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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12년 대선과 민주개혁의 과제들
천안함사건이 보여준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와 미래
서재정 徐載晶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국제대학원 교수. 저서로 『한미동맹은 영구화하는가』 『한반도의 선택』 등이 있음. jsuh8@jhu.edu
남태현南兌鉉
미국 쏠즈베리대학 정치학과 교수. 저서로 『영어 계급사회』 등이 있음. txnam@salisbury.edu
한국 민주주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1987년 민주화가 시작했고 1998년 김대중 야당 후보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평화적인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시 2008년 정권이 바뀌면서 민주주의 절차가 뿌리내렸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2012년 대선을 바라보는 지금 한국 민주주의에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1) 새로운 시대적 요구, 즉 경제민주주의, 보편적 복지, 남북관계 개선, 소수자 보호 등 실질적인 발전을 이루어야 할 때이고 이를 위해서는 정치체제도 질적으로 도약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천안함사건은 우리에게 한국 민주주의가 얼마큼 와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좌표라 하겠다.
천안함사태는 민주주의의 문제이자, 분단의 문제다. 천안함 침몰 이후 국가와 시민사회가 보여준 모습은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와 가능성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분단체제의 절반의 영역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획득하더라도 이는 구조적 한계를 지닌 기형적 민주주의라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분단체제의 한계를 넘어설 추동력은 시민사회에 있고, 시민사회의 역량이 이제 그 한계와 힘을 겨룰 만큼 성숙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1987년 이후 선거제도를 중심으로 한 절차적 민주주의 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천안함사건은 남북문제가 여전히 강고한 성역으로 남아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주었다. 그 성역 안에서 민주주의적 절차와 원칙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던 탓에, 과학적 근거에 반대되는 ‘폭침설’이 정부의 공식입장이 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행정부는 입법부를 철저히 배제했고, 국회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는 했지만 실질적 활동 없이 이를 해산, 행정부에 대한 감시와 견제의 기능을 스스로 포기했다. 이후 천안함과 관련된 일련의 재판에서 사법부도 독립적 기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국가기구 간의 권력균형과 상호견제가 무너진 가운데 행정부는 ‘폭침설’에 합리적인 의혹을 제기하는 시민들에게 ‘종북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공권력을 들이대며 의사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상 권리를 제한했다.2) 즉 천안함 정국은 분단체제 아래서 국가안보라는 명목으로 민주주의가 총체적으로 훼손될 수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한계와 동시에 천안함 정국은 긍정적 가능성도 내비쳤다. 즉 시민사회의 의식과 역량이 이전 시기와는 뚜렷하게 다를 정도로 성장하여 정부 차원의 ‘북풍’이 예전과 같이 먹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방선거를 불과 보름여 앞두고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의해 폭침되었다는 공식 발표가 나오고, 이어서 남북관계를 전면적으로 중단한다는 5·24조치가 취해지는 등 안보위기감을 극대화하는 조치가 잇따랐다. 그럼에도 유권자들은 과거의 투표행태와는 달리 야당에 승리를 안겨주었다. 보수언론을 비롯한 많은 매체에서 공세를 퍼부었지만 국민의 3분의 2는 정부의 ‘폭침설’을 신뢰하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의식을 보이기도 했다.2) 특히 참여연대와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같은 시민운동단체들이 보고서 발표 등 정부에 대한 감시 및 견제의 역할을 수행했고, 이를 국제사회에까지 확장하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정부 조사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공식서한을 보내기까지 했다.
이 글은 천안함사건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와 가능성을 분석하고자 한다. 즉 민군합동조사단(합조단) 보고서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천안함의 침몰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4) 이 사건을 둘러싼 일련의 논란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재확인하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확인과정에서 2013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가 더 발전해갈 수 있는 가능성과 과제를 찾아보려 한다.
