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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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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黃貞殷

1976년 서울 출생.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가 있음. aamudo@empal.com

 

 

 

장편연재 1

소라나나나기

 

 

小蘿

 

내 이름은 소라.

소라의 라는 미나리 라(). 본래 열매 라()를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호적에 이름을 올리러 간 할아버지의 실수로 미나리가 되었다. 생전에 미나리를 즐겨 드셨다고 하니 실수고 뭐고 다만 취향의 반영인지도 모르겠다. 이 할아버지에 관해서는 기억하는 바가 별로 없다. 내가 두살이 되던 무렵 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고 간염으로 돌아가셨으므로 기억이고 자시고 남을 기회가 없었다. 전해들은 내용으로는 보통 몸집에 완력도 보통, 생활력도 보통, 무엇을 하든 보통이라는 평가를 듣고 산 남자였다고 한다.

있지.

네 할아버지는 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고 죽은 것이 아니야,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홍수가 있었거든.

 

홍수가 나서 많은 집이 떠내려가고 사람들이 죽었거든. 네 할아버지는 그 난리 통에 낚시를 했단다. 집이며 짐승이며 사람 들이 쓸려가고 있는 흙탕물에 낚싯대를 던져두고 고기를 잡았단다. 그 물에서 건진 물고기를 먹고 죽은 거란다. 물에 휘말린 사람들을 생각해보렴. 오죽이나 원통했겠니. 오죽이나 고통스러웠겠니. 그런 물에 낚싯바늘을 담근 사람이라서, 급사(急死)한 거란다. 네 할아버지는 그 낚싯바늘에 뺨이나 등을 긁힌 사람들의 원한을 받고 죽은 거야.

 

어머니의 이름은 애자.

나나와 나는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를 때보다도 애자,라고 부를 때가 많다. 애자는 애자라고 불러야 애자답다. 애자의 애는 사랑 애(). 그 이름 그대로 사랑으로 가득하고 사랑으로 넘쳤다.

애자가 가장 애자다운 사랑으로 넘쳤을 시절은 아무래도 아버지와 연애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나나와 나는 애자로부터 숱하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름에 시작된 연애였으므로 여름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규모로 태풍이 불었단다.

간판들이 날아가고 전신주가 넘어지고 가로수가 뽑혀나갈 정도로 바람이 불었단다.

그 바람 속을 둘이서, 옷자락 한번 날리지 않고 걸었단다. 바로 눈앞에서 부러진 가로수를 넘기도 하면서 우산을 쓰고 계속 걸었단다. 바람에 휘말린 잔 나뭇가지들이 뼈처럼 화살처럼 날아다니는 길을 조금도 다치지 않고, 걸었단다.

뭘 하며 걸었어?

라고 내가 물은 적이 있었다.

애자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야기했지,라고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느 것 하나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끝없이, 끝없이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도 기억나는 것이 없느냐고 재차 묻자 그건 말이지,라고 애자는 말했다.

너무 소중하게 너무 열심히 들어서 기억에 남지 않고 몸이 되어버린 거야.

몸?

들었다기보다는 먹은 거야.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로 남김없이 먹고 마셔서, 일체가 되어버린 거야.

아침에 먹은 우유 한모금이 피가 되고 근육이 되는 것처럼, 그 이야기들이 전부, 내 피가 되고 뼈가 된 거야,라고 말한 뒤 애자는 자기가 한 말을 생각해보는 듯한 모습으로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연애하던 시절의 애자를 볼 수 있는 사진이 한장 있다.

애자는 사진 속에서 젊고 예쁘고 웃는다.

놀이공원에서 찍은 사진으로 알록달록한 차양 아래를 걷느라고 얼굴에 오렌지색 그늘이 져 있다. 입을 대고 빨면 달게 녹을 듯한 빛깔의 회전목마를 등진 채 사진을 찍는 사람 쪽으로 턱을 치켜들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다. 목을 향해 둥글게 말아넣은 단발머리가 귀엽게 흩어져 있고 피부는 희고 눈썹은 검고 입술은 붉다. 백설 같다. 백설 같은 애자의 곁에 아버지가 있다. 찍히는 순간 움직였거나 움직이는 순간 찍혔거나 사진 오른쪽 모서리로 반쯤 빠져나간 채 흐릿한 옆얼굴을 보이며 웃고 있다. 이것 말고 나나와 내게는 아버지의 사진이랄 것이 없다. 애자가 전부 치워버렸다. 먹었나,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애자의 몸이 되어버린 이야기와 같은 방식으로 그 사진들도 전부 애자의 몸이 되었나.

이가 드러날 정도로 웃고 있으니 소리를 내며 웃었을 것이다. 나는 이 사진을 보면 그가 어떤 소리로 웃었는지, 목소리는 어땠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애자의 피가 되고 뼈가 된 목소리란 어떤 목소리일까. 열살 때까지는 함께 살았으므로 어렴풋하게나마 나는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그 무렵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나 자주 신고 다녔던 쌘들도 기억하고 있으니 그의 목소리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목소리일 것이다.

 

이런 목소리일 것이다,라고 여기고 있는 어떤 톤의 목소리를 이따금 떠올리고는 하지만 그 목소리를 틀림없는 아버지의 목소리,라고 우길 자신은 없다. 열살 때까지는 함께 살았으므로 수백번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지금 나는 그의 음성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소리들에 희석되어 사라져버렸다. 소라야,라고 불렀겠지,라고 생각하며 흉내를 내는 셈 치고 그의 목소리를 생각해보아도 소용없다.

소라야.

하고 종이에 적힌 검은 문장으로 떠오를 뿐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금주.

성이 김이었으므로 금(金)을 두번 사용해서 김금주(金金紬).

여자 같은 이름이네,라는 소리를 꽤 들으며 자랐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나나와 내가 각각 아홉살과 열살이었을 때 죽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거대한 톱니바퀴에 말려들었다. 상반신이 갈려 나왔으므로 공장에 남은 직원을 모아 점호를 해보고서야 사고를 당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나나와 나는 이런 이야기를 애자로부터 들었다.

 

있지.

넷이서 행복해지자며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가엾어.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산 걸까.

 

애자는 나나와 나에게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준 뒤, 언제고 그런 식으로 중단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덧붙였다. 너희들의 아버지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가 특별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은 아니란다.

그게 인생의 본질이란다.

허망하고.

그런 것이 인간의 삶이므로 무엇에도 애쓸 필요가 없단다.

 

나는 올해 사진 속 애자의 나이가 되었다.

애자는 여전히 예쁘지만 더는 젊지 않다.

늙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늙었다기보다는 다만 말라가고 있다.

팔뚝이 말랐다거나 몸이 여위었다는 의미도 아니고, 애자의 몸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비물질적인 부분이 마르고 있다는 의미다. 마르고 말라서 조그맣게 졸아들었다. 애자가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있을 때 어깨를 쥐고 흔들면 갈비뼈 틈에서 호두알만한 것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구를 것 같다.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살아가려면 세계를 그런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좋다고 애자는 말한다. 나나와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수없이 들려주었다. 애자의 이야기는 부드럽고 달다. 부드럽고 달게, 그녀는 세계란 원한으로 가득하며 그런 세계에 사는 일이란 고통스러울 뿐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자초해서 그런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필멸, 필멸, 필멸일 뿐인 세계에서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애쓸 일도 없고 발버둥을 쳐봤자 고통을 늘릴 뿐인데. 난리법석을 떨며 살다가도 어느 순간 영문을 모르고 비참하게 죽기나 하면서. 그밖엔 즐거움도 의미도 없이 즐겁다거나 의미있다고 착각하며 서서히 죽어갈 뿐인데. 어느 쪽이든 죽고 나면 그뿐일 뿐인데.

 

죽고 나면 그뿐,이라면서 세계엔 원한이 가득하다고 애자는 말한다.

그뿐,이라면 원한이고 뭐고 남을 것이 있나. 듣고 보면 묘하게 모순이 있는데도 듣다보면 말려든다. 이런 이야기에 말려드는 것은 좋지 않아,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들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한 채로 듣다가 시간이 흘러서야 아차 말려들었다,라고 깨닫는다. 애자의 이야기는 대부분 그렇다. 달콤하게 썩은 복숭아 같고 독이 담긴 아름다운 주문 같다. 애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귀를 통해 흘러든 이야기의 즙으로 머릿속이 나른해진다. 애자가 일러주는 이야기처럼 만사를 단념하고 흐르게 된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므로 고통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특별히 더 고통스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특별히 더 달콤하다. 고통스럽더라도 고통스럽지 않다. 본래 공허하니 사는 일 중엔 애쓸 것도 없다. 세계는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으로 가득해진다.

 

아무래도 좋은 것뿐인 세계엔 아낄 것도 없고 소중할 것도 없다.

나는 최근에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소라.

소라의 라는 미나리 라().

본래 열매 라()를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호적에 이름을 올리러 간 할아버지의 실수로 미나리가 되었다,라는 이야기는 애자로부터 들었으므로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열매고 뭐고, 나는 본래 미나리인지도 모른다.

 

*

 

눈이 부셔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단풍잎을 보았다.

꿈에서.

바람이 불고, 붉은 잎들이 사각거리는 소리도 들었는데 꿈에서 깨고 보니 꿈이었다.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꾼 것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든 것은 단풍 꿈을 꾸고도 하루가 지난 뒤였다. 하루가 지나고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선명해서, 그런 꿈을 꾸었다고 말하자 나나는 태몽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섹스를 한 지도 일년이 넘었으므로 내 경우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나나인가,라고 생각하며 나나를 보았다. 나나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참외를 아삭아삭 먹고 있었다. 일요일 밤이었고 모처럼 영화를 보러 가자는 연락에 나나와 나는 나기를 기다리는 참이었다.

단풍이면 딸인가.

어째서?

빛깔이 화려했어.

그럼 아들이지. 화려한 건 대체로 수컷이니까.

그런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도착했다는 전화가 걸려와서 나나와 나는 나기가 차를 대놓고 기다리는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나기는 라디오를 틀어두고 있다가 나나와 내가 차에 오르자 시동을 걸었다. 너희들 내려오기 전에 들었다며 나기는 최근 러시아에서 발표되었다는 미심쩍은 뉴스를 들려주었다. 다섯개의 혜성이 명왕성 부근에서 관측되었고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으며 두달 뒤엔 최소한 그 가운데 두개가 지구 지표에 충돌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빠른 건가,라고 나나는 말했다. 명왕성에서 지구까지 두달 만에 올 수 있다면 걔네, 엄청 빠른 건가.

