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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 제2회 사회인문학평론상 수상작
푸어(poor) 공화국, 대한민국
정지은 鄭知恩
1981년생. 인하대 국문과 및 성공회대 NGO대학원 졸업. 현재 인천문화재단 재직중.
solbitur@gmail.com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다. 중심이 버티지 못한다
—윌리엄 예이츠 「재림」 중에서
근래에 들었던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신규 아파트의 불을 켜는’ 신종 알바의 등장이었다. 자신의 몸을 실험실 쥐처럼 내맡기는 제약사의 ‘마루타 알바’보다 어감은 좀 낫다고 위로해보지만 현실은 여전히 마루타 알바만큼이나 오싹하다. 이 ‘불 켜기 알바’는 미분양, 미입주로 ‘불 꺼진 아파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막기 위해 동원된 건설사의 고육지책이기 때문이다. 중도금 대출이자 대납, 분양가 할인, 잔금 유예 같은 혜택을 제공하는데도 잔금을 받지 못해 유동성 위기를 우려하는 건설사들의 사정이 다급하긴 한 것 같다. 짓기도 전에 팔아서 돈을 받을 수 있는 건설사도 이렇게 힘드니, 일을 모두 마친 후에나 돈을 받을 수 있는 개인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버는 건 어려워도 쓰기는 쉽다. 대한민국은 최저시급(2012년 기준 4580원)으로 김치찌개는커녕 햄버거 하나 사먹기 힘든 나라다. 알바생의 시급과 맞먹는 스타벅스 라떼 한잔은 4400원‘이시고’, 주문한 물건들은 ‘나오는’ 게 아니라 ‘나오신다.’ 이 이상한 높임말은 백화점에서 시작되어 어느 순간 동네 가게들에까지 전염되어버렸다. “신상품입니다”는 왠지 무례한 것 같고, “신상품이세요”라고 해야 손님이 존중받는 것처럼 느낀다나. 과도한 높임말이 문제가 되자 약삭빠르게 직원들을 동원해 ‘잘못된 높임말 추방 캠페인’을 벌이는 백화점도 등장했다. 그런들 저런들 물건이 사람보다 높은 지위를 획득하고, 가격에 따라 대접받는 게 당연해져버린 현실은 추방 불가능하다.
동네 구멍가게가 사라지고 24시간 편의점을 위시한 각종 프랜차이즈들이 동네 상권을 장악하면서 ‘돈의 맛’은 더욱 달콤해졌다. 돈을 내는 사람은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고객’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으며, 똑같은 방식으로 대접받는다. 표준화된 접객 매뉴얼에 따른 선진 경영기법의 일환인 셈이다. 아이가 돈을 낸다고 하대했다가는 언제 어디서 돌아다니고 있을지 모를 미스터리 쇼퍼(mystery shopper)1)의 감시망에 걸려 서비스점수에서 낮은 평가를 받아 잘릴지도 모른다. 전자회사의 서비스센터 수리기사나 민영화된 공기업의 직원은 자신의 서비스를 이용한 고객이 ‘매우 만족’하셨다는 문항에 싸인하도록 애걸하기도 한다. 심지어 칭찬글을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려주면 더욱 감사하겠다고까지 덧붙인다. 물론 이때도 고객은 구매력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만 존중받는다. 사회적 관계가 배제된 경제적 관계에서는 돈이 절대적인 기준이다.
하지만 대접받는 것은 ‘고객’일 때뿐이다. 누구든지 한번 수렁에 빠지면, 아니 한번만 ‘삐끗해도’ 좀처럼 헤어나기 어려운 사회가 대한민국이다. IMF 경제위기와 유럽발 금융위기를 거치며 한층 공고해진 ‘빚-비정규직-빈곤 노동’의 악성 트라이앵글2)이 개미지옥처럼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중산층이건 고학력자건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빚진 자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비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은 일해도 빈곤하며, 그들은 다시 빚에 노출될 공산이 크다. “적금이고 카드고 최후의 보루조차 사라져 앞으로 살 일이 걱정”인데 “아들이 이제 대학생”인 박민규의 ‘그’와, “매달 13평형 원룸의 월세와 의료보험, 적립식 펀드 한개와 적금을 부어갈 만한 생활력을 갖”춘 김애란의 ‘그녀들’3)이 넘쳐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푸어(poor, 빈곤) 시리즈가 끊이지 않고 유행한다. 직장이 있고, 집이 있고, 교육을 받았어도 스스로를 빈곤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취직 전에는 스펙푸어, 가까스로 일하기 시작하면 워킹푸어, 결혼할 때는 허니문푸어, 집이 있으면 하우스푸어, 집이 없으면 렌트푸어, 아이를 가지면 베이비푸어, 교육시킬 때는 에듀푸어, 나이 들면 씰버푸어란 자조 섞인 농담이 나돈다.4)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 이후에는 프랜차이즈푸어(franchise poor, 퇴직금을 프랜차이즈 창업에 써버리고 가난해짐)가 양산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한국인의 인생은 하나의 푸어를 벗어나면 또다른 푸어로 전락하는 ‘푸어의 징검다리’ 구조에 빠져 있는 셈이다.