1. 천안함사건에서 나타난 정부 내 비민주주의
국방부는 2010년 3월 31일 합조단을 82명으로 구성했다가, 4월 12일 73명으로 재편성하여 조사를 진행했다. 연합군사훈련 도중 발생한 군 사고이므로 국방부가 조사를 주도해야 했다는 명분이 따를 수도 있으나, 군이 당사자인 사건을 군이 조사한다는 점에서 그 출발부터 한계가 있었다. 사건의 성격상 국방부에서 독립된 기구나, 사법부 또는 입법부, 아니면 민간 주도의 조사가 이뤄졌어야 함에도 국방부가 이를 주도했다는 사실 자체가 조사의 투명성과 객관성을 제약했다. 조사 주체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못한 것은 조사 결과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밀주의의 보호 속에 민주적 감시・감독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조사단에 민간인들을 참여시킨 것은 군의 투명성을 높인 진일보한 조치였다. 더군다나 최초 합조단 82명 중 민간인은 6명만 참가했던 데 비해 재편성 후 그 수가 27명으로 늘어난 것은 내부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5) 다만 ‘민간전문가’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나 국립해양조사원 등 국립연구기관이거나 삼성중공업이나 현대중공업처럼 국방부의 수주를 받는 관계에 있다는 점은 이들의 독립성이 상대적으로 제한되었을 가능성을 내비친다. 충남대와 울산대 교수 같은 학계나 국회에서 추천한 위원들만이 상대적으로 군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보면 실질적으로 독립적인 민간인은 소수였을 것이다. 외국에서 파견한 전문가 24명은 기본적으로 군 내지 관으로 봐야 하고, 지원요원 98명 중 82명이 군인이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합조단이 대부분 군이나 국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전문가들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합조단의 독립성을 저해하고, 군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 구조적 한계를 보여준다.
이 구조적 한계가 합조단의 조사과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가 있다. 우선 합조단 각 분과에서 조사 분석하여 보고한 데이터가 합조단 차원에서 내린 결론과 상반된다. 예를 들어 과학수사분과의 증거물채증팀은 해저 및 해역 함체에서 수거한 증거물을 분석한 후 “천안함사건에 사용된 어뢰의 파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금속은 식별하지 못했다”고 결론내린다(120면). 또 생존자 및 시신에 대한 검안 결과 “화상, 파편상, 관통상은 없었다”고 보고하고 “시신 대부분은 (…) 외상에 의한 사망 가능성은 적으며, 정황상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고 적시했다(132면). 그뿐 아니라 근접폭발시 충격파와 폭발소리에 의해 청각장애 환자가 다수 발행해야 하나 이러한 환자는 없었다고 인정한다. 근접폭발시 나타나야 하는 파손부위 열손상도 없었고(77면) 폭발 위치에 나타나야 하는 꽃무늬 모양의 파공도 남아 있지 않았다(84면). 즉 근접폭발시 당연히 남았어야 할 파편, 파공, 충격파의 흔적, 열손상 중 그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과학수사분과는 보고하고 있다. 이 분과의 데이터는 명백히 어뢰의 근접폭발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또한 함정구조/관리분과 선체충격해석팀의 분석 결과도 어뢰폭발설과 배치된다. 이 팀은 천안함 파괴 경위를 공학적 시뮬레이션으로 구현해 그 결과를 보고서 155면에서 172면까지 친절하게 나열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천안함 함수와 함미를 모두 보여주는 시뮬레이션 중 그 어느 것도 천안함이 양분되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선체충격해석팀은 시뮬레이션을 통해 버블효과로 천안함이 함수와 함미로 두 동강 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또 시뮬레이션은 버블효과가 있었다면 천안함 가스터빈실 부분의 한가운데가 절단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실제 천안함의 파손형태(가스터빈실 부분의 가운데는 멀쩡하고, 그 앞과 뒷부분이 절단)는 버블효과로 설명될 수 없음을 입증한다.
즉 여러 팀에서 보고한 데이터가 어뢰 같은 폭발물의 근접폭발이 없었음을 강력히 시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데이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뢰의 근접폭발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둔갑한다. 보고서에는 그 이유가 합조단 내의 비민주성이지 않았을지 의심쩍은 대목들이 여럿 발견된다.