자주색 넥타이를 맨 영화관 직원이 입구에서 검은 안경을 나눠주고 있었다. 이것을 쓰고 토끼 터널을 낙하하는 앨리스를 보았다. 저년이 열쇠를 탁자에 놓아둔 채로 작아졌잖아, 이제 어떡할 거야, 멍청한 년, 나나가 중얼거리자 멀리 뒤쪽에 앉은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나나는 팝콘을 먹으면서 팔꿈치를 긁느라고 여기저기 팝콘을 흘렸다. 그중 몇개가 수수깡처럼 가벼운 질감으로 내 무릎과 넓적다리 위로도 툭, 툭, 떨어졌다. 나나가 오늘은 산만하네, 평소하고 다르게 이상하게 산만하네,라고 생각하다보니 아무래도 임신한 것은 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수안경을 통해 화면을 보았다. 버섯 위에서 파란색 캐터필러가 물담배를 피우며 알쏭달쏭한 말을 흘리고 있었다. 캐터필러의 담뱃대에서 연기가 고불고불 피어올랐다. 비단처럼 부드럽게 잡힐 듯한 연기를 향해 손을 펼쳤다가 오므렸다. 간신히 코끝에 걸려 있던 안경이 흘러내려 그것을 자꾸 고쳐쓰느라고 이날의 영화엔 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나나와 나기와 나는 한달에 한번쯤 영화를 보러 다녔고 그럴 때의 일정은 반드시 일요일 마지막 상영으로 정해두고 있었다. 월요일에 관한 부담으로 관람객이 가장 적은 시간을 노리자는 것이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갈 때는 나기의 스쿠프를 애용했다. 나기의 스쿠프는 검은색으로, 출시될 당시에는 젊은 층을 겨냥한 스포츠카, 다가오는 매혹, 어쩌고였으나, 세월이 흐르고 여러 사람의 손과 운전습관을 거치며 낡은 차가 되었다. 여러군데 도장이 벗겨지고 엔진을 제외한 부품들은 벌써 몇차례나 교체되어서, 본래의 부품이랄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눈에 띄게 구겨진 데 없이 멀쩡했다. 속도를 높이면 바닥을 향해 가라앉은 채로 잘 나아갔다.

이 차에 관해 말해보자면, 도어가 두개라 세번째 탑승자가 뒷좌석으로 들어가려면 앞좌석에 앉은 사람이 일단 내려서 좌석 아래 숨은 레버를 만져 좌석을 바짝 앞으로 당겨야 한다는 점이 성가시고 재미있었다. 레버를 당기면 앞좌석이 엄청난 기세로 팡, 하고 접혀서 바닥에 설치된 레일을 따라 드륵, 하고 밀려갔기 때문에, 레버에 손을 댈 때마다 충격을 대비하는 심정으로 가슴이 뛰었다. 나는 이 스쿠프에 받혀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차 생겼어.

라는 전화를 한통 받고 어디쯤에서 기다리라는 연락을 나기로부터 받은 뒤였다.

끈적끈적한 여름밤이라서, 퇴근하고 샤워를 마친 나나와 둘이서 산책 삼아 슬슬 나가보았다. 완만하게 굽은 대로변에 서서 나기가 온다던 방향으로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금지급기도 닫힌 시각이었다. 백 미터쯤 전방에서 신호를 받고 대기하던 차들이 불빛을 앞세우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다른 불빛에 비해 어두운 불빛 두개가 나나와 나를 향해 돌진했다. 어, 할 틈도 없이 그 검은 차는 들이받듯 보도 턱을 넘은 뒤 내 곁의 은행나무 밑동과 살짝 충돌했다. 딸깍, 딸깍, 비상등 점멸하는 소리가 들리고 범퍼가 아래쪽으로 툭, 떨어졌다.

나나와 내가 입을 떡 벌리고 있는데 나기가 운전석 문을 팡, 열고 내리더니, 아마도 흥분했기 때문인 듯했는데, 중심을 잡느라고 두어번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탁, 침을 뱉었다. 체온이 올라서 눈언저리가 붉고 촉촉했다. 나기의 말로는 온 정신을 전방에 집중하며 운전하다가 멀리 도로변에 선 나를 발견하고 무심코 그쪽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굉,장했지.

라고 나나는 그때 일을 두고, 두고두고 나기를 놀렸다.

과일가게 자식으로 자란 나기는 딸기를 먹지 않는 남자였다.

나기네 어머니는 매일 장사를 마친 뒤 상품으로 더는 내놓을 수 없는 과일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과든 복숭아든 집에 놓인 과일들은 껍질을 벗겨 먹어야 하는 상태였고 수년 동안 이렇게 먹고 보니 과일이란 본래 그렇게 먹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라고 나기는 말했다. 나기는 껍질째 먹어도 되는 성한 과일이라도 반드시 껍질을 벗겨 먹었다. 껍질 있는 채로 과일을 먹으면 이상하게 어색하다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먹기가 모호한 과일은 딸기,라는 것이 나기의 의견이었다. 껍질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우리 자매와 나기는 말하자면, 한줄기에서 자란 감자처럼 양분(養分)을 공유한 사이였다.

나나와 나는 한 시절 나기네 밥을 먹고 자랐다.

내가 열한살이 되던 해였다.

아버지가 죽고 일년 뒤로 그 무렵 애자와 나나와 나는 가난해서, 살던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애초 반대하던 결혼이었고 이쪽엔 제사 지낼 아들내미 하나 없으므로,라는 명목으로 사고 합의금을 친가 쪽에서 받아갔고, 애자도 생활에 별 열의가 없었으므로 애자와 나나와 내겐 별다른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와 살던 집의 계약이 끝나 집을 비워줘야 할 때가 되었는데 애자는 짐도 꾸리지 않고 나날을 생각에 잠겨 보내고 있었다. 이사 당일이 되어서야 넝마주이를 불러 집 안을 한바퀴 돌아보게 하고 물건들을 대신 처분하는 조건으로 조그만 수레 하나를 빌렸다. 애자는 가방 두개와 상자 두개를 수레에 싣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집을 떠났다. 나나와 나는 교과서와 필기구와 공책을 모조리 넣어 빵빵하게 부푼 가방을 메고 애자의 수레 곁을 걸었다. 삼십분가량을 걸어 도착하고 보니 나로선 한번도 가본 적 없는 한적한 동네로, 넓적하게 퍼진 이등변삼각형 모양으로 지붕을 올린 이층주택들이 죽 늘어선 길이었다. 애자는 그런 집을 몇개나 지나 옆집과 별로 다를 것 없이 생긴 집 앞에 수레를 세웠다. 청색 페인트와 바니시를 두껍게 바른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깨끗하게 마른 붉은 벽돌이 깔린 마당이 있었고 이 마당을 건넌 곳에 반지하로 들어가는 새시 문이 있었다. 이제부터 살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애자가 조그만 열쇠를 사용해서 문을 열었고, 나나와 나는 벽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뉜, 묘한 공간과 맞닥뜨렸다.

본래 창고로 사용하던 지하실 중앙에 양쪽 방향으로 트인 벽을 하나 세워 현관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두개의 셋집을 만든 구조였다. 벽 한쪽 끝에 현관, 다른 쪽 끝에 화장실이 있었으므로 현관과 화장실은 각각 절반씩 오른쪽과 왼쪽에 속한 공간이었다.

애자는 현관에 구두를 벗어두고 왼쪽으로 들어가서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방에 반듯이 누웠다. 창백한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두 손을 가슴에 얹은 모습으로 입술은 붉었고 비늘 모양의 손톱은 투명하고 맑은 벚꽃잎 색깔을 띠고 있었다. 나나와 나는 책가방을 벗어두고 그녀의 곁에서 바닥에 퍼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기다렸다. 애자는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소라야, 하고 부른 뒤 여기까지 오는 길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레, 돌려주고 올래?

어디에?

그 집에.

 

돌려주고 와줘,라는 부탁을 받고 나나와 둘이서 수레를 끌고, 온 길을 돌아갔다. 수레에 타겠다고 고집하는 나나를 태우거나 자리를 바꿔서 나나가 낑낑대며 끄는 수레에 내가 타거나 하며, 살던 집에 도착하고 보니 문이 열려 있었다. 애자는 문단속에 각별히 신경을 썼던 사람이라 무더운 여름에도 그 문이 그런 방식으로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나나와 나는 겁을 먹고 망설였다. 수레를 그대로 두고 가자고 조르는 나나를 곁에 둔 채로 나는 집 안을 엿보았다. 먼지와 진흙이 묻은 니커보커스를 입은 넝마주이가 운동화를 신은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아 부엌 찬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무릎 근처에 기름때 묻은 바구니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 애자가 사용하던 간장과 식초와 소금 병이 담겨 있었다. 애자가 공들여 물걸레질을 하곤 했던 바닥은 온통 그가 신은 운동화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나와 내가 만지고 사용하던 물건들이 거실 바닥에 모여 있었고 옷장에서 끄집어낸 옷가지들이 한 무더기, 방으로 들어가는 문턱 부근에 봉분처럼 쌓여 있었다. 껍질만 남은 채 서로를 향해 몇겹으로 엎어진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섬뜩한 광경이었다.

나나의 손을 잡고 도망치듯 새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왠지 모를 조바심에 빠르게 걸었다. 빨리, 빨리, 빨리, 나보다 짧은 걸음으로 자꾸 뒤처지는 나나를 채근하며 도착하고 보니 애자는 우리가 나갈 때 보았던 것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나와 나는 해 질 무렵까지 애자의 곁에 엎드려 있다가 새로운 집을 둘러보기로 마음먹고 그 방을 나섰다. 현관 유리를 통해 비쳐든 석양으로, 벽을 따라 이어진 좁은 복도의 절반쯤이 어둑어둑한 오렌지색을 띠고 있었다. 복도 측면으로 두개의 방이 부엌을 중심으로 연결된 구조였다. 나나와 나는 우리가 사용할 방으로 들어가보았고 그 방에서 증기기관차 모양의 연필깎이를 찾아냈다. 연결나사와 바퀴살까지 섬세하게 재현된 기관차로, 바퀴는 검은색, 몸체는 은색이었고 작고 네모난 굴뚝이 달려 있었다. 나나가 연필깎이 손잡이를 잡고 돌려보았다. 연필밥을 받는 플라스틱 서랍엔 흑연가루와 돌돌 말린 나뭇밥이 얇은 층으로 쌓여 있었다.