이러한 푸어들, 특히 비정규직은 정치를 비롯한 각종 사회적 네트워크와 이슈에서 소외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사회는 그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는다. 그들은 일단 선거 때 투표를 하러 갈 시간적 여유가 없다. 일례로 2012년 총선에서 인천의 투표율은 전국 꼴찌를 기록했는데, 혹자는 그 원인으로 인천에 소규모 공장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선거날 쉬는 대기업 사업장과 달리 중소제조업 종사자들은 공휴일에도 출근해야 하고 투표장에 가는 것도 사업주의 눈치를 봐야 해서 투표율이 낮다는 것이다. 물론 신문을 읽을 시간도 없다. 시간이 있으면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지 머리 아픈 뉴스는 보지 않는다. 이렇다보니 사회 문제에 무신경해지거나, 관심이 있어도 근무시간이 너무 길어 참여하기 힘들다.
게다가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무언가를 공유하며 소속감을 느낄 모임이나 조직이 전무하다. 비정규직, 파견직과 용역직의 일상화는 직장의 네트워크마저 파괴한 지 오래다. 같은 회사에서 매일 얼굴을 맞대고 일하지만, 월급과 직급은 물론이고 명절 선물까지도 각각 고용된 회사에 따라 다르다. 정규직은 쌀 20kg, 계약직은 스팸세트, A용역회사는 와인, B용역회사는 올리브유 같은 식이다.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해고 통보를 문자메시지로 받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김찬호(金贊鎬)의 지적처럼 한국사회의 위기는 단순히 경제의 어려움이 아니라 더욱 근본적으로 부가가치 생산능력이 심각하고 급격하게 고갈되어가는 데 있다. 자본주의의 역설은 비자본주의적 영역, 즉 위와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가 얼마나 건실하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그 경쟁력이 보장된다는 점5)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자본주의도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방을 찾아 헤매는,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 세대
학교 선배가 그러는데, 요즘 계급을 나누는 건
집이나 자동차 이런 게 아니라 피부하고 치아라더라
—김애란 「도도한 생활」 중에서
‘20대 개새끼론’6)부터 ‘88만원 세대론’7)까지 각양각색 담론이 넘쳐나지만, 현재의 20대에게 가장 중요한 당면과제는 취업이다. 90%에 가까운 대학진학률이 보여주듯 대학생은 더이상 특권층이 아니며, 저항의 상징이던 대학문화 역시 사라진 지 오래다. 대학축제 때 유명 연예인을 부르는 것이 이제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학과가 없어진 자리를 대체한 학부제는 과의 선후배 관계를 무너뜨리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수업 듣고, 혼자 놀다가 집에 가는’ 잉여인간들의 집합소로 대학을 바꾸어버렸다. 수업 끝나고 알바 가기 바쁜 학생들은 동아리활동을 할 시간이 없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공무원시험 준비나 하는 게 현실적으로 낫다고 생각한다. 하루바삐 취직해 학자금대출을 갚아야 하는 대다수 대학생들에게 운동권 학생은 부채의식의 대상이 아니라, 예외적이고 이상한 존재일 뿐이다. 학생회는 등록금투쟁 대신 시험기간에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야식을 준비하는 ‘복지형 학생회’가 대세다. 하루종일 도서관에 혼자 틀어박혀 공부하다가 밥은 모여서 먹고 다시 흩어지는 ‘밥터디(밥+스터디)’의 등장은 취업을 위해 ‘전투준비’를 마치고 입학한 대학생들에게 이상할 것이 없다. 커뮤니티 자체가 붕괴된 대학은 ‘계급간 교류’를 할 만한 공간도, 시간도 제공해주지 못한다. 학생들의 출신・계급 자체도 균일화되고 있다. 최근 6년간 서울대 합격자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 지역 일반고 출신 합격자 가운데 강남구 출신이 22.4%를 차지했다. 이는 하위 14개 구의 합격자를 모두 합친 것보다 높은 비율이다.8) 지방 출신 학생 역시 부유한 경우가 많은데, 등록금과 서울의 살인적인 주거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는 집’에서만 자녀를 서울로 올려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펙’(specification)은 원래 제품명세서를 뜻하는 단어지만 대한민국에서 그런 뜻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스펙은 ‘스펙님’ 그 자체다. 세대별 노동조합 ‘청년유니온’이 4년제 대학 졸업예정자 및 졸업자 가운데 24~31세 남녀 37명을 대상으로 이력서 가격을 매겨본 결과, 이력을 만드는 데 들어간 평균비용은 4212만원이었다.9) 그럼에도 취업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시중의 한 증권사는 60명의 인턴사원을 모집한 뒤 실적에 따라 정식으로 채용된다며 실적을 강요, 6개월간의 수익은 회사가 챙기고 60명 중 16명만 정규직으로 뽑아 금감원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물론 그후 이 증권사는 관련 유의사항을 전달받았을 뿐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다. 취업시장의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기업들은 채용시에 ‘있는 집 자식들’을 선호한다. 부모가 기자면 주요 취재원과 개인적으로 연이 닿을 가능성이 높고, 은행원이라면 집이 어려워져서 사고 칠 가능성이 낮거나 혹은 대출을 땡겨오기 편하니까. 이래저래 같은 조건이라면 집안이 잘사는 사람을 뽑겠다는 식이다. 심지어 아이돌 가수도 긴 훈련생 기간을 경제적으로 감내할 수 있고 스타로 성공한 후에도 돈 문제로 잡음을 일으킬 가능성이 낮은 강남 출신을 선호한다고 한다. 한국은 부자의 가난뱅이 체험을 그린 박완서 단편 「도둑맞은 가난」(1975)으로부터 착한 성격도 부자들이 독점하는 박찬욱 영화 「쓰리 몬스터—컷(Cut)」(2004)의 세계로 진화했다. 30년간 한국사회가 이뤄낸 성장은 꼭 그만큼이다.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는 더이상 보기 드물다.