예를 들어 과학수사분과는 HMX, RDX, TNT 같은 폭약성분을 검출했으나, 이 폭약의 원산지는 밝히지 않는다. 보고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미국, 프랑스, 캐나다, 우리나라의 폭약성분과 채증물에서 검출된 폭약의 동위원소 분석을 통한 화학적 지문검사를 실시하여 폭약성분의 원산지를 판단하고자 했으나,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제한되었다”고 한계를 스스로 인정한다(117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제한”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조사팀의 활동과 보고에 내외적인 제한이 가해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중 적어도 내적인 제한이 있었음은 보고서의 다른 부분에서 유추할 수 있다. 보고서는 그림 3장-6-23에서 28까지 일련의 자료에서 시뮬레이션 결과를 임의적으로 함수와 함미 부분으로 절단하여 보여주면서 시뮬레이션 결과로 천안함이 이렇게 절단될 수 있다는 착시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시뮬레이션 결과를 어뢰의 버블효과에 절묘하게 갖다맞춘 것이다. 과학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보이는 시뮬레이션의 결과들, 버블효과를 부정하는 그림 3장-6-14에서 22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이 두 그룹의 그림들은 합조단 안에 객관적으로 분석을 실행한 전문가들과 분석의 결과를 ‘폭침’으로 유도하려는 전문가들이 있었고, 후자가 합조단을 주도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이러한 의혹은 소위 ‘흡착물’ 분석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합조단은 천안함 선체와 어뢰추진체에서 채취한 흰색 분말덩어리가 “알루미늄 산화물과 수분”이라며 그 근거로 그림 3장-5-11과 12를 제시한다. 그런데 문제는 에너지분광분석(EDS)과 X선회절분석(XRD)에서 나온 이 두 물질의 데이터 자체는 정확하지만 그 해석이 왜곡됐다는 것이다. 즉 같은 ‘흡착물질’을 분석한 안동대 정기영 교수와 캐나다 매니토바대학의 양판석 박사도 같은 데이터를 얻었고, 이외의 분석을 추가하여 이것이 알루미늄 황산염수화물 계열이라고 추후 확인한 바 있기 때문이다. 합조단의 전문가들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6) 이 데이터는 합조단의 누군가에 의해 알루미늄 산화물의 근거로 오용되었고, 여기에 모의 폭발실험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조작된 데이터가 추가되면서 폭발과정에서 생성된 ‘흡착물’로 결론지어졌다.(그림 3 참조)7) 흡착물이 폭발의 결과물이라는 해석을 합조단 내에서 주도적으로 몰고갔던 사람이 있다는 내부증언까지 있는 형편이다.8)
결론적으로 국방부가 연루되어 있는 사건을 국방부가 주도하여 조사했기 때문에 그 결과에 대한 신뢰도는 추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보고서와 내부증언 등을 종합할 때 실제로 합조단의 조사는 내부의 비민주성으로 인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이뤄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즉 천안함사건의 조사과정은 첫째, 군에 대한 문민통제라는 민주주의 대원칙에 어긋났고, 둘째, 합조단의 독립성과 내부 민주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이다.
2. 천안함사건에서 나타난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권력의 남용으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기능을 입법·행정·사법으로 분립하여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하는 권력분립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행정부의 권력남용을 막기 위해 의회는 국정감사 등을 통해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국은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고 행정부가 막강하여 입법부와 사법부의 견제기능이 미흡한 데다, 천안함사건 당시의 18대 국회는 한나라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채 여당으로서의 정부견제 기능마저 포기한 상태였다. 이같은 현상은 분단체제하의 남북관계나 안보 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이명박정부 아래서 한국 민주주의가 후퇴한 시기에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천안함 정국이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삼권분립과 관련하여 두드러진 것은 사건의 진상규명이나 이후 조치를 취하는 데 국회가 거의 완벽하게 배제되었다는 사실이다. 문정인(文正仁)이 지적했듯이 “삼권분립의 관점에서 행정부의 발표는 절반의 진실”이다.9) 특히 국가안보에 영향을 주는 위중한 사안이고 여러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조사하고 그 결과를 발표해야 할 입법부가 배제된 것은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적 원칙이자 헌법적 원칙에 어긋난 것이다.
2010년 4월 28일 국회는 ‘천안함 침몰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특위) 구성안을 통과시킨 후 ‘흡착물’ 성분분석 재실험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제한적인 성과였을 뿐,10) 그밖에는 한나라당과 정부의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에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다. 특위 구성은 4월 28일 결정되었으나 한나라당이 위원 명단을 제출하지 않아 5월 24일까지 첫 회의가 열리지도 못했다. 그나마 공식 활동시한이 6월 27일까지라 실제활동 기간은 불과 한달뿐이었던 셈이다. 이 기간에 공식회의는 단 네차례 열렸고 더구나 5월 28일과 6월 25일 전체회의는 한나라당 의원들과 국방부 등 정부의 불참으로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결국 특위는 5월 24일과 6월 11일, 단 두차례 회의를 연 후 해산되었다.11) 국회의원 20명으로 구성된 특위가 활동 한달, 전체회의 두차례. 초계함이 침몰하고, 군인 46명이 사망했을 뿐 아니라, 남북관계의 전면적 중단을 가져온 5·24조치의 원인이 된 사건과 관련한 국회의 초라한 기록이다.