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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첸 리췬 『내 정신의 자서전』, 글항아리 2012 『망각을 거부하라』, 그린비 2012

망각의 거부, 생존자의 글쓰기

 

 

류준필 柳浚弼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교수 pilsotm@inha.ac.kr

 

 

56505658첸 리췬(錢理群)의 저서 두권이 거의 동시에 번역되었다. 하나는 자서전에 해당하는 『내 정신의 자서전』(我的精神自傳, 김영문 옮김, 이하 『자서전』)이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1957년의 ‘반()우파투쟁’을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의 핵심적 분기점으로 파악하는 『망각을 거부하라』(拒絶遺忘: 1957年學硏究筆記, 길정행 외 옮김, 이하 『거부』)이다. 그간 번역된 당대 중국 지식인의 저서들이야 다양하지만 이번의 두 책은 특히나 이채롭다. 1939년에 태어난 저자는 베이징대학 재학 당시 반우파투쟁 와중에 ‘우파’로 지목되어 고초를 겪은 당사자다. 문화대혁명(이하 문혁) 이후 다시 모교로 돌아와서 1981년에서 2002년까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과 지식인들이 존경하고 따랐던 저명인사다.

외부자의 관점에서 중국현대사의 거대한 굴곡에 조응하여 형성된 지식인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 역사적 경험의 방대함과 특이함이 손쉬운 추론과 유비를 잘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로 같은 이유로 다양한 풍문과 억측이 난무하고 어설픈 단정과 동일시가 양산되기도 한다. 신뢰할 만한 당대 중국 관련 정보와 지식이 빈약한 우리 현실을 감안할 때, 『자서전』의 번역은 중국 지식인의 내적 감각에 다가서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자서전』에서 자신의 내면을 향하던 저자의 ‘독특한’ 시선이 마오 쩌둥과 덩 샤오핑 시대의 역사 속으로 진입할 때 펼쳐지는 광경은 『거부』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따라서 이 두권을 겹쳐놓으면, 내면과 역사가 교직되는 형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평생 루쉰(魯)을 학문적 중심에 둔 저자답게 『자서전』은 루쉰—더하여 그의 아우 저우 쭈어런(周作人)—을 전범(典範)으로 삼아 서술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루쉰의 텍스트를 자기 삶의 역정(및 자신의 저술)에 삽입해 교차시킨다. 이것은 반우파투쟁에서 문혁까지의 근 20년을 직접 체험한 자기 세대를 “역사적 중간물”(『자서전』 20면) 의식으로 설명하는 데서 먼저 확인된다. 이어 “정치적 낭만주의, 경제적 낭만주의, 도덕적 이상주의”가 전형적으로 발현된 1958~60년의 대약진운동과 잇따른 대기근을 ‘돈 끼호떼적 이상주의 충동’에 빗대고, 그 반대편의 내면적 허무주의 역시 전제정치를 용인하고 마는 현상을 ‘햄릿적 회의(懷疑)’로 설명할 때도(50~89면) 그 비판의 입지는 어김없이 루쉰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사회비판에 적극 나서게 된 상황의 자기설득 기제도 루쉰의 “정신계의 전사”(175면)에 의거한다.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등장하는 루쉰의 텍스트는 모두 ‘독립적 지식인’이라는 하나의 형상을 지시한다. ‘자기독립성’의 상실이야말로 중국현대사의 비극과 맞닿아 있다는 저자의 믿음 때문이다. 집단의 대변자를 자처하게 만드는 “민족주의 문제의 오류”, 과학과 민주의 정신을 부르주아 사상으로 부정하게 된 “지식인과 인민의 문제” 관련 오류 등이 그런 사례들(32~41면)이다. 이런 정신을 견지하려는 학자의 삶이 순탄할 수는 없는 법인즉, 첸 리췬에 대한 제도권 아카데미즘의 압력과 제약이 적지 않았다. 삭제와 개정을 거치지 않은 저술은 한권도 없었고 지도교수 자격심사에도 회부되었다(162~70면). 이런 와중에 결국 심각한 사건이 터졌다. 베이징대학 개교 100주년을 즈음하여 첸 리췬이 ‘사상의 자유와 포용의 정신’이 상실된 대학의 풍토를 여러차례 비판하자 학생들이 열광적으로 호응했다. 결국 학교의 공산당위원회가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고 첸 리췬의 강연 등을 금지했다(171~92면).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거부』의 ‘1957년학()’의 씨앗이 발아되었다. 첸 리췬은 베이징대학 100주년을 기념하는 역사회고는 수많았으나 1957년 부분이 공백상태로 남아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후 그 공백의 자리에 ‘사회주의 민주’라는 이름을 붙이고, 문혁기를 거쳐 톈안먼사건(1989)에 이르기까지 ‘민간사상’의 시각에서 중국 역사의 저류(底流)를 복원하기 시작했다. 그 일차적 결실이 이 책 『거부』다(『거부』 710~30면). 중국 문제의 핵심은 기층에 있다는 입장에서 1956~57년 무렵의 농촌・공장・학교 상황을 개관하고,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민간사상의 대표자들이랄 수 있는 린 시링(林希翎)의 ‘사회주의 민주’와 류 치디(劉奇弟)의 ‘헌법(민주와 법제)’ 그리고 탄 톈룽(譚天榮)의 ‘맑스주의 위기론’(215~31, 273~88, 300~9면)을 자세히 다룬다. 이어 문혁 발생 직전까지 우파의 운명과 사회조류를 기술함으로써 문혁의 발생학에 가까이 다가선다.