현재 한국의 20대와 30대가 등록금대출, 장기간의 취업 준비, 불안정한 일자리, 치솟는 집값 등 경제적 부담으로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는 ‘삼포세대’로 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연애에도 결혼에도 출산에도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영화만 해도 기본 8000원, 3D영화는 12000원이다. 팝콘에 콜라까지 더하면 2인이 영화를 2시간 동안 즐기는 데 드는 비용은 3만원을 훌쩍 넘는다. 시급 5000원짜리 알바를 6시간 이상 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이러니 연애도 사람 만나는 것도 다 돈이라는 자조 섞인 푸념이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커피전문점들을 욕해도, 그곳에 가면 인터넷 무료사용과 노트북 대여는 물론이고 휴대전화 충전까지 가능하다. 이러니 주머니 사정이 빤한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커피전문점 이외에는 거의 없다. 가장 값싼 비용으로 눈치 보지 않고 오랜 시간 눌러앉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노선부터 경제력까지 모든 면에서 평행선을 달리는 20대와 50대가 묘하게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이 요즘의 프랜차이즈 커피점이다.
하숙집은 원룸으로 바뀌었고, 더이상 자취방에 몰려와 술 마시고 노는 친구들도 없다. 관계가 생기려면 사람을 만나야 하고, 사람을 만나면 커피라도 한잔해야 하는데 관계는 곧 돈이라는 것을 이들은 일찌감치 깨달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집에서 숨만 쉬고 있어도 돈이 든다(월세가 30만원이라면 하루당 1만원 꼴이다). 연애에는 더 많은 돈이 든다. 김애란 단편 「성탄 특선」(2006)에는 돈을 구할 수 없는 남자가 크리스마스에까지 여자에게 모든 비용을 부담하게 할 수 없어서 어머님이 편찮으시다는 거짓말을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상당수 20대에게 이는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다.
20대는 서로를 폐인, 잉여, 덕후(오따꾸お宅의 한국적 표현), 안여돼(안경・여드름・돼지의 준말로 못생긴 외모를 통칭)로 부르며 희화하거나 낮춘다. 그들에게 익숙한 것은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10)지는 반지하 방에서 홀로 면식수행(세끼를 라면으로 해결)을 하며 온라인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들에게 ‘내 집 마련’은 사치다. 게다가 서울에서의 내 집 마련은 꿈조차 꾸기 힘들게 되어버렸다. 집을 마련할 수 없는 상황은 결혼을 미루게 만들고, 안정적인 주거환경이 마련되지 않으니 출산에도 엄두를 못 낸다. 2010년을 기준으로 자녀 한명을 양육하고 대학까지 졸업시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총 2억 7514만원에 달한다. 아이는 알아서 크는 것이 아니라 돈이 키운다.
‘지상의 방 한칸’조차 너무나 절실한 상황에서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마땅치 않다.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것은 일자리가 어떻게든 유지되는 것이다.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는 계속 줄어드는데 거기에 취직하려는 사람은 늘어난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주요 대기업이 투자를 늘려도 ‘일자리 없는 성장’ 때문에 고용은 불안하기만 하다. 정부부터 나서서 일자리랍시고 인턴 기회를 제공하지만, 1년 이상을 보장받지 못한다. 가까스로 취업에 성공했더라도 트위터에 올린 글 때문에 아직 출근하지도 않은 회사에서 해고통보를 받기도 한다.11) 사실 대한민국 직장인 모두가 잠재적 자영업자인 셈이다. 그러나 자영업자 10명 중 8명이 3년 내 폐업하고, 자영업자 42%가 월소득 150만원 미만인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직장인은 행복한가? 2011년 4분기 기준 전체 1731만명의 임금근로자 가운데 940만명(54.3%)이 월 200만원 미만을 받는다. 대졸 이상 학력자의 27%가 월급여 200만원을 밑돌았다. 대학을 나와도 4명 중 1명은 200만원 미만 월급쟁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12)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췄다는 이들이 마주한 현실은 대저 이러하다.
