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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한국사회의 모순과 2013년체제

 

 

김기원 金基元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저서로 『경제학 포털』 『재벌개혁은 끝났는가』 『미군정기의 경제구조』 등이 있음. kwkim@knou.ac.kr

 

 

1. 한국은 선진국인가

 

한국은 1인당 소득이나 산업구조 면으로 보면 이미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어이없어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보수파는 국민을 더 채찍질하려고 선진국론을 부정한다. 선진국이란 말을 들으려면 1인당 GDP가 적어도 3~4만달러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진보파는 진보파대로, 한국처럼 문제투성이인 나라에 대해 어찌 선진국이란 좋은 어감의 단어를 적용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자학하지는 말자.

2011년 한국의 1인당 명목 GDP24천달러지만, 구매력으로 따지면 32천달러다. 같은 구매력기준(purchasing power parity)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진국이라고 여기는 나라들과 비교해보자. 미국과 스웨덴은 각각 48천달러, 41천달러로 우리보다 꽤 높다. 하지만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은 각각 38천달러, 36천달러, 35천달러, 34천달러로 조금 높을 뿐이다. 또 스페인, 이딸리아, 뉴질랜드는 각각 31천달러, 3만달러, 28천달러로 우리보다 도리어 낮다.

그동안의 압축적 고도성장으로 1인당 소득 면에서 한국의 세계적 위상이 비약한 것이다. 실제 선진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의 소비수준이 그들에 비해 별로 떨어지지 않는다. 전자제품 A/S, 깨끗한 공중화장실, 인터넷 서비스 등 소비자의 관점에서 유럽보다 크게 앞선 부분도 널려 있다. 산업구조 면에서도 한국은 선두그룹에 속한다. 메모리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 주요 제조업 생산에서 한국은 대체로 5위 이내의 세계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니 200여개 국가 중 G20에 끼어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삶의 질은 GDP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범죄율, 교통사고율, 공해, 노후안정, 사회갈등, 문화수준, 정치적 자유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GDP 이외에 이런 것들의 상황도 좋아져야 국민이 행복해지고 ‘바람직한’ 선진국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은 1인당 GDP는 높으나 인구 대비 수감자 수는 다른 선진국의 5배 정도로 많으니 바람직한 선진국이라 할 수 없다. 한국도 1인당 GDP 면에선 선진국 수준이지만 총체적 삶의 질에선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바람직한 선진국이 아니라 문제투성이 선진국인 셈이다.

앞으로도 한국에선 경제성장이 불가결하다. 도인의 삶을 추구할 수 없는 일반 대중에게 풍요로움을 증대시키는 성장을 도외시하라는 건 무리한 요구다. 또 20세기 초반의 아르헨띠나처럼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가 미끄러진 사례를 보더라도 현실에 안주할 수는 없다. 경제가 침체를 계속하면 2012년 현재 실업률이 대공황기 미국 수준의 25%까지 올라간 스페인처럼 위기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재벌-수출 주도의 성장모델 쪽에서 예컨대 중소중견기업-내수-남북한협력 주도의 성장모델 쪽으로 옮겨가는 것이든 어떻든 새로운 성장모델도 필요하다. 복지강화의 경우에도 도덕적 해이를 초래할 수 있는 복지보다는 가족, 교육, 고용 면에서의 성장친화적 복지에 역점이 놓여야 한다.

하지만 성장만능주의 시대가 끝났다는 점도 깨달아야 한다. 한국도 다른 선진국처럼 저성장 또는 중성장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1960~80년대에 누렸던 8~9%의 경제성장률이 3~5%로 떨어졌다. 높은 성장률로 다른 사회문제를 덮어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자본 면에선 산업구조가 성숙함으로써 새로운 성장산업을 찾기가 힘들어졌고, 노동 면에선 고령화가 급진전하고 있는 탓이다.

따라서 성장을 무시하지 않되 이제는 총체적 삶의 질 문제를 따질 때가 된 셈이다. 사람 사는 세상 어디라고 걱정거리가 없을 수 있겠느냐만,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에서 드러나듯 바람직한 선진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시정해야 할 한국사회의 모순은 심각한 상태다. 그 모순은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차원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겠으나, 경제적 모순을 중심으로 보면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이라는 세개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2.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

 

‘고단함’이란 생산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다. 생산과정에는 한편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과정과 다른 한편으로 그 생산에 투입되는 노동력을 생산해내는 과정이 포함된다. 한국인들의 삶은 이런 두개의 생산과정 속에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고단하다.