나나와 나는 그 방에 책가방을 가져다두고 옆집에도 가보았다. 간단했다. 벽을 따라 걷기만 하면 옆집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화장실 앞에서 벽을 끼고 돌아서, 우리 쪽 문과 마찬가지로 무늬 없는 밤색 널빤지로 만들어진 방문 앞을 지나 온갖 그릇과 물건으로 가득한 그 집 부엌을 지나고, 그 집 방문을 한개 더 지나 현관에서 벽을 끼고 돌면 우리 집이었고, 애자가 누운 방 앞을 지나 텅 빈 부엌을 지나고, 기관차 모양의 연필깎이가 놓인 방 앞을 지난 뒤 화장실 앞에서 벽을 끼고 돌면, 다시 옆집이었다.

화장실과 현관이 벽의 이쪽 끝과 저쪽 끝에 마주 보고 있었으므로 화장실을 등지고 보면 오른쪽이 우리가 살 집이었고, 현관을 등지고 보면 왼쪽이 우리가 살 집이었다.

왼쪽과 오른쪽.

오른쪽과 왼쪽.

나나와 나는 이 구조가 흥미롭고 신묘해 옆집과 우리 집을 나누고 있는 벽을 거대한 실패 삼아 실패에 실을 감듯 빙글, 빙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돌았고, 몇번째인가 벽을 돌았을 때, 옆집 거실에 소년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돛단배가 그려진 거친 질감의 티셔츠를 입었고 눈썹을 덮도록 반듯하게 자른 머리칼 아래 주근깨로 덮인 콧등이 솟아 있었다. 그게 나기와의 첫 만남이었다.

 

도깨비.

라고 생각했어.

라고 나기는 말했다.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자박자박, 하고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줄곧 비어 있던 옆집과 자기 집을 맨발로 오가는 소리가 자박자박 자박자박, 하고 몇번이나 나서, 도깨비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라는 내용으로 정리된 것은 시간이 조금 흘러서였고, 당시에 오간 대화는 막상 이랬다.

 

도깨비.

라고 소년이 불쑥 말했으므로 나나와 나는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도깨비가 있어?

나나가 내게 바짝 붙으며 속삭였다.

언니, 이 집에 도깨비가 있어?

소년은 나나를 잠자코 바라보다가 있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본 적은 없지만.

본 적이 없는데 있는지 어떻게 알아.

알아.

어떻게 알아.

이 집은 있지.

음기가 세기 때문에,라고 소년은 진지하게 말했다.

나나와 나는 어리둥절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높은 천장 쪽으로 고인 어둠과 여태 끼고 돌았던 벽의 존재가 새삼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내가 물었다.

음기가 세다는 게 무슨 뜻이냐.

야한 생각을 하게 된다는 뜻이지.

야한 생각?

야한 생각을, 자꾸.

그런 델 도깨비가 좋아해?

도깨비니까. 아무래도.

너 뭐냐.

너넨 뭐냐.

나는 소라.

얘는?

나나.

나는 나기, 하고 소년은 말했다.

너네 여긴 어떻게 들어왔냐.

 

묘하게 어긋난 대화로 첫 대면을 끝낸 뒤, 나기와 우리 자매는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갔고 이후로 공연히 벽을 돌아 상대 쪽 공간에 나타나지 않도록 주의했다,고는 해도, 현관과 화장실을 공유하다 보니 아침과 오후엔 맞닥뜨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기와 나는 동갑내기였으므로 처음엔 모종의 부끄러움이 있었으나 이렇게 맞닥뜨리는 횟수가 쌓이면서, 무심하게 한두마디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때로는 한쪽이 열쇠를 잃어버려서, 잠긴 문 앞에 책가방을 깔고 앉아 숙제를 하며 다른 쪽의 열쇠를 기다리거나 하는 날도 있었다.

 

무척 작은 열쇠였다고 기억한다.

손잡이 부분이 작은 동전만한 크기였고 구리 같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어린 손에도 작게 여겨졌으니 다 자란 지금의 손으로 쥐어도 작을 것이다.

그 열쇠로 열고 들어가서 만나게 되는 공간에 대해 나는 어른이 된 뒤 몇 사람에게 말해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잘되지 않았다. 말로 간신히 그림을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런 터무니없는 집이 있을 수 있느냐는, 내가 말하고자 했던 바와는 다른 곳을 짚는 질문이 돌아오게 마련이었다. 그렇게 기묘한 구조 덕분이었는지, 주변 셋집의 세가 올라도 그 집의 세는 몇년이고 오르지 않아서, 나기네와 우리 가족은 비교적 오래 그 집에 살았다.

아버지의 죽음 뒤로 나나와 나는 꼭 붙어 다녔다. 등교나 하교를 할 때는 물론이고 점심시간에도, 이따금 쉬는 시간에도 서로를 찾아다녔다. 그러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야 하게 된 생각이고 당시엔 틈이 날 때마다 나나가 나를 만나러 오거나 내가 나나를 만나러 갔다. 나나도 나도, 대단한 불행을 당한 아이,라는 뒷말을 원치 않는 꼬리처럼 끌고 다녔다. 둘 다 본래 말이 없고 표정 변화도 별로 없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점들이 아버지가 그렇게, 죽어서 그래,라는 쪽으로 연결되었다. 뭐든 그쪽으로 연결되어서, 또래 아이들은 우리 몸이나 우리가 만진 것을 건드리려고 하지 않으면서 작은 고리 형태로 주변을 맴돌았고, 그런 뒤엔 그 고리를 놓아둔 채로 돌아섰다. 사십여명이 모여 한 학급이 되고, 열개의 학급이 모여 한 학년이 되고, 여섯 단위의 학년이 모여 이천오백명인 또래집단에서, 나나와 나는 순식간에 단둘이었다. 그런 점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이 나나와 나는 애자를 생각했다.

애자만 생각했다.

애자는 그 집에서 대체로 친절했으나 대체로 불안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애자는 어린 나나와 내가 무엇을 먹는지, 양치질을 제대로 하는지, 어떤 옷을 입고 학교에 가는지, 등등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루나 이틀은 토스트나 계란빵을 더는 못 먹을 때까지 만들어주는 등 열심히 움직이다가도, 문득 기력을 잃고 인형 같은 표정으로 몇시간이고 드러누워 지낼 때가 많았고, 가끔이기는 했지만 혼자 외출을 해서 며칠이고 돌아오지 않는 때도 있었다. 아름답고 친절하지만 무기력하고 깊은 공허에 잠긴 애자의 곁에서, 나나와 나는 그녀를 방해하거나 귀찮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먹는 것 입는 것을 어떻게든 우리끼리 해결하며 작고 조용한 짐승처럼 지냈다.

하루는 묵은 떡을 밥솥에 데워 먹고 있는데 벽 건너편에서 나기네 어머니가 아이 시어라, 냄새 봐라, 하며 건너왔다. 애자는 마침 외출하고 없어서, 나나와 나는 부엌에서 밥솥을 열어두고 숟가락으로 떠낸 뜨거운 인절미를 설탕에 찍어 먹고 있었다.

 

뭐 먹니.

나기네 어머니가 부엌으로 들어와서 떡이 담긴 밥솥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한입 먹자, 하며 그녀는 떡을 한점 떼어 우물우물 먹었다. 내가 얼굴을 붉히고 있는 동안 그녀는 살풍경한 부엌을 둘러보고, 설탕을 입에 묻히고 있는 나나와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떡의 맛이 좋으니 자기네 밥이랑 바꿔 먹자며 나나와 나를 벽 건너편으로 데려갔다.

이날부터 나나와 나는 매 끼니,까지는 아니더라도 종종 나기네 밥을 먹었다. 그 시절엔 초등학생이라도 도시락을 싸서 다녔으므로, 나기네 어머니는 나기의 도시락까지 세개를 준비해서, 현관 안쪽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섰을 때, 나기네 신발장인 왼쪽 신발장에 한개, 우리 것이었던 오른쪽 신발장에 두개를 얹어두었다. 나나와 나는 아침마다 그것을 챙겨서 등교했다. 점심시간엔 각자의 도시락을 가지고 운동장 구석에 놓인 벤치에서 만나 나란히 앉아 먹었다. 반찬으로 머리째 튀긴 부세 한마리가 통째로 담겼다거나 다른 반찬 없이 맑은 주홍색으로 무친 오이지만을 수북하게 담았다거나 이따금 계란말이지만 대개는 계란 프라이, 혹은 다른 반찬 없이 계란 프라이 한가지를 밥에 얹고 양념간장을 뿌린 것, 하는 방식으로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시락이었으나, 나나와 나는 소중하게 그것을 먹었다.

성장기였으므로 그 밥을 먹고 뼈가 자랐을 것이다.

뼈에도 나이테라는 것이 있다면 나기네 밥을 먹고 자란 시절의 테가 분명 있을 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나나와 내가 계란 프라이나 껍질을 살짝 태운 생선 튀김에 일종의 노스탤지어를 품게 된 것은 아마도, 이 시절의 기억 덕분이었다.

 

쉽지는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일찍 일어나 장사도 준비해야 하는 아침에 도시락을 세개나 준비하는 것은 말이다. 듣기로 나기네 아버지는 한겨울에 사과 궤짝을 들다가 뇌출혈로 세상을 뜨고 말았고, 홀로된 나기네 어머니의 장사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두 식구가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형편이었으니 경제적인 면으로도 간단하지는 않았을 텐데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신발장 위에 나나와 내 몫으로 도시락 두개가 납작하게 얹혀 있었다.

이 도시락을 눈치챈 애자가 나기네 어머니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애자는 유령처럼 하얀 손을 모으고 선 모습으로 나기네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다가, 동정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말했다.