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안에 행정부가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예외라고 할 수 없지만 의회가 이 정도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1975년과 1976년 의회에서 초당적 처치위원회를 구성하여 FBI와 CIA의 정보수집과 공작활동이 법을 위반하지 않았는지 광범위한 조사를 벌여 보고서 14권을 발표하고 개선조치들을 권고했다. 1989년 선원 47명이 사망한 아이오와호 폭발사고에서도 해군 자체조사에 만족하지 못한 의회가 청문회를 개최하고, 의회 산하의 회계감사원이 해군조사단 조사 결과를 재조사하도록 했다.12) 9·11 이후에도 미국은 2002년 11월 초당적 9·11위원회를 구성하여 사태를 방지하지 못한 이유 등을 거의 2년 가까이 강도 높게 조사한 바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안보 사안, 특히 북한이 관련된 (혹은 관련되었다고 의심받는) 사안에서 국회가 독립적으로 역할을 수행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그 이유는 정부조직의 구조적 문제와 현대사의 문제로도 설명할 수 있으나, 두가지 다 분단체제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분단은 한국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구조적 질곡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정부구조 면에서 한국은 제2공화국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통령제를 유지하고 있다. 대통령제에서도 대통령이 법률안 제출권, 국가긴급권, 헌법개정안제안권, 국민투표부의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헌법재판소 소장・재판관을 임명하고, 대법원장・대법관을 임명하며, 광범위한 사면권을 행사하는 등 입법부와 사법부의 권력을 초월하는 “초권력적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다.13) 또 각부 장관이 국회의원을 겸직할 수 있어 제도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행정부와 입법부 간에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던 제헌의회의 헌법초안이 대통령제로 갑자기 바뀐 이유, 제3공화국·유신헌법·제5공화국이 등장한 이유 등이 맞물려 있지만 분단이 그 구조적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즉 대통령제는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에서 사회안정을 이루고 안보를 지키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명분 아래 지속적으로 강화되어왔던 것이다.
분단체제하에서 입법부의 독립성이 침해받아온 역사는 1948년 제헌의회에서부터 시작된다. 제헌의회는 1948년 9월 22일 대한민국 법률 제3호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했으나, 행정부의 반대와 방해 및 친일세력의 특위 위원 암살 음모 등으로 활동에 어려움을 겪던 중 결정적으로 ‘국회프락치 사건’이 터지면서 실질적으로 와해되었다. 결정적 증인도 객관적 물증도 없는데도14) 국회의원 13명이 남로당 공작원이라는 혐의로 실형을 받은 이 사건은 이후 두고두고 국회의원들에게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이후 한국전쟁 기간 벌어진 국군의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서도 국회가 조사를 벌였으나 실패한 경험도 있다.15)
국회가 그나마 상대적 독립성을 어느정도 누리고 있던 시기에 이런 사건들이 발생했음을 상기할 때, 대통령의 권력이 강화된 유신체제와 제5공화국을 거치면서 국회의원들의 피해의식이 얼마나 깊어졌을지 짐작할 수 있다. 즉 북한이나 안보에 관련된 사안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고생만 하고 심지어 간첩으로 몰려 처벌받을 수도 있다는 내면적 자기검열기제를 고착화했고, 이것이 이번 천안함사건에서 의회의 무기력으로 나타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
2011년 6월 28일 국회 인사청문특별위원회의 조용환(趙庸煥)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국회가 안보 사안에서 단순히 무력한 정도가 아니라 안보공세의 장이 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청문회에서 조 후보자는 천안함사건에 대해 “북한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답했으나,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북한 소행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이냐”며 추궁하자 “정부 발표를 받아들이지만 직접 보지 않아 확신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답변했다.16) 그 발언 때문에 헌법재판관 선출안이 역사상 처음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오랫동안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국회가 민주화 이후 5・18광주청문회와 과거사위원회 등으로 독자성을 부분적으로나마 획득했으나, 천안함이 계기가 되어 이 독자성이 다시 크게 손상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같은 민주주의의 후퇴는 국가와 시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천안함 침몰 직후 정부는 사건 발생시간을 수시로 바꾸어 발표하고, 침몰 위치에 대해서도 번복하고, 확인되지도 않은 채로 사고 원인을 예단하여 발표하는 등 스스로 신뢰를 떨어뜨렸다. 시민과 언론이 이러한 문제점에 합리적 질문을 제기하면, 성실히 답변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대신 국가권력으로 질문 자체를 봉쇄하려 했다.17) 정부는 의혹의 가능성 자체를 봉쇄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명예훼손 소송이라는 합법적 도구를 사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찰과 배후압력을 행했다.18) 그 결과 “국가 단합을 도모하는 구심점으로서의 정부 역할이 흔들”렸을 뿐 아니라19)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해 표현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는 반민주주의적인 행태도 나타났다.