우선 남보다 우월한 듯이 보이는 노동력을 생산하려고 어릴 때부터 지옥 같은 수험경쟁에 시달린다. 사실 이런 높은 교육열이 배출해낸 대량의 우수한 노동력이 우리 경제성장의 견인차였다. 그러나 과도한 수험경쟁 탓에 인격함양이나 창의력과는 거리가 먼 문제풀이 기술 중심 교육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하여 공교육이 허물어지는 가운데 군비경쟁과 마찬가지로 낭비적인 사교육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게다가 선진국 모방성장이 끝나가는 오늘의 한국에선 창의력을 억압하는 교육이 경제성장에도 유해하게끔 되었다.

80%라는 세계적인 대학진학률에서 보듯이 교육의 고단함은 전국민적 고단함이다. 굳이 대학 가야 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인 학생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대학으로 몰리니 학생 자신이 고단하고 부모도 고단하다. 하층가정은 말할 것도 없고 중산층가정도 자식교육 뒷바라지하느라 살림에 핍박을 받고 가족의 즐거움 따위는 내팽개친다. 기러기 가족이라는 현상을 어느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대학 들어가서도 낭만을 향유하고 큰 뜻을 기르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대졸자가 늘어난 반면에 그들이 선호하는 ‘괜찮은 일자리’는 크게 줄어 대학이 취업학원으로 변모해가기 때문이다. 그리해 학생들은 스펙 쌓고 학점 세탁하고 각종 고시 준비하기 바쁘다.

취직해서도 고단함은 계속된다. 한국의 노동시간은 과거에 비해 다소 줄기는 했으나 2010년 현재 연 2200시간 정도로 OECD 평균 1750시간에 비해 약 450시간 더 길다. 또한 늙어서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노인 비율 역시 엄청나게 높다. 2009년 현재 65세 이상 노인고용률이 30%로서 OECD 평균인 9%의 3배 이상이다.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 비율도 OECD 내에서 가장 높은 편으로 다른 선진국의 3배에 달한다.

‘억울함’은 1차 분배과정의 문제로서, 시장에서의 소득분배가 사회적 가치 창출에 대한 기여에 걸맞게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데 대한 억울함이다. 재벌거대기업이 독점력으로 중소중견기업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시장구조 탓에 재벌거대기업은 살찌는 데 반해 중소중견기업은 근근이 버티고 있다. 납품단가를 후려치고, 중소중견기업 기술을 탈취하고, 리베이트를 강요하고, 총수 친인척이 사업영역을 침범하니 구미식의 공정한 경쟁이든 일본식의 온정주의적 동반성장이든 어느 쪽도 자리를 잡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리하여 중소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경우는 기적에 가까운 예외에 속한다. 그들 사이에 넘기 힘든 분단의 장벽이 있는 셈이다. 19936만개 가까운 중소제조업체 중 10년 후인 2003년에 종사자 500인 이상의 대기업으로 성장한 사례가 고작 8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한다. 또한 1990년대 이후로는 경제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견기업(종업원 200~499인)의 비중은 줄어든 반면, 영세기업(종업원 10~19인)과 소기업(종업원 20~49인)의 비중은 크게 늘어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기업 사이의 이런 억울함과 더불어 노동자 사이에도 불공평한 대우라는 억울함이 존재한다. 공무원과 공기업 종사자의 대우는 일부 민간거대기업에는 못 미치지만 다른 선진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그래서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신이 내린 직장’ 운운하게까지 된 것이다. 비슷한 능력을 보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직업의 안정성이 높은 경우에는 소득수준이 낮아야 공평한 법인데, 87년체제에서 강해진 관료 및 공공부문의 세력 탓에 이런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

민간거대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및 중소중견기업 노동자) 사이에도 부당한 격차가 존재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능력이나 근속연수 같은 개인적 특성을 제외하고 민간거대기업 정규직이 대략 20%의 임금을 더 받는 걸로 추정된다. 그리고 2005년 한국에서 임금 상위 10% 평균은 하위 10% 평균의 4.5배로서, 그 차이는 북유럽의 2.2~2.6배는 물론 OECD 평균 3.4배보다도 훨씬 컸다.

