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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피터 게이 『프로이트』(전2권), 교양인 2011

프로이트, 환상의 파괴자

 

 

홍준기 洪準基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HK교수 junkh7@hanmail.net

 

 
51845193피터 게이(Peter Gay)의 걸작 『프로이트』(Freud: A Life for Our Time, 정영목 옮김)는 프로이트의 이론과 임상작업, 인간관계, 정신분석학계를 둘러싼 상황은 물론, 당시의 유럽과 미국에서의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맥락 등 관련된 모든 것들을 총망라하면서 프로이트의 이론과 그 발달과정을 재구성한다. 이와 더불어 저자는 소란스럽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으면서도 프로이트의 인간적인 매력과 더불어 그 결점까지 생생하게 전달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을 그의 삶과 엮어낸 전기로서 이 책을 능가하는 작품이 다시 나오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개정판이 출간된 2006년, 즉 프로이트 탄생 150주년이 된 해에조차 머리말에서 저자는 여전히 “〔프로이트의〕 평판은 지금도 백년 전이나 다름없이 논란에 쌓여 있다”라는 말로 글을 시작한다. 꼭 저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프로이트에 대한 문헌 중 상당부분이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과 반감을 드러내기 위해 씌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떤 사상 혹은 이론(임상이론을 포함해서)에 대한 2차문헌은 대개 그 이론을 잘 설명하고 전달하기 위해 쓰이지만(비판적 논평이 포함된다 할지라도) 프로이트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으나 이스비스터(J. N. Isbister)가 쓴 전기가 그러하고, 많은 학술서나 논문도 마찬가지며, 특히 국내에서도 학계의 반()정신분석학 정서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생겨났을까? 저자는 자신이 던진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인 이 문제에 대해 이론적 혹은 정신분석적 대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역사학자로서 저자는 이러한 대답이 자신의 과제가 아니며, 어쩌면 그것은 자기 역량 너머에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저자는 명시적인 이론적 대답을 생략한 채 프로이트를 지지하는 쪽과 비난하는 사람들 사이는 어차피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쿨하게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프로이트의 편을 들면서 전기를 쓰겠노라고 밝히며 독자에게도 어느 한쪽 입장을 택하라고 권유한다. 프로이트를 “오도된 심리학자(…) 독재자, 거짓말쟁이, 사기꾼, 한마디로 돌팔이”로 보든가 아니면 프로이트의 “작업은 획기적으로 중요하다”라는 두 입장 사이의 택일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책에서 프로이트에 대한 반감의 이유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프로이트가 유대인이었고, 종교를 공격했으며, 유아성욕설을 주장한 것 등이 불러일으킨 저항이 그에 대한 반감의 원인이었다고 제시한다. 여기서 그는 무엇보다도 프로이트가 인간의 환상을 파괴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강조하는 듯하다(“나는 인생의 많은 부분을 나 자신의 환상, 그리고 인류의 환상을 파괴하는 데 보낸 사람입니다.” 로맹 롤망에게 쓴 편지, 2326면 참조). 프로이트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했던 일이 환상의 파괴였고 바로 그것이 저자가 생각하기에 프로이트가 비난을 받은 이유라는 것인데, 동시에 그것은 저자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옹호하는 이유기도 하다고 저자는 말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라깡(J. Lacan)의 ‘프로이트로의 복귀’라는 작업 이후로 현대인은 무의식, 성, 욕망이라는 화두를 더이상 불편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프로이트와 라깡의 영향을 받은 소위 ‘욕망철학’을 무미건조한 전통적 철학보다 훨씬 더 선호한다. 그런데 왜 정신분석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경향 못지않게 정신분석학에 대한 반감이 (대중보다는 특히) 학계를 중심으로 여전히 강하게 존재하는 것일까? 알뛰쎄르(L. Althusser)가 말하듯이 프로이트는 아버지 없이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일까? 달리 말하면 프로이트에 대한 반감은 아버지 없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들(그리고 아버지를 가진 아들들)의 복수라는 것일까? 짧은 지면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길게 논할 수는 없지만 좀더 심도있는 논의가 필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또한 프로이트가 자신의 전기 집필을 싫어했을 뿐 아니라, 전기작가들에 대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는 사실을 굳이 강조하면서 서술을 시작한다. 프로이트에 대한 이러한 자신의 ‘배신적’ 태도를 부각시킨 데는 평자가 보기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이 책이 프로이트에 대한 깊은 존경과 애정, 그리고 그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씌어졌다는 자부심, 달리 말하면 프로이트에 관한 자신의 진정성과 학문적 능력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이트가 평생을 바쳐 삶과 세계, 인간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듯이 저자 자신도 프로이트라는 인물과 그 이론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열정을 바쳤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준비에 10년, 집필에 2년의 시간을 들였다는 저자의 노력이나 책이 지닌 대작의 위용 때문만은 아니다. 이 책은 위대한 임상가이자 사상가, 문화비판가였던 프로이트에 대한 경애에 바탕을 둔 한 역사가의 헌신적인 열정과 진정성의 산물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대한 상세하고 흥미로운 입문서로서 읽을 수도 있다. 도식적이고 딱딱한 프로이트 개론서에 염증을 느끼는 독자에게 이 책은 아주 적절한 안내자가 되어줄 것이다. 반면 오늘날엔 프로이트와 라깡을 연계해 다루는 것이 중요한 화두가 되었는데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 책에 라깡의 프로이트 해석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한계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사정이 이 책이 갖는 탁월성에 어떤 손상도 주지 않는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을 때는 미국에 라깡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한 이 책은 프로이트 전기이지 프로이트의 이론과 임상에 대한 ‘좁은 의미의’ 연구서가 아니다. 다만 이 책의 번역이 지금에야 나왔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만약 원서가 출간된 1980년대 후반 국내에 소개되었다면 일찍이 프로이트 독자들이 손꼽는 고전의 자리를 지켜왔을 것이고, 더 나아가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도 더 빨리 자리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정신분석 관련 서적에 대한 보급이 늦어진 현상 그 자체가 사실 저자가 말하는 정신분석에 대한 저항의 한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대목이다.

사소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프로이트의 전기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저자의 말처럼 프로이트를 옹호하는 편에 서기로 결심한 독자들에게 이 책은 커다란 기쁨과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다.

 


※ 프로이트와 라깡의 이론적 관계에 대해서는 www.freud-lacan.co.kr, www.freud-lacan.com, 라깡의 강연 모습을 보려면 www.youtube.com/watch?v=iL6rkBSHS4A&feature=related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