빵과 커피, 그리고 베이비부머
언니, 건물이 아니라 스트리트(street)를 가지고 계신 거예요?
—드라마 「신사의 품격」 중에서
언제부터인가 새로 연 빵가게에 가면 단정한 유니폼에 명찰을 달고 모자를 쓴 채 어색한 웃음과 익숙지 않은 손놀림으로 빵을 담아주는 중년의 아저씨와 아줌마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전국에 점포가 3000개가 넘는 한 프랜차이즈 업체 덕분에 이제 생일 케이크 하면 이곳의 파란 박스가 자동으로 떠오를 정도다. ‘독일빵집’ ‘○○○제과점’을 몰아내고 골목골목을 점령한 이 빵가게의 현실은 어떨까? 다른 데보다 깨끗하고 편해 보여 알바를 시작한 한 대학생은 처음 2개월간 수습이라는 명목으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4000원가량의 시급을 받으며 출근 첫날부터 도넛을 튀겨야 했다. 화상을 여기저기 입었고, 뜨거운 빵을 만지기 위한 장갑 등의 필수품이 제대로 지급이 되지 않아 알바생이 자비로 추가 구입해야 했다. 최저임금도 주지 않는 것을 본사에 항의하자, ‘수습기간에 최저임금 미만을 지급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본사에서 가맹점주에게 최저임금 지급을 권유하지만 강제사항은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알바생을 착취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맹점주의 실상은 어떨까? 파리바게뜨의 모그룹인 SPC의 홍보부장 말에 따르면 ‘파리바게뜨 300여개 점포는 새벽 6시부터 저녁 12시까지 제품을 팔아야 하고, 매장 아르바이트생의 평균 근속기간이 4개월로 짧고, 투자해야 하는 초기자금도 큰 편이다’.13) 게다가 가맹점주들은 근래 들어 가맹점 월임대료가 평균 12% 상승하고 있어 어려움이 가중된다고 토로한다. 물론 그 와중에 재벌 3세들이 유학시절 구상해온 사업 아이템인 ‘외국계 프랜차이즈’ 등과도 경쟁해야 한다. 요즘 재벌들이 욕을 먹으면서도 이런 소상공인 업종에까지 문어발을 뻗치는 가장 큰 이유가, 재산 분배가 끝난 후 계열사를 물려받지 못한 비주류 재벌 3세를 위해서라는 해석까지 등장했다. 이제는 아들뿐 아니라 딸들에게도 계열사 하나쯤은 물려줘야 하는 시대니 말이다. 물론 이 내로라하는 재벌의 2세, 3세 따님들의 주력업종이 ‘베이커리’로 겹치는 것14)은 신기한 우연일 뿐이고.
그나마 손쉬워 보이는 커피점은 어떨까? 2012년 대한민국은 ‘커피공화국’이라 불린다. 서울의 어지간한 상권은 한집 건너 한집이 까페라는 우스갯소리도 있고, 커피 소비가 늘어난 탓에 녹차가 팔리지 않는다는 뉴스가 나올 정도다. 프랜차이즈 커피점 외에 개인이 차리는 까페도 우후죽순 증가세다. 2011년 커피 수입액은 5억800만 달러로 불과 일년 만에 2억 100만 달러가 늘어났다.15) 아메리카노 한잔에 들어가는 원두의 원가가 150원이라는 기사가 나오면서 때아닌 폭리 논쟁이 불붙기도 했다.
취업난, 조기퇴직의 흐름과 커피 프랜차이즈 성장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본적으로 커피 프랜차이즈 열풍은 직업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취직이 어려운 사람이 창업시장으로 유입되지만, 자영업을 통해 월급쟁이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는 비단 커피뿐 아니라 업종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동일한 현상이다. 경제활동인구의 23%가 자영업으로, 2011년말 기준 662만 9000명에 달한다. 준비되지 않고 은퇴한 베이비부머를 비롯해 취직하지 못한 청년층 등 프랜차이즈를 차리려는 예비 창업자는 늘 넘쳐난다. 자연스럽게 프랜차이즈 본사는 성장한다. 로열티와 인테리어비, 물류비 등으로 거둬들이는 수익이 커지고, 가맹점이 늘어날수록 브랜드 가치는 더 올라간다. 반면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으로 인해 가맹점주의 기대수익은 줄어든다.
프랜차이즈 커피점의 도입 초기만 해도 스타벅스와 커피빈은 ‘별다방’ ‘콩다방’이라는 애정섞인 별명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몇년 사이 급속하게 성장한 까페베네는 선두주자들과는 달리 ‘바퀴베네’라는 조롱조의 별명을 얻었다. 생명력 강한 바퀴벌레처럼 골목골목 없는 데가 없다는 뜻이다. 이 별명의 변화는 커피전문점 프랜차이즈에 대한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통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중견 빵집이었던 홍대 거리의 리치몬드 제과점이 없어지면서 그 자리에 생긴 가게가 롯데 계열사의 커피전문점 엔제리너스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건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곳은 그나마 자본력이 되는 업체뿐인 것이다. 목 좋은 곳의 경우 건물주가 임대료를 올려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프랜차이즈 업체에서 돈을 싸들고 찾아와 임대료를 올려줄 테니 자리를 넘기라고 설득해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자동차정비소도 브랜드가 있어야 손님이 온다. 자영업자들이 브랜드를 빌려 쓰는 형태로 운영되는 현대차 ‘블루핸즈’는 1417개의 가맹점이 있다. 기술만 있어도 먹고살던 ‘순돌이 아빠’16)의 시대는 끝난 셈이다.