노동능력에 따른 합리적 격차에 대해선 사람들이 납득하지만, 운이나 ‘빽’이나 조직력에 의한 격차에 대해선 억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자동차공장에서 오른쪽 바퀴를 장착하는 정규직과 왼쪽 바퀴를 장착하는 비정규직 사이에도 엄청난 차별이 존재하기까지 했다. 법원의 불법판정으로 인해 이런 노골적인 사례는 줄어들었으나, 업무를 구별함으로써 부당한 격차를 은폐하는 형태로 바뀌었을 뿐이다.

1987년 민주화 이전엔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사이에 넘기 힘든 신분적 차별이 존재했다. 그 둘은 명찰이나 출입 식당이 다르기까지 했다. 87년체제에선 그런 차별은 약화되고, 대신에 거대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및 중소중견기업 노동자) 사이의 신분적 차별이 심화되었다. 힘들고 위험한 일은 주로 비정규직이 담당한다. 일하는 공간이 다른 경우에는 그런 차별을 간과할 수도 있겠으나, 함께 일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은 견디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 때문에 근래 터져나오는 노사갈등의 많은 부분은 비정규직 문제였다.

영세자영업자 역시 비정규직만큼은 아니더라도 억울함 또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대기업들이 구멍가게 상권까지 넘보고 대기업 정규직이 노동귀족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영세자영업자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양면적 성격을 갖는데 그 양면에서 모두 억울한 처지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과거에 비해 줄기는 했으나 여전히 계속되는 투기와 부패에 따른 불로소득 역시 대중의 박탈감을 불러오고 있다.

‘불안함’은 2차 분배과정 곧 재분배(복지)의 문제다. 이전의 고성장 단계에서는 성장 자체가 복지문제를 은폐했다. 국민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급격하게 향상되어갔으므로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불안감을 압도했던 셈이다. 그러나 고성장단계가 끝나고 중성장·저성장 단계로 접어드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에 걸맞은 사회안전망의 미비가 불안감을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핵가족화에 따라 가족복지가 해체되면서 그를 대신할 사회복지의 미비에 따른 노인층의 불안이 특히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자식 뒷바라지 탓에 저축한 재산은 변변찮은 반면에 연금제도는 아직 불충분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2010년말 한국 노인의 빈곤율(중위소득의 절반 이하)47%로 OECD 평균인 17%의 3배에 육박하고, 한국 전체 인구 빈곤율인 14%의 3배를 초과한다. 독거노인의 경우는 더욱 심각해 빈곤율이 77%에 이른다. 때문에 노인 자살률이 젊은이의 3배가 넘고, OECD 평균의 5배에 이르고, 20년 전에 비해 5배 이상 급증한 것이다.

자녀 장래에 대한 불안과 아동복지의 미비로 합계출산율은 세계 최저수준인 1.2명 정도다. 쌍용자동차나 한진중공업 등에서 구조조정 반대 결사투쟁이 일어난 것도 북유럽 복지국가와 달리 실업수당제도와 재취업지원제도가 미비하다는 불안요소가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리하여 복지에 대한 갈망은 빈곤층에 국한되지 않고 중산층에서까지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중산층도 언제 하층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은 경제적 차원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남북한의 긴장관계 탓에 고단한 병영생활을 거쳐야 하며, 종교적・양심적 병역거부자는 감옥행이다. 이명박정권하에서 진행된 민주주의 후퇴로 ‘미네르바’ 사건처럼 억울하게 구속되는 일도 발생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검찰과 법원에서 억울한 처우를 받는 일도 흔하며, 진보개혁세력은 보수수구언론에 의해 억울한 중상모략을 당하기 일쑤다.

그리고 양극화가 심하고 복지가 취약하니 치안이 불안해 아파트를 선호하고, 고급아파트에선 이중삼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한다. 부자들도 불안한 것이다. 광우병 같은 일로 인해 먹거리에 불안을 느끼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왕따나 폭력에 시달릴까 불안하기도 하다. 김대중·노무현정권의 ‘햇볕정책’을 걷어찬 이명박정권의 ‘비바람정책’으로 인해 남북관계 역시 연평도 포격 같은 준전시사태까지 발생해 국민 전체가 불안함을 떨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 모순의 산물인 셈이다. 다만 이런 모순을 얼마만큼 심각하게 인식하고 또 어떤 데서 해법을 찾는가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 차이가 ‘진보↔보수’ ‘개혁↔수구’ ‘남북한 평화협력↔남북한 긴장대결’이라는 3차원의 주요 대립전선을 만들어낸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따위의 이념 대립을 넘어서 통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그러나 진정한 통합이란 차이에 따른 대립을 무조건 덮어버림으로써 가능한 게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지배질서를 온존시키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서로의 대립지점과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고, 양립 가능한 대립과 해소해야 할 대립을 구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의 대립전선을 확인하는 것은 바람직한 선진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과제다.