1957년의 반우파투쟁을 핵심적 분기점으로 삼아 ‘사회주의 전제’와 ‘사회주의 민주’ 혹은 ‘당()—국()체제’와 ‘민간사상’을 대비할 때, 첸 리췬 자신의 입지는 마오시대는 물론이고 그후 덩 샤오핑의 개혁・개방시대와도 근본적으로 불화(不和)한다. 바로 이곳이 첸 리췬의 ‘자기독립성’의 발원처이자 정당성의 근거지다. 물론 여기엔 국가권력을 맞은편에 둔 단순한 지식인론으로 이해됨직한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론적 밀도를 핑계 삼아 첸 리췬의 의의를 폄하한다면 그것은 관망자의 안이함이기 쉽다.

첸 리췬처럼 80년 후반의 비슷한 시기에 루쉰을 학문적 출발점으로 삼은 왕 후이(汪暉, 59년생)는 한 세대 아래의 지식인이다. 근자에 왕 후이는 유럽의 68혁명과 미국・일본 등의 반체제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된 1960년대를 세계사적 동시대성이 발현된 때로 보고, 이 시기 문혁의 발생을 탈정치화된 정치의 ‘재정치화’라는 시각에서 접근하려 한다(『去政治化的政治』; 「代表性的斷裂()」). ‘60년대의 망각’을 문제삼는 왕 후이는 첸 리췬의 1957년학과 초점을 달리한다. 이것은 한국의 30~40대 지식인들이 (1953년이 아니라) 1960년대(혹은 김수영)를 동시대적 시원으로 여기는 무의식적 관행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57년체제’가 향후 중국현대사를 규정했다는 첸 리췬의 1957년학은 그래서 더 문제적이다. 57년체제 가설을 인정할 경우, 57년체제 형성에 한국전쟁이 끼친 결정적 영향을 강조하는 원 톄쥔(溫鐵軍)의 입론(「告別百年激進」)을 함께 고려한다면 한반도의 ‘53년체제’(분단체제)와의 연계성이 드러난다. 자세히 그 내용을 소개할 지면은 없지만,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중국을 재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첸 리췬의 저서는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다. 그 가치란 한국 나름의 역사적 맥락과 조우할 때 더 빛날 수 있다. 다만 ‘내 정신의 자서전’ ‘망각을 거부하라’라는 제목에서부터 단웨이(單位)라는 중국식 용어에 이르기까지 번역 자체에 관해서는 많은 대목에서 의견을 달리할 수도 있다. 어떻든 이웃나라 원로 지식인의 자전적 목소리에 섬세한 귀 기울임이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