나기네 어머니는 신발을 벗으려고 한쪽 손을 벽에 짚은 모습으로 그 말을 들었다. 여름밤, 그녀가 방금 열고 들어온 문 틈으로 마당의 열기가 흘러들었고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애자를 바라보고 선 나기네 어머니는 못마땅한 듯 입을 다물었다. 사철 바깥바람에 검게 그을린 그녀와 동굴에서 갓 나온 여우처럼 창백한 애자, 어느 쪽도 만만해 보이지는 않는 상황이라서 나나와 나는 애자의 등 뒤에서 이 광경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나기네 어머니는 목에 건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애자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그뒤로 닫힌 문 안쪽에서 무슨 이야기가 어떻게 오갔는지는 알 수 없어도, 한참 만에 문을 열고 나온 애자는 조용히 벽 건너편으로 돌아왔고, 다음날도 전날과 다름없이 신발장에 도시락이 얹혀 있는 것을 보고 나나와 나는 애자가 졌다,라고 생각해두었다.

그 일을 계기로 애자가 벽 저편에 적대감을 품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이따금 걸레질을 시작하면 엎드린 채로 옆집까지 쓱, 쓱, 걸레를 밀고 갔다가 걸레를 밀며 돌아오고는 했다. 달이 밝은 밤엔 나기네 어머니와 둘이서 모깃불을 피우거나 감을 깎아두고 반지하 입구에 앉아 달을 보았다. 가끔은 나기네 어머니를 따라 나가 가게 일을 돕는 날도 있었고, 그런 날에 애자는 풋과일 냄새를 풍기며 돌아와서 삯으로 받은 자두나 바나나를 바구니에 담아두었다. 한송이도 아니고 낱개로 떼어 팔 정도로 바나나가 드물고 비쌌던 시절의 일이었다.

 

만나지 않았다면, 하고 나는 이제 와 생각할 때가 있다.

나기나 나기네 어머니를 만나지 않고 나나와 애자와 셋이서 살았더라면, 오로지 애자의 세계 속에서 나나와 내가 자랐다면, 나나와 나를 포함해서 애자까지, 어떻게 되었을까.

나기네 어머니에 관해 말하자면 그녀가 특별하게 자상했다거나 거대하게 선의를 베푼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도시락이었다.

도시락이되 웬만해서는 어김없는 도시락이었다.

애자는 고아였으므로 나나와 나에게는 외가랄 곳이 없었고 친가와는 아버지가 살아 있을 적부터 왕래가 거의 끊긴 상태였으므로, 애자 말고 특별하게 어른과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나나와 나에게, 나기네 어머니가 마련하는 도시락 한점의 무게는 접촉 가능한 거의 유일한 보살핌이었고, 어른의 행동이었고, 매일 아침마다 가방에 담겨 꾸준하게 감득되었던 외부였다. 애자, 말고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었다.

다만 도시락이었다.

그뿐이었고 그 정도나 되었으므로 대단히 대단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있지.

하고 애자는 말했다.

좋은 것은 좋지.

좋은 것들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감탄하고 호들갑이지.

좋은 것들이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는 이유는 말 그대로 귀하기 때문이란다.

세상에 좋은 것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감탄하고 칭송하는 거란다.

별로 없어, 좋은 건.

그러니까 그런 것을 기대하며 살아서는 안되는 거야.

 

기대하고 기대할수록 실망이 늘어나고, 고통스러워질 뿐인 거야.

 

이렇게 말한 뒤 애자는 두개의 쇠구슬을 맞물려 닫는 가방에 속옷과 빗을 챙겨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한달 전의 일이었다.

나기의 스쿠프 뒷좌석에 애자를 앉히고 애자의 곁에 나나가, 조수석에 내가 앉아서, 교외로 바람을 쐬러 가듯 요양원을 향해 갔다. 애자는 광택감 있는 굵은 색실로 뜬 가방을 무릎에 올려두고 바람에 얼굴을 맡기고 있었다. 애자의 다른 짐들은 큼직한 종이가방에 담겨 내 다리 사이에 놓였다. 나기는 별로 헤매지 않고 요양원으로 진입하는 언덕을 찾아냈다. 연이 핀 작은 연못이 있고 산책이 가능한 마당에 서면 멀리 대숲이 보이는 시설이었다. 입구에 나지막한 동백나무 한그루가 서서 끝물인 꽃을 너덜너덜하게 몇송이 달고 있었다. 애자는 접수처 앞에서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발견하고 가방을 손에 쥔 채로 그 앞에 섰다.

아이스크림이네.

하며, 자물쇠로 잠긴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바람에 밀린 스커트가 몸에 감겨 발목보다도 더 두꺼울 것 없는 종아리가 드러났다.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나나와 내가 방심하는 틈을 타 과량으로 약을 먹기를 반복해온 애자의 몸은 바싹 말라서, 단 한번의 충돌로도 뚝, 꺾어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접견실에서 애자는 담당 간호사의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한 뒤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또다른 간호사가 나타나 애자의 짐을 보자고 말했고 나기가 내 품에서 종이가방을 넘겨받아 벌려 보였다. 간호사는 가방에 든 것 가운데 날카로운 것, 날카롭게 되는 것, 고리를 만들 수 있는 것, 고리가 되는 것, 질긴 것을 빼내고 종이가방에 달린 손잡이 끈의 매듭도 풀어서, 봉투 형태가 된 종이가방을 가지고 갔다. 나는 간호사가 건넨 가방끈을 한 손에 쥐고 있다가 주먹째로 주머니에 넣었다.

나나와 나기와 나는 접견실에서 기다리다가 애자를 보러 올라갔다. 철제 침대가 놓여 있고 유리를 끼우지 않은 그림 한점이 걸린 크림색 방이었다. 창을 통해 요양원 사람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고추밭과 그 너머 대숲이 보였다. 애자는 잿빛으로 센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고쳐 묶은 모습으로 침대에 앉아 있다가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켜 보였다. 저런 건 소용없으니 떼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밖엔 다 좋아.

여긴 조용해서, 좀 잘 수 있겠네.

나기가 침대를 밟고 서서 그림을 떼어냈다. 언덕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노란 손바닥을 펼쳐 보이고 있는 그리스도를 그린 그림이었다. 나나와 나기와 나는 그 그림을 가지고 방을 나선 뒤 마당에 한동안 머물렀다. 어쩔 수 없나,와 어쩔 수 없다, 사이에 도대체 어쩌지를 못하고 서서, 연잎 틈으로 검은 기름 같은 연못에 잠긴 연뿌리들을 내려다보았다. 돌아오는 길엔 애자의 말과 기척이 바람을 통해 빠져나가도록 창을 열고 달렸다. 바람이 거세게 차 속을 훑고 돌아 여기저기 소용돌이를 만들어냈고 그것에 휘말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종잇장처럼 가슴이 펄럭거렸다. 식어간다,라고 생각했다. 무색무취로 이렇게 사라져간다.

 

세계엔 이런 일뿐, 하고 순식간에 애자의 말에 휩쓸렸다.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이런 일뿐인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애초부터 세계엔 그런 것뿐이라고 여기는 것이 좋다.

 

라고 생각했다가도 그런 일뿐, 하고 마음 편하게 여길 수는 없는 실증이 나나와 내게는 있었다.

도시락이었다. 어린 시절, 수업시간 내내 가방에 담긴 채로 무릎에 닿았던 납작한 온기였고, 먹으면 틀림없이 배가 불렀던 밥과 짭짤한 반찬이었다. 그것을 두고 생각해보면, 만사란 아무래도 좋은 것, 하고 손쉽게 생각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나기네 어머니의 이름은 순자.

순자의 순은 어째선지 열흘,이라는 의미의 순().

나기가 부르는 방식 그대로 나나도 나도,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녀는 수십년 동안 꾸려왔던 과일가게를 정리하고 몇년 전부터 빌딩 청소를 하러 다니고 있었다. 내가 벌 테니 이제는 놀며 쉬며 지내시라고 말을 해도 딴에는 쉬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고 나기는 말했다. 대걸레로 화장실을 청소하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복도를 닦는 일은 어쨌든 실내의 일이라서, 한겨울과 한여름 노점에서 얼거나 익어가며 장사를 할 때와 비교하면 편하다, 좋다,라고 한다며 나기는 쓸쓸하게 웃었다.

 

*

 

나는 나나와 둘이서 살고 있는 집에서 버스로 십오분가량 떨어진 거리로 일을 다니고 있었다. 사장이 한명, 이사가 한명, 부장이 한명, 경리를 담당하는 직원인 내가 근무하는 건설사무소로 주로 하청을 받아 도로포장공사를 하고 각종의 건설폐기물을 다루는 곳이었다. 사장은 거래처로, 부장은 현장으로, 면담이나 접대를 나가는 일이 많아서 사무실엔 이사와 단둘이 남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사는 나보다 여덟살이 많은 남자로 건축을 전공한 사람인 것은 아니고 현장 경험도 없어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의 매형인 사장에게 이름과 자금이 동원되었을 뿐으로 신문을 읽거나 인터넷 기사를 읽거나 골프 경기를 시청하거나 자기 책상 위의 난을 닦으라고 지시하거나 뒷짐을 지고 문 앞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는 것으로 소일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태몽일지도 모른다.

출근해서도 그 생각을 놓지 못하고 있다가 나는 실수를 했다.

나나는 임신인가,라고 적어둔 메모를 그 이사에게 들켰다.

라기보다는 내 책상 곁을 지나던 이사가 멋대로 그것을 보았다.

소라씨, 이 문장은 틀렸어.

라고 어느 틈엔가 내 곁에 서서 메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나나는 임신인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나나는 임신했나,라고 적어야 맞는 거지.

봐봐.

라며 그는 내 책상 위로 시큼한 코롱 냄새가 나는 머리를 숙였다.

나나는 임신인가, 하면 나나는 임신이다,라고 동격이 되는 거잖아, 나나가 임신인가? 하면 임신도 나나가 되는 거잖아, 임신 자체가 나나냐, 나나가 임신 자체냐, 말이 안되잖아 말이, 임신했나,라고 써야지, 나나가 임신을 했나,라고 써야지, 그래야 맞는 거지,라면서 메모에 반듯반듯한 글씨로 나나는 임신했나,라고 쓰고 입을 다물고 자신의 메모를 감상하듯 내려다본 뒤,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나나가 누군가?