 

 

3. 한국사회의 3차원적 대립전선

 

정치를 하면 무얼 먼저 하겠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일찍이 공자는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으며,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必也正名乎 (…) 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고 답했다. 오늘의 한국 현실에서도 바로 그에 해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재벌 개념에 대한 혼란으로 재벌개혁의 원칙과 방향성이 갈팡질팡하고 있다. 친북이니 종북이니 하는 애매한 용어를 동원한 색깔론은 이성적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딱지 붙이기는 시장의 의의와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흔히들 엄밀한 정의 없이 막연한 느낌만으로 사용하는 진보↔보수, 개혁↔수구 같은 용어도 마찬가지 형편이다.

진보(進步)라는 글자를 뜯어보면 전진해서 나아가는 것이니, 퇴보(退步)가 그의 반대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보수(保守)라는 글자를 뜯어보면 뭔가를 지키는 것이니, 바꾸는 것 즉 혁신(革新) 같은 말이 그 반대말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정의는 일견 그럴듯하지만 현실에 적용하면 금방 난관에 봉착한다.

전진한다는 게 도대체 무언가 하는 문제다. 생산기술의 진보 같은 건 쉽게 이해가 간다. 하지만 전쟁무기 기술의 발전을 진보라 하기엔 께름칙하다. 그리고 가족 사이의 정서적 유대를 약화시키는 여성의 사회취업 증가는 진보인가 어떤가. 또 보수가 지키려고 하는 게 도대체 뭔지가 분명해져야 그 개념이 현실적합성을 갖는다. 일본이나 구미의 사전들을 들춰보아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기존 정의들의 합리적 핵심을 발전시키되 실천적 목적의식을 전제한 새로운 개념정의가 필요하다.

우선 ‘진보=좌파’ ‘보수=우파’라는 등식에서 출발해보자. 남북한이 대치하는 한국에선 좌파라면 북한체제를 동경하는 ‘빨갱이’를 연상시킨다. 때문에 많은 진보파는 좌파라는 용어의 사용을 기피한다. 그런가 하면 좌파를 자처하는 일부 진보파는 오히려 북한체제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반면에 보수파는 진보파를 빨갱이와 동일시하고자 좌파라는 용어를 즐긴다. 남북대치 상황에서 ‘진보=좌파’ 개념의 복잡성을 말해주는 셈이다.

남북한의 적대관계가 해소되고 나면 좌파라는 용어를 훨씬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겠으나, 그 이전에는 좌파라는 용어의 사용을 어느정도 자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만 서구 용어법에서의 좌파는 한국에서 진보파에 해당하고 우파는 보수파에 해당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서구에서 사민당처럼 좌파정당으로 지칭되는 게 한국에서는 진보파고 기민당 같은 우파정당은 보수파인 것이다.

근대사회에서 진보파(좌파)와 보수파(우파)의 구분은 경제활동을 조절하는 기본적인 두 축인 ‘시장’과 ‘국가’의 상대적 양(量)에 관한 것이다. 진보파는 시장보다 국가를 더 선호하며 보수파는 그 반대다. 국가가 자원배분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세금을 많이 거둬 그것으로 복지를 강화하자는 게 진보파고, 그 반대로 세금과 복지지출을 줄이자는 게 보수파다.

다만 시장과 국가가 어느 비율 이상이면 보수고 그 이하면 진보라든가 하는 식으로 구분되는 건 아니다. 진보라는 이름이 붙은 정당만이 진보파 정당인 것도 아니다. 다른 이념과 정파에 대비한 상대적 개념이다. 민주통합당이 새누리당보다는 진보적이고 통합진보당보다는 보수적이라는 식으로 나누어지는 셈이다. 국가로 따지자면 오늘날 자본주의 중에선 북유럽이 가장 진보적인 국가인 반면에, 미국은 유럽보다 보수적인 국가다. 그리고 미국 내에선 민주당은 공화당보다는 진보적이다.

