 지속적으로 일궈낼 수 있었다.
이 세상의 경계는 결코 명확하지 않다. 어떤 형태가 있는 것도 아닌데다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중세시대 유럽 도시의 대학처럼 동쪽에 건물 한채, 서쪽에 집 한칸이 큰 길 작은 골목에 점점이 박혀 있다. ‘성다원쉬에’의 맹공에 유명 문학싸이트들이 하나씩 백기를 들고 신하 되기를 자청하면서, 세상은 점점 블로그와 소규모 개인 홈페이지 안으로 축소되어갔다. ‘성다’의 요란한 기세에 비하면, 이런 ‘영세’ 영주들의 목소리는 사면에서 꽃가루처럼 간간이 흩날릴 뿐이다. 그러나 특히 요즘 같은 시대, 어떤 분야든 영구불변한 형식이란 없다. 모든 고정불변하는 것은 오로지 변화에 기탁하여 실존의 근거를 찾는 법이다. 이런 세상을 잠시 ‘블로그문학’이라 부르도록 하자.
온갖 부류의 인간들이 이곳에 입장하여 작품을 발표한다. 어느 명망있는 지면작가가 은퇴 후 가명으로 블로그에 장편소설을 발표하면, 수십명의 독자들—그중에는 멀리 북미에서 온 독자도 있다—이 게시판으로 달려와 심도있는 토론을 펼쳐주시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한편이 끝나면 바로 다음 작품으로 직행. 유명 대학 정치학과 출신의 치링허우(70後, 1970년대생이라는 뜻) 남성 전문직 종사자는 바쁜 일상으로 나자빠질 지경임에도 틈만 나면 블로그에 들어와 게이와 레즈비언 소설을, 그것도 장기간 연재한다. 산골 작은 마을에 사는 젊은 처녀는 낮에는 여관 카운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밤에는 정기적으로 블로그에 길거나 짧은 감상을 올린다. 누군가 간단한 답글이라도 달아주면 뛸 듯 기뻐하며 어쩔 줄 모른다.
이런 예들은 무궁무진, 천차만별이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 중 절대다수가 결코 돈 때문에 몰려든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블로그문학’의 무대 뒤에 글자수나 클릭수를 계산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블로그나 개인 홈페이지가 존재할 수 있는 배경 대부분에 자본의 논리가 개입되어 있긴 하지만, 이 남녀노소들이 블로그에 지속적으로 ‘졸필’을 갈겨대는 주요한 이유는 역시 돈보다 한층 매력적인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독자다. 게슴츠레 풀린 눈으로 쉼없이 마우스를 클릭하며 오로지 피로에 지친 심신을 위로하려는 독자들 말고, 또랑또랑한 눈빛과 열정으로 작가와 대화하고 싶어하는 독자, 심지어 먼 길도 마다 않고 함께 가줄 그런 독자 말이다. 좀더 투박하게 말하면 그들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관심을 가져줄 사람을 찾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분명 제한적이다. 그러나 경청과 관심은 더더욱 희박하다.
여기엔 분명 수천수만의 독자가 있다. 그들은 읽기만 할 뿐 아니라 논평도 단다. 물론 욕지거리도 있지만 건의도 있다. 어떤 경우 작가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예 소매를 걷어붙이고 무대 위로 올라와 직접 한수 보여주려는 독자도 있다. 그래서 독주(獨奏)를 관람하게 되어 있던 무대가 순식간에 집단경기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여기엔 물론 종이세계처럼 경계가 분명한 쓰기→읽기 관계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즉흥성이 더 커 자유분방한 쌍방향 관계가 주조를 이룬다. 읽기→쓰기, 읽기→읽기, 심지어 쓰기→쓰기. 이런 관계에서 작가와 독자의 위치는 부단히 변할 뿐 아니라 심지어 서로 뒤바뀌기도 한다. 인터넷공간 바깥에서 정해진 각종 경계와 위계는 이곳에 오면 뒤죽박죽이 된다. 문밖의 세상은 약육강식의 꼼수로 가득하지만 이 안엔 호응이 있고 어쨌거나 다소간의 온기가 있다. 문학의 경계를 살짝만 넘어서면, 단기간 내 비교적 안정된 ‘준사회’적 정체성이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블로그문학’의 모순된 두 특징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첫째, 공간의 분산성과 읽고 쓰기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블로그문학은 ‘무질서의 질서’라 할 생존 패턴을 빠르게 형성해갔다. 종이문학이 거대한 가위와 칼로 다듬어진 엄격한 위계를 과시하는 졸부들의 정원이라면, 인터넷문학은 크고작은 초목이 티격태격 얽혀 자라는 도심 밖의 들판이다. 예컨대, 애초 신문이 시작했던 ‘연재’형식이 인터넷문학에서도 광범위하게 운용되고 있지만, 루 쉰(魯迅)이나 장 헌수이(張恨水)3) 등이 누렸던 독자에 대한 작가의 절대적 우위는 보장되지 않는다. 매일 밤 자기의 블로그에 들어와 다음 글을 기다릴 수십명의 독자를 생각한다면 아무리 게으른 작가라 한들 마음이 다급하지 않을까? 수차례 건의와 격려를 보내던, 그래서 무의식 중 한길을 걷는 전우라 여겼던 독자가 어느날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면, 평소 제아무리 당당한 당신이라도 의기소침해지지 않을까?