5명이 숨진 용산참사 역시 호프집, 일식집, 백반집 등의 식당주와 직원들이 재개발로 갈 곳을 잃으면서 일어났다. 동네 자영업자들의 가게가 강제철거되고 번듯한 건물이 들어서면 자본력 있는 외국계 프랜차이즈들이 제일 좋은 목을 차지하고 중대형 국내 프랜차이즈들이 그다음을 차지한다. 생계형 가게들은 그렇게 하나둘 사라져간다.17) 동네 슈퍼는 SSM(super supermarket, 기업형 슈퍼마켓)으로, 동네 세탁소는 크린토피아 같은 체인점으로, 동네 약국 역시 온누리약국 같은 프랜차이즈 약국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프랜차이즈는 지리산 성삼재 자락에도, 백령도에도, 제주도 올레길에도 어김없이 들어와 있다.
이렇다보니 가맹점 1000곳이 넘는 브랜드는 4개 편의점 업체를 포함해 모두 27개에 달한다. 가맹점 수 ‘1000클럽’에 가입한 프랜차이즈들의 총 가맹점 수는 5만 5720개에 이른다.18) 하지만 여기에 가입된 이 많은 빵집의 빵을 어느 나라 밀가루로 만드는지, 그 많은 닭고기가 어떤 환경에서 나온 건지 별반 관심이 없다. 게다가 프랜차이즈의 범람은 전국민의 생활을 똑같이 만들어버렸다. 첫 생일케이크를 사는 곳은 파리바게뜨 아니면 뚜레쥬르, 장 보러 가는 곳은 이마트나 롯데마트 또는 홈플러스, 연인과 처음 영화 보러 가는 곳은 CGV 아니면 롯데시네마가 될 것이며, 퇴근길에 아빠가 사서 가져오던 치킨은 건당 2000원의 수수료를 받는 용역 배달업체의 프랜차이즈 치킨으로 바뀔 것이다. 아, 물론 사는 집이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의 가치를 말해주는’ 브랜드 아파트라면 더 좋겠다.
돈 벌어서 은행과 건물주에 갖다바치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농담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식이다. 직장인들의 ‘월급느님(월급+하느님)이 월급통장을 스쳐지나가신다’와 비슷한 맥락이다. 직장인은 카드사를 위해 돈을 벌고, 가게주인은 건물주를 위해 돈을 벌고, 자가소유자는 은행을 위해 돈을 버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은행권에 취직한 지인은 “처음에는 대출이 없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는데, 요즘은 되레 대출이 하나도 없는 고객이 이상해 보인다”는 고백을 하기도 한다. 신용카드 연체 한번 안한 사람보다 대출이 있는 사람이 신용등급이 높은 은행이니 그럴 만도 하다. 대출도 실적이니까. 하지만 숫자로 존재를 증명해보여야 하는 곳은 날마다 늘어난다. 백화점은 일정 금액 이상 구매한 고객을 위한 이벤트 참여조건을 자사 혹은 계열사 신용카드 소지자로 한정한다. 세탁세제라도 한통 받으려면 재벌사 계열의 신용카드를 소유하거나, 최소한 백화점 포인트카드 정도는 있어야 한다. 무료로 나눠주던 쿠폰은 전월 실적이 어느정도 이상 되는 고객에게만 DM으로 특별히 발송된다. 구매금액에 따라 응모할 수 있는 콘서트의 레벨이 달라지는 마케팅도 새롭게 등장했다. 단, 유효한 실적은 ‘최근 3개월’뿐이다. 작년의 실적도, 내년의 실적도 중요하지 않다. 어제의 고객이 오늘 다시 고객이 되기 위해서는 어제 산 만큼의 구매실적이 필요하다. 실적요건을 채우지 못하면? 자동 탈락이다.
아파트공화국의 유령들
“땅값, 집값이 올라가면 사람값이 떨어진다”
—선대인 「나는 꼽사리다」 9회 ‘한국경제, 퍼펙트 스톰 공습경보’
자신이 소유한 집의 진정한 면적이 얼마나 될지 계산해본 적이 있는가? 주택 소유자 사이에 한동안 유행했던 질문이다. 자신 명의의 집이 있다 해도, 은행 대출분만큼의 집값을 제외하면, 실제 소유자가 은행에 월세 내지 않고 소유하는 공간은 기껏해야 방 한칸이나 거실 정도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그 코너 ‘사마귀유치원’에서는 예쁘고 아늑한 집에 사는 거 어렵지 않다며 해결책을 제시한다. “집을 구입하는 건 부담이 되니까 전세로 살면 되는데 서울시 평균 전세가가 2억 3000만원이니 이 돈만 있으면 된다. 2억 3000만원은 한달 월급 200만원을 10년 동안 한푼도 안 쓰고 숨만 쉬면 모을 수 있다.”