2012년 5월 이명박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에서 천안함사건에 의혹을 제기하는 시민을 “이들〔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우리 내부의 종북세력”이라고 지칭한 것은 이러한 반민주주의적 모습의 정점이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발언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 원리를 훼손하고, 헌법적 원칙을 위배하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시민이 있다면 국가보안법 위반이지만 검찰은 천안함사건과 관련한 국가보안법 고발 건들은 모두 무혐의로 각하한 바 있다. 그럼에도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이 ‘종북주의’ 운운하는 것은 법치주의 원리를 훼손한 것이며, 헌법에도 명시된 무죄추정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다. 또한 사법부가 천안함과 관련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판결을 내린 적도, 내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행정부 수반이 불특정 다수 시민을 ‘종북세력’이라는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규정지은 것은 삼권분립의 민주적 원칙을 훼손한 것이기도 하다.20)
3. 천안함사건으로 본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
지금까지 논의한 것과 같이 천안함사태는 민주주의의 퇴행과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민주화의 발전상도 보여준다. 한국정부는 사건 이후 일련의 대응을 통해 남북간 긴장을 고조시키며 안보정국을 조성하려 했지만 결과는 그러한 의도와는 판이했다. 시민사회와 일부 언론에서 정부의 설명에 대해 의심과 반론을 던졌고, 이를 제압하려는 정부의 갖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일반 시민들은 정부의 주장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즉 천안함사태는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가 그만큼 성숙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2010년 5월 20일 합조단은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이로부터 나흘 뒤 ‘북한의 군사도발’을 규탄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담화문이 따랐다. 이와 함께 정부는 천안함 추도 모금행사를 벌이며 안보와 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이 사건을 안보와 직결시켰다. 정부의 이러한 노력은 시민들이 정부 발표를 대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하는 듯했다. 과거의 비슷한 경우, 정부 발표는 일단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일쑤였다. 혹 의심이 간다고 해도 정부의 주장을 뒤집을 만한 정보를 가진 단체가 드물었거나, 있더라도 이러한 단체들이 일반 시민들과 소통하기에는 역량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천안함사건은 달랐다. 정부의 주장에 중요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정부의 설명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를 보여준 대표적인 NGO로서 참여연대를 꼽을 수 있다. 천안함 침몰로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참여연대는 NGO 가운데 처음으로 군의 수사방식이 폐쇄적이라는 비난을 공식논평에 싣는 것을 시작으로 정부의 사태대응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졌다.21) 또한 국방부가 침몰시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음을 지적했고,22) 수중 버블제트에 의한 폭발이 타당한지, 북한의 어뢰인지, 어뢰에 의한 공격인지,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이 실재하는지, 그렇다면 침투가 가능한지 등 중요한 의문을 제기했다.23) 이들은 공론화를 위해 각종 토론회를 주최하여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냈다.24) 또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함께 정보공개청구를 제기하고, 이 청구가 거부되자 시민 1160명을 대신해 ‘천안함 관련 정보공개거부처분의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나아가 침몰 직후 국제사회가 한국정부의 발표에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을 때 정부 조사에 의문을 제기하는 서신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원국들에 전했다.25) 한편 주목해야 할 것은 참여연대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제한적이었다는 것이다. 사태의 위중함으로 볼 때 정부는 예전처럼 직접적인 폭력 수단을 쓸 수도 있었지만 이러한 민주화 이전 식의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26) 그만큼 NGO가 활동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확대된 것이다.