사실 세상에 진정한 무질서는 없다. 눈앞에서는 질서가 무너진 듯해도 좀더 먼 곳, 혹은 좀더 깊은 곳에서 질서는 차고 올라와 소리없이 세상을 점령한다. 많은 바링허우(80後) 작가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인터넷문학은 바로 ‘전인민의 오락’, 즉 ‘여유, 재미, 심심풀이’라고. 블로그문학의 전반적 수평은 시종 아마추어 상태에서 출렁여왔다. 그래서 독자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특히 상상력과 돌파력의 차원에서 적어도 목전의 블로그문학은 당초 기대했던 발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1980년대 소설과 비교하면 형식에서든 내용에서든 블로그문학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이런 상황은 분명 사회 밑바닥에 깔린 억압의 공고함을 절감케 한다. 일시적 자유로는 장기간 굳어진 편협과 빈곤의 굴레를 절대로 풀 수 없다. 하물며 요즘 같은 시대, 아무리 인터넷세계라 한들 구속 없는 진정한 자유란 멀어도 한참 멀다.
하지만 두번째 특징이 있다. 들판에서는 문학이라는 거목이 한순간에 솟아나지 않는다. 우후죽순 자라나는 잡초들 틈에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는 여실히 무너진다. 종이세계의 위계를 획정하는 저 크고작은 제도들, 이를테면 대학 중문과의 학제, 문학잡지의 지면 배치, 출판사의 경영방식, 서점의 순위, 작가협회 내의 분파 등은 이곳 인터넷에서는 기본적으로 힘을 쓰지 못한다. 오히려 다른 무형의 요소가 ‘경계’ 체감에 영향을 미친다. 폭주하는 클릭이 주도하는 인터넷 열독방식 그리고 인터넷 바깥 일상에서 다종다기한 매체들이 만들어낸 느낌과 표현습관은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에 기이할 정도로 효력을 발휘한다. 천성적으로 금 밟는 쾌락을 즐기는 열성 집필가라면 당연히 블로그문학에 발을 넣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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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처럼 인터넷이 대대적으로 부추긴 금 밟기의 충동이 인터넷문학이라는 거대하고 다양한 미래지향성을 내포한 새로운 공간을 탄생시켰다. 이곳은 블로그문학처럼 고요하지 않다. 크고작은 자본들이 지분 싸움으로 난리법석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불현듯 떠오른 별것 아닌 아이디어들이 오히려 신선한 문체를 창조하고 나아가 새로운 매체를 구현할 수 있다. 승자 독식만 하지 않는다면, 자본은 때로 다양한 충동들이 활동할 조건을 마련해주는 장점도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추세 중 하나는 문자와 비주얼, 음악 등을 뒤섞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처럼 기본은 이미지에 두면서 상당량의 문자와 음악을 차용하는 경우나 「차오니마의 노래」(草泥馬之歌, 2009)4) 및 「충칭 서양인거리 표어 걸작선」(重慶洋人街標語集錦, 2009)5)처럼 문자를 위주로 하되 이미지와 음악의 외피를 씌운 것도 있다. 대부분 상업적이지만 아닌 것도 있으며, 자기검열성이 강해 좀처럼 규율을 위반하진 않지만 희노애락을 거침없이 표현하기도 한다.