 

나나가 임신인가.

라고 말하자 나기는 어리둥절해서 나를 보았다.

단풍 꿈을 꾸었거든, 하고 말한 뒤 수일 전에 있었던 나나와의 대화를 말하자 그건 역시 태몽일지도 모르겠다며 나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임신일까.

물어봐.

물어보면 되지,라는 대답에 엇, 하고 생각했다. 물으면 되는구나.

묻는다는 걸 왜 생각하지 못했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나기가 폭신하게 말린 계란말이가 담긴 접시를 내 앞으로 밀었다. 계란말이를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봤어,라는 말을 듣고 맛을 보러 온 참이었다. 나는 젓가락으로 한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짭짤하면서 달았다.

어때.

달아.

많이 다냐.

적당하게,라고 답하자 나기는 만족스러운 듯 턱을 치켜든 뒤 조리에 사용한 볼을 닦기 시작했다. 맛이 어떤지 보러 와,라고는 했어도 기본적인 신뢰가 있었으므로 해괴한 맛을 보게 될까봐 긴장하지는 않았다. 내 요리는 정말 맛있다,라는 자부를 인정할 정도로 나기의 요리는 맛있었다.

나기는 도저히 번화가라고는 할 수 없는 골목 모퉁이에 삯,이라는 간판을 걸고 조그만 바를 운영하고 있었다. 차 한대가 들어갈 정도의 실내주차장을 가게로 개조한 임대공간으로 나기의 삯이 들어서기 전에는 치파오와 중국어 교재를 파는 망해가는 가게였다. 삯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도 그 음식을 나르는 사람도 설거지를 하는 사람도 나기 혼자였으므로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가짓수로만 안주를 마련해서 파는 맥줏집이었다. 국자와 면을 건지는 바스켓이 걸린 주방을 바라보는 형태로 다섯 사람 정도가 나란히 앉으면 더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일단 앉고 나면 등 뒤가 바로 벽이라서, 화장실에라도 가려고 하면 앉은 사람들의 엉덩이나 등을 쓸며 지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로 바,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막대(bar)라거나, 어딘가의 복도에 가까울 정도였다. 나기는 이곳에서 다만 두가지 방침을 고수하며 장사하고 있었다.

신선한 재료를 사용해서 음식을 만든다,라는 것이 첫째였고, 그날의 재료는 남기지 않는다,라는 것이 첫째에 얹힌 덤이었고, 내가 먹지 못할 것을 남에게 먹이지 않는다,라는 것이 둘째였다.

다만,이라고는 해도 상당한 비용이 드는 영업방침인 듯했는데 그 두가지에 관해서 나기는 양보가 없었다. 손님이 영 들지 않은 날엔 남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서 나나와 내가 사는 집으로 찾아왔다. 망하기 딱 좋게 장사를 한다고 나나는 말하곤 했지만 딱히 비난하는 투는 아니었고, 그런 방침이라서 조금씩 단골을 늘려가는 모양이었다.

나기는 이 가게를 내려고 짐을 꾸려 일본으로 떠난 적이 있었다.

나나와 나는 출발 전날에 송별 삼아 나기네에서 늦게까지 먹고 마신 뒤 잠들었다. 잠결에 이제 간다,라는 말을 듣고 눈을 떠보니 나기는 청록색 셔츠에 밑단이 해진 청바지 차림으로 예상보다도 작은 싸이즈의 여행가방을 곁에 세워두고 있었다. 깊게 잠든 나나는 내버려두고 내가 문 앞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나기를 배웅했다. 다녀올게,라며 손을 흔들어 보인 뒤 나기는 어둑어둑한 새벽 속으로 바퀴가 달린 가방을 돌돌 끌고 갔다가 그로부터 이년 뒤, 떠날 때와 다름없는 옷차림을 하고 가방을 돌돌 끌며 돌아왔다. 왼쪽으로 쏠린 가르마 부근의 머리털이 둥글게 빠져 있었고 위쪽 송곳니 하나를 잃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물어도 나기는 말하려 들지 않았다.

등판이 구겨진 여름 양복을 입은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혼자서도 익숙하게 안쪽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메뉴를 보지 않고도 술과 안주를 시키는 모습이 벌써 여러차례 삯을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두리번거리거나 어색해하는 기색 없이 안주를 젓가락으로 집어먹으며 그는 홀로 마셨다.

물으면 되나,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묻고 나서 어떡하지.

대답을 듣지.

대답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런 대답을 들은 거지.

임신이라면 어떡하지.

너라면 어떨 것 같은데.

나라면, 하고 생각했다가 깨끗하게 머릿속이 비었다. 연애를 한 적도 있고 섹스를 한 적도 있고 언제고 결혼을 한다면 할 수도 있겠지만 임신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는 소라,라는 이름의 부족으로 멸종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혼과 임신은 별개, 무엇보다도 내게 엄마가 된다는 건 애자가 되는 것, 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기네 어머니를 겪었어도 애자는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이미지였고, 그것을 극복하고 좋은 엄마가 될 자신도 의지도 내게는 없다는 것을 나는 자각하고 있었다. 나나는 어떨까. 나나는 괜찮을까.

어떻게 물어볼까.

뭘 물어야 할까, 아기 아빠부터 물어야 하나,라는 말에 나기는 간단하게,라고 대꾸했다.

추궁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 질문의 가짓수는 가급적 적게.

 

소라,라는 이름의 부족,이라는 것은 실은 예전에 나기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예컨대 나나는 간장을 싫어하잖아?

라고 말하며 나기는 술잔에 손가락을 담가 탁자에 술 방울 하나를 찍은 뒤 이게 나나,라고 말했다. 나기가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날 밤이었다. 잠들어버린 나나를 곁에 두고 나기와 나는 반쯤은 졸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가물가물 감기려는 눈을 깜박이며 나기가 탁자에 만들어둔 맑은 방울을 들여다보았다.

그게 나나냐.

간장을 싫어하는 나나,라고 진지하게 대답하며 나기는 그 옆에 술 방울 하나를 더 찍었다.

이건 간장을 좋아하는 소라.

라고 말한 뒤 손가락을 또 옆으로 움직여서 두개의 술 방울을 만드느라고 크기도 면적도 줄어든 방울을 하나 더 찍은 뒤 그게 자신이라고 말했다.

나는 간장이란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검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각자가 이렇게 다르잖아. 너도 나도 사람, 어차피 사람, 그렇게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이렇게나 다르다는 생각에 은근히 놀랄 때가 있는 거지.

간장에 비할 바냐.

뭐 어때.

일단은 그렇다는 얘기,라고 나기는 말했다. 게다가 살아가는 일이란 간장에 얼마나 배타적인가, 하는 문제로도 중대하게 방향이 갈릴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엄숙하게 말하고 있었다.

부족이 되나,라고 나는 물었다.

부족민이고 뭐고 없는데?

네가 있잖아.

라고 나기는 말했다.

족장이자 부족민인 네가 있잖아.

나 하나뿐인데?

하나뿐인 부족도 있는 거지, 세상엔.

 

*

 

질문의 가짓수는 가급적 적게,라는 나기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나나야 임신했어? 라고 묻기로 했다. 그것 한가지를 물으려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이틀간을 나나의 주변을 맴돌며 타이밍을 살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어야 좋을지, 진지하게 물어야 좋을지, 어느 경우든 속으로 연습해보며 나나의 뒤통수를 노려보았으나 막상 물으려 들면 입이 붙었다. 아무래도 저녁에 묻는 것이 낫겠다, 저녁에 묻자,라고 결심하고서도 어느 아침, 정류장까지 함께 걸어갔다가 묻고 말았다.

나나야 임신했니.

나나는 했어,라며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 같이 가볼래?

라고 되돌아온 질문에 상황을 생각할 틈도 없이 같이 가겠다고 대답을 하고 그쪽 노선의 버스를 탔다. 다급한 일이 있으므로 오늘은 오후에 출근하겠다고 사무실에 전화를 해두고 긴장한 채로 나나의 곁에 앉아 있다가 나나를 따라 내렸다. 나나는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검은 스커트로 평소처럼 출근 복장을 단정하게 갖춰입은 모습이었다. 곁눈으로 살피지는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눈이 자꾸 나나의 배 쪽으로 움직였다. 배 부분에 넓은 주름이 두개 잡힌 디자인의 스커트라서 배가 볼록한지 어떤지 잘 알아볼 수 없었다. 나나는 등을 펴고 걷는 걸음걸이로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서 로비를 가로질렀다. 산부인과 전문병원으로 엘리베이터 곁에 카네이션과 장미와 작약이 생화로 꽂힌 수반이 놓여 있었고 벽은 파스텔 톤으로 밝았으며 적당한 간격으로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림들은 간접조명을 받아 부드럽게 색을 드러내고 있었고 곳곳에 푹신한 소파가 놓여 있었다. 나나는 벌써 몇번은 다닌 듯 헤매지 않고 이런저런 모퉁이를 휙휙 돌아 검사실로 들어갔다. 젊은 산모들이 소파에 앉아 대기하고 있는 접수처에서 나나도 조그만 쪽지를 받아들고 거기 적힌 대로 옮겨다녔다. 올 때마다 이렇게 검사를 하나,라고 묻자 오늘은 검사가 많은 날이라고 나나는 답했다. 초음파실 앞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더러 있어 나나를 의자에 앉히고 물을 가져다주었다. 목이 마르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로 돌아다닌 참이었으므로 나도 이곳에서 고깔 모양의 종이컵에 물을 받아 먹었다. 다른 병원과는 미묘하게 다르게 차분한 공기가 흐르는 대기실에 앉고서야, 뭐가 뭔지 갈피를 전혀 잡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가 생기니 어때.

내가 묻자 나나는 더부룩해,라고 말했다.

더부룩해?

뱃속에 커다란 싹이 튼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한 뒤 나나는 종이컵 속의 물을 마셨다.

의료 가운을 입은 여자가 차트를 들여다보며 대기실로 나와서 나나의 이름을 불렀다. 어영부영하는 사이 나나가 먼저 들어가고, 보호자도 이쪽으로,라는 안내를 받고 암막 커튼을 젖히고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나나는 이미 배를 걷어두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배가 조금 불룩했다.