참여연대 같은 NGO의 정치적 역량의 성장은 언론의 자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NGO의 메시지가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로운 보도가 매우 중요하다. 이번 천안함사건을 보면 언론매체들 중 보수언론은 ‘폭침설’을 정부보다 앞서 주도했지만, 일부는 정부 압력으로부터 상당한 정도의 독립성과 자유를 행사했다. 예를 들어 KBS의 ‘추적 60분’은 자체 실험과 분석을 토대로 어뢰폭발로 남아 있어야 할 산화물이 추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 온라인 미디어인 프레시안은 심층보도 기능에 더해, 정부의 ‘관리’가 미치지 않는다는 장점 덕에 천안함사건 진상규명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프레시안은 과학자들의 증거에 기반한 이견을 끊임없이 보도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정부가 내세운 과학의 가면을 벗길 수 있도록 도왔다.27) ‘흡착물’ 의혹, 어뢰 폭발의 유무 등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면 접하기 힘든 점을 알기 쉽게 소개함으로써 정부의 설명에 대중이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외에도 『한겨레21』과 MBC ‘뉴스데스크’에서도 정부의 발표와 관련 각종 의혹을 심도있게 다루었다. 이러한 성과는 권력층으로부터 상당한 견제가 있던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더욱 값지다고 할 만하다. ‘추적 60분’의 예를 들면, 친정부 성향의 고위급 인사들이 보도 내용을 놓고 방송 제작과정에 지속적으로 간섭했고28) 심지어 방영 자체가 불투명해지기도 했다.29) 그뿐 아니라 방송이 나간 후 방송통신위원회는 의문을 제기한 보도에 대해 “불명확한 내용을 방송”했다는 이유로 ‘경고’라는 중징계를 내렸던 것이다.30)
NGO의 활동과 독립적 언론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시민의식의 성장이었다. 정부의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안보정국에 휩쓸리지 않았다. 정부 발표의 신뢰도를 측정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침몰이 일어난 2010년에는 정부 발표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한다” 또는 “신뢰하는 편이다”라고 응답한 사람은 단지 32.4%였다. 반면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또는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라고 응답한 사람은 무려 35.8%에 이른다. 이러한 수치가 2011년 조사에서도 거의 똑같이 나타난다(33.6% 대 35.1%)31)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연평도사건에서 북한의 포격으로 사상자까지 발생하여 정부의 안보논리가 대중에게 큰 설득력을 가졌을 만한 국면이었음에도, 시민들은 여전히 정부의 설명에 대한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 여권의 참패로 이어졌다. 안보정국이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역풍이 되었던 것이다.32) 많은 사람(69.3%)이 천안함사태의 배후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봤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거의 대부분(90.3%)이 이러한 의심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한나라당 지지자의 거의 절반(41.2%)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투표시에 천안함사건을 고려한 사람은 여야 모두 절반이 되지 않는다(각각 40.1%, 48.2%). 더군다나 천안함사건으로 지지후보를 바꾸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70%)이고, 바꾼 사람도 여당에서 야당으로 바꾼 사람(12.7%)이 그 반대(2.4%)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즉 천안함발 북풍이 역풍으로 바뀐 것은 그만큼 한국의 민주주의가 성장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4. 남은 과제들,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
결국 천안함사태는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와 가능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따라서 천안함 문제의 해결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이뤄질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2013년체제를 여는 핵심 고리의 하나다. 합조단 보고서 중 조작된 것이 확실한 데이터에 대한 청문회나 국정조사는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단단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가 안보영역으로 확대되고 분단구조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천안함발 북풍이 이전처럼 한국의 정치를 뒤흔들지 못했다는 사실은 한국 민주주의가 그만큼 성숙했음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남은 과제가 무엇인가도 말해준다. 그 숙제는 다름아닌 남북간 긴장 완화가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째, 남북대립은 동북아시아 국제정치 긴장의 원인이 되고, 이는 한국의 안보위기를 불러일으켜 민주주의를 제한한다. 천안함사건과 연평도사건으로 이어지는 남북간 긴장의 고조 속에서 미국이 2010년말 핵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를 서해로 보낸 것이 그 예라 할 것이다. 미 함대 파견은 북한과 중국에 위협으로 인식되어 해군력 증가 등 군사적 대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와중에 일본 대중은 오끼나와 미 해병대 기지의 현(縣)외 이전에 대한 반대를 접었고, 일본 정치권에서는 평화헌법을 수정하려는 움직임도 탄력을 받고 있다. 이러한 지역안보 긴장은 한국의 안보와 민주주의에 대한 구조적 압력으로 작용한다.
둘째, 남북의 긴장은 국가보안법을 정당화한다. 시민의 기본적인 자유, 즉 사고와 양심의 자유를 처벌하는 법이 존재하는 이상, 민주주의는 언제라도 퇴보할 수 있는 구조적 결함이 있는 것이다. 2012년 1월 사진작가 박정근이 북한을 조롱하려는 의도로 북한의 ‘우리민족끼리’ 트위터 내용을 리트윗했는데 이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까지 당한 것이 그 단적인 사례다. 북한이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시민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법적 토대 위에서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발전하기는 불가능하다.