문자로 된 작품의 경우에도 문학과 비문학의 혼합은 갈수록 다양해져 정체불명의 것들이 꼬리를 물고 출현했다. 당니엔밍위에(當年明月)의 『명조 그 시절』(明朝那些事)6) 같은 장편 대작부터 명사들의 연설 패러디, 재담, 개사한 대련(對聯)·노래가사·시 등 형형색색의 풍자성 단편에 이르기까지, 문자의 재기발랄함과 신랄함, 사유의 순발력을 십분 발휘하여 언어의 잠재적 표현 가능성을 최대한도로 드러낸 수많은 작품에 사람들은 연일 탄성을 질렀다. 현대인의 삶을 고농도로 응축한 이런 표현 중에는 ‘다쟝여우(打醬油)’7)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것도 있다. 문자를 걷어낸 부호의 지시능력에 대해 말하자면, 문자를 포함한 일체의 행위를 도구화하여 억압하는 이 시대에 대한 의미심장한 시적 저항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자류(文字類)’의 애매한 작품들이 시대의 단면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더 주목할 것은 문학과 게임의 결합이다. 중국 대륙에서 특히 남성 청소년들에게 영향력이 큰 온라인게임은 이미 전세계 규모 2위, 설계능력 3위의 거대기업을 키워냈다. 중국 게이머의 기술수준도 세계 2위에 올랐다고 한다. 본래 문학은 온라인게임 개발의 기반이었다. 최근 들어 중국 온라인게임 산업의 두드러진 특징은 문학 텍스트—온라인문학만이 아닌 종이문학까지—의 이용률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특히 온라임게임을 하며 자란 1세대 혹은 2세대는 십년 뒤 (온라인 및 오프라인) 문학의 주요 독자군이자 아마도 최대의 작가군이 될 테니, 미래 문학에 미칠 온라인게임의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다. 이미 온라인게임을 주요 모델로 한 문학과 비주얼, 심지어 건축 작품까지 출현한 마당이다. 다양한 문체와 매체 유형이 말 그대로 서로의 피부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아마 당신은 감지했을 것이다. 온라인문학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한 이 새로운 공간이 결코 문학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 공간에서 태어난 새로운 사물들은 일단 성장하면 대부분 문학을 이탈한다. 하지만 분가한 후에도 언제고 돌아와 문학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때 한집에 살아 서로 닮아서인지 이들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문학 안에 상당한 지분을 꿰차고 앉아 그 방향을 대폭 바꾸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인터넷문학의 에너지는 이런 혈연적 유대를 지나 한층 광활한 전장으로 흐른다. 연못이 깊어봤자 물은 썩게 마련, 강물과 바다를 향해 오래 흘러야만 맑아진다. 영화 「인터넷중독전쟁」(罔癮戰爭)8) 결말에서 ‘칸니메이(看你妹)’가 하늘을 우러르며 백행 장시를 줄줄 외는 독백 장면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금치 못했다. 어쩌면 바로 이런 다중매체 공간에서 인터넷문학은 최대한의 힘을 발산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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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종이문학으로 돌아가자.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모옌이나 왕 안이로 대표되는 ‘엄숙문학.’ (이런 상당히 의심스러운 용어를 자꾸 쓰는 나를 용서하시라.) 이는 백년 전 5·4 신문화운동 속에서 태어난 중국현대문학의 현대판 직계이자 나 같은 연배의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인정하는 정통문학이다. 오늘날 대학 중문과와 중학교 어문교과서에서 가르치고 각급별 작가협회 및 소속 간행물 그리고 대다수 평론가들이 떠받드는 ‘당대문학’(contemporary literature)이란 대부분 이런 문학이다.
2010년, ‘엄숙문학’은 몇차례 매체의 주목을 받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 사회적 영향력은 하락세다. 이런 문학을 다루는 잡지의 판매량도 줄어들고 있다. 간판급 작가들의 판매부수도 바닥을 긴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중대한 사회문제를 토론하는 거의 모든 장에서 ‘엄숙문학’ 작가의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이미 십여년이나 지속되었다. 작년도 마찬가지였다. ‘엄숙문학’ 작가들이 만들어낸 인물, 플롯, 스토리 중 대중의 눈에 찰, 그래서 널리 인용하고 차용하고 개사할 만큼 세태와 민심을 생생하게 드러낸 것은 거의 없었다.
6.
‘엄숙문학’의 침묵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은 새로운 문학의 소란이다. 궈 징밍(郭敬明)은 그런 문학의 제1호 작가다. 그가 주간하는 『쭈이샤오숴(最小說)』를 비롯한 ‘쭈이(最)’자 계열의 잡지들은 새로운 문학을 대표하는 종이매체다. 『런민원쉬에(人民文學)』 『서우훠(收穫)』가 ‘엄숙문학’을 대표하는 종이매체이듯.