추락하는 집값과 올라가는 금리에 신음하는 하우스푸어는 2010년 기준 최대 156만 9000가구로 추정된다.19) 한국 전체 인구의 11%에 해당하는 약 549만명이다. 이들이 매달 은행에 갚는 대출원금과 이자가 가처분소득의 42%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다.20) 금리가 오르거나 경기가 더 나빠지면 언제든지 다중채무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하우스푸어는 다른 푸어와 달리, 지불능력을 넘어선 레버리지 활용 때문에 유동성 함정에 빠진 걸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집이라도 있는 하우스푸어에 비해 더 심각한 사람은 렌트푸어다. 전세가 사라지거나, 있더라도 1년새 수천만원이 오르거나 반(半)전세로 전환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무주택이면서 영세서민이거나 사회초년생, 신혼부부들이 이 부담을 떠안고 있다. 국토연구원의 서울 및 수도권 지역별 점유형태 조사에 따르면 MB정권이 출범한 2008년에 50.7%였던 자가소유 비율은 2010년 46.56%로 떨어졌다. 전세 거주자는 29.56%에서 29.44%로 소폭 감소했다. 늘어난 것은 반전세와 월세 거주자뿐이다.
렌트푸어 현상은 저금리와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에 맞물려 있다. 대부분 중장년층인 집주인들 처지에서는 저금리 상황에서 전세 보증금을 받는 것보다 월세를 받는 것이 경제적으로 훨씬 이득이다. 게다가 은퇴한 베이비부머 세대 다주택자들은 안정적인 노후생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세 대신 월세를 선호한다. 이렇다보니 과거 부동산 호황기에 대출 받아 집을 사고, 집값이 오르면 팔아서 더 넓은 평수로 이사가거나 추가 대출을 받아 다른 집을 사서 재산을 불린 베이비부머 세대가 더이상 집값 상승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주택 임대시장에서 젊은층을 희생양 삼아 높은 월세 구조를 만들고 있다는 지적은 뼈아프다.21) 국토연구원의 2011년 주거실태 조사를 살펴봐도 참여정부 때인 2006년에 평균 7.9년 걸리던 내 집 마련 소요기간은 2008년에 8.96년, 2010년 말에는 9.01년으로 늘어났다. 집값이 아무리 떨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청년 세대에게는 버거운 가격이고, 어렵사리 집을 장만한다 해도 그 집값이 올라갈 전망도 없거니와 내집 마련 소요기간은 점점 늘어만 간다. ‘자기 집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는 것이다.
진입장벽이 높아진 대신 아파트 주민들끼리의 ‘구별 짓기’는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임대아파트는 내 집값을 떨어뜨리는 ‘공공의 적’이며, 우유나 신문 배달원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라는 공고문이 버젓이 나붙는다. 입주민과 방문객의 주차진입로가 구별되어 있는 풍경은 이제 너무나 익숙하다. 입주민들에게 ID카드를 발급해 카드 없이는 단지 내 통행을 불가능하게 하는 아파트도 속속 늘어난다. 인천의 송도 국제도시의 경우 논란이 되는 영리병원(투자개방형 외국의료기관) 도입을 가장 찬성하는 사람들은 바로 송도 아파트를 산 중산층 입주민들이다. 이들은 기존의 집을 팔고 대출금을 더해 송도에 입성했기 때문에, 집값이 떨어지는 순간 마땅한 방법이 없다. 영리병원이 들어와야 집값이 유지되고, 그래야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탈출할 해법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정말 부자들은 영리병원에 신경 쓰지 않는데, 가진 것은 아파트 한채뿐인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위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주객전도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송도뿐 아니라 영종, 청라 등 대규모 아파트를 분양했던 곳에서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파트 동이나 단지를 단위로 하는 ‘분파적 사회자본’은 풍부하게 존재하나, 그것을 초월하는 더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적 총자본’은 감소하고 있다는 지적22)과도 일맥상통한다.
모든 정책은 대출로 통한다
한미FTA 반대집회 때 해남 땅끝마을에서 상경한 농부 할아버지가
지나가는 시민들 붙잡고 ISD 조항을 설명하더라니까요.
—한 문화활동가의 말
2012년 현재 가계부채 911조와 자영업자 대출 164조를 합친 부채 규모는 1075조원이다. 7개 전업카드사의 한달 이상 연체율은 2.09%로 2년 3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방정부, 중앙정부, 공기업, 가계, 자영업자 등 어느 한곳, 누구 한명 부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정부는 정책을 내놓는 대신 대출을 권하거나, 신용카드를 만들라고 권유한다. 정부가 권하는 대출과 카드의 종류는 다양하다. 전세자금대출, 학자금대출, 생애 첫 주택마련 대출, 고금리 전환대출, 햇살론, 고운맘카드, 바우처카드, 스포츠(관람)바우처카드 등 이름도 다양하다.