셋째, 남북의 긴장은 법적인 개인의 자유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건강한 토론과 의식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남북의 긴장이 사회적 의식을 짓누르는 예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친구라는 뜻의 ‘동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북한에서 애용되는 호칭인 탓에 남한사회에서 일종의 금기가 된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라든가 공산주의라는 말에 과장된 부정적 반응을 쉽게 비친다. 실제로 모든 자본주의사회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서 주창하는 제도를 도입해 수정하며 발전해왔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알레르기적 반응은 이들 제도가 주는 이론적·실제적 공헌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을 막아왔다. 사회당의 미미한 존재와 공산당의 부재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천안함사태를 통해 우리는 한국 민주주의가 부딪힌 한계점과 그간 쌓아온 역량을 동시에 진단해보았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국내 민주주의는 남한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북한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 이를 바탕으로 한 국제사회와의 교류와 긴장 완화 없이 남한만의 민주주의는 불완전할뿐더러 심각한 위협에 언제라도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3년 한국사회에는 새로운 정치 사회 패러다임이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 어떤 국내 변화도 남북긴장의 완화와 분단체제의 해소 없이는 구조적 한계를 안을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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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낙청 『2013년체제 만들기』, 창비 2012.
2) 이명박 대통령 제91차 인터넷 라디오 연설(2012.5.28). 이러한 발언의 문제점은 다음 글 참조. 서재정 「MB의 위험한 ‘종북세력’ 발언」, 경향신문 2012.6.3.
3)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의 ‘통일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한 정부 발표를 신뢰한다는 응답자의 비율이 2010년과 2011년 각각 32.4%와 33.6%에 불과했다. 강원택 「차기 대선과 대북정책」,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 학술심포지엄 ‘2011 통일의식조사 발표: 통일의식과 통일준비’ 자료집 104면.
4) 이에 대해서는 서재정·이승헌 「결정적 증거, 결정적 의문: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 보고에 부쳐」, 『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참고.
5) 보고서는 최초 82명 중 17명이 관(官), 6명이 민(民)이라고 명기하고 있으나, 재편성 후 몇명이 관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따라서 ‘민간인’ 27명 중 상당수는 국책연구기관에 근무하는 ‘관’인 것으로 보이고, 조선소나 대학에 근무하는 4~6명만 민간인인 것으로 추정되나 그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 대한민국 국방부 합동조사결과 보고서: 천안함 피격사
건(2010.9.10), 38~42면. 이하 보고서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시함.
6) KBS ‘추적 60분’ 「의문의 천안함, 논쟁은 끝났나?」, 2010.11.17.
7) 보고서 부록 V-5-2는 모의 폭발실험에서 나온 흡착물의 에너지 분광분석 결과로서 알루미늄 산화물의 씨그널을 보여야 하지만, 그림상에서는 알루미늄 황산염수화물의 씨그널과 같게 표시되어 있다. 함체 및 어뢰추진체에서 추출된 ‘흡착물’의 분석 결과와 동일하도록 조작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결과다. 자세한 내용은 이승헌 과학의 양심, 천안함을 추적하다, 창비 2010, 113~15면.
8) 황준호 「서재정·이승헌, ‘천안함 합조단에 조작 주도한 인물 있었다’」, 프레시안 2012.4.3.
9) 황방열·이경태·권우성 「문정인 교수 인터뷰 ② ‘북, 김정일 유고 때 국방위 체제로 움직일 것’」, 오마이뉴스 2010.6.14.
10)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주언론실천위원회 성명 「국회 천안함 특위 파행? 언론도 파행!」, 2010.7.1. 특위의 활동 덕분에 천안함 함체와 어뢰추진체에서 채취된 ‘흡착물’을 직접 분석할 수 있었던 과학자는 정기영과 양판석이다. 이 둘은 독립적인 별개의 분석을 통해서 이 물질이 알루미늄 산화물이 아니라고 입증했다. 이들의 연구결과 덕분에 합조단의 주장이 틀렸음은 의문의 여지 없이 밝혀졌으며, 앞으로 국정조사 등을 통해서 밝혀져야 할 것은 합조단의 누가, 왜 이 물질을 알루미늄 산화물이라고 주장했느냐는 것이다. 최근 김광섭 등도 합조단의 주장이 틀렸음을 지적, 이런 조사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단 김광섭의 주장 중 선행연구 결과나 독자적 실험 없이 가능성만을 내세운 부분은 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강태호 「천안함 1번 글씨 연소 여부, 모두 틀렸다」, 한겨레 2012.6.22.
11) 국회사무처 제290~291회 국회(임시회) ‘천안함 침몰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회의록’ 1~4호, 2010.5.24~6.25.
12) 이 방식은 천안함사건의 처리방식에 많은 시사를 던져준다. 석광훈 「천안함, 美 아이오와호 폭발사고 조작과 판박이」, 프레시안 2010.6.9.
13) 정종욱 「한국 대통령제의 성공을 실현하기 위한 운영 모델」, 『서울대학교 법학』 43권 3호 266면.
14) 박원순 「국회 프락치 사건, 사실인가」, 『역사비평』 1989년 가을호 228면.