저 정도로 배가 부르도록 모르고 있었던 나야말로 야속한 쪽일 텐데 오히려 나나가 야속하게 여겨져 나는 얼굴을 붉혔다. 안쪽에 앉으라는 안내를 받고 침대 곁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나나야, 배가 나왔어.

라고 말하자,

이 정도는 별로 나오지 않은 거야,라고 나나는 얄밉도록 의젓하게 말했다.

이제 봅니다.

하며 검사가 시작되었다. 담당의는 나나의 배꼽 근처에 투명한 액체를 짠 뒤, 배 위에서 쓱, 쓱, 액체를 밀며 화면을 잡았다. 나나는 배를 내놓고 누운 채 자기 발치에 놓인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것을 향해 얼굴을 들고 있었으나 본심을 말하자면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로 얼이 빠져 있었다.

여기가 발, 하고 담당의가 말했다.

왼발, 발가락 다섯개, 여기가 팔뚝, 보이시죠, 팔뚝 뼈, 보이시죠, 여기가 손, 하며 진행되다가, 여기가 얼굴인데요, 하며 담당의가 커서를 움직였다. 아기가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눈코입이 보이질 않네요.

모처럼 검사를 하러 왔으니 얼굴을 보고 가라며 그녀는 나나를 몇차례 돌아눕혔다. 나나는 담당의가 무언가를 묻거나 자세를 지시할 때마다 네, 하며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어느 순간 넓적하게 눌린 코가 보였다. 얼굴이 눌렸어,라고 엉겁결에 말하자, 못생겼다고 하시면 안되죠,라고 담당의가 주의를 주었다. 못생겼다고 말하지는 않았는데…… 이 장소에서 아기를 보고 못생겼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가?라고 멍하게 생각하고 있는 틈에 이게 심장 안에 있는 혈관,이라며 가느다란 고구마 모양의 덩어리를 보여주었다. 심방, 심실, 하며 빠르게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는 네개의 어두운 방을 보여주고, 이것을 들어보라며 그 방에서 나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쐐, 쐐, 쐐, 쐐, 쐐, 쐐, 쐐.

두근, 두근, 하는 소리를 듣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요란하게 쐐, 쐐, 하고 들려왔다.

쐐, 쐐.

쐐, 쐐.

쐐, 쐐.

쐐, 쐐.

바쁘구나.

라고 생각했다.

격렬하구나.

사람이 가장 격렬한 운동에너지를 발산할 때는 저렇게 뱃속에 있을 때인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사용할 눈이며 콩팥이며 비장이며 심장 같은 것을 단 몇개월 만에 만들어야 하니까,라는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난 뒤에 든 생각이고 일단은 쐐, 쐐, 쐐, 쐐, 하는 소리를 들으며 걱정이 되었다.

아기가 괜찮을까.

저토록 비좁은 곳에서 메아리치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그 소리에 일단 자기가 시달리겠다.

소리를 피해 도망갈 곳도 없이, 시끄럽겠다. 영 시끄럽겠다.

라는 생각을 두서없이 하다가 물었다.

아기가 듣나요?

담당의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기색으로 듣지요,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못생겼다고 말하면 안되는 거예요.

 

인간이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어.

라고 나는 말했다.

나기와 나나가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았다. 나기가 삯에서 쓰고 남은 두부를 가져와서, 두부 크로켓을 만들어 먹자며 자정이 넘은 시간에 밀가루와 빵가루를 늘어놓고 법석을 떠는 중이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만들어질 때부터 말이야, 자기 소리를 들어가며 만들어지는 거잖아. 심장으로부터 흐르고 번져가는 소리를, 쐐, 쐐, 쐐, 하고 들으면서.

라고 내가 말하자 나기가 튀김옷 반죽이 묻은 젓가락을 쥐고 나를 보
았다.

두근, 두근,이 아니고?

쐐, 쐐, 쐐.

쌔, 쌔, 쌔?

쐐, 쐐, 쐐, 하던데.

혈관이라서 그래,라고 나나가 두부를 자르며 말했다.

심장 속에 있는 혈관 소리라서 그래.

하여간 한번 들었더니, 계속 들리는 것 같아, 그 소리가.

나기가 반죽에 담갔던 두부를 빵가루에 굴리며 그건 네 거지,라고 말했다.

계속 들린다면 니 몸에서 나는 소린 거지.

그런가.

나는 반죽이 묻은 손을 가슴에 올리고 말했다.

하여간 이렇게, 자기 소리를 들어가며 만들어지잖아. 쐐, 쐐, 쐐, 온통 그 소리뿐인 공간에서.

그 소리만은 아니지.

라면서 나기는 빵가루옷을 입힌 두부를 쟁반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나나가 그 곁에 바짝 앉아 있다가 두부 한점을 집어 뜨거운 기름에 담그자 기름 표면이 확 끓어올랐다.

엄마 몸에서 나는 소리도 있을 것 아냐.

사람의 배라는 게 완벽하게 방음이 되는 것은 아닐 테니까,라고 나기는 말했다.

바깥의 소리도 어느정도는 들릴 것 같은데.

그런가.

그렇대.

그렇지?

나기는 옻을 입힌 긴 젓가락을 쥐고 튀김솥을 들여다보았다.

그래도 시끄럽긴 하겠네. 매미 소리 같기도 하고.

쌔, 쌔, 쌔, 하며 나기는 두부를 건져냈다. 나나가 기름종이를 깐 접시를 들고 그 곁에서 기다렸다가 익은 두부를 받아 가지런하게 쌓았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두부 튀김을 쌓은 큰 접시를 중앙에 두고, 나나와 나기와 나는 각자 자기 몫의 접시에 조금씩 덜어 먹었다. 바삭바삭한 튀김옷과 뜨거운 두부가 한꺼번에 씹혔다. 나기와 나는 맥주를 가져다 마셨고 나나는 감잎차를 마셨다. 나는 별생각 없이 나나의 접시 쪽으로 두부를 덜어주었다. 나나는 눈 아래 기미가 도드라진 모습으로 자기 접시를 내려다보며 오물오물 씹고 있다가 내가 옮겨둔 두부 몇점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큰 접시에 돌려놓았다.

 

*

 

아기의 아버지는 내 남자친구,라고 나나는 말했다.

조만간 소개해줄게,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있지.

하며 애자는 사나흘에 한번씩 전화를 걸어왔다.

공예를 시작했어.

무슨 공예?

종이.

종이?

종이접기, 공예.

가위는 사용하지 않아,라고 애자는 덧붙였다.

가위를 사용할 일이 없도록 선생이 미리 알맞게 종이를 잘라서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부드러운 색지를 사용해서 학을 접고 풍선을 접고 꽃을 만든다고 애자는 말했다. 어제는 작약을 일곱송이나 만들었어, 풀로 붙여서.

애자와 통화를 하면 배음으로 지, 지, 하는 소리라거나 치, 치, 하는 소리, 사아, 사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지금 애자가 전화를 걸고 있는 장소가 어디쯤인지를 그려보게 되었다. 나는 통화를 할 때마다 나나의 소식을 전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렇게 얇은 날개를 비비는 듯한 소리들에 입이 닫혀, 매번 별다른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사무실에서 사적인 통화는 금지.

라면서 이사가 다가왔다.

소라씨, 혹시……

네.

혹시.

임신했나,라고 묻는 말에 깜짝 놀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메모가,라면서 이사는 뒷짐을 진 채로 내 책상 곁에 섰다. 나나는 임신인가,라고 적혀 있었잖아, 나는 임신인가를 잘못 적은 것은 아닌가, ‘나나’라는 것이 실은 ‘나’를 두번 적은 게 아니냐고,라면서 그는 슬쩍 내 배 쪽을 내려다보았다. 소름이 돋아 자세를 바로 하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라고 말하는 저쪽의 목소리를 들은 뒤로도 귓속이 헝클어진 참이라 한동안 누구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당황스러웠다. 임신했나,라고 묻는 말이 그 정도로 불쾌한 어감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은 몰랐다.

소라야.

네.

니 백모(伯母)다.

라고 듣고서야 뒤통수 쪽으로 틀어올린 머리와 붉은 이마, 숱 적은 눈썹 아래로 대놓고 사람을 바라보는 눈을 떠올렸다. 안녕하세요, 백모,라고 우물거리듯 인사하자 그때까지도 내 책상 곁에 서 있던 이사가, 사적인 통화는 짧게,라는 말을 남기고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할머니의 생신이 다가오고 있다고 백모는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또 몰랐으므로 잠자코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 뒤로 애자를 비롯해서 나나와 나는 그런 자리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알아서 간 적도 없지만 오라는 연락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매번 얼굴도 내밀지 않는 것은 누구의 작심이냐, 하고 책망하는 투로 말한 뒤 이번 생신엔 할머니가 너희를 꼭 보고 싶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백모는 말했다. 이번엔 시외로 몸에 좋은 것을 먹으러 갈 것이라며 그녀는 나나와 나를 초대했다. 애자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나나와 둘이서 와라,라는 말에 나나에게 물어볼게요,라고 대답은 했어도 아무래도, 아마도,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인이 돌아가실 때가 되었는지 별스럽게 고집을 부린다,라고 말한 뒤 백모는 전화를 끊었다.

가지 않겠다,라고 대답을 할 줄 알았는데 나나는 의외로 흔쾌하게 가겠다,라고 대답했다.

뭘 먹겠대?

라고 묻는 말에 오리,라고 대답하자 오리 먹고 싶네, 먹으러 가자,라고 간단하게 대답이 나왔다.

오리를 먹을 장소인 시외까지는 백모의 집에서 승합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일요일에 나나와 둘이서 일단 백모의 집으로 이동했다. 나나와 내가 사는 곳에서 백모의 집까지는 전철로 삼십분가량 떨어진 거리였다. 지하정류장 세개를 지난 뒤 지상으로 올라간 전철은 좀처럼 지하로 가라앉지 않고 줄곧 지상을 달렸다. 창으로 비쳐든 정오의 햇빛이 전철 바닥에 나란히 놓인 나나의 발과 내 발을 데웠다. 나나는 꽃무늬 원피스를 맵시있게 입었고 맑은 얼굴색을 망치지 않을 정도로만 화장을 한 모습이었다.