정부가 대출을 권하기 전부터 가계는 부채로 허덕이고 있었다. 가계부채가 한국경제의 시한폭탄이 되어버린 가장 큰 이유는 소득이 충분치 않은 이들이 주거, 의료, 육아, 교육 등 필수지출을 ‘개별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사회구조가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은, 시행한 적도 없는 ‘복지 포퓰리즘’이 아니라 사회안전망의 부재다. 이러한 다중채무는 빚이 쌓이면서 이자 부담이 벌이보다 더 커져 또 빚을 얻어야 하는 악순환을 불러온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된다면 한국에서도 외화 시리즈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 같은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평범한 화학교사가 가족을 위해 마약딜러가 되는 과정을 그린 이 미국 드라마의 주인공이 마약을 만들어 팔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암에 따른 천문학적인 의료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고 한 똘스또이의 말은 틀렸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연령과 주기에 따라 거의 비슷한 궤적으로 흘러간다. ‘서바이벌’의 승자는 TV프로그램에나 나올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꿈이었던 가게주인은 이제 불가능하다. 웬만한 자본금 없이는 어떤 가게의 주인도 되기 힘들어졌다. 쌀가게, 구멍가게, 연탄가게, 미장원은 사라져버렸고, 혹여 남아 있다 해도 가난의 출구가 될 수 없다. 생계수단은 점점 맨몸밖에 남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세계화나 금융자본주의, 도시 공간의 자본주의적 재편 같은 구조적 요인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놓여 있다. 이들이 합법적으로 기댈 수 있는 것은 교회, 로또, 생명보험23)뿐이다.
일반적으로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자식들이 부모와 더 자주 만난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은 부모가 가난할수록 자녀와의 만남 횟수가 줄어드는 신기한 나라다.24) 가족관계도 돈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정직하게 일하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며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대는 이제 남보다 많이 갖고 욕심을 많이 부리는 것이 능력으로 추앙받는 시대로 바뀌었다.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적・문화적 불평등과 중첩됨으로써 더 강화되고 구조화되었다. 놀부가 자본주의의 새로운 인간상으로 부각되면서 ‘놀부’를 내세운 프랜차이즈가 성업하는 사이 흥부는 경제적 능력도 없으면서 아이들을 낳는 무책임한 가장으로 전락한다. “자기보다 열배 부자면 그를 헐뜯고, 백배 부자면 그를 두려워하고, 천배 부자면 그에게 고용당하고, 만배 부자면 그의 노예가 된다”는 사마천(司馬遷)의 일갈은 재벌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명확히 해준다. 한국사회는 ‘믿을 건 돈밖에 없다’는 신념이 모두의 얼굴을 두껍게 만들어 사회적 마지노선이 사라진 마몬(mammon, 성서에서 유래한 말로, ‘재물’을 뜻함)의 사회로 변해버렸다.
구조 대신 현상을 개별적으로 보고 모든 푸어의 원인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면, 문제 해결은 간단해진다. 명문대에 들어가는 것은 개인의 실력이고, 좋은 직장에 입사하기 위해 스펙을 쌓는 것은 당연하다. 어렵사리 들어간 직장에서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도 구조조정을 당한다면, 그건 개인이 노력하지 않은 탓이므로 사회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직장을 ‘창업’으로 바꾸고, 해고를 ‘폐업’으로 바꿔도 결론은 같다. ‘개개인이 인생의 모든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를 해둬야 한다’는 간단한 방정식이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푸어에 대처해온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와 사람의 상호작용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총체적 푸어 시리즈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대로라면 스펙푸어가 아니었던 직장인도 얼마든지 하우스푸어가 될 수 있고, 하우스푸어가 아니었던 그 누군가도 씰버푸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냇물을 건너려는 사람과 한강을 건너려는 사람에게 똑같은 징검다리를 놓은 후 건너지 못하면 그 사람을 나무라는 대신, 각자의 앞에 놓인 길이 어떤 것인지부터 파악하고 누구도 물에 빠지지 않고 건널 수 있도록 대안을 찾아야 할 때다.
아직 희망은 있다. 조한혜정은 “근대는 ‘마을을 버린 사람들’에서 시작해서 ‘마을을 만드는 사람들’로 끝이 날 것이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일본의 반(反)빈곤 활동가 유아사 마꼬또(湯浅誠)의 표현을 빌리면 사회 전체의 기반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이대로는 곤란하니 뭐라도 해보자”와 “어차피 헛일이다” 사이를 연결하는 활동을 어떻게든 찾아내야25)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말 시행을 앞두고 있는 협동조합기본법 등 대안경제에 대한 논의가 더욱 소중하다.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삶을 꿈꾸며 귀농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는 통계는 그래서 반갑다. 루이비똥 ‘지영이 백(bag)’26) 대신, 동네 벼룩시장에 나온 ‘핸드메이드 이불조각보 가방’을 선택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꿈꾸는 자 잡혀간다’(송경동 시인의 산문집 제목)가 현실에 가깝지만, ‘길이 없는 땅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고, 희망이 된다’는 루쉰(魯迅)의 말은 유효하다. 모든 것이 상위권으로 집중되는 사회적 불평등을 방치해 결국은 가진 자의 삶마저 어렵게 할 것인지, 함께 나누면서 안정된 삶을 누릴 것인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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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님을 가장해 매장을 방문하여 서비스를 평가하는 사람. 직원 및 매장의 서비스 수준을 체크하고, 개선할 점을 기업에 제안하는 신종 부업이다. 본사에서 매장별 점수를 매길 때 중요한 자료로 사용된다.