나아가 ‘진보↔보수’를 근대사회를 넘어 인류사회 전반에 적용하면 어찌 될까. 진보파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며 사회연대(공생), 경제적 평등, 분배, 민주성, 정치적 자유를 강조하는 데 반해, 보수파는 사회적 강자를 대변하며 자기책임(경쟁), 경제적 자유, 성장, 효율성, 정치적 질서를 강조한다. 인간본성으로 따지자면 진보파는 모성(母性)과 음()에 가까우며, 보수파는 부성(父性)과 양()에 가깝다. 어미는 못난 자식이 더 안타까운 반면 아비는 잘난 자식을 편애하기 쉽다.

‘진보↔보수’를 우리 사회의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과 관련시켜보면, 우선 진보파는 이런 문제들을 보수파보다 상대적으로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인성교육과 노동시간 단축을 강조하고,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한 복지확대에 적극적이다. 반면에 보수파는 교육과 산업에서의 경쟁력을 중시하고, 복지확대에 따른 개인의 도덕적 해이를 우려한다.

개인과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진보적 논리와 보수적 논리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 한국에서 진보파와 보수파는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양자는 선악이 아니라 조화로운 균형을 달성해야 하는 관계고 그게 바로 음양의 조화다. 건강한 인간상태를 나타내는 음양화평지인(陰陽和平之人)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진보와 보수 어느 한쪽이 지나치면 개인이나 사회가 병든다. 활력을 잃고 붕괴한 옛 소련 및 동유럽 체제는 진보파 논리의 극단적 사례다. 반대로 양극화가 심해지고 금융위기가 발생한 오늘날 자본주의는 시장만능주의라는 과도한 보수파 논리가 지배한 결과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진보와 보수라는 구분과 별개로 ‘개혁과 수구’라는 구분도 강조될 필요가 있다. 개혁파는 근대사회의 두 축인 시장과 국가의 질을 높이려는 세력이고, 수구파는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다. 시장의 질을 높인다는 것은 시장의 투명성과 공정경쟁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국가의 질을 높인다는 것은 국가의 민주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진보↔보수를 가로축(X축)에 놓는다면, 개혁↔수구는 세로축(Y축)에 놓을 수 있다. 다만 맑스의 토대-상부구조 개념이 공간적 비유이듯이, 여기서 양과 질이라는 성격이 상이한 구분을 동일한 그래프 위에서 X축과 Y축으로 설정하는 것도 설명의 편의를 위한 비유다.

근대사회를 넘어 인류사회 전반에 대해 개혁↔수구를 규정한다면, 사실과 이성에 입각하며 효율성과 민주성 모두를 해치는 사회시스템, 예컨대 부패나 특권구조 같은 걸 뜯어고치려는 세력이 개혁파고, 수구파는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다. 조선시대 조광조(趙光祖)나 김옥균(金玉均) 같은 세력은 그런 의미에서 개혁파에 속하는 셈이다.

많은 구미 선진국에서도, 국제관계에서는 이라크 침공에서 보듯이 수구적 제국주의 행태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 자국 내에서는 시장과 국가의 질이라는 개혁↔수구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덜 심각하다. 이와 달리, 후진국은 물론 한국도 수구파를 물리치고 개혁을 추진해야 바람직한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선거 쟁점이 주로 세금과 복지지출 문제인 구미 선진국과 그렇지 않은 한국을 비교해보라. 1987년 이후 독재체제가 무너지고 민주체제가 등장했으나 이명박정권의 역주행에서 보듯이 민주체제의 기반은 아직 불완전하다. 관료나 공기업의 비효율성은 예전에 비해 개선되고는 있으나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많다. 그리고 재벌체제의 폐해와 노동시장의 분단구조는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이런 것들이 억울함을 낳고 있는 셈이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와 개혁은 결합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그리고 수구를 물리치는 개혁의 과제를 위해선 개혁적 진보와 개혁적 보수 세력이 힘을 합쳐야 한다. 예컨대 덴마크나 네덜란드에서 가장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고 유럽연합(EU) 전체가 권장하는 노동의 유연안정성(flexicurity=flexibility+security)을 보자. 한국 역시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에서 벗어나려면 이런 유연안정성 도입이 필요한데, 고용유연성과 소득안정성은 각각 노동시장의 개혁과 진보적 복지확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유연안정성은 나라별로 구체적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한국에서 고용은 전체적으로는 그다지 경직되지 않았다.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유연한 측면도 있다. 따라서 전체적 유연성을 높이는 일보다 거대기업 정규직의 고용경직성을 바로잡아 노동시장의 분단구조를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보수와 개혁↔수구는 착종된 모습을 보여, 진보파가 곧 개혁파는 아니다. 장하준(張夏準) 교수나 거대기업노조 같은 일부 진보파는 재벌체제와 노동시장의 개혁을 거부하거나 외면하는 수구적 행태를 보인다. 주체사상파 역시 복지확대를 주장하는 점에서 진보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북한체제의 개혁과 개방에 반대하는 수구파다. 비례대표 선출을 둘러싸고 민주주의를 훼손한 통합진보당의 행태 역시 수구적이다. 반면에 보수파 중에서도 국가와 시장구조의 개혁에 적극적인 개혁적 보수파가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새누리당 내의 소수 쇄신파가 지향하는 바가 여기에 가깝다.