이런 문학의 역사는 매우 짧다. 초기의 혼란기를 합쳐도 십오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2010년 『쭈이샤오숴』의 단기 판매량은 이미 30만부를 넘겨 『런민원쉬에』와 『서우훠』를 크게 웃돌았다. ‘엄숙문학’에 눈높이를 맞추는 당신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궈 징밍이 문학이야?” 그렇다. 중국작가협회 대회장에 코디네이터를 대동하고 참석하는 젊은이. 생김새로 보나 사회적 지위로 보나 절대로 문학이 아니다. 자기를 스타로 가꾸는 데 온 정성을 쏟아붓는 그에게 문학은 분명 비즈니스다. 2007년 그의 회사와 스폰서가 공동으로 개최한 ‘문학스타’ 선발대회는 전국적으로 일년 넘게 지속되었다.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는 과정에서 청중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2009년 베이징의 모 고등학교 강당에서 거행한 결승전은 비명을 지르며 환호하는 수만명의 팬—대부분 중학생—으로 대성황을 이뤘다. 이는 이런 문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로 중국 특색의 ‘문화산업’이 낳은 상품이라는 것. 또한 작가 궈 징밍의 정체성도 말해준다. 첫째가 자본가, 다음이 대중스타, 그리고 마지막이 작가라는 것.
어쩐지 『쭈이샤오숴』에 실리는 작가소개는 늘 이런 식이더라니. “몇년 모 회사의 전속작가로 계약, 무슨무슨 작품 출시.” 또, 두번째 장편소설이 법정에서 ‘표절’로 판정났을 때 궈 징밍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배상하죠. 하지만 절대 사과는 안합니다.” 그의 블로그에 몰려든 한무더기의 팬은 이렇게 떠들었다. “어쨌든, 표절을 했건 안했건, 난 당신이 좋다!”
‘엄숙문학’과 확연히 갈리는 이 새로운 문학은 과거의 ‘통속문학’—예를 들어 민국(民國)시대 초엽에 흥성했던 색정소설이나 그 이후의 무협소설—과도 판연히 다르다. 새로운 문학은 작가와 작품의 새로운 관계에 기반해 있다. 작가가 대중의 우상이 되는 관계에서 작가는 작품보다 더 전면에 노출된다. 이런 관계에서는 작가가 표절을 했는지 안했는지 작품이 독창적인지 아닌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독자들의 자아발견에 도움이 되는지, 나아가 상품의 가치를 입증할 찬란한 기호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지, 이것이야말로 중대사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문학이 오늘날 지배층의 유력한 조력자가 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문학은 이제 사회 지배구조의 중요한 일환이자 사회재생산의 핵심적 고리가 되었다. 우둔하진 않지만 결국은 순종적인 청소년을 대량으로 길러내어 그들의 청춘을 땅에 발 딛을 곳 없는 환상이자 대상을 찾지 못한 원망으로 전환시키는 작업. ‘신자본주의’가 현대사회의 본질을 비교적 정확하게 개괄하는 용어라 한다면, 궈 징밍과 『쭈이샤오숴』로 대표되는 일련의 문학이야말로 바로 ‘신자본주의문학’이다.
재미있게도, 밤낮으로 확산되는 ‘신자본주의문학’이 ‘엄숙문학’에 미치는 반향 역시 현저하게 달라졌다. 과거의 경멸도 잠시뿐, 오히려 ‘귀순’을 종용하거나 알랑거리는 상황이 출현한 것이다. 궈 징밍은 중국작가협회의 권유에 따라 이 조직에 가입했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이 법정에서 표절 판정을 받은 이상 기성 회원이라도 제명하는 것이 관례다. 그럼에도 그의 신작은 『런민원쉬에』와 『서우훠』의 주요 지면을 연달아 장악했다. 『쭈이샤오숴』가 모옌이나 왕 안이의 작품을 여전히 거들떠보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궈 징밍과 그 부류가 주도하는 각종 ‘문학’상 심사와 시상식에 싱글벙글하며 참석한 문학계 원로들은 식장 구석에 서서 팬들의 환호를 얻어가진다. 그들은 진작에 파악했던 것이다. 독자든 작가든 젊은층을 쟁취하는 경쟁에서 ‘신자본주의문학’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내키지 않아도 이 말은 해야겠다. 적어도 ‘신자본주의문학’이 종이세계에서 누리는 지금의 위세로 보건대, 가까운 장래에 ‘엄숙문학’을 초월할 가능성은 갈수록 명확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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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세계에 또다른 문학이 있다.