15) 전갑생 「1960년 국회 ‘양민학살사건조사특별위원회’ 자료」, 『제노사이드연구 1』(2007.2) 253면.
16) 김기현 「조용환 헌재재판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답변 논란」, 동아일보 2011.6.29.
17) KBS ‘9시 뉴스’는 2010년 4월 7일 한주호 준위가 ‘제3의 부표’에서 숨졌다고 보도했다. 국방부는 즉각 부인성명을 내고 KBS에 정정보도를 요구, KBS가 정정보도를 내고 그 뉴스 영상을 삭제하도록 했다. 해군본부는 8개 신문사를 상대로 언론중재신청을 했고, 방송통신위원회는 ‘추적 60분’ 「천안함」 편에 중징계를 결정하기도 했다.
18) 국방부 장관은 박선원(朴善源)을 허위사실유포 혐의로, 합동참모본부는 이정희(李正姬) 의원을 명예훼손혐의로, 해군은 신상철(申祥喆)을 전기통신기본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경찰은 의혹을 제기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한 대학생을 연행,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보수단체인 라이트코리아, 납북자가족모임, 6·25남침피해유족회는 김용옥(金容沃)을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인터넷에 의혹을 올린 누리꾼 12명을 전기통신기본법 위반 혐의로, 라이트코리아와 고엽제전우회는 참여연대와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을 명예훼손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고발했다.
19) 송민순 「천안함, 국가안보를 생각하며」, 2010.4.30. http://blog.naver.com/songmin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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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서재정 「MB의 위험한 ‘종북세력’ 발언」, 경향신문 2012.6.3 참조.
21) 참여연대 논평 「대통령 지시도 통하지 않는 군의 기밀주의」, 2010.4.2; 「천안함 진상조사, 더욱 두터워지는 비밀의 장막」, 2010.4.19; 「천안함 밀실조사, 독점 정보 오남용, 도를 넘어섰다」, 2010.5.12; 「정보공개는 의무이지 쇼가 아니다」, 2010.6.1.
22) 참여연대 논평 「군 해명자료 사건발생 시간 제각각」, 2010.4.2.
23) 참여연대 천안함 이슈리포트 1 「천안함 침몰 원인 조사 결과가 남긴 8가지 의문점」, 2010.5.25.
24) 참여연대 긴급좌담회 「천안함 침몰과 군사기밀」, 2012.4.6; 토론회 「천안함 참사 관련 정부의 정보통제와 언론보도의 문제점」, 2010.4.13; 긴급토론회 「천안함사건 조사 결과에 대한 토론회」, 2010.5.23; 토론회 「천안함 1주년: 천안함 진실과 민주주의 그리고 한반도 평화」, 2011.3.24.
25) 참여연대 “The PSPD’s Stance on the Naval Vessel Cheonan Sinking,” 2010.6.1.
26) 하지만 정부가 탄압을 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방법이 달라졌을 뿐이다. 국무총리가 국회에서 참여연대를 “어느 나라 국민인지 의문이 생겼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언론은 익명의 정부관계자를 인용하여 참여연대의 활동을 “이적행위”로 지칭했다. 이에 맞추어 일부 우익단체는 참여연대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한편 이적행위와 허위사실 유포 등의 혐의로 고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도록 했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이러한 압박에 “위협과 공포를 느낀다”고까지 발언했다. 이정환 「“이적행위? 국제적 망신을 누가 시키고 있나?”」, 미디어오늘 2010.6.14.
27) 서재정 「버블효과는 없었다」, 프레시안 2010.5.27; 황준호 「美 물리학자 “어뢰 폭발했다면 ‘1번’ 글씨 타버려”」, 프레시안 2010.5.31; 황준호 「천안함 조사, 더이상 과학이란 이름을 더럽히지 마라」, 프레시안 2010.6.7.
28) 조현호 「교양 프로그램에 김윤옥 여사 미화 장면 넣으라 지시」, 미디어오늘 2012.3.27.
29) 채은하 「추적 60분 ‘천안함’편 불방될 수도… “분노가 목구멍까지”」, 프레시안 2010.
11.17.
30) 조현호 「5공식 추적 60분 천안함 징계」, 미디어오늘 2011.1.6; 「방통심의위 <추적 60분> ‘천안함’편 중징계 내려」, 경향신문 2011.1.6.
31) 강원택 「차기 대선과 대북정책」, 앞의 자료집 104면.
32) 강원택 「천안함 사건은 지방선거의 변수였나?」, 동아시아연구원(EAI) 오피니언 리뷰 1, 201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