흔히들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진보파와 보수파의 극단적 대립에 대한 피로감의 표현이다. 아울러 이는 진보↔보수라는 구분과는 별개로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진보↔보수의 대립지점을 진보 쪽으로 일정하게 이동해서 상호간에 적절한 균형을 갖게 하는 한편으로, 개혁↔수구 사이에선 수구를 타파하고 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게 역사발전이다.

개혁↔수구와 더불어 한국사회에서 특수하게 나타나는 또다른 대립전선은 분단모순에서 유래한다. ‘남북한 평화협력↔남북한 긴장대결’이라는 대립전선이 바로 그것이다. 김대중·노무현정권의 햇볕정책과 이명박정권의 비바람정책이 각각을 대표하는 셈이다.

이 대립전선은 진보↔보수 및 개혁↔수구의 대립전선과 그대로 겹치지는 않는다. 그림에서 보듯이 Z축이라는 새로운 대립축이 필요한 것이다. 남북한 평화협력에 찬동하는 보수파가 있는가 하면, 수구파인 주체사상파 역시 남북한 평화협력에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X축과 Y축 각각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듯이, Z축 내에서도 입장이 여러가지로 달라진다. Z축의 긴장대결 쪽에는 평양으로 탱크를 몰아 북진통일해야 한다는 극단적 입장이 있는가 하면, 차마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통중봉북(通中封北)’ 운운하면서 북한을 고립시키려는 이명박정권도 있다. 평화협력 쪽에도 남북한 통합의 속도를 둘러싼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X축, Y축, Z축은 한국사회의 주요 대립전선을 용이하게 파악하기 위한 일종의 이념형(ideal type) 분석도구다. 현실은 당연히 이보다 복잡하다. 예컨대 극단적 진보나 극단적 보수가 수구적 경향을 띤다든가 하는 것은 서로 독립된 축들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럼에도 3개의 축을 설정한 것은 ‘진보≡개혁≡평화’ ‘보수≡수구≡대결’이라는 항등식이 성립하지 않는 뒤엉킨 한국의 모순구조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156_한국사회의이념정책지형(p405)

 

한국에선 그동안의 압축적 고도성장과정에서 보수파의 논리가 지나치게 우세했다. 아울러 근대화의 역사가 짧고 분단체제하에 놓인 탓에, 진보파든 보수파든 객관적 사실을 외면하고 비합리적 주장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분단모순은 보수파 내에서 개혁적 보수파 대신에 수구적 보수파가 득세하고, 진보파 내에도 수구적 진보파가 존재하는 기반이 되었다. 요컨대 ‘보수논리로의 편중’ ‘진보파/보수파의 비합리성’ ‘남북한 긴장대결’이라는 삼중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한국이 북유럽과 같은 바람직한 선진사회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한편으로 진보↔보수의 균형을 위해 X축에서 볼 때 한국사회를 좀더 왼쪽으로 옮겨가는, 즉 복지를 확대하는 진보정책이 요구된다. 다른 한편으로 Y축과 Z축에서는 각각 위쪽으로 옮겨가는 개혁과 남북한 평화협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일단 좌표를 옮긴 연후에 진보파와 보수파가 서로 정권을 주고받기도 하면서 생산적으로 경쟁해가면 되는 것이다.