‘엄숙문학’이든 ‘신자본주의문학’이든, 거기엔 배후를 지탱하는 체제와 규범이 있다. 온갖 관변 및 유사 관변 기구들이 협력하여 구축한 주류문학 생산체제, 그리고 중국 특색의 ‘문화산업’—그 정식 명칭은 ‘창의산업’이다—이 주도하는 종이 간행물 생산체제가 그것이다. 이 두 체제는 분명 다르고 때로 서로 격렬하게 충돌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같다. 이들은 하나의 목표를 공유한다. 바로 문학에 내포된 반예속성·반규범성이라는 거대한 에너지를 규제하고 길들여 자기의 소유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문학이 좀처럼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첫째는, 문학의 역사가 ‘경전’을 중심으로 세워졌기 때문이고 둘째, 더 중요한 이유는 매년 새로 유입되는 ‘문학인구’가 젊은층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젊고 활기 있어서가 아니라 현실의 폭력적 억압이 그들을 신음하고 절규하도록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입시교육, 취업경쟁, 치솟는 집값, 정보의 감시와 규제, 공무원 사회의 뿌리 깊은 부패, 실리에 급급한 근시안적 주류문화…… 이런 것들이 거대한 괴물로 변해 젊은이들의 울분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려 할 때, 수많은 반항의 에너지들은 체제가 유도하지 않은 곳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이 에너지를 문학이 전부 받아들이긴 역부족이다. 하지만 만약 다른 영역에서 억압과 위험이 지나치게 크다면, 그 에너지의 상당부분은 문학으로 흘러들 것이다. 억압적 사회구조의 문화적 토대는 나날이 견고해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 이런 구조에 대한 반항 역시 곳곳에서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문학은 그중에서도 제일 선두에 있다. 문학으로 흘러드는 에너지 중 다수가 싸이버공간으로 갔지만 역시 적지 않은 부분이 싸이버 바깥에 있다. 싸이버 공간이 문학의 경계를 교란하면 할수록 더 많은 에너지들이 문학 지면으로 수용된다. 종이의 세계는 좁지만, 거기엔 필경 기성체제 바깥에서 신음하고 절규하는 문학이 존재한다.
십년 이래 이런 문학은 도처에서 일어서고 있다. 그들의 축적된 에너지에 내장된 거대한 잠재력을 어쩌면 당신은 이미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안정적인 윤곽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다. 여기서는 이들 문학의 몇가지 특징을 거칠게 개괄하는 정도로 정리해둔다.
첫째, 주요 작가군을 구성하는 대다수는 젊은이, 즉 바링허우 내지 쥬링허우(90後). 이들은 궈 징밍 같은 저급 글쓰기를 경멸한다. 그렇다고 모옌 식의 작법을 따르고 싶지도 않는 듯하다. 『런민원쉬에』의 후보 작가가 된 지는 오래지만 작가협회에 가입할 의사는 더더욱 없다.
둘째, 분노와 원망에서 출발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이들은 근엄 떠는 걸 부끄럽게 여기고 오히려 냉소적·자학적으로 보이고 싶어한다. 겉보기엔 유약하고 비굴한, 생각이라고는 없는 ‘유희’일 뿐이지만, 거기엔 사회와 인생에 대한 진지한—내지는 격렬한—마음이 담겨있다. 이 지점에서, 표현방식은 천태만상이지만, ‘문학적 반항’이 무엇인지 그 정의가 새롭게 정립되고 있다.
셋째, 싸이버문학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상식을 뛰어넘는 형식을 좋아한다. 금단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문류(文類)를 교란하는 몸짓은 더욱 분주해진다. 『두창퇀(獨唱團)』 제1집에서 한한(韓寒)9)은 대량의 삽화문자를 배치하거나, ‘모두가 모두에게 묻다’라는 항목을 전격 개설하여 온갖 괴상한 질문에 관변(官邊)식 대답들을 배열했다. 의도적으로 자신을 비문학의 틈으로 숨겨넣은 것이다. 2011년 새해 첫날, 『난팡저우모(南方週末)』는 ‘우리 아빠’라는 제목의 산문 열여섯편을 전면에 걸쳐 게재했다. 지면 여백에 베이다오(北島), 하이쯔(海子), 릴케의 시를 몇줄씩 채워넣었으니 엄연한 문학 간행물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자들이 정리한 구술기록 중에는 ‘집안일’을 빙자하여 최근 일년간 쟁점화된 사회문제—취업, 주거, 결혼비용 등—를 다룬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문학이라는 우산을 펼쳐 비문학적인 사안에 대한 견해를 안전하게 피력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렇게 경계선에 바짝 붙어가기 때문에 다수의 젊은 작가들이 살짝살짝 입장할 수 있었다. 여러편의 ‘구술’로 이루어진 합창은 어딘가 삐걱거리는 멜로디가 섞이기도 하고 내용이 서로 대립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작은 틈새건 충돌이 생기는 게 현실 아닌가.
