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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사랑의 근친

장석남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유준 劉俊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존재론적 충일성에 대한 꿈: 은희경론」 「시적 대의를 옹호하며」 등이 있음. yjnamu@hanmail.net

 

 

2031장석남(張錫南)의 시에서는 허밍이 들린다. 대숲에 앉아 바람을 연주하는 그의 허밍을 듣고 있노라면 “자연의/태곳적 선물들에 둘러싸여(…)단순함과 아름다움과/타고난 우아함을 조용히 풍기는 인간을”(윌리엄 워즈워스 『서곡』, 김숭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9, 229면) 목가풍으로 노래했던 워즈워스의 음성이 메아리쳐오기도 한다. 물론 장석남이 인간의 자유와 (전)인성을 왜곡시키는 구조에 대해 명시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조화로운 물리적・내면적 전원의 기록들을 읽다보면 우리의 몸과 마음이 거주하고 있는 자리가 불편해져옴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장석남의 시는 인공낙원에 길들여진 우리의 미(적 감)각에 대한 훌륭한 교정책이기도 하다.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 2012)를 정독하고 나서도 아무런 불편 없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켤 수 있다면, 이미 장석남의 근친은 아니리라. 즉 ‘품성의 총체성’(쉴러)이 구현된, 혹은 적어도 그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유기체는 아니라는 것이고, 고요가 도망가건 말건 하등 관심도 없다는 것이다. 삭은 모래자루들에서 흘러나오는 모래를 통해 “게으른 평화”(「가을 저녁의 말」)를 보고, “속이 울음인 사람/다랑이 논둑길을 걸으면 낫는다”(「다랑이길」)고 말하는 시인, 아울러 “내 유산으로는 징검다리 같은 것으로 하고 싶어/꽃처럼 옮겨가는 목숨들의/발밑의 묵묵한 목숨”(「나의 유산은」)이라고 말하는 시인에게서 안빈과 소박과 겸애의 미덕을 갖춘 ‘자연의 아이’(워즈워스)를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덕을 통해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두고 ‘자유로운 바라봄의 작업’이라고 했던, 그리고 그 작업을 통해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쉴러적 방식에 가까운 것이라 할 만하다.

장석남을 두고 워즈워스를 빌려 ‘자연의 아이’라 했지만, 그의 자연은 기실 주로 상상력에 의해 채색된 워즈워스의 자연보다 훨씬 더 직접성을 갖는다. 이 시집 전체의 첫 시행이 “돌 위에도 물을 부으면/그대로 의미심장”(「의미심장(意味深長)」)인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에 충실하되, 그 약동하는 현재성 위에 의미심장한 어떤 정신성을 구현해낸다. 그 때문인지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즐거움이 곧 선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홉개의 계단을 가진 방/왼쪽엔 신()이 사는 산이,/오른쪽엔 세속(世俗)이 아홉층/마당으론 저승을 아는 호수(湖水)/나는 그중 하늘 쪽에 가깝고 싶지만/나는 하늘에서 사는 사람이 되지 못하므로/술을 마시고 죄를 삼키고 꿈을 부른다네”(「빈방—남지암(南枝庵)을 기록함」)라는 읊조림에서 우리는 에피쿠로스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스토아적인, 노장적이면서도 또한 공맹적인 울림을 발견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가 만물과의 조응 속에서 시작(詩作)과 더불어 나무를 심거나 정자를 짓거나 하며 몸의 감각들을 통해 또다른 창조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언젠가 산문에서 밝혔듯 거문고, 서예, 고전음악, 고서 등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쏟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자연 속에서 품성의 총체성이 구현된 ‘유기체적 전체’에 가닿으려는 노력의 일환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가 인터뷰에서 “이웃한 것을 모르면 그건 온전하지 않은 게 아닌가”라고 한 말을 통해서도 그러한 점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이런 측면에서 그의 작품과 시작(과 관련된) 행위는 우리에게 매우 각별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문단 내적으로는 ‘전위적 파격’과 ‘고루한 서정’을 동시에 경계하며, 시적 근원과 갱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사유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문단 외적으로는 자신, 타자, 자연과의 관계에서 겪는 극심한 소외라는 근대 이후의 고질병 및 전인적 감각의 하향평준화 경향에 맞서는 부드러운 저항의 방식을 보여준다. “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이른 봄빛의 분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발목이 햇빛 속에 들었습니다/사랑의 근원이 저것이 아닌가 하는 물리(物理)도 생각하고 있습니다/이 빛이 그 방에도 들겠는데/가꾸시는 매화 분()은 피었다 졌겠어요/흉내 내어 심은 마당가 홍매나무 아래 앉아 목도리를 여미기도 합니다/꽃봉오리가 날로 번져나오니 이보다 반가운 손님도 드물겠습니다”(「안부」)라는 아름다운 한 자락의 ‘안부’ 속에서 우리는 그 한 예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사랑(의 근원)”이란 프레더릭 바이저가 초기 독일낭만주의의 사랑의 윤리학에 대해 내렸던 정의 즉, “우리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자연과 하나로 존재했던 저 황금시대로 돌아가려는 열망”(『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 김주휘 옮김, 그린비 2011, 193면), 바로 그것이리라. 그리하여 그의 시는 자신의 근친이고, 타인의 근친이며, 자연의 근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의 근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