 

 

4. 2013년체제를 향하여

 

한국사회가 X축에서 왼쪽, Y축과 Z축에서 위쪽으로 좌표 이동하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다. 때문에 1987년 민주화 이후 25년이 흘렀는데도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 속의 87년체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극복은커녕 이명박정권하에선 오히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는 퇴행현상이 나타나기까지 했다.

이런 현상은 도식적인 자본↔노동의 계급모순이나 미제국주의의 억압이라는 민족모순으로 환원될 수 없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사회주의를 현실적 대안으로 상정할 수 없는데다, 고단함 등의 문제는 근원적으론 자본-노동의 모순과 관련이 없지는 않으나 직접적으론 자본들 사이나 노동자들 사이의 모순에서 초래되고 있다. 또 미국의 존재가 제약조건이긴 하나 그와 무관하게 남북관계가 햇볕정책 쪽으로 움직일 수도 있고 비바람정책 쪽으로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자본의 지배나 미국을 일단 논외로 한다면 진보・개혁・평화협력을 저지하는 주된 세력은 어디일까. 우선 이명박시대처럼 대통령과 국회가 보수·수구·대결파에 의해 장악된다면 진보・개혁・평화협력이 결정적으로 어려워진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1987년의 민주화로 대통령이 권력을 제왕처럼 독점하던 시대는 끝났으나 그렇다고 대통령과 국회의 영향력을 경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의 독재권력이 약화된 반면 과두적 지배세력이 새롭게 등장했다. 재벌, 거대신문, 관료, 검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삼성을 필두로 하는 재벌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정계, 관계, 언론계, 법조계, 학계 같은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영향을 미친다. 거대신문은 대중의 생각을 좌우하며, 관료는 축적된 실무지식으로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검찰은 국가의 주요한 폭력기관이 되었다. 이런 과두조직들은 이념적으로 편향되어 있다. 상호간에 또는 대중으로부터의 견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문제가 있다.

이뿐 아니라 각종 특수이익집단이 공공의 이익과 상치되는 행동을 한다. 김대중정부하에서 의약분업과 관련해 벌어진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경제민주화에 큰 역할을 했던 노조도 점차 특수이익집단의 모습을 띠어가고 있다. 조직률이 60~70%에 달하는 북유럽의 노조가 공공의 이익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과는 달리 10% 정도의 조직률을 가진 한국의 노조, 특히 거대노조는 자기 이익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을 자신들 고용의 안전판으로 삼고 있으니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진정성을 가질 수 없고, 기업복지가 상대적으로 우월하니 사회복지 향상에 무관심하다. 심지어 노조 지도부와 관련된 각종 비리마저 터져나온다.

그러면 이런 보수·수구·대결세력이라는 장애물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 시민의식의 성장을 기반으로 해야겠지만, 당장의 열쇠는 정치지도부의 변화를 가져올 선거가 쥐고 있다. 진보·개혁·평화를 지향하는 세력이 정치지도부에 들어서 재벌, 보수수구언론, 검찰, 관료의 과두체제를 바로잡고 나아가 거대노조를 포함한 특수이익집단도 견제해야 한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과두적 보수수구세력과 대결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김대중·노무현정권 모두 여기에서 실패했다. 진정성과 역량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국민 대중의 지지를 끌어들이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대노조를 포함해 대중의 삶과 유리된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은 2013년체제로 나아가는 데 지원세력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노동의 유연안정성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자세를 보라.

이런 척박한 여건하에 20124월 총선마저 보수수구세력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보궐선거가 치러지면 앞으로 의석 구성이 변화할 수도 있겠으나, 현재 상태로선 국회와 대통령 모두를 진보개혁세력이 장악해 복지, 경제민주화, 평화협력의 2013년체제를 만들어가기는 힘들어졌다. 따라서 2013년체제 대신에 2018년체제를 기다리면서 그동안 고단함, 억울함, 불행함을 안고 가야 할 형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동전에 의해 독재체제를 민주체제로 일거에 변혁시킨 87년체제와는 달리, 2013년체제 만들기는 주요 고지를 하나하나 획득해가는 진지전이다. 최고사령부만 공격하는 게 아니라 과두적 지배세력이 차지한 여러 고지들을 탈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선에서 패배했더라도 대선에서 승리하면 2013년체제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수 있다.