넷째, 아직 이들은 안정된 은신처를 구축하지 못했다. 『두창퇀』 제1집이 해적판을 제하고 150만부가 팔렸지만 제2집은 소각 처분되고 무기한 정간(停刊) 조치를 받았다. 그러니 여기저기 떠돌며 유격전을 펼치는 수밖에. 이러한 틈새와 함정이 들쭉날쭉, 시도 때도 없이 호환되는 세계에서 힘을 얻은 자가 힘을 빌려주지 않긴 어렵다. 이런 문학의 구체적 외형은 텍스트의 내용에서 그 유통방식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변화무쌍하고 애매모호하다. 예를 들어 이들 문학의 대표작가 한한은 소설로 등단했지만 지금은 시평과 산문이 뒤섞인 블로그로 독자와 대화한다. 그리고 2010년 9월 출간된 그의 신작 장편 『1988,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1988—我想和這個世界談談心)의 경우, 백부의 한정판을 찍어 정가 988위안에 10그램의 금괴 막대를 끼워팔았던 것이다!
이토록 모호하고 위태롭지만 나는 그래도 믿고 싶다. 이 광활한 토지, 체제 바깥의 신음과 절규가 비록 종이세계 안이지만 곳곳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릴 거라고. 그들의 목소리는 앞으로도 계속 다른 소음과 뒤섞이게 될 것이고, 그래서 그들의 소리가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목소리를 한층 주의 깊게 듣고 더 정확하게 식별해야 한다. 안정적인 변론능력을 결핍한 외형이야말로 어쩌면 새로운 사물의 특징일지 모른다. 종이세계에 국한해 보자면 중국문학의 생기, 그 엄청난 부분이 바로 이곳에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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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분’과 ‘육분’은 모두 비유다. 문학의 판도란 원래 이런 숫자로 획분할 수 없으니까. ‘성다원쉬에’ ‘블로그문학’ ‘엄숙문학’ ‘신자본주의문학’ 또한, 불가에서 말하는 ‘방편법문(方便法問)’ 비슷한 것일 뿐 깊이 고민해서 만든 개념은 아니다. 사실, 내가 여기서 분류한 문학들 가운데는 서로 통하거나 비슷한 점도 많다. 어쩌면 그런 공통성과 유사성 중 어떤 부분이 그들 사이의 거리나 차이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성다원쉬에’는 최소한 주체의 차원에서 보면 『쭈이샤오숴』식의 종이매체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 ‘신자본주의문학’에 속한다. 그리고 그중 가장 영향력 있는 부분이 최근 몇년 상호공조 아래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온라인 안팎의 다양한 탈경계적 글쓰기들, 특히 정치성이 비교적 강한 작품들 또한 시작 단계부터 서로를 자극하면서 지속적으로 상호보완하고 있다. 애초에 문자에 기반한 풍자적 영감들이 단편 비주얼, 니얼거(擬兒歌),10) 기타곡,11) 소품문(小品文) 등으로 변신하여 극히 짧은 시간 안에 전국으로 퍼져나간다. 유사한 일들이 거의 매일 일어나고 있다. 그러면서 ‘블로그문학’과 ‘엄숙문학’의 많은 작품들이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보수’와 연합하는 양상도 나날이 두드러진다. 이제껏 일부 뛰어난 중견 및 원로 ‘엄숙문학’ 작가들이 지켜온 사회비판의 마지노선과 젊은 세대들이 사면에 꽃피운 ‘체제 밖’ 문학의 풍경, 이 양자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한층 진일보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결론은 명확하다. 중국문학이 너무 크게 변했다는 것, 그래서 반드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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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는 물론 문화영역에서 일어난 최근 삼십년 중국의 사회격변은 기본조건, 규범, 지배구조 모든 면에서 1970년대와 완전히 다르다. 문학세상이 ‘육분천하’가 된 것은 본질적으로는 바로 이런 거대한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작은 범위에서 보면 다른 소소한 원인들도 있다. 그러나 정치, 경제, 문화의 전반적 변화와 문학에서 일어난 다양한 현상 사이에는 특별히 주의를 요하는 일련의 매개고리가 있다. 이 매개고리야말로 문학이 어떻게 변했고 왜 이런 변화가 발생했는지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줄 것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배문화의 새로운 생산기제다. 1990년대 중반 이래 빠르게 구축된 이 생산기제는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문학의 기본적 ‘생산’조건은 물론 판도 자체를 뒤바꾸어놓았다. 도대체 지배문화의 생산기제 어디가 ‘새롭다’는 것인지, 그 ‘새로움’이 문학의 생산조건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에 대해 설명할 지면 여유가 여기서는 없다. 다만 몇가지 중요한 대목만 제시할까 한다.