2) 안수찬 외 『4천원 인생』, 한겨레출판 2010.
3) @ecri11의 트윗.
4) 스펙푸어(spec poor)는 남부럽지 않은 스펙이 있어도 취업이 어려운 부류를, 워킹푸어(working poor)는 근로소득이 낮아 아무리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부류를, 허니문푸어(honeymoon poor)는 결혼자금 마련을 위해 대출을 받으면서 빈곤해지는 부류를, 하우스푸어(house poor)는 대출금을 갚느라 실질적 소득이 적은 부류를, 렌트푸어(rent poor)는 소득의 상당부분을 월세로 지출하는 부류를, 베이비푸어(baby poor)는 출산 및 육아 비용의 지출이 과다한 부류를, 에듀푸어(edu poor)는 높은 사교육비 부담에 시달리는 부류를, 씰버푸어(silver poor)는 노년기에 이르러서도 가난한 부류를 가리킨다.
5) 김찬호 『돈의 인문학』, 문학과지성사 2011.
6)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사회에 불만을 갖거나, 취업과 학점에만 신경 쓰며 정치문제에 무관심한 20대를 성토하는 논리. 올해 총선 때 20대, 특히 20대 여성의 투표율이 8%라는 근거없는 이야기가 온라인상에 유포되면서 ‘생각없는 20대’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7) 우석훈과 박권일이 함께 쓴 책 『88만원 세대』(레디앙 2007)에서 시작되었다. 88만원 세대에서 88만원은 우리나라 비정규직의 평균임금인 119만원에 20대의 평균 소득비율 74%를 곱해서 산출한 금액이다. 결국 ‘88만원 세대’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20대의 평균임금 소득을 통해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20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8) 한준규 「상위 5개구 57.7%, 하위 5개구 4.7% ‘극과 극’」 한국일보 2012.6.6.
9) 박현정 「당신의 이력서는 얼마짜리입니까」 한겨레21 2012.6.4.
10) 장기하와얼굴들 노래 「싸구려 커피」.
11) 박소희 「트위터 해고자 정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오마이뉴스 2012.4.30.
12) 박유연 「비정규직은 10명 중 9명이 월급 200만원 미만」, 『조선비즈』 2012.6.5.
13) 김지연 「전세계에 파리바게뜨 빵 열풍이 거세게 불 겁니다」, 『뉴스천지』 2012.2.23.
14) 고급 베이커리 사업에 호텔신라(삼성 이부진), 조선호텔(신세계 정유경), 블리스(롯데 장선윤), 해비치호텔(현대자동차 정성이) 등 재계 오너 일가들이 잇따라 진출하자 언론에서는 재벌가 딸들의 ‘빵집 경쟁’을 경쟁적으로 보도해 ‘딸들의 전쟁’이 한동안 화제였다.
15) 김남권 「“한국은 ‘커피공화국’”…수입액 5억불 사상 최대」, 연합뉴스 2011.12.18.
16) 평범한 이웃의 일상을 소재로 한 TV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1986~1994)의 캐릭터. 전파상을 운영하고 손재주가 뛰어나 ‘한국판 맥가이버’로 불리기도 했다.
17) 황교익 「대한민국이 무섭다」, 네이버 블로그 ‘악식가의 미식일기’, 2009.1.21.
18) 강창동·윤희은 「일자리 2만 4000여개 만든 BBQ…… 벤처 2700개 설립과 맞먹어」, 한국경제 2012.6.6. 편의점 업체를 제외하면 파리바게뜨 3100개, 뚜레쥬르 1300개, 비비큐 1800개, 페리카나 1400개, 네네치킨 1050개, 본아이에프(본죽 등을 운영) 1325개, 까페베네 780개, 크린토피아1705개 등이다.
19) 「하우스푸어의 구조적 특성」 현대경제연구원 보고서, 2011.5.24.
20) 유승호 「하우스푸어, 집 대출 갚는 데 소득 41% ‘허덕’」, 한국경제 2011.5.22.
21) 유선희・박태우 「노후자금 급한 중장년층, 젊은층에 ‘월세부담’ 떠넘겨」, 한겨레 2011.
9.14.
22) 전성인 『아파트에 미치다』, 이숲 2008.
23) 조은 『사당동 더하기 25: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해의 기록』, 또하나의문화 2012.
24) 김찬호, 앞의 책.
25) 정혜윤 「강한 인간이야, 우리들은 강한 인간이야」, 『시사IN』 2012.6.8.
26) ‘지영’이란 이름만큼 흔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