물론 대선승리의 전망이 그리 밝지는 않다. 보수·수구·대결세력이 총선승리의 기세를 끌어가고 있고, 홍보나 조직 및 자금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보·개혁·평화세력이 진정성과 비전, 전략 면에서 거듭나 대중의 에너지를 집결할 수 있다면 승리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특히 대중의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을 덜어주기 위한 비전 면에서 진보·개혁·평화세력은 보수·수구·대결세력과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줄 수 있다. 예컨대 고단함과 관련해선 진보교육감들의 혁신학교 정책 같은 걸 내세우고, 억울함과 관련해선 재벌 및 노동시장 개혁의 구체안을 제시하고, 불안함과 관련해선 성장친화적 복지와 개성공단 대폭확대를 주창할 수 있다.

그리고 안보는 원래 보수·수구·대결세력의 의제지만 천안함 진상규명처럼 오히려 평화를 제창하면서 보수·수구·대결세력의 맹점을 짚을 수 있는 의제도 없지 않다. 요컨대 진보·개혁·평화를 추상적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설득력있는 구체적 정책으로 대중의 피부에 와 닿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진지전은 기동전에 비해 시간과 품이 훨씬 많이 든다. 그리고 노무현정권하에서 대통령과 국회를 진보·개혁·평화세력이 장악하고도 큰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했음을 상기한다면, 겨우 대통령 하나 장악한들 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들 수도 있다. 하지만 2012년 대선마저 보수・수구・대결세력이 장악했을 때의 참담한 결과는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또한 과거의 오류에서 배운 바 있고 이명박정권의 실정으로부터 시민의식이 향상되었다면 노무현정권 때와 사정이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총선 패배라는 제약조건은 대선에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진보·개혁·평화 의제에 대한 선택과 집중을 강요한다. 그리해 노무현정권처럼 무리한 욕심을 낼 가능성이 적어져 오히려 의미있는 실질적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브라질의 룰라 전 대통령은 이것저것 많이 해서 인기를 얻은 게 아니라 보우사 파밀리아(Bolsa Familia)라는 빈곤가정대책 하나로 승부한 셈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차기 대통령이 핵심적 진보·개혁·평화 의제 몇개만 성공해도 2013년체제의 출범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진보·개혁·평화는 상호보완성을 갖기 때문에 일부 의제만 제대로 수행해도 파급효과가 커질 수 있다. 예컨대 평화협력의 진전은 비합리적 수구세력을 약화시켜 진보와 개혁의 촉매제로 작용한다. 거꾸로 진보와 개혁의 강화 역시 비합리적 대결세력을 약화시켜 평화협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색깔론의 위력이 과거에 비해 약화된 점을 상기해보자.

그리고 복지주의적 진보는 노동자들의 실질임금 격차를 완화시켜 자본시장과 노동시장의 불공정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예컨대 거대기업의 법인세와 거대기업 정규직의 소득세를 더 거둬 교육 등의 사회복지를 강화하면 노동자들 사이의 실질적 생활수준 격차가 줄어든다. 그리되면 중소중견기업 노동자들의 근속연수가 늘어나 숙련과 그에 따른 기업경쟁력이 향상되고, 그리하여 거대기업과의 협상력이 높아져 납품단가 후려치기 따위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2차 분배과정에서의 복지증대가 1차 분배과정의 개혁을 유도하는 셈이다.

거꾸로 시장과 국가의 자유주의적 개혁은 복지확대에 유리하다. 재벌개혁은 재벌의 사회적 지배력을 견제해 복지재원 확대를 위한 증세를 용이하게 한다. 또 국가기구의 효율성과 민주성이 향상되면 복지지출 증대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획득하기가 쉬워진다. 그리스처럼 부정부패 문제가 심각하면 복지가 지속 불가능해지는 반면, 북유럽 같은 신뢰투명사회에선 복지와 성장이 선순환을 이루어 복지가 지속 가능해지는 것이다.

요컨대 1인당 소득 면에선 선진국 수준에 올라섰으나 삶의 질을 악화시키는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이 폭발 지경인 한국사회는 진보·개혁·평화를 통해 이런 모순을 떨쳐야 할 시점에 와 있다. 하지만 보수·수구·대결세력의 저항은 만만치 않다. 진보·개혁·평화세력이 진정성, 비전, 전략을 제대로 갖추면 2013년체제가 성립 가능하겠지만 그러지 못하면 2018년체제조차 어쩌면 어려워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