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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신생을 향한 죽음충동

김태용 소설집 『포주 이야기』

 

 

노대원 魯大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지하미궁, 그 지독한 악몽으로부터의 탈출 「이색직업의 탄생」이 있음. naisdw@empal.com

 

 

2031김태용(金兌墉)은 소설의 형식으로 소설 언어와 이야기를 집요하게 탐문한다, 아니, 고문한다. 그 과정에서 날카롭게 발산되는 파열음과 신음은, 혹은 그 배설물은 독자들에게 그를 ‘어려운’ 소설가로 여기게끔 한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더 재치있게 말하자면 “김태용 소설은 읽기의 어려움에 대해 쓰는 소설이며, 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복도훈)일 것이다. 그 반대편 자리에 박형서(朴馨瑞)가 있다. 박형서는 이야기 재미의 최대치를 구현하면서 동시에 이야기의 존재 의미를 탐문한다. 두 작가는 현시점에서, ‘소설을 묻는 소설’의 두갈래 길을 대표한다. 그들은 진중하게 포월(抱越)하거나 혹은 유쾌하게 질주하고 있다.

지면이 적다. 얼른 포주 이야기(문학과지성사 2012)의 허리를 낚아채보자. “허구와 서사에 능통한 자가 쓰는 권태로운 문장의 시작. 시작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중심과 무관한 중간. 다시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돌아갈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어느 지점이다.”(허리 166면) 우선, ‘허구와 서사에 능통한 자가 쓰는 권태로운 문장’이란 말을 김태용 소설에 대한 자기지시적 논평으로 삼으면 어떨까? 김태용은 「나는 언제까지 젊고 아름다운 것일까」(망상 해수욕장 유실물 보관소, 뿔 2011) 같은 흡입력 있는 단편 스릴러의 작가. 그런 그가 다른 한편으로 ‘권태로운 문장’, 즉 자기반성적/반영적 해체구성이 서사 원리인 소설들의 대표 작가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여러 평론가들은 김태용의 최근 단편들을 ‘죽음의 글쓰기’로 명명하거나 거기서 죽음충동과 반복강박을 읽어낸다. 더없이 적절하고 명쾌한 지적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향한 소설 쓰기는 어떤 강렬한 열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 앞에서 인용한 두번째 문장을 뒤틀어서: “죽음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니까, 김태용 소설에서 그 숱한 죽음의 풍경들은 죽음을 위하여 쓰이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앞에 둔 자의 글쓰기를 보자.

 

나는 포주였다. 과연 나는 포주였다,라고밖에 쓸 수 없는가.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 나는 포주였다,라고 쓰기 이전부터. 글은 얼마든지 다시 고쳐 쓸 수 있다. 인생은 다시 고쳐 쓸 수 없다. 글 역시 다시 고쳐 쓸 수 없다. 다시 고친다고 해도 나는 포주였다,라고 시작하는 글이 되고 말 것이다. 나는 포주였다. (포주 이야기 26면)

 

자서전이자 유서의 형식으로 씌어지는 이 소설은 언제나 첫 문장 “나는 포주였다.”로 회귀한다. 그것은 자기처벌의 회한이고 참회인가? 아니면, 포주에서 ‘언어의 포주’이자 ‘언어의 포로’가 된 자가 행하는, 뒤틀린 우월감에서 비롯된 자기고백인가? 서술자는, 삶의 수정 불가능성에 직면해서 그 불가능성을 반복의 형태로 위반하고자 꿈꾸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들뢰즈(G. Deleuze)는, 프로이트를 다르게 반복하면서, 죽음충동을 무기적인 물질상태로의 회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반복은 우리를 이 가면에서 저 가면으로 옮겨가게 하며,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다르게 연극하도록 하는 충동이라는 것. 반복은 신생(新生)을 향한 죽음충동이다.

김태용 소설은 일링크스(Ilinx)의 서사 시학이다. 프랑스 인류사회학자 로제 까이와에 의해 놀이의 네가지 범주 가운데 하나로 채택된 일링크스는, 그리스어로 물의 소용돌이를 뜻하며 현기증(ilingos)이란 말에서 파생되었다. 김태용의 메타픽션적 서술자들은 극도로 자기반성적이지만, 한편으로 여러 서술자/인물들은 현란한 일링크스의 놀이충동에 몸과 의식을 내맡기기도 한다.

김태용의 많은 인물들이 유사 죽음이나 죽음 직전의 마비상태에 이른 것과 같은 맥락에서, 소설에는 배설과 탈진의 모티프 또한 넘쳐난다. 또한 ‘충동’이나 ‘환각’이라는 말은 얼마나 빈번하게 나타나는지. 그들은 정신의 혼란, 육신의 탕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신의 혼돈 속에서 곧 체력이 고갈돼갔다”(웅덩이 118면)라는 문장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배설하듯이, 몸을 벗고 의식을 벗는다. 일링크스의 서사충동은 퇴행과 추락, 다시 말해 죽음 가까이로 다가가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현기증 나는 일탈과 위반은 자기방기의 해방감과 관련되어 있다. 나를 벗고 새로이 태어나도록 하는 것! 김태용이 상상하는 세계의 문장은, 그러므로 언제나 이렇게 끝날 것이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시오.”(머리 2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