가족모임이라는 이야기에 아버지의 다른 형제들을 포함해서 더 많은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도착하고 보니 백부와 백모, 그들의 아들과 딸, 할머니로, 큰집에 사는 식구들뿐이었다. 꽃꽂이용으로 사용되는 듯한 항아리가 놓인 거실로 안내되어 오랜만의 대면을 치렀다. 할머니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늙은 모습이었다. 아들을 잡아먹었다,라고 말하며 장례식장에서 애자의 등을 때리던 기세는 자취 없고, 다만 표정이 좋지 않은 노인의 모습으로 조금 물러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토록 고집을 피우며 나나와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더니 그렇지도 않은 기색이라서 백모 쪽에서 말을 꾸몄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사촌들은 붙임성 있게 나나와 나를 대했다. 서너살 때 보고 그간 보지 못했는데도 계속 보아온 것처럼 나나와 나를 누나나 언니,라고 부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들의 부모인 백부와 백모도 산뜻한 중산층의 모습으로 삶에 어느정도 여유를 갖춘 부모의 태도를 보였다. 부드럽게 면박하고 장난스럽게 받아넘기는 농담이 오가는 분위기 속에서 나나와 나는 별다르게 할 말도 없어 잠자코 앉아 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사촌들의 스스럼없는 태도에 졸아들었다. 물감으로 그린 듯한 사촌들과 간장으로 그린 듯한 우리 자매, 입을 다물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싫은데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싫었다. 나나도 내 곁에서 긴장한 듯 등을 펴고 앉아 있었다. 화목한 쪽과 좀처럼 그 화목에 섞일 수 없는 쪽과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노인, 이렇게 세 그룹으로 은근하고도 확연하게 나뉜 채로 백부의 승합차에 올랐다. 내외가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고 나나와 내가 그 뒷자리에 앉고 할머니가 그 뒤에 홀로 앉고 사촌들이 맨 뒷자리에 앉았다. 백부는 버릇인 듯 백모를 누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백부가 백모를 누나,라고 부를 때마다 쿡, 하고 옆구리를 찌르는 나나의 곁에서 나도 이따금 나나의 옆구리를 쿡, 찔러가며 시외로 실려갔다.

가는 길 내내 백모는 오리가 몸에 좋다, 특히 노인에게 좋다고 말했다. 외가 쪽 노인들에게도 듬뿍 사 먹이고 싶은데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 유감이다, 이번엔 할머니 생신이라 특별히 마련한 자리다, 잡숫고 건강하게 사시라, 외가 쪽으로 노인 한분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아침까지 건강하게 잡숫고 저녁에 기척 없이 돌아가셨다,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고 가셨으니 호상이다, 사람의 죽음은 그래야 한다,라고 호기롭게 말하고 있었다. 할머니로부터는 화답 한마디 없는 채로 화제는 맨 뒷자리에서 저희들끼리 장난을 치고 있는 남매의 근황으로 이어졌다. 여자아이는 조만간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떠나는 모양이었다.

나나하고 소라는 만나는 사람이 없니?

백모가 문득 뒤쪽을 향해 물었다.

결혼은 언제들 할 거니?

라고 시작해서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것이 좋다, 줄어드는 출산율에 더불어 줄어드는 국력, 애국의 길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야릇한 결론까지,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는 내용을 잠자코 들었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는 뒤통수만 보일 뿐이라서 백모가 어떤 얼굴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틀어올린 머리를 정수리쯤에서 나비 모양의 핀으로 고정해두고 있었다. 나비의 가슴은 연보라색 무늬가 들어간 보라색 터키석으로 되어 있었다. 아주 예전에도 백모는 저런 것으로 머리를 틀어올리고 있었지,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정리한 친척들 가운데 이 내외가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말았다.

애자가 죽은 것처럼 안방에 드러누워 있는 광경이었다. 거실에서 아버지의 형제들이 아버지의 회사 동료들과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기계를 멈췄다가 재작동하면서 경고를 하지 않았고 그 바람에 그가 죽은 것이다, 회사 측 과실이니 책임은 마땅하고, 이 사건 자체가 노동조건에 관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 집에 싸울 사람이 누가 있느냐, 우리는 그런 데 관심 없다, 살길이 바쁘다,라고 아버지의 형제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장례식장으로 양복을 입고 찾아온 회사 사람들을 상대한 것도, 그들과 합의금을 의논한 것도, 각자의 몫으로 돈을 나눈 것도 그들을 포함한 나의 친척들이었다. 애자는 내내 자기 숨소리를 듣는 듯한 모습으로 누워 지냈다.

백부의 승합차가 오른쪽으로 완만하게 커브를 돌아 목적지에 당도했다. 오리요리 집은 벼가 새파랗게 자란 국도변에 있었다. 마당이 딸린 옛날 기와집을 개조한 곳으로 오리를 먹으려는 사람이 많아 대기를 해야 했다. 기다리시는 동안 산책할 수 있도록 뒷마당을 꾸며두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점주에게 듣고 그가 알려준 대로 모퉁이를 돌았다. 대강 자르고 쪼갠 듯 모서리가 날카로운 돌들을 쌓아 만든 계단 위에 정자가 놓여 있었고 정자 주변으로 철쭉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다. 날이 무더우니 그늘에 앉자고 백모가 말했다. 나나는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눈썹 부근에 땀이 돋은 것을 보고 닦아주려고 손을 내밀자 성가신 듯 고개를 흔들었다. 육각형 정자 지붕 아래로 둥글게 마주 보도록 한 의자에 앉아 서로를 향해 발을 내민 채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다 컸네,라고 백모가 피로한 기색으로 나나와 나를 향해 말했다.

다 커서 몰라보겠네.

길에서 마주쳤더라도 모르고 지나갔겠다.

그래도 친척이지.

여기 있는 사람 가운데 누구 하나가 죽으면 결국 한자리에 모일 사람들인 거야.

이런 이야기를 드문드문 듣고 있다가 자리가 준비되었다는 말을 듣고 일어났다. 돌계단엔 이끼가 자라 있었고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아 아래로 발을 딛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나는 나나가 잡고 내려올 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으나 나나는 그 손을 가볍게 스쳐 제 발로 타박타박 내려왔다.

기름이 밴 상 앞에서 오리를 기다렸다. 통나무를 절반으로 쪼개 만든 상은 발이 깔릴 것처럼 묵직해 보였고 바닥을 향한 밑면엔 검은 비늘 같은 나무껍질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상 위로 빈틈이 없을 정도로 접시들이 놓인 뒤 약초를 먹인 오리고기가 나왔다. 생신을 맞은 할머니는 끄트머리에 앉혀두고 백부와 백모가 중앙에 앉아 활발하게 요리를 평가하며 오리를 나누었다. 나는 내 쪽에서 가까운 접시에 놓인 오리고기를 집어 나나의 접시에 놓았다. 나나가 그것을 겨자쏘스에 담갔다가 먹었다. 할머니를 제외하고 큰집 식구들은 사촌의 유학 이야기로 정신이 없었다. 치안과 환율이 어떻게 되고 더위와 습기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나나와 나는 묵묵히 요리를 먹었다. 몇차례 더, 오리고기를 나나의 접시로 옮겨놓고 곁들여 먹을 부추무침을 옮기려는데, 상 밑에서 나나가 싸늘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됐어,라고 나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그만해.

얘는 별명이 압둘이다.

 

라고 백모가 나의 사촌을 가리키며 말하고 있었다.

지 아빠를 닮아가지고, 이목구비가 중동 사람처럼 또렷해서 별명이 압둘이야.

다만 그뿐인 일정이었는데 돌아오는 길엔 해가 졌다.

좋은 것을 먹었다.

라면서 만족한 듯 입을 다시는 백부의 곁에 백모가 앉고 그 뒷자리에 할머니가 앉고 그 뒷자리에 나나와 내가 앉고 그 뒷자리에 사촌들이 나란히 앉은 채로 시를 향해 출발했다. 시외에서 시로 진입하려는 차가 많아 돌아가는 속도가 더뎠다. 가다가 서고 가다가 서기를 반복하는 차 안으로 저물기 직전의 햇빛이 노랗게 비쳐들었다. 올 때와는 다르게 갈 때는 고요했다. 맨 뒷자리의 사촌들도 백모도 할머니도 모두 기름진 것을 먹은 포만감에 졸고 있었다. 백부가 틀어둔 라디오에서 알앤비 가수가 알앤비 리듬으로 문 리버를 부르고 있었다. 에어컨디셔너로 싸늘해진 자리에서 보고 있자니 창밖의 타는 듯한 노란빛은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곧 어두운 분홍색으로 날이 저물 참이었다. 피곤했다. 나나는 한쪽으로 머리를 기울인 채 잠들어 있었다. 화장이 지워져 턱 부근이 얼룩져 있었다. 나도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얘, 하고 탁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떠보니 할머니가 앞자리에서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은 꿈에서였나, 싶을 정도로 한참을 말이 없다가, 나나는 자는 모습이 금주를 닮았구나,라고 그녀는 말했다.

불시에 아버지의 이름을 듣고 나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가,라고 생각했다. 나나가 이렇게 자는 모습이 아버지를 닮았나,라고 생각하며 어물어물하는 틈에 할머니는 노랗게 짓무른 듯한 눈을 깜박이더니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

 

그러지 마.

라는 내용으로, 그날 밤엔 나나와 다퉜다.

그렇게 하지 마,라면서 나나는 맨발로 방을 자박자박 돌았다.

언니가 이렇게 할까봐 나는 말하지 않은 건데.

내가 뭘 어쨌는데.

엄마처럼 보살피려고 하지 마.

그런 적 없어.

그러고 있어.

싫어,라고 나나는 말했다.

그렇게 챙겨주는 것, 징그럽고, 싫어.

머리를 한대 맞은 것처럼 멍해져서 나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들었나 싶었다. 나나는 자기 생각에 잠긴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며 방을 빙글빙글 돌았다. 소화가 되지 않는다며 아까부터 손가락 사이를 다른 쪽 손으로 비틀듯 주무르고 있었다. 손가락 뿌리 부근이 벌써 빨갰다. 뭘 어떻게 했느냐고 나는 물었다. 떨릴 정도로 긴장해서 혀를 씹는 듯한 발음이 되고 말았다.

걱정이 되니까 잘 대해주려는 거잖아.