첫째, 1980년대 말의 사회풍파, 1990년대 초 쏘비에뜨 및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 1990년대 후반 ‘권귀(權貴)자본주의’의 팽창, 그리고 ‘미국모델’에 대한 전지구적 추종이 초래한 환멸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일련의 격변 속에 강화된 보편적인 정치 무력감.
둘째, 보통사람, 특히 도시민 혹은 도시로 가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의 일상을 점점 더 견고하게 억누르는 이데올로기.
셋째, 초등교육 단계부터 강화된 ‘입시교육’이 청소년의 심신에 미치는 거대한 영향력.
넷째, 컨베이어벨트 위의 육체노동은 물론 금융·IT 계통의 화이트칼라, 아니 교육·언론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노동의 강도.
다섯째, 나날이 극심해지는 도농간 문화적 차이. 이와 연동하여, 이른바 ‘국제 대도시’라 자부하는 연해지역 초대형 도시의 내륙지역 및 중소 도시에 대한 압도적 문화우위.
여섯째, 개인용 컴퓨터, 위성TV, 인터넷, 고속도로망, 휴대전화 등 새로운 통신기술과 하드웨어 보급의 증가.
일곱째, 유통시스템 안으로 편제되어가는 문화와 정보의 감시제도. 이런 감시 초점의 전이는 ‘창작의 자유’라는, 1980년대 수많은 사람들을 흥분시켰던 신성한 단어를 무용지물로 변질시켰다.
이상은 문학 안팎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한, 작지만 의미심장한 주석이다. 더 나열할 게 있지만 제시한 일곱가지가 제일 중요하다. 이 중에는 우리가 과거에 주의하지 못했던, 그래서 한층 낯설어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낯섦은 무의식적인 위축을 수반한다. “이런 건 다 문학 바깥의 사정이다. 문학연구자인 나랑 무슨 상관인가?” 지난 십년간 이러한 말들을 어찌나 많이 들었는지.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오늘의 중국문학을 효과적으로 해석하고 앞으로의 변화 가능성을 판단하려면 앞서 나열한 사항에 반드시 관심을 기울이고 이해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식과 분석사유, 연구방법을 부단히 확장해야 한다. 문학연구의 영역이 지나치게 넓어져 연구의 난도가 증가한다 해도 말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문학의 범위는 이미 넓어지고 있다. 문학에 대한 압살이든 이용이든, 반항이든 몸부림이든,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 익숙한 그 ‘문학’ 바깥의 공간에서 나날이 현저하게 증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실로 우리의 무관심과 보신주의를 용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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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이 급격히 퇴색하면서 몇백만, 몇십만 부에 달하던 문학잡지의 판매량이 만 단위 심지어 천 단위로 곤두박질쳤다. ‘현대사회에서 문학의 침묵은 필연’이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가장 빈번하게 거론되는 예가 미국이다. 어떤 논자는 문학적 쎈세이션의 실종이 오히려 중국 현대화의 진전을 방증한다고 말한다. 십년이 채 안되는 시간 동안, 점점 더 많은 작가와 연구자 들이 이런 생각에 동조하며 차츰 위안을 얻고 있다. 더이상 당황해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당연히 반성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눈앞의 상황은 분명하다. 오늘날 세계의 문학현실은 천태만상이다. 분명 포크너와 헤밍웨이 같은 문학은 미국에서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과 남미, 아시아의 수많은 다른 지역에서 문학은 여전히 정신생활의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회적 영향력 또한 매우 크다. 특히 중국의 경우, 인터넷의 보급과 인터넷문학의 흥성으로 인해, 일상적으로 일정 분량의 문학작품을 읽는 데 익숙한, 그래서 ‘문학인구’로 분류되는 독자의 총량과 그 반대편에 있는 각종 오프라인 문학작품의 출판수량이 사실상 모두 증가하고 있다. 앞서 제시한 거친 개괄은 종이로 된 ‘엄숙문학’이 전체 문학계에 점하는 지분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음에도, 이런 문학세계의 판도 자체는 나날이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지난 백년의 상황과 지금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오늘날 중국사회의 정신적 에너지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문학세계에 집중되어 있다. 이 점에서 ‘성다원쉬에’의 경영자들은 나와 판단을 공유한다. 나처럼 그들도 적어도 앞으로 꽤 긴 시간 동안 문학이 여전히 중요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물론, 문학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입장이 크게 다르겠지만. 중국인의 상당수가 ‘창의적’이라고 여기는 그들은 이런 시대에 문학의 ‘창의성’이야말로 가장 돈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사회 전반이 자기에게 맞는 현대의 방향을 개척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분투하는 지금, 중국엔 위대한 문학이 있어야 한다고. 19세기 러시아문학처럼 민족과 사회의 정신수준을 높일, 위대한 문학의 모습이 더는 똘스또이나 도스또옙스끼, 체홉 같지는 않더라도 말이다—물론 당연히 달라야겠지만.
