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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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제 裵龍齊

1964년 전북 정읍 출생.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삼류극장에서의 한때』 『이 달콤한 감각』이 있음. crazydream21@hanmail.net

 

 

 

직립의 어둠들

 

 

여기저기 어둠들이 직립으로 서서 허공을 바라본다

가만히 쓰다듬자

손끝으로 전해오는 저림이 가슴까지 저며온다

 

먼 불빛에도 놀라 돌아보는

어둠도 떨리는 심장을 품고 있음을,

검은 피가 천지사방으로 솟구칠 때마다

세상은 너무 오래된 어둠의 내력을 읽으며 꿈의 이름을 짓는다

그 피가 온몸으로 흘러든다

 

어둠과 우리는 똑같은 영혼을 가졌던가

깜깜한 바람의 언어로 방언을 외치며 떠다니는 어둠의 魂들과

핏빛 십자가의 계보를 따라

공기방울처럼 떠올라 지상에서 사라지길 기대하는 우리의 靈은

허공의 같은 자궁 속에서 잉태되었던가

그러므로 지상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치욕적일 수 있다

 

검은 피를 수혈받은 자들은 알지

삶도 하나의 상상 같아서

마른 빵처럼 딱딱해진 풍경을 내던지며 쉽게 절망할 수 있다는 것

모든 것이 허물어지면 비로소

제 몸 안에 환각의 풍경을 가득 채웠다는 것

 

어쩌면 직립보행의 근원은 어둠일지 모른다

우리가 유일하게 이루어낸 완전한 진화는

서성이며, 혹은 안절부절 두리번거리며

어둠을 흉내내는 일

잠시 지상에 머물다 떠나는 어둠들은

맨정신으로 치욕을 견디는 방법이란 직립밖에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바람의 방언까지 완전하게 익히면

우리는 완벽하게 죽을 수 있을까

 

 

 

오렌지의 올바른 사용법

 

 

우는 방법을 오래 잊어버렸다 끊임없이 갈증이 일었다 간혹 풍경에 구멍을 뚫어보면 마른 연기들이 솟구쳤다 텅 빈 하수구 속으로 흘러가는 썩은 바람의 희미한 비명들이 들려왔다 두 눈에선 붉게 달아오른 정액 냄새가 흘러나왔다

너는 해변의 묘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속에서 묘비명처럼 그럴싸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갈증이 나면 두꺼운 오렌지의 껍질을 벗기며 말했다 과즙 알맹이를 터트릴 때마다 꼭 눈물방울을 깨무는 거 같아요 오렌지의 껍질들은 너무 두꺼워 네 아랫도리 한가운데서는 오렌지 눈물 맛이 났다 나는 지하에 매설된 파이프처럼 단단한 통로가 되어 너를 흘려보냈다 속살을 드러낸 눈물은 은밀한 체위처럼 달콤한 것일까 그러므로 너와 나로 이어진 모든 통로는 그 사진 속의 먼 나라 프랑스 묘지로 연결된 것은 아닐까

우는 방법을 잊은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몸이 헐렁해졌다 아마 울음은 몸속의 내장 중에 가장 오래된 장기(臟器)였을 것이다 아니 몸보다 먼저 나를 이룬 최초의 심장이었을 것이다 단연코 나는 오렌지의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종족이었을 것이다

오렌지는 너와 나의 체액이 되어 서로의 구멍 속을 들락거렸다 캘리포니아 마른 땅 어디선가 너에게 오기까지 어떤 혈통의 눈물을 익혔는지 궁금해진다 이미 해변의 묘지 깊숙한 내부에 도착한 오렌지의 눈물 속에서 죽은 물고기들이 자기의 죽음을 씻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와 내가 오렌지를 올바르게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너는 정확한 사용법을 알고 있었는지

본디 울음이 자신에게 자신을 증명하며 부호들을 새겨넣는 것이라면 최초가 사라진 나는 마른 바탕만 겹겹이 쌓이는 붉은 눈 속으로 들어가 증발하는 최후만 남아 있을 것이다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