걱정하지 않으면 돼.

어떻게 그러냐.

내버려둬.

언니는 옛날과 똑같은 것을 반복할 셈인 거야?라고 묻는 말에 옛날이라니, 언제 적 무슨 일을 말하는 걸까, 하고 어안이 벙벙해서 생각했다. 어렸을 때,라고 나나는 잘라 말했다.

그때처럼, 언니가 나를 찾아오고 내가 언니를 찾아가고, 그렇게 하고 있잖아. 그게 어떤지 알아? 둘이서 같이 혼자, 언니는 우리가 둘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언니하고 나하고 둘이서 같이, 혼자인 거야. 나는 이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나나는 걷던 것을 멈추고 털썩 앉으며 말했다.

임신했다고 자꾸 챙기고, 언니가 그렇게 하니까 나는 굉장히 약해진 것 같고.

 

세상에 우리 둘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외로워져.

 

*

 

쌍년.

하고 말하자 나기는 두꺼운 잔에 맥주를 담아 내놓으며 그러니까 내버려두라고 했잖아,라고 말했다.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잔을 탁자에 탁 내려놓으며 다시 한번 쌍년, 하고 말했다.

그래도 징그럽다고 말할 건 아니지.

한창 예민할 때잖아.

평소엔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런 때는 언니,라고 부른다.

언니를 언니라고 부르는데 뭐가 이상해.

……편드냐.

그래.

에잇.

그럼 너도 쌍년, 하고 말한 뒤 머리끝까지 오른 알코올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탁자에 풀썩 엎드렸다. 집에 가서 자라 주정뱅이,라고 말하는 것을 못 들은 척하고 탁자에 왼쪽 뺨을 붙인 채로 삯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삯을 발견하고 들어온 손님인 듯한 남녀가 가게를 둘러보며 문어튀김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기는 그들에게 계란말이를 주문받고 능숙하게 요리를 만들어서 탁자 너머로 넘긴 뒤 핸드타월로 손을 닦으며 내 쪽으로 돌아왔다.

다음 주쯤엔 어머니하고 만두를 만들 예정,이라고 나기는 말했다. 김치가 너무 많아서.

만두 만들러 온다고, 엄마가.

………

올래?

응.

그럼 만두피 반죽을 넉넉하게 해야겠네,라면서 나기는 설거지통에 담긴 맥주잔을 씻기 시작했다.

 

나나랑 같이 와,라고 나기는 말했으나 그뒤로 나나에게는 말도 붙이지 못했다.

라기보다는 나는 나대로 심기가 불편해 냉전을 유지하고 있었다.

쌍년.

하고 생각했다.

쌍년.

하고 두고두고 생각했다.

그대로 며칠이고 냉랭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나나가 멀었다. 멀어도 너무 멀어서 여태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사람 같았고 심지어는 다른 생물 같았다. 둘이라서 긴밀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느닷없이 징그러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느닷없다는 것은 나의 자만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자 저절로 입이 닫혔다. 평소에 그렇게 생각한 적이 많았으므로 간단하게 그 말을 입에 올렸는지도 모른다. 징그럽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정도 호의를 보였다고 그렇게까지 말을 한 나나야말로 징그러운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서서히 몸에 부담이 오는지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하거나 정수리쯤이 눌린 채로 신발을 신으려고 현관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안됐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징그럽다,라고 했던 어감이 고스란히 떠올라 명치가 싸늘해졌다. 나나와 나는 서로를 맞닥뜨리지 않도록 출근과 귀가 시간을 앞뒤로 조절했다. 집 안에 있을 때는 같은 극을 지닌 자석처럼 멀찍이 서로를 우회했다. 날도 더운데 방문을 닫고 머물렀다. 이쪽에서 달칵, 열고 나가면 저쪽에서 들어가며 달칵, 하고 닫았다. 달칵, 하고 이쪽을 닫으면 달칵, 하고 저쪽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욕실이나 거실에 볼일이 있을 때는 문에 바짝 다가서서 방 바깥의 기척을 살폈다. 좁은 집 안에서 이렇게 지내려니 불편하고 피곤했으나 그럴수록 딱딱하게 마음이 굳었다.

쌍년.

하고 생각했다.

 

꿈을 꾸었다.

나나와 내가 나오는 꿈이었다. 나나와 나는 버섯 규모로 작아져서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 서 있었다. 폭탄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딛고 가는 거대한 발들 틈에서 나나와 나는 용케 밟히지 않은 채로 삽을 쥐고 서 있었다. 발 쪽을 내려다보니 막대기로 그린 듯한 동그라미 속이었다.

잘 봐.

이제 팔 거야.

라고 말한 뒤 나는 발 근처의 땅을 파기 시작했다. 나나도 내 곁에서 땅에 삽을 꽂았다. 이제 시작했다,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틈엔가 내가 만든 구덩이 속에 서 있었다. 머리를 들고 위를 보니 내가 퍼낸 흙이 쌓인 구덩이 가장자리가 보였다. 잘게 찢어낸 솜 같은 구름이 뜬 하늘도 보였다. 나나는 여태 파고 있는지도 몰랐다. 흙을 떠내는 소리가 삭, 슷, 삭, 슷, 하고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가만히 얼굴을 들고 구덩이 가장자리를 보고 있는 사이 그 소리가 멈췄다. 언니, 하고 부르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그 소리에 화답하려고 나나야,라고 부르다가 커튼에 얼굴을 쓸려 눈을 떴다.

삭, 슷, 했던 것은 커튼 자락이 얼굴을 스치는 소리였던 모양이었다. 최근엔 밤이 무더워 창 쪽에 머리를 두고 자고 있었다. 밤새 틀어둔 선풍기가 후줄근한 기색으로 공기를 휘젓고 있었다. 나나야, 하고 목소리를 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일어났다. 주말이라 늦잠을 잔 참이었다.

거실로 나가보니 나나가 큰 컵에 우유를 담아 마시고 있었다. 모르는 척 냉장고로 다가가 물병을 꺼냈다. 컵에 물을 따르려는데 공기가 진동했다. 벽이며 바닥도 붕붕 진동하고 있었다. 창가로 가서 보니 승용차 한대가 엔진을 공회전하며 일층에 서 있었다. 은색 차체가 뜨겁게 달궈져 반짝거렸다. 냉기를 가두느라고 닫힌 차창 안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양팔을 운전대에 얹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열기가 벽돌 벽을 타고 내가 서 있는 창으로 올라왔다. 창에 달린 풍령이 그 바람에 잘강거렸다. 나나가 방으로 들어가며 달칵, 문을 닫았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다른 날보다는 덜 차가운 기색이었다.

그대로 집에 머물기도 답답하고 어색해 운동화를 신고 산책을 나섰다. 전철역까지 걸어갔다가 아예 전철을 타고 두 정거장 떨어진 강변으로 나갔다. 날씨 좋은 휴일을 맞아 나온 사람이 많았다. 뜨거운 잔디 위에 앉아, 롤러블레이드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개를 산책시키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돌아올 때는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탄 김에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지 않고 조금 더 갔다가 애자가 머무는 요양원으로 가는 전철로 갈아탔다. 계획에 없던 여정이라 트레이닝복 차림에 낡은 운동화, 가방도 뭣도 없이 카드 한장을 가지고 있었다. 전철에서 내린 뒤엔 햇빛과 마른 흙먼지가 소용돌이치는 무더운 차양 아래서 이십분가량 버스를 기다린 뒤, 터덜거리며 도착한 버스에 올랐다.

요양원으로 올라가는 언덕 가장자리엔 빨간 쌜비어와 백일홍이 자라고 있었다. 연으로 덮인 연못은 물비린내를 풍기며 진득하게 녹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멀리 대숲은 꿈쩍도 않고 있었다.

방문객을 맞는 접수창구엔 검은 노트가 놓여 있었다.

고무줄로 묶인 볼펜을 당겨 방문자 명단에 애자의 이름과 내 이름을 적었다.

 

애자는 별반 반기는 기색도 없이 나를 맞았다.

라디오 음악이 흐르는 공작실에서 타원형으로 오린 종이들을 겹쳐 꽃송이를 만들고 있던 참이었다.

삼십분 전에 간식을 먹었는데 그때 남은 것이라며 요구르트를 내게 주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것이라 받고 보니 미지근했다. 병 주둥이를 덮은 은박 위에 엄지 두개를 대고 눌러서 구멍 두개를 내고 그 가운데 하나에 입을 대고 마셨다. 이렇게 해야 요구르트를 잘 마실 수 있다. 나나에게 배웠다.

나나의 말 가운데 그토록 충격이었던 것은 징그럽다,라는 말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나가 옳은지도 모르겠다.

둘이라서 긴밀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나란히 서서 각자의 구덩이를 파왔는지도 모르겠다.

그 구덩이에 각자의 괴물을 묻어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나의 말로 자신의 구덩이에 묻힌 것을 비로소 자각하게 되어서 나는 그토록 부들부들 떨었는지도 모르겠다.

 

있지.

라고 애자는 말했다.

최근에 아래층에 들어온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줬어.

부부가 있었대.

어렸을 적에 자기가 살던 마을에 금실이 좋은 젊은 부부가 있었대.

좋아도 너무 좋아서 귀신에게 시기를 받은 거지.

장맛비가 내리던 날 내를 건너 집으로 돌아오던 남편이 물에 휩쓸렸대.

마을 사람들이 하류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는 우산을 발견했대.

부인은 믿지 않았대.

어딘가에 남편이 살아 있다고 믿고 여름과 가을 내내 내를 따라 오르내리며 남편을 불렀대.

마을 사람들이 딱하게 여겨 그 집을 찾아와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주었대.

하루는 부엌 문간에 앉아서 아궁이 쪽을 바라보던 여자가 모처럼 웃더래.

불을 피우던 사람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고 보니 여자가 아궁이 속에 들어가 있더래.

빨간 불 속에서 부인의 표정이며 피부가 그토록 아름답더래.

아름답더래.

나는 그렇게 못해서, 아름답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어.

 

그렇지 않아,라고 나는 말했다.

여전히 예뻐.

그 얘기가 아니잖니,라며 애자는 한숨을 쉬고 팔락, 종이를 접었다.

 

라디오에서 시보로 다섯시를 알리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