오늘의 중국문학에 깊이 절망하면서도 뜨거운 관심을 놓지 않고 심지어 ‘문외한’의 멋쩍음을 무릅쓰며 최근의 변화상을 그려본 것도 이런 믿음 때문이다. 이번 정리를 거치면서 나의 믿음이 약간의 물증을 얻은 것 같다.
번역 | 백지운・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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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 학술지 『文學評論』(2011年 第5期)에 실린 「六分天下: 今天的中國文學」을 옮긴 것이다. 지면사정상 원문의 주는 대부분 생략하고 한국 독자의 이해를 위해 옮긴이주를 달았다. ⓒ 王曉明 2011/한국어판 ⓒ 창비 2012
1) 초창기 중국 인터넷문학의 대부.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지금껏 수수께끼다. 1993년 전세계 중문 싸이버공간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산문, 우언(寓言), 소설, 잡문 등으로 인기를 누리다 1996년 돌연 인터넷세상을 떠난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옮긴이.
2) 錢亦蕉 「文學, “夢開始的地方”: 盛大文學公司CEO侯小强專訪」, 『新民周刊』 2009年 2期.
3) 1920~30년대 중국의 대표적인 통속소설가. 전통적 장회(章回)소설과 서양소설의 기법을 융합했다. 50여년의 생애 동안 100여편이 넘는 통속소설을 남겼다—옮긴이.
4) 한동안 인터넷상에 유행했던 비주얼 동영상이 딸린 노래. ‘차오니마’는 황량한 자갈밭에 사는 신비한 동물 이름으로, 이 노래는 척박한 환경에 굴하지 않는 차오니마의 강인한 생명력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차오니마’는 성적인 의미의 욕설 ‘操你妈’와 동음어이다. 노랫말에는 유사한 욕설과 동음으로 된 일련의 명사들이 등장해 웃음을 자아낸다—옮긴이.
5) 사진과 카툰으로 표현된 표어 씨리즈. “여자가 정숙한 이유는 덜 예쁘기 때문이다” “소년팔이 성냥, 불장난은 본성, 불장난은 쾌락” “재주는 어린애처럼 뱃속에 오래 품어야 표가 난다” 같은, 상식을 비꼬는 말장난 형식이 주를 이룬다—옮긴이.
6) 인터넷에 연재된 역사고사로 한동안 ‘명나라 붐’을 크게 일으켰다. 작가 당니엔밍위에는 광둥성 공무원으로 알려져 있다. 2006년부터 2009년에 걸쳐 연재됐다—옮긴이.
7) 2008년 인터넷에서 크게 유행했다. 직역하면 ‘간장을 치다’라는 뜻인데,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만나면 모른 척 ‘지나간다’는 의미로 쓰인다. 도의적으로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행동은 보신주의로 일관하는 비폭력·비참여적 태도에 대한 허탈과 조소를 내포한다—옮긴이.
8) 원제는 ‘칸니메이의 인터넷중독전쟁’(看你妹之網癮戰争)으로, 주인공 이름을 딴 ‘칸니메이’ 씨리즈의 세번째 작품이다. 러닝타임 64분. 제작기간 약 3개월. 먼저 감독이 극본을 쓰고 네티즌에게 게임으로 시연하게 한 후 다시 네티즌의 참여로 음향을 넣었다. 영화 제작엔 전기세와 인터넷 요금 외에 단 한푼도 들지 않았다—옮긴이.
9) 1982년생. 작가이자 프로 카레이서. 잡지 『두창퇀』 편집인. 1999년 첫 소설 『삼중문(三重門)』이 190만부 이상 팔리며 ‘바링허우’ 붐을 일으켰다. 2010년 미국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하나. 파워 블로거로서 중국사회를 비판하는 신랄한 에세이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옮긴이.
10) 동요(童謠) 형식 안에 정치풍자 내용을 담은 노래—옮긴이.
11) 기타 반주에 온갖 불만을 담아 